올해 여행과산행의 시산제는 연산의 천호산에서 하기로 하였다. 통상 시산제라 하면 전통적인 산신제에 따라 음력

설날에서 대보름 사이에 하는것인데, 요즘은 양력이 보편화 되다보니 양력 설날이 지나면 시산제를 하는곳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날도 엄연히 음력을 지켜가고 있는것 처럼 시산제 라는것이 안지낼려면

모르겠지만 일반 제사처럼 음력을 따르는 전통 예절 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음력 정월 초하루가 지나서 지내는게

맞다고 생각을 한다. 이번 시산제 날짜는 일부러 그렇게 날짜를 고른게 아니라, 산악회장님이 대보름 안에만 지내면

되는것으로 잘못 아시고 날을 잡은것 이라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미 공지가 나간후라 어쩔수 없이 그냥

진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맨 꼭대기에 있는 걸음이네 펜션

 

 

오늘 시산제 이후 진행을 이곳에서 하기로 했는데, 전날 비가 내려서 그런지 다들 산에갈 생각들을 안하고 이곳에

모여있다. 그곳 또한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한 산중 이고 보니 이곳에서 그냥 시산제를 지내고 놀자는 것이다.

결국 운영진들의 간단한 논의로 모두 짐들을 챙겨 산으로 향한다.

 

 

 

 

 

 

 

 

천호산 아래의 걸음이네 펜션에서 내려다 보이는 황산벌과 연산 일대

 

 

 

 

 

 

 

 

천호산 아래 이렇게 높은곳 까지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우스개 소리로 저런 곳에서 술마시다 술떨어지면 사러 내려갈 막내는 상당히 난감 할것 같다 라는 말을 해본다.  

 

 

 

대전~논산간 1번 국도를 따라가다 연산네거리를 못미쳐 왼쪽으로 길게 뻗은 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바로 천호산

이다. 천호산은 통일신라시대 당시엔 황산 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왕건이 후백제와 국운을 걸고 치열한 격전을

벌일때 마지막 운명을건 한판을 벌이는데 바로 일리천(지금의 경북 선산) 전투다. 신검은 이 전투에서 왕건에게

패했고, 여기 황산에서 항복하게 된다. 신검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이 하늘의 보호 때문이란 뜻으로 산

이름을 천호산 (天護山)으로 바꿨다고 한다.

 

 

 

 

 

 

 

 

산길은 아래에서 보는것과는 다르게 짧지가 않다. 펜션이 상당히 높은곳에 있어 몇발짝 움직이면 능선에

이를줄 알았는데, 산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된비알 인데다, 제수 과일과 막걸리를 배낭에 넣고 올라가는데

갈수록 능선이 뒤로 도망가는것만 같다.

 

 

 

 

 

 

 

 

천호산에서 황령재 방향 능선에 젯상을 마련했는데, 여행과산행 시산제는 여전히 소박하기만 하다.

그래도 지난해엔 사과 배를 한개씩만 올렸는데 올해는 전도 보이고 과일 갯수도 지난해 보단 낫다.

 

 

 

 

 

 

 

 

이곳 황산에서 신검에게 항복을 받고 승리한 왕건은 황산의 이름을 천호산 으로 바꾸고 개태사를 지었다.

개태사는 전성기때 무려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할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 하듯 경내에는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솥(철확)이 잘 보관돼 있는데, 이 가마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로 개태사가 그 당시 얼마나 큰 도량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연산 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보자면, 삼국시대 당시 이곳의 백제시대의 지명은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 이었는데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황산군 으로 되어 있다가 고려시대에 연산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연산 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 천호산 등의 산세가 연이어져 있어 연이은 산이란 뜻에서 연산이란 지명이 생겨난 것 같다고 한다.

 

 

 

 

 

 

 

 

올 한해 무탈하게 안전산행 할수 있도록 해주시고...

사업하시는 분들 대박 나시고...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 승진 하시고...

수험생을 둔 집에는 합격의 기쁜 소식이 있기를...

 

 

 

 

 

 

 

 

시산제 풍경 1 - 준수님 作

 

 

황산이 연산이 된데에는 백제의 언어에 기인한다고 한다. 즉, 누를 황(黃)의 노랗다 라는 말이 백제어로 늘다 

라고 했는데 이게 늘이다 라고 할때의 늘다와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누렇다 뜻의 황산이 후에 늘뫼의

의미인 연산을 거쳐 이후 놀뫼로 변신하여 현재 논산이 되었다고 한다.

 

 

논산의 지명 대한 설은 이 밖에도 논뫼(畓山)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하고 있는데 현재의 論 자가

선택된 이유에 대해서는 '논' 자중에 한자로 가장 쉬운 글자가 論 이기 때문 이지 다른 뜻은 없다고 한다.

 

 

 

 

 

 

 

 

시산제 풍경 2 - 준수님 作

 

 

 

먼 곳에서 시산제를 위해 일부러 와서 멋진 사진을 남겨준 준수님의 사진중에 세장을 후기를 위해 모셔왔다.

 

 

 

 

 

 

 

 

시산제때 돼지 입에 들어간 돈으로 해마다 산악회 운영을 편하게 한다.

인원부족으로 적자난 산행경비 보충해 주고, 체육대회등 각종 행사를 지원하는데 사용된다.

 

 

 

 

 

 

 

 

산대장 속리님과 사진의 왕고수 준수님 ~

 

 

 

 

 

 

 

 

내려가는길 역시 가파르기 그지없다.

 

 

 

 

 

 

 

 

나무 사이로 백제의 국운이 끝장났던 황산벌 전투의 현장인 황산벌이 보인다.

 

 

지난번 마성산을 언급하면서 탄현의 위치에 대해 적었었는데, 성충등 충신들이 죽기 직전까지 백제의 안위를

염려하며 좁고 험한 탄현을 지키라고 하는것을 간신들로 인해 적기적소를 놓치고 이곳 황산벌판에서 적은수로

대병을 맞는 우를 범하게 된다.  

 

 

 

 

 

 

 

 

대전에서 논산으로 내려가는 1번 국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천호산

 

 

사실 백제의 멸망 하게된 결정적인 문제는 의자왕의 향락 때문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간의

국제적인 밀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자왕 말기에 그의 뒤를 이를 태자 자리를 놓고

백제의 두왕자들과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키며 국력을 약화 시켰고, 이렇게 백제가 내분으로 정신 없는 사이에

주변국 정황을 제대로 파악치 못한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자신이 아니라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오판을 하는 바람에 지방에 분산된 병력을 제대로 모으지도 못한 채 어이없이 무너진 것이다. 고구려 또한 나당

연합군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방어에만 치중한 나머지 동맹국이었던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도 지원군을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천호산 아래 펜션이 있는 마을 풍경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갈 때 모든 백성들이 그것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향락에 빠진

잘못된 군주라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건 바로 그가 삼국사기 같은 신라계열인 경주김씨 김부식이 써내려간 

승자들의 기록에, 흔히 그렇듯이 삼국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왜곡되었기 때문 이라고 한다. 삼천궁녀 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허구 라는게 역사가들 사이의 정설 이라고 한다.

 

 

 

 

 

 

 

 

걸음이네 펜션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시작으로 길고 긴 뒷풀이가 시작된다.

 

 

다들 올 한해 안산, 즐산들 하시고 행복한일 가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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