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달력을 한장남긴 12월의 첫날, 가을을 넘기면서 처음 맞는 추위가 될거라는 예보에 두텁게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지난 1월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를 정리해야 하는 때라니, 세월의 속도가 먹는 나이만큼 빨라진다고

하더니 갈수록 더 가속이 붙는것만 같다. 오늘 산행지는 속리산이다. 속세를 떠났다고 하지만 어느산 보다도 더욱

세속적인 산, 그러기에 더욱 정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산행시작 (9시40분)

 

 

화북에 들어선 버스가 길이 미끄러워 주차장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진 곳에서 하차를  하여

다들 걸어 올라간다. 벌써 여러차례 화북으로 해서 속리산에 들어서는지라 주변 풍경이 낮설지가 않다.

 

 

 

 

 

 

진행방향의 우측 백두대간 능선의 암릉

 

 

화북에서 문장대 까지는 길도 완만하고 힘들지 않은 코스다.

일단 문장대 까지는 조망터에 들러 사진을 찍는것을 제외하고는 쭈욱 치고 오른다.

 

 

 

 

 

 

 

조망바위에 올라서 바라본 우복동천 청화산

 

 

조망바위에 올랐다가 내려서는데 쉽지 않다. 올라갈때 발디딤 왼쪽 끝이 얼어 있는걸 봤기에 오른쪽으로 안전하게

디디고 내려서야 하는데 슬쩍 보니 왼쪽을 딛고 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바위사이 크랙으로 떨어지는지라 조심

해서 딛고 내려선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등로 왼쪽의 기암

이쪽에서 보면 인수봉 처럼 생겼는데 위쪽 산수유릿지 구간에서 보면 뒤쪽으로도 길게 늘어서 있는 큰 바위다.

 

 

 

 

 

 

 

위의 인수봉 같은 바위 우측으로 이어지는 바위다.

저 너머에 문장대가 있다.

 

 

 

 

 

 

 

그 우측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암릉

수만년을 저렇게 있었을 바위들..

일년에 한번씩 이곳에 온들 서른번이나 더 올 수 있을까?

50년 그리고 백년 이후엔 후손들이 어떤 복장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며 이길을 오를까.. 

억만년 바위들의 삶을 생각해보며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생각해본다.

홀로 앞서 걷고 있자니 이런 저런 상념들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청화산

 

 

 

 

 

 

 

진행방향 왼쪽의 산수유릿지 구간의 암릉

 

 

 

 

 

 

 

천일산제단

 

 

 

 

 

 

 

문장대 (10시55분)

 

사진을 올리면서 카메라 시간세팅이 잘못된것을 확인하고 수정을 한다.

문장대는 원래 큰 암봉이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운장대라 하였으나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서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

이라는 말을 듣고 찾았는데 정상에 오륜삼강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반보님이 이를 일컬어 모 대통령의 목민심서와 같은 맥락이 아니겠느냐 하며 말씀을 하신다.

 

 

 

 

 

 

 

점심식사후 주능선을 걸으면서 반보님과 이 계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장대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은 직벽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인데, 예전에 세조가 찾기 이전에 도대체 어느누가

이 직벽을 무슨수로 선등하여 이 바위위에 평평한 공간이 있는줄 알았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반보님 말씀대로

세조는 수백명의 관원을 동원하여 비계를 만들어 가며 정상에 올랐겠지만 말이다.

 

 

 

 

 

 

 

일단의 산객들이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헬기장으로 올라서고 있다.

 

 

 

 

 

 

 

화북에서 올라오면서 우측위로 아름다운 바위들을 드리우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길

 

 

속리산 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에 최치원이 현강왕 12년(서기 886년)에 속리산 묘덕암에 와서 산의 경치를 구경하고

도불원인 인원도(道不遠人 人遠道) 산비리속 속리산(山非離俗 俗離山) 이라는 시를 남기면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내용즉슨, (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라는 뜻 이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백악산

 

 

문장대에서 묘봉으로 향하는 서북능선과 평행을 이루며 늘어서 있는 백악산

그 뒤로 충북의 명산들이 뚜렷하게 조망된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조망도 (클릭)

 

 

문장대는 사방팔방으로 우뚝선 곳이라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추운날 겨울산행에서 문장대에 오래 서있지 못하는데 이날은 춥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귀마개 없이

버틸만한 바람이 분다. 이렇게 30여분 일행들을 기다리며 조망을 한다.

