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동구 하소동에 있는 만인산은 보문산, 계족산, 식장산과 함께 대전 시민들이 가까이 두고 많이 찾는

산 이다. 만인산의 이름은 萬人이 아닌 萬仞山 으로 만길 높이의 산이 라는 말과 높은 낭떠러지를 의미 한다고

한다. 이곳 만인산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탯줄을 모셔놓은 태조태실이 있어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데 문득 집사람과 가벼운 산책을 가고 싶은찰라에 만인산이 떠오른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태조태실이

궁금 하기도 하였던 차라 이번 기회에 궁금증도 해소할겸 만인산의 태조태실을 살펴 보기로 하고 늦은 오후에

차를 몰고 만인산으로 떠난다.

 

 

 

 

 

만인산 휴게소 뒤편의 분수대

 

만인산의 휴게소는 전국의 국도변에 있는 휴게소중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 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국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찾는 다기 보다는 만인산과 만인산 휴양림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일제가 만든 대전에서 금산으로 가는 태봉재를 지나는 국도

 

 

요즘에는 새로 개통된 4차선 도로를 타고 머들령을 지나 금산으로 가지만 예전에는 이 도로가 금산으로 가기

위한 주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태봉에 이러한 길이 열린 것은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난 이후이다. 조선태조의 태실이 이곳에 자리

하면서 만인산은 태봉산으로 불리우게 되고, 이 일대는 개국이래 줄곧 신성한 성역으로 남아있으면서, 나라의

봉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아왔고 나무를 하는것조차 용납이 되지 않는등 지역 관리들로 부터 엄격한 관리를

받아왔었다.

 

일제는 국가의 성지인 태조의 태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곧게 나 있던 길을 무시한 채 일부러 태실이 있는

만인산을 깎아내고 구불구불한 산비탈로 길을 내 태실을 훼손하고 나라의 정기를 무너뜨리려는 흑심을

드러내며 대전-금산간 신작로를 만들었는데 이는 나라의 정기를 막기위해 명산의 봉우리에 쇠말뚝을

박은것과 같은 유형의 행태라 할 수 있겠다.

 

 

 

 

 

 

 

임도를 벗어나 능선에 오르는 길에 만난 유격훈련 구간

 

 

일제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1928년 조선총독부는 전국 50여 개소에 있는 왕과 왕자 및 공주의

태실을 파헤쳐 태항아리를 창경궁으로 이관한 뒤, 전혀 연고도 없는 경기도 고양군에 마치 공동묘지 처럼 합장을

하고 서삼릉이라 이름했다. 왕실의 태를 묻을때는 최고급 백자를 사용하였는데 일제가 그 백자들을 탐을 내서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때 태조의 태실도 파괴되어 이장 되었다.  일제는 서삼릉으로 전국의 태실을

모으는 과정에서 태를 담아두는 태호를 모두 가짜로 뒤바꿔치기 했는데, 왕실의 태를 담아두는 태호는 모두

국보급 도자기 였다고 한다.

 

 

 

 

 

 

능선에 오르는 길

 

 

그 이듬해엔 이곳 태조의 태실 자리를 친일파 조병갑에게 넘겼던 것으로 토지대장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처럼 훼손된 태조의 태실이 해방 이후에도 원래대로 복원되지 않은 것은 물론, 태실 자리는 조병갑의

손을 떠난 뒤에도 50여년간 `명당 차지'를 위한 세도가들 사이의 아귀다툼의 대상이 돼 왔으며 지난 1985년에야

일제가 태실을 파헤친 뒤 버려 둔 석물들만 인근 주민들에 의해 발견, 보존돼 있다.

 

 

 

 

 

 

 

능선에서 만난 훈련용 타워

 

 

그것도 웃기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렇게 방치된 석물을 팔아치우려고 산주인이 군 담당직원에게 물었다고 한다.

우리산에 석물들이 있는데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가슴이 답답하니 치우라고 했다고 말이다.

담당 직원은 내용도 모르고 치우라고 했고, 이에 주인은 신이나서 서울의 모 골동품 업자에게 석물을 넘겼다.

