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엔 계룡산을 가는줄 알고 있었는데 나에게 산행지 추천을 말씀하시니 황악산등 몇군데를 추천해 드렸는데

그중에 제일 가까운 옥천으로 결정을 하신다. 먼저 차량이 두대가 확보되면 천성장마 종주길의 한구간인 옥천의

마성산~용봉~삼성산 구간을 고려해보고 유사시에는 장령산 원점회귀 코스를 선택할수도 있는 상황에서 눈길에

다행스럽게도 가파른 산길을 차로 올라 용암사로 향하게 된다.

 

 

 

이번 코스는 지난번 고리산 산행에서 언급했던 신라군의 최전방 능선으로, 운해와 아침일출로 유명한 용암사에서

출발하여 마성산에 올라 관산성이 있었다는 삼성산을 향해가는 능선길로 지난번 백제군 진영에서 바라보았던

관산성 능선을 거꾸로 신라군 진영에서 식장산과 고리산을 위시한 백제군 진영을 바라보며 신라와 백제간의

역사가 뒤바뀌게 되는 성왕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며 걸을수 있는 길 이다.

 

 

 

 

 

용암사 (10시17분)

 

 

 

옥천에 들어서니 도로가 모두 빙판이다. 특히 용암사로 가는 길은 전혀 녹지 않아서 7부능선에 있는 용암사 까지

어찌 올라가려나 걱정이 된다. 유사시 차를 산아래 세워놓고 걸어 올라갈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차가 산밑에

다다르자 용암사 스님들이 부지런하게 눈을 치웠는지 산 아래에서 가파르게 용암사로 올라가는 길엔 모두 제설이

되어 있어 무난하게 올라갈수가 있도록 되어 있다. 용암사 스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오늘의 하산지점은 금구리에 있는 가화현대 아파트로 이곳과는 꽤 떨어져 있는 곳이라, 차량회수를 위해 따로

오시는 분을 그쪽으로 인도하고, 차량한대를 두고 오기 위해 갔다오는 사이에 용암사 구경을 한다.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 50곳 중에 한곳으로 선정된 용암사

절집이 아름다워서 선정된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바라보는 운해와 일출이 장관 이라고 한다.

물론 나같이 똑딱이 들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큰 카메라 들고 다니시는 분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출사 포인트다.

 

 

 

 

 

 

 

용암사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도덕봉이 보인다.

예전에는 도둑들이 극성을 부려 도둑봉 이라 불리다가 도덕봉 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전 수통골에 있는 도덕봉과 이름의 유래가 똑 같은걸 보면 전국의 도덕봉이란 그 고상한 이름과 달리

대부분 예전 도둑들 소굴 이었을듯 싶다.

 

 

 

 

 

 

 

용암사

 

 

용암사는 서기 552년 신라 진흥왕 13년에 의신조사가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하기 저에 이곳의 산세를 보고 감탄을

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사찰의 규모가 원래는 상당하였는데, 임진왜란때 불타고 간신히 명맥만 유지 해오다가

근래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중건 되었다고 한다. 용암사라는 이름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파괴 하였다고 하며 신라 마의태자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는 아버지를 떠나 금강산

으로 가다가 용암사에 들려 한동안 머물면서 용바위에 올라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곤 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용암사의 쌍삼층석탑 (보물 제1388호) 

 

 

용암사가 있는 삼청리는 마을에 소나무와 대나무, 잣나무 이 세 가지가 항상 푸르게 있다 하여 '삼프리'라 하였다가

'삼파리'로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옮겨 쓰면서 삼청이라 하였다고 한다.

 

 

 

 

 

 

 

어느분이 붙혀논 동전 옆에 나도 살짝 동전을 세워본다.

이럴때는 흔히 소원을 빌어야 하는데, 동전세우기가 쉽지 않다 보니 집중하는 사이에 깜박하고 말았다.

 

 

 

 

 

 

 

 

용암사 뒤 조망포인트에서 바라본 풍경

 

 

조망이 시원스럽지 않지만, 용암사에서는 이정도면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시계가

불투명 해진다.

 

 

 

 

 

 

 

지난해 봄에 다녀온 옥천 장령산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용산 으로 알려졌으나, 옛문헌등을 토대로 장령산 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한자로 쓰면 藏靈山 으로 신비스런 기운이 숨어있는 산 이라는 뜻 이다.