 

 

 

 

 

 

 

왼쪽부터 멀리 대야산 앞쪽으로 청화산에서 이어진 조항산이 바로앞에 보이듯 선명하게 들어오고 우측 뒤로

희양산이 거대한 바위를 뽐내듯이 서있다. 그 옆으로 구왕봉, 악휘봉, 장성봉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희미하게

보인다.

 

 

 

 

 

 

 

문장대

 

 

속리산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유래는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데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이라 불리어 오다가 진표율사가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끓고

울었다고 한다.

 

그 소들 쥔장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때, 율사는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끓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그사람은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니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 하고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떠나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 속(俗)과 떠날 리(離) 를 써서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문장대에서 법주사로 내려선 계곡

 

 

 

 

 

 

 

저 멀리 구병산 너머론 백화산 한성봉과 주행봉이 들어온다.

백화산 이라면 대전에서도 가까운 곳인데 지난번 저곳에 올라 구병산을 바라보니 바로 앞에 있는듯

마을 건너에 근육질 능선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묘봉 - 상학과 우측으로 미남봉으로 뻗은 능선

 

 

 

 

 

 

 

관음봉에서 우측으로 뻗은 병풍바위 능선과 그 뒤로 운흥리 마을

운흥리 왼쪽뒤로 금단산, 우측뒤로 조봉산, 낙영산이 뚜렷하게 보이고 그 뒤로 도명산과 가령산이 희미하게

보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장대에서 묘봉으로 이어진 속리산 서북능선

 

 

 

 

 

 

 

백두대간 능선 뒤로 병풍처럼 서있는 청화산

 

 

청화산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극찬을 했던 산으로,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스스로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

이라 칭하고 청화산에 기거 하였으며 청화산을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청화산은 내선유동과 외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에는 용유동을 가까이 두고 있는데,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은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福地)다.>

 

실제 저곳은 청화산에서 시루봉으로 이어진 산줄기 밑에 마을이 있는데 그곳을 소의 배속처럼 편안하고 안전한

우복동천 이라고 한다. 앞에 승무산이 가리고 있어서 밖에서는 그 마을을 볼수가 없고 예전에 오지중의 오지였을

이곳 저 소의 뱃속같은 곳에 아늑한 마을이 있다고 누가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전란, 환란도 피해간다는

말을 했던것 같다.

 

 

 

 

 

 

 

천황봉으로 이어진 능선 위로는 해가 솟아 있어 역광으로 능선의 아름다운 모습은 육안으로만 감상을 해야 한다.

 

 

 

 

 

 

 

그렇게 30여분 혼자 놀고 있으니 선두팀이 올라온다.

이제 춥다.

 

 

 

 

 

 

 

마지막으로 한컷을 남기고 문장대를 내려선다.

 

 

 

 

 

 

 

지난번 서북능선길을 열었을때 우중에 수정봉 옆으로 올라 북가치를 지나 관음봉을 넘고 문장대에 오른적이

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서북능선으로 내려서는 길이 다시 막혀있다. 안전시설만 조금 보충하면 참 좋은 구간

인데...

 

 

 

 

 

 

 

문장대 앞 너른 바위에서 햇볕을 받으며 식사를 마치고 반보님과 먼저 출발을 한다.

바위 위엔 아직도 우리들 일행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문수봉으로 가면서...

 

 

 

 

 

 

 

칠형제봉과 산수유릿지 능선

 

 

산수유 릿지는 화북 공원관리소에서 청법대로 연결된 능선으로 1995년 청주 청심 산악회에서 개척하였는데,

개척당시 9피치를 개척하던 김선주씨가 추락 사망한 곳으로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9피치 40M 벽을 <선주벽>

이라 명명 했다고 하며, 그때가 산수유 꽃이 필무렵 이어서 그 능선을 산수유릿지라 부른다고 한다. 

 

 

 

 

 

 

 

화북에서 오르면서 우측으로 보이는 암릉으로 백두대간 구간이다.

뒤로 백악산, 조항산, 대야산 등이 조망된다.

 

 

 

 

 

 

 

문수봉 조망터에서 바라본 문장대

 

 

 

 

 

 

 

소프트 줌으로 당겨본 문장대

 

 

 

 

 

 

 

문장대에서 묘봉으로 이어진 풍경

 

 

 

 

 

 

 

청법대 구간을 지나가며

철계단 있는 곳에 왼쪽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다.