그런데 작업을 하던 포크레인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신도 죄에 연루될까봐 신고를 해서 천만다행스럽게도

서울로 반출될뻔했던 석물들이 만인산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한밭 그 언저리 산들 - 김홍주)

 

 

 

 

 

 

 

 

시간 있으면 한번 올라가 보고 싶기도 한데...

 

 

그러나 일제만큼 한심한 작태는 모 가문에서 석물을 치우고 원래 태조의 태실자리 위에 자신들 조상의 묘를

안치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남아있던 석물은 크게 훼손되고 본래의 태실지마저 빼앗기는 어처구니 없이 일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 그곳을 대단한 명당으로 생각했던것 같다. 

 

하여 지난 92년 금산군이 이의 복원에 나섰으나 원래의 태실 자리를 위와 같은 개인 소유자에게 빼앗긴채

현재위치의 인근 산중턱에 복원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북아풍수지리 카페에 의하면 그 자리는 풍수지리학

적으로 냉혈이 흐르는 흉지라고 한다.

 

 

 

 

 

 

 

능선길에서 옆지기

 

 

어떤이들은 이곳은 비보풍수가 적용된 조선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비보처로써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 자리가

천하의 명당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보 라는 말은 어떤 기운이 너무 약하거나 강할때 그 기운을 북돋워 주거나

누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풍수적 조치를 의미한다. 즉 음기가 지나치게 강한 산자락에 남근석을

세워두는것, 화기가 강한 산아래에 큰 연못을 만드는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왕실에는 비보처

로써 효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서는 흉지에 불과한데 이런곳에 애써 돈을 써서 유물을 복원하지 않고

묘자리를 썼다는 말이다.

 

 

 

 

 

 

 

태조태실

 

 

태조대왕의 태실은 원래 함경도 용연에 있었으나 태조 2년(1393년) 당대 최고의 지사(地師)가 현재의 금산과

대전의 접경에 있는 만인산을 보고 `중첩된 산봉우리가 연꽃이 만발한 형상으로 99계곡의 물이 하나로 모이는 곳'

이라고 산세를 평가,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왕실은 이 산의 이름을 태봉산(胎封山)으로 바꾸도록 하고 縣이었던

이 고장을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시켰다(『新增 동국여지승람』 성종 23년)

 

 

 

 

 

 

 

 

태조태실에서 바라본 정면 풍경

 

태실이라 함은 왕실에서 아이를 출산하면 그 태를 묻어두었던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태를 보관하는

풍습은 왕실뿐 아니라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는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태는 곧 생명의근원인 까닭에 그 처리를

함부로 하지 않고 손액이 없는 방위와 장소를 가려 묻거나 태웠던 것이다.

 

태조는 태는 원래 고향인 함흥땅에 비장되어 있었는데 왜 그곳에 있던 태를 천리길이 넘는 이 먼곳 충청도의

만인산 으로 이전한 것일까? 태종실록 및 세종실록지리지, 그리고 이후에 편찬된 여지도서 및 진산군읍지에는

태조태실을 만인산으로 정하게된 내용이 적혀 있다. 

 

 

 

 

 

 

 

태조태실 안내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의 동쪽 20리에 만인산이 있고, 성봉(星峯)이 있는데 땅이 후박하고 물이

깊으며, 봉우리가 기이하고 수려한 것이 연꽃과 같다. 라고 되어 있으며, 용암답산기에서는 태조가 처음에

소문을 듣고 재신과 더불어 지관을 파견하여 그것을 보고 오도록 했는데, 지관이 산 위에 이르러 점지하여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이는 만세의 터로구나’ 하고 탄복하여 만인산 태봉에 태를 봉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풍수가들에 의하면 태조의 태를 이곳 만인산 성봉에 보관하게된 까닭엔 풍수학의 비보풍수가 적용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금강과 그 아래 지세가 한양에 반목하는 형국인데 진안의 마이산이 그 정점에 있는

산 이라고 한다. 그 마이산의 기운을 오행으로 중화시키는 터가 바로 이곳 만인산의 성봉 이라서 이곳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태를 묻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나오는 '차령이남

공주강 외곽' 이라는 반역의 땅을 반영한 것 이라고도 한다.