 

 

 

 

 

 

 

시계가 갈수록 흐려지고 있는 옥천 읍내쪽 풍경

 

 

 

 

 

 

 

능선 옥천쪽 방향의 파노라마 조망 (클릭)

 

 

 

 

 

 

 

이정도 조망만 유지 되었어도 좋았을텐데...

하늘은 속절없이 흐려져만 간다.

 

 

 

 

 

 

 

방금전 조망을 했던 조망바위

 

 

 

 

 

 

 

능선 앞 조망터에서 멋진 바위 위에서 일행들은 조망을 하며 쉬어간다.

 

 

 

 

 

 

 

장령산과 마성산으로 갈라지는 능선 갈림길에 도착 (11시14분)

우측 사목재 방향으로 길을 잡고 간다.

 

 

 

 

 

 

 

멀리 보이는 마성산

 

 

 

 

 

 

 

마성산으로 가는길

 

 

이 능선이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던 백제 성왕시절의 신라군 최전방 라인 이다.

건너편 봉우리 능선은 백제의 최전방 라인.

 

식장산이 코 앞에 있고 그 너머가 바로 대전이고 보면 대전 옆의 백제의 구도 공주(웅진)과 새로운 도읍인

부여(사비) 멀지 않은곳 이니 만큼 백제로써는 한치도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되는 절대 사수의 지역인 셈이다.

 

 

 

 

 

 

 

뒤돌아 보는 지나온 능선줄기 뒤로 보이는 장령산

 

 

삼성산 ~ 용봉 ~ 마성산 ~ 장령산 ~ 대성산 으로 이어지는 이 줄기가 신라의 방어선 이다.

능선 우측으로 보이는 큰 산줄기는 충남제일봉인 서대산

 

 

 

 

 

 

 

서대산과 공산

 

 

 

 

 

 

 

사목재 (11시33분)

 

 

사목재는 옛날 군서 사람들과 금산 사람들이 옥천읍을 오가는 주요 이동로 였다. 현재는 장령산 휴양림에서

맨왼쪽 제4코스 긴 임도길을 따라 오르면 이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제 비로소 장령산 줄기를 벗어나 마성산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사목재란 이름의 유래는 옛날 이곳에 도둑이 많아 이 고개를 넘으려면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넘어라 라는 의미와

용암사 스님들이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며 넘었던 고개 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첫번째 봉우리에 오르니 정상이 넓게 되어 있어 여럿이 모여 식사하기 딱 좋게 생겼는데 잔 바람이 있어

정상을 살짝 넘어간 곳에서 눈을 치우고 모여 앉아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진다.

 

 

 

 

 

 

 

공산 너머 바로 군서면 평야지대가 보이는데 바로 그 평야지대 끝에 현재 지도상에 말동산 이라고 되어있는

성티산성이 살짝 보인다. 매우 가까운 곳인데 시계가 좋지 않은 탓이다. 당시 백제의 기마병이 주둔을 했던

곳으로 성왕이 백제의 고위 관료들과 그곳에서 전장을 지휘했던 곳이다.

 

 

이곳의 백제 기병을 상대하려고 삼년산성에서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장군의 기병이 내려와 구진베루에 숨어있던

것인데, 그걸 알리없는 성왕은 늘 다니던대로 고리산에서 백제의 주력을 이끌고 있는 태자를 만나러 가다가

잡혀서 황당한 참살을 당하게 된다.

 

 

 

 

 

 

 

가까이 보이는 마성산

 

 

이 봉우리만 넘으면 될 것 같더니, 밋밋해 보이던 능선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예전 신라군이 경계를 서면서 오르락 내리락 하던 능선 이다.

 

 

 

 

 

 

 

넘어온 봉우리

 

 

사목재를 지나 마성산으로 가면서 일행중 한분이 왜 능선의 큰 나무들이 다 죽었을까 라고 물음을 던지신다.

가만히 보니 산불이 난듯하다. 우연의 일치 일까. 언어의 유희라고 해도 좋겠지만... 조금 깨름직한 생각을

해본다. 성왕이 죽은곳인 구진베루를 굽이굽이 감아돌며 흐르는 서화천을 당시에는 구천(狗川) 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구천이 구천(九泉) 이고 보면 바로 죽은자의 넋이 돌아가는 곳이요, 또는 무덤 아니던가.