 

 

 

 

 

 

 

청법대 구간을 지나며 바라본 천황봉 방향

 

 

 

 

 

 

 

신선대에서 바라본 청법대

 

 

청법대는 다섯개의 봉우리가 마치 부처님이 앉아 있는 듯한 좌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라고 한다.

 

 

 

 

 

 

 

묘봉 남릉

 

 

 

 

 

 

 

법주사로 이어진 계곡

 

 

 

 

 

 

 

신선대에서

 

 

옛날 속리산 절경에 혼을 빼앗긴 한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오르는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신선세계 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떠나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그곳을

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은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선대 주막의 지글지글 감자전

 

 

속세면 어떻고 속리면 어떻냐...

당귀주는 술술 넘어 가고 감자전은 또 어찌나 맛이 좋던지..

 

 

 

 

 

 

 

 

신선대의 명물 반달이

 

 

멀리서 보면 흑염소 같이 생긴 녀석이 가까이 가보니 검은털에 기운세고 용감무쌍하게 생겼다. 가슴에 반달형의

흰색 털이 있어서 반달이라고 부른다고 쥔장님이 말씀 하신다.

 

 

 

 

 

 

 

신선대의 당귀주 맛은 마셔봐야 그 맛을 안다. :-)

 

 

 

 

 

 

 

많은 분들이 신선대 지나 갈림길에서 바로 법주사로 내려가고 나머지 일행들은 천황봉을 향해 간다.

 

 

 

 

 

 

 

신선대 갈림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기가막힌 조망터가 있다.

주의 하지 않으면 다들 그냥 지나치고 마는 곳 이다.

 

 

 

 

 

 

 

조망터에 올라보니 다들 탄성을 지른다.

이렇게 좋은데를 놔두고 왜 일찍 내려들 가냐고..

이제부터는 기암들의 축제 현장이다.

큰 바위에 붙어 있는 작은 녀석이 마치 물개나 돼지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이곳에 올라설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되는 멋진 풍경이다. (클릭)

 

 

 

 

 

 

 

마치 저 뒤 암봉위의 뾰족한 꼭지가 반보님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 같다.

 

 

 

 

 

 

 

돼지바위를 배경으로 반보님과 진대장님

 

 

 

 

 

 

 

역광이 비치는 주능선

숨은 입석대 찾기

 

 

 

 

 

 

 

바위군락 우측으로 입석대가 숨은듯 서있다.

그래서 이곳을 입석대 전망대라 부르고 싶다.

 

 

 

 

 

 

 

능선 너머로 속리산 동릉 (동부능선)도 조망이 된다.

 

 

 

 

 

 

 

입석대 전망대에서 법주사 쪽으로 바라본 풍경

 

 

 

 

 

 

 

입석대

 

 

조망터를 내려와 걷다가 우측으로 입석대를 바라본다.

옛날 조선시대에 임경업 장군이 이곳에서 수련후에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누워있는 큰 바위를 세웠는데 그게

입석대 라고 한다. 경업대와 함께 속리산은 임경업 장군의 무예 훈련장으로서의 전설을 품고 있다.

 

 

 

 

 

 

 

동릉으로 내려서는 갈림길

 

 

 

 

 

 

 

또 다시 조망 바위에 올라 쉬며 한 없이 맑은날 아름다운 속리산의 속살을 구경한다.

이곳도 땅만 열심히 쳐다보고 걸으면 찾을수 없다.

속리산 산행의 묘미중 하나는 이렇게 숨어 있는 조망터를 찾아 조망을 하는데 있다. 

 

 

 

 

 

 

 

중앙부 엄지손가락 같이 우뚝선 문장대와 왼쪽으로 관음봉..

그리고 우측으로 우리가 걸어온 능선

 

 

 

 

 

 

 

비로봉 직전 침팬지 모자 바위

 

어느분은 오리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어느분은 원숭이 처럼 생겼다고도 하는데 뭐 바위 모습이야 보는사람 맘대로니

보이는대로 이름을 지으면 되겠다.

 

 

 

 

 

 

 

비로봉과 천황봉 

 

 

진표율사가 속리산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자선을 할 때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쳤고,

이에 대사가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한 후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하여

구름을 타고 떠났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을 직접 배알할 수 있던 산봉우리를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붙여 비로봉

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비로봉

 

 

밧줄이 있으면 좋으련만 정규 등로 밖이라 안전시설이 확보되지 않았다.

그래도 오르려 한다면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이나, 일행들이 앞서 가고 있기에 중간부 까지만 올라서 보고 내려온다.