 

 

 

 

 

 

 

태조태실

 

 

하지만 훈요십조에 언급되는 차령이남과 공주강(금강)외곽 지역 이라는 말은 당연히 A지명과 많이 동떨어진

B지명을 언급 한것으로 보아 A와 B사이의 지역이라고 판단을 해야 옳은데 엉터리 정치가들은 A아래, 그리고

B아래 라는 비논리적인 주장을 하며 호남을 차별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차령이남 그리고 금강외곽 이라는 말은 잘못 해석이 되는바 처럼 호남지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차령과

금강 사이에 있는 청주를 언급한 것으로, 당시 왕건과 크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궁예의 야심찬 참모 아지태가

청주사람 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철원으로 천도를 권유하여 수많은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하고 궁예를

몰락의 길로 인도 하였으며 사료에도 철원의 성을 쌓는데 청주사람 천명을 데리고 갔다 라고 나와 있다. 예전

TV 사극 태조왕건을 기억하는 분들은 아지태가 어떤 인물인지 대충 알고 있을것 이다.

 

 

 

 

 

 

 

태조태실 석상

 

 

그리고 궁예 또한 어린시절을 청주에서 보낸 청주사람으로 동향인인 아지태를 가까이 두었으며, 역시 동향

사람인 입전과 신방들 중용하여 왕건의 청주에 대한 반감을 샀다고 한다. 아울러 청주는 반역의 고향으로

낙인이 되는데, 고려사에는 '왕건이 즉위하자 9월에 청주 출신의 순군리 임춘길이 동향출신의 배총규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10월에는 청주수(淸州帥) 진선, 선장 형제가 모반을 꾀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왕건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대를 현재 충북 진천에 주둔을 시켰는데 그래서 진천의 '진' 자가 진압할 진(鎭)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것을 두고 정치가들이 오직 자신의 표를 얻기위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지역감정을 유발시키려는 의도에서

호남을 반역의 고향이라고 부르며 그 배후에 왕건의 훈요십조를 두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태조태실

 

태조태실 뒤편에 있는 만인산의 정기봉은 식장산에 이어 대전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 봉우리인데, 원래 사료에

의하면 성봉으로 되어 있는데 근래에는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정기봉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조망이 탁 트인 곳에 자리한 지금의 태조태실

 

 

성봉이 정기봉이 된 것에도 우스운 유래가 있다는데, 다름아니고 푸른학습원에서 만인산 일대를 개발하고

개념도를 만들때 근동 노인이 이 산 이름을 정기봉 이라고 했다고 하여 조금도 문헌을 조사해 보지 않고 모든

안내판과 기록에 노인의 말대로 정기봉 이라고 했다고 한다. 참으로 어설프고 우스운 일화가 아닐수 없다.

이게 사실이라면 관계기관에서는 봉우리 이름 이라도 원래대로 해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출처 : 김홍주의 산행이야기)

 

 

 

 

 

 

 

원래 태조태실 자리와 현재 태조태실 자리

 

사이에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있다.

 

 

 

 

 

 

 

원 태조태실 자리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4번지의 태조태실 자리에는 어느 대단한 집안에서 조상의 묘를 써놨다. 

부끄러운지는 알았는지 상석에 비문을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저 출렁다리를 건너서 내려오는 길

 

태조태실을 둘러보고 다시 휴양림으로 내려오는 길에 출렁다리를 건너본다.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도 꼬맹이들조차 잘도 건넌다. 

아래 안전을 위해 그물망을 쳐놨지만 그물망 밖으로 떨어지게 되면 큰 부상을 입을수 있는 곳 이다.

 

 

 

 

 

 

 

집사람도 외줄구간 통과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하산을 하고 나니 해가 저문다.

집사람은 태조태실도 잘 보았지만, 만인산이 너무 걷기 편하고 가을 풍경이 참 예쁘다며 산책길을 칭찬을 한다.

조만간 아이들 데리고 다시 오자며 오후의 짧은 산책을 즐거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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