또한 사목재 라는것을 死木으로 부르게 되면 나무가 죽는다는 말이니... 마성산 자락의 산불의 흔적을 보면서

이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걷는다. 

 

 

 

 

 

 

 

두 봉우리 사이로 멀리 장령산이 보인다.

 

 

 

 

 

 

 

오르락 내리락 하며 가는 진행방향의 봉우리

 

 

 

 

 

 

 

지나온 봉우리 뒤로 보이는 서대산은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멀지 않은 장령산도 흐릿하니 조망에서 벗어나 아쉽기만 하지만 조망바위에서 일행들이 군서면 너머

식장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성충이 마지막으로 의자왕에게 상소를 올려 신라군을 막으라고 한곳이 탄현이다. 지금까지 탄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력한 후보중 하나가 바로 마달령과 식장산 정상 사이에 있는 자모실 고개라고 한다.

백제군의 병력이 부족하니 요지를 선점하여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결국 백제는 성충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 탄현을

지키지 못하고 연산의 넓다란 황산벌에서 신라의 대병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얼핏 보면 노고산성과 이백산성 사이에 있는 마달령이 탄현이 아닌가도 싶다. 그곳에서 적을 맞으면

적군이 자모실로 아예 들어오지도 못할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마달령이 뚫리면 신라군은 백제의 산성들이

즐비한 자모실로 가지 않고 조금 돌아가는 길 이지만 직진할수도 있어보이니 말이다. 

 

 

 

 

 

 

 

마성산 정상 (13시27분)

 

 

마성산 정상석은 소박하기 그지 없다.

옥천에 마성산이 3개가 있다고 하는데 육영수 여사 생가가 있는 마성산은 많은 사랑을 받는데 비해 이곳은

그리 인기가 없는것 같다. 그래도 마성산들중 제일 높고, 천성장마의 마지막 봉우리인데 말이다.

 

 

 

 

 

 

 

마성산 정상의 돌탑

 

 

아마도 성을 쌓았던 돌들로 탑을 세운것 같다.

신라군의 최전방 GOP 답게 주요 봉우리 마다 산성이 하나씩 있다.

 

 

 

 

 

 

 

마성산 정상석이 있는 뒤로 살짝 오르면 진짜 정상인곳에 이렇게 마성산성 표지석이 있다.

원래 이곳에 이런 오석으로 정상석이 있어야 했는데,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관계로 돌탑 옆에 누군가

정상석을 만들어 놓은것 같다.

 

 

 

 

 

 

 

가야할 용봉 능선과 왼쪽으로 옥천군 군서면 

 

 

 

 

 

 

 

비로소 우리가 가야할 종착지가 보인다.

이 능선끝 희미하게 보이는 밋밋한 봉우리가 바로 예전 관산성이 있던 삼성산 이다.

너무 멀다고 중간 탈출을 말씀하는분도 있었지만 종내는 다들 무사히 완주를 하게 된다. 

 

 

 

 

 

 

 

삼성산 까지는 열개가 넘는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는 쉽지 않은 코스 이지만 다들 잘 따라 오신다.

천성장마 종주를 하시는 분들이 마지막 봉우리 마성산을 넘고 한숨을 돌릴텐데, 정작 마성산을 넘고나서 종착지인

삼성산 까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오르 내림이 있으니 지칠대로 지친 산객들의 마지막 땀한방울 까지 짜내는

구간이 될 듯 하다.

 

 

 

 

 

 

 

두번째 주요 봉우리인 용봉이 맨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동평산성 직전의 안내도를 보는 회장님과 산대장님

 

 

 

 

 

 

 

동평산성 터

 

 

 

 

 

 

 

동평산성에서 (14시48분)

 

 

관산성 ~ 동평산성 ~ 마성산성 으로 이어지는 신라군의 주요 거점들 이다.

 

 

 

 

 

 

 

용봉(龍峰) (15시15분)

 

 

관산성과 앞쪽으로 백제군 진영이 잘 조망되는 봉우리다.

 

 

 

 

 

 

 

용봉에서 삼성산 까지는 4개의 봉우리가 기다린다.