 

 

 

 

 

 

 

앞서간 일행들이 저곳에서 쉬며 기다리고 있다.

 

 

 

 

 

 

 

바위를 기어오르는 돌거북이 

 

 

 

 

 

 

 

속리산은 기암들의 천국 이다.

 

 

 

 

 

 

 

천황석문

 

 

 

 

 

 

 

왼쪽에도 마치 사천왕상 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기암이 보인다.

 

 

 

 

 

 

 

뒤돌아 바라본 지나온 길은 완전히 기암 전시장이다.

망원 렌즈로 하나 하나 당겨서 담아보면 하나 같이 다들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속리산 동부능선과 뒤로 보이는 청화산

 

 

 

 

 

 

 

관음봉에서 묘봉으로 이어진 능선

 

 

 

 

 

 

 

속리산 동릉과 청화산과 도장산

 

 

 

 

 

 

 

속리산 천황봉

 

 

천황봉과 천왕봉

 

진안의 구봉산과 같이 이곳도 원래 천황봉 이었는데 2007년에 천왕봉으로 변경이 되었다.

이는 녹색연합 이라는 단체의 주장에 의해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은 '황' 자가 들어가면 무조건 일제시대의 잔재

라고 보고 국토지리정보원에 요청하여 변경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구봉산에서 언급을 하였듯이, 우리나라도 일제시대 이전부터 천황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옥황상제나 환웅천황을 의미 하였다고 한다. 현재 구봉산의 천왕봉 이라 되어 있는 곳도 일제시대 이전부터

별개의 천황산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 지도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데 근래 정상석이 천황봉도

장군봉도 아닌 근본을 찾을수 없는 천왕봉 으로 바뀌고 말았다.

 

 

 

 

 

 

 

천황봉에서 바라본 속리산 전경 (클릭)

 

 

고전에는 윤휴(尹鑴.1617-1680)의 백호전서 제24권의 세심당기(洗心堂記)에 ‘…起步於庭 相與指點 文壯天皇

雲煙面目 (일어나 뜨락을 거닐며 서로 함께 문장대와 천황봉의 운연어린 면모를 가리켜 보이곤 하였는데)에

이곳을 천황이라 불렀던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일본인들은 지도를 만들때 우리가 지칭하던 천황과 자기네들의 천황을 명확히 구분하여 표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던 기존의 <천황> 지명에 그들의 천황을 의미하는

てんのう(덴노)를 쓰지않고 외래어표기인 가타카나로 チョンハン또는 チョンフヮン으로 써서 천황에 가까운

음으로 기재했다.

 

 

 

 

 

 

 

천황봉에서 바라보는 관음봉 ~ 문장대 ~ 주능선

 

 

신산경표를 만든 박성표씨에 의하면 편의상 천황을 천왕으로 적은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언어 중 한자를 표기수단으로 하는 단어 중 구(龜→九), 계(鷄→溪), 풍(豊→風) 등으로 발음이

같아 바뀌는 경우가 있으며 무엇보다 전자에 비해 후자가 훨씬 쓰기 쉽기 때문에 황(皇)→왕(王)으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

 

 

 

 

 

 

 

하산길에 올려다본 비로봉

 

 

 

 

 

 

 

속리산 곳곳에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이 있는데..

이런 계단은 언제 만든것 일까?

 

 

 

 

 

 

 

상고암

 

 

 

 

 

 

 

상환석문

 

 

 

 

 

 

 

석문벽엔 이덕수 라는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분은 누굴까?

같은 이름이 괴산 선유구곡의 제7곡 기국암에도 새겨져 있다.

 

 

 

 

 

 

 

세심정을 지나며 일행들과 또 한잔을 기울이고 나머지 구간을 열심히 걷는다.

신선대에서 내려간 일행들이 뒤풀이 장소에 도착을 해서 그런지 사랑으로님 핸드폰이 연신 울려댄다. 

 

 

 

 

 

 

 

시간상 법주사는 이렇게 멀리사 슬쩍 보고 지나친다.

서둘러 매표소를 통과 하니 길손식당 사장님이 봉고차를 대기해 놓고 기다리신다.

산행종료 (16시25분)

 

 

 

 

 

 

속리산 지도

 

산행코스 :: 화북 - 문장대 - 신선대 - 비로봉 - 천황봉 - 법주사 (6시간 35분 : 식사등 포함)

산행일시 :: 2012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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