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래 500년을 이끌어 가전 한성백제는 고구려 스파이에 속아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이다가 민심도 잃고 국고도 탕진하다 결국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 자신이
목숨을 잃고 멸망한다. 많은 왕비와 많은 왕족, 귀족들이 피살되고 8천명의 백성들이 잡혀간다.
결국, 백제는 문주왕이 곰나루로 불리웠던 웅진으로 천도하니 그게 바로 현재의 공주다.
그후 성왕이 사비성(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웅진백제 시대를 연다. 하지만 한성에서 기반을
잃고 지방 웅진으로 옮겨 오게된 백제는 왕권이 힘을 잃고 이후 3명의 왕이 암살을 당하거나 쿠테타로
목숨을 잃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거의 다 쓰러져 가는 백제를 기적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이가
있었으니 바로 무령왕 이다.
무령왕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쓸며 백제 중흥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백제의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이끌며 사비(부여)로 천도를 하게 된다.
공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끊어 백제의 수도 웅진성 탐방을 시작한다.
공주의 옛 지명은 웅진 이다. 곰 나루 라는 말이다.
지금 금강의 <금>자가 비단 금(錦)을 사용하지만 원래는 웅진의 곰웅(熊)자를 딴 웅수(熊水)에서 <곰강> 으로
불리다 금강 으로 변했다고 한다. 공산성은 약 2,200m 길이로 110m 높이에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의
장방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백제의 최후를 맞이한 공산성 (당시 웅진성)
송산리 고분에서 만났던 일본 관광객 팀들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
금서루는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서있는 문이다.
금서루를 지나 천오백년전 백제 웅진시대의 왕성이자 백제 멸망의 종지부를 찍었던 과거로 들어가 본다.
금서루에 오르며 바라본 주차장과 공주시
성 내부에서 가장 넓은 곳 이다.
백제의 황성, 그리고 최후의 격전을 맞았던 성의 내부치고는 너무 좁은듯 하다.
이 안에 얼마의 군대가 주둔할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인 관광객들과 함께 성벽을 따라 공산정으로 향한다.
공산정에 오르며 내려다본 일방통행의 금강교
공산정
공산정에서 바라본 금강과 강건너 공주의 신도심
관광공사에서 만든 백제역사여행 어플을 통해 들어보니, 백제의 황성들은 강 남쪽에 성을 지었다고 한다.
북쪽에 강을 두고 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강을 따라 이어진 성곽길을 걸어 공산성을 한바퀴 돌아 보기로 한다.
일본 관광객들은 공산정에서 다시 내려서 돌아갔다.
공산정에서 바라본 지나온 금서루
산성을 한바퀴 돌아 내려오면 금서루 뒤로 보이는 성곽으로 내려올 것이다.
공산정에서 내려서는 길은 둥근 나무형태의 플라스틱으로 계단을 조성해서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플라스틱을 밟으면 무척 미끄러운데, 비가오는 날이나, 겨울엔 무척 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맑은날, 그것도 미끄러 지지 않는 등산화를 신고 걷는데도 이처럼 미끄러우니 말이다.
이곳 계단은 조속히 나무 등으로 교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공산성에서 가장 넓은 곳
천명 이상의 군대가 주둔하기엔 좁은것 같다.
공북루
공산성 북쪽의 금강을 지나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원래 망북루 였는데, 선조때 터만 남아있던 곳에 새로 누각을 세우고 공북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북루와 공산정
만하루와 공산성 연지
백제시대 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못
금강변이라 물을 쉽게 확보 하였으며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게 돌로 층을 이루며 단을 쌓았는데
연못 수면에 내려설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연못과 성안을 몰래 연결하는 암문이 연못까지 연결되어 있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지나가 보니 고개를 조금 숙이면 지나갈수 있을 정도다.
조선 영조때 건립되었다가 1984년에 복원된 만하루
성벽을 따라 걸으며 바라본 금강변 풍경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때 세운 15m 높이의 고층 누각 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누각은 복원된 것으로 별도 다른곳에 임류각지가 있다.
광복루
토성과 영동루
토성
가파르게는 보이지만 못오를리 없어 보이지만, 아마도 당시엔 매우 가파르거나 직벽의 모습 이었을 것이다.
성곽길에서 바라본 임류각지
진남루
백제 왕궁지
사진으로 보이듯이 그렇게 넓고 커 보이지는 않는다.
쌍수정
쌍수정에서 바라본 백제 왕궁터
660년 7월13일 백제 웅진의 공산성은 백제 최후의 운명을 건 대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수도 사비성을
빠져나온 의자왕의 백제군은 공산성에 진을 치고,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전멸시킨 신라·당 연합군과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엿새간 나당 연합군의 공격도 없는 가운데 의자왕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당시 공주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지역 유지인 예식의 배반으로 당나라에 강제 항복을 당하게
된다. 그는 붙잡혀 당나라로 끌려갔고, 백제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맨 처음 올랐던 금서루와 반대편 성곽을 따라 올랐던 공산정
당나라군 13만과 신라군 5만의 연합군은 이전의 전투양상인 영토확장이 아닌 백제의 멸망을 목표로
지역의 다른 성들을 모두 제껴둔채 개전 5일만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는 완벽한 군사작전을
보여주지만 의자왕을 놓치는 가장 중대한 우를 범하고 만다.
천만다행 으로 포위망을 빠져나온 의자왕 일행은 금강과 험준한 벼랑으로 천혜의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는 웅진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대비한다. 사비성에서 백제의 식량이 불에 타버리고, 신라의 보급로는
험준한 산간지방을 통과해서 와야 하는 상황에서 시간은 나당 연합군이 아닌 의자왕의 편이었다.
그와중에 인근에 난공불락의 백제의 임존성이 버티고 있고, 백제멸망을 위해 사비와 웅진으로 직진해
오면서 백제의 지역 산성들을 그대로 지나치는 바람에 백제의 지방군은 주력을 그대로 보전해 있으니
식량보급이 어려운 18만의 연합군은 사방에서 밀려들 백제군을 염려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백제와 운명을 같이한 공산성
평지인 사비성과 달리 웅진성(현 공산성)은 강을 끼고 있는 산성이라 수비가 용이하고, 지방의 백제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모여들때까지 농성을 하기에 충분한 성 이었는데, 농성 10일만에 의자왕은 전투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항복을 하고 만다. 많은 사학자들이 당시 어이없는 항복이 아니었더라면 백제군이 승리할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내놓는다.
하지만 사실 이는 의자왕의 항복이 아니라 당시 웅진성을 관할하고 있던 예식 이라는 장수의 배반으로 의자왕은
부하에게 구금당해 강제 항복을 당하게 되고, 백제는 멸망을 하게 된다. 이후 예식은 일가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예식진 이라는 이름으로 정3품 대당좌위위 대장군을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
에도 나와 있었지만 예식진의 묘비명이 2008년 중국에서 발견되면서 더욱 뚜렷해 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학자들은 예식의 배반으로 인해 신라가 통일을 하게 됨에 따라 당과 삼국이 평행을 유지하던 힘의 균형에서
이후 한반도가 힘을 잃고 동북아의 힘의 균형추가 중국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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