삼성산 왼쪽뒤로 백제군의 주력이 있던 고리산이 지척이건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고리산 뒤에 백골산 까지 보이면 좋으련만...

 

 

 

 

 

 

 

옥천읍내

 

 

옥천의 신라시대 지명은 고시산군 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상주의 관성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

옥주(沃州)를 거쳐 조선시대에 옥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옥천(沃川) 이라는 이름은 강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기름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옥주가 옥천으로 변한것은 조선 태종때의 일인데, 계수관 제도로 인하여 각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만 주(州)를

사용하도록 하고 기타 州 자가 들어가는 다른 도시는 모두 산(山) 이나 (川) 으로 변경 하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도에 속하던 옥주는 태종의 명으로 보은, 황간, 영동, 청산과 함께 충청도로 소속 변경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충청도에는 주요 거점도시로 충주, 청주, 홍주, 공주가 있어 그 이름을 유지했고, 옥주는 옥천이 되었다고

한다. 

 

 

 

 

 

 

 

성왕이 죽임을 당한 구진베루

 

 

구진베루란 굽은 벼랑을 말한다. 신라의 GOP와 백제의 GOP 사이 DMZ 중간에 구천 (서화천)이 흐른다.

꼬불꼬불 구절양장으로 흘러가는 구천의 물길이 구진베루에 와서는 백제쪽으로 깊게 휘어서 감아 돈다.

 

 

어스름한 저녁무렵 고리성에서 몸져누운 아들을 만나서 위로하고 주력군 수뇌부와 전략회의를 하기위해

성왕은 좌평 네명을 포함하여 백제의 총수뇌부 50여명만 데리고 호위병사 없이 예전에 늘 다니던 길로

말을 달린다. 구진베루 뒤편에 삼년산성에 있어야할 신라의 정예 기병이 길을 끊고 매복해 있는줄도 모르고

말이다. 성왕은 자식과 백제의 앞날을 생각하며 자신의 안일함을 얼마나 탄식했을 것인가...

 

 

성왕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삼국의 판세가 뒤바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현장 인데 관산성 능선에서 잡목으로

인해 제대로된 조망을 할수가 없는게 아쉽다.

 

 

 

 

 

 

 

이전에 백제가 관산성과 옥천일대까지 진출했을때 성티산성에 있는 백제군과 고리산에 있는 백제군들은

이 구천을 따라 이어진 길을 달려 서로를 오고 갔는데 신라군이 관산성에서 마성산으로 진영을 구축하고

있던때에 성왕은 상황이 변한것을 무시하고 이 길을 통해 고리산에 있는 태자 부여창에게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도 백제의 좌평들과 고위 관리를 몽땅 데리고 말이다.

 

 

그러나 백제의 성왕이 전방에 왔다는 첩보를 입수한 신라군은 삼년산성에 있던 김무력 장군 소속의 기병을

불러들이고 백제가 성왕과 태자간에 소통의 통로로 위험한 관산성앞 DMZ 지대를 지나는것을 파악하고서

구진베루 뒤편에 기병을 매복시키고 있었는데 백제측은 이것을 몰랐던것 같다.

 

 

신라측도 성왕을 잡을줄은 생각도 못했다. 고위관료가 지나간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고리산으로 가는 길에

숨어있다가 잡고보니 생각지도 못한 대박이 터진것 이다. 상대가 호랑이 같은 적국의 군주인 성왕 이라니.

게다가 백제의 수뇌부들 대부분 까지 몽땅 잡게 되었으니...

 

 

 

 

 

 

 

성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등 승자의 기록인 국내 기록보다는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측의 

일본서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행국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라고 청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수없다" 하니, 고도가 "우리

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하여 참수당하였다.

 

 

지난번 고리산행기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맹세한것을 어긴것은 백제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 이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한강유역을 탈환하여 신라는 한강 이북을

백제는 한강 이남을 차지 하였는데 진흥왕은 말머리를 거꾸로 돌려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가 고구려에

뺏겼다가 수복한 한강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이런 내용을 적어 세운 비석이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다.

 

 

백제 성왕은 딸까지 신라왕의 첩으로 보내는등 굴욕 외교를 펴면서까지 신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동맹을 배신하고 백제의 직전 도읍이었던 공주(웅진) 턱밑인 대전 앞 옥천까지 진출한 신라를 더 이상

참고 볼수가 없었던 것이다.

 

 

 

 

 

 

 

삼성산으로 오르는 길

 

 

왕의 목을 하급병사 에게 베라고 한것도 부족하여 신라는 성왕의 목을 가지고 경주의 도당 북청 계단 아래에

묻고 신라 귀족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도록 하였다. 이에 분노한 백제측에서 기병을 이끌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게 되는데 성왕이 죽은 구진베루 위쪽 관산성 아래에 말무덤 이라는 곳이 있는바 처럼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의자왕때 백제군이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후 김춘추가 가장 사랑했다던 막내딸과 사위의 목을

베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보내 성왕의 복수를 하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그 일로 한을 품고 굴욕을

참아가며 당의 협력을 얻어와 백제를 멸하게 된다.

 

 

 

 

 

 

 

관산성

 

 

이처럼 잡목들로 인하여 조망이 좋지가 않다.

옛날에는 서쪽등에 망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역사의 현장인 만큼 망대를 복원하여 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식장산 ~ 고리산 일대를 조망할수 있도록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고리산에서 바라본 옥천시내와 관산성 (2012년 4월)

 

 

 

 

 

 

 

백제군 진영에서 바라본 신라군 최전방과 성티산성에서 고리산으로 오다가 죽은 백제 성왕의 목이 잘린 곳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은....

사서에 따르면 삼국시대 당시 인구 분포를 보면

고구려가 69만호, 백제가 76만호, 신라가 약 18만호 정도로 나와 있는데....

어떻게 백제인구의 1/4도 되지 않는 신라가 순수 병력 싸움에서 백제를 멸하고 통일할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더 기이한것은 이 백제의 인구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 인구보다 많았으며, 조선 중종때의 인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백제의 위치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고, 사비(부여)가 수도로서는 너무 작다 라는

말이 나오며 백제가 중국에서 상당한 영역을 차지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여하튼 고구려와 신라도 그렇지만, 백제는 마치 아틀란티스와 같은 전설속의 나라인 것이다.

 

 

 

 

 

 

 

삼성산 정상의 산성 표지석 (관산성)

 

 

혹자들은 관산성은 이 작은 산성뿐만이 아니라 옥천으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인 삼양리 토성등 몇개의 성을

공통 지칭하는 것 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백제는 성왕을 잃고 기병을 전멸시키고 나서 제대로된 기병이 없는 가운데 신라군 기병의 급습을

받게 된다. 전선 앞쪽의 옥천지역에만 신경쓰고 있던차에 삼년산성에 있던 김무력이 빙 돌아 백골산 뒤쪽

지금의 대청호반 평원에 자리한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옥천의 신라군이 공격을

하니 백제군은 포위가 되어 전멸을 하고 고리산 뒤에 백골산 이라는 지명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관산성 전투 개요

 

 

 

 

 

 

 

삼성산 에서 바라본 옥천

 

 

관산성전투는  554년 7월에 백제의 패전으로 끝나는데 그로부터 두달후 백제는 복수전을 통해 진성(현 금산군

진산면)을 공격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대야성 전투

이후 절치부심하던 김춘추는 한을 품고 굴욕을 감수하며 당의 원군을 얻어와 지난번 백화산 주행봉 산행기에서

언급했던 옥천 동쪽에 있는 백화산의 금돌산성에서 전투를 지휘하며 의자왕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소부리성으로 가서 의자왕과 태자 융을 꿇어 앉히고 득의의 술잔을 받게 된다.

 

 

 

 

 

 

 

현대가화아파트, 산행종료 (16시45분)

 

 

조금 늦는 후미를 고려하여 차량회수를 위해 앞서 달려가신 세분 덕분에 보다 빠르게 대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생각했던것 보다 조금 긴코스가 되어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실제 거리수는 그렇게 멀지가 않은 곳이다.

날씨가 좋았으면 주변 조망이 참으로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흐릿한 날씨덕에 못본게 많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 이다. 

 

 

 

 

 

 

마성산 ~ 용봉 ~ 삼성산 지도

 

산행코스 :: 용암사 - 사목재 - 마성산 - 용봉 - 삼성산 - 현대아파트 (식사포함 약 6시간)

산행일시 :: 2013년 1월 12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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