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구봉산 중에서 가장 높고 유명한 산이 바로 진안의 구봉산 이다. 대전의 구봉산도 오밀조밀한

암봉들이 시원한 조망을 제공하지만 진안의 구봉산은 일단 그 몸집 부터가 틀리다. 바로 옆에 있는 운장산과 함께

진안고원에 천미터가 넘는 산세를 자랑하며 우뚝 서있는 구봉산을 두고 산꾼들은 마치 설악의 공룡을 옮겨다 놓은듯

아홉 봉우리의 가파른 오르내림이 만만치 않은 산 이라고 한다.

 

 

구봉산의 이름의 유래는 두가지가 있는데, 아홉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九峰山 이라고 했다는 설과 조선 선조때의

유학자 송익필의 호가 구봉 이라서 구봉산 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구봉산 바로 옆의 운장산 또한 원래는 주줄산

이었는데 송익필의 자가 운장 이라서 그의 이름을 따서 산명을 바꾸었다고 하니 구봉산도 충분이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만 송구봉의 구봉은 아홉구가 아닌 龜峰 이라서 지금와서 그 유래는 정확히 판단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산세를 보는 사람들은 구봉산이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고, 장군봉은 거북이의 머리에 해당하는 장군대좌형

이라고 한다니 결국 九峰은 龜峰과 무관하지 않은것 같다.

 

 

잦은 비로 인해 여름이 왔던 기억도 없이 슬며시 가는듯 하더니 다시 몇일째 무더위가 이어진다. 뜨거운 열기가

몸을 타고 올라와 얼굴에 이르면 귀에 들리는것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뿐, 이런날 구봉산의 아홉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길이 쉽지가 않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특히 더 아름다운산. 대전의 구봉산에 자주 오르며 그 이름마저 친근한

구봉산에 늦여름 더위가 온몸을 달구던날에 다녀왔다.

 

 

 

양명마을 옆 주차장에서 바라본 구봉산 (10시 5분)

 

주차장에서 봐서는 장군봉이나 구봉산의 위용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장군봉의 위용은 나중에 1봉에서 8봉으로 가면서 점점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오게 된다.

 

 

 

 

 

주차장을 출발해 잠시 마을을 지나면서 구봉산 1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게 시작이 된다.

몸이 풀리기도 전에 만나는 가파름은 늘 쉽지 않다.

 

 

 

 

 

더덕꽃

 

 

가파른 1봉 갈림길에 오르면서 등로옆에 작은 더덕 이파리들이 보이길래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서 오르는데 앞서간

속리님이 꽃이 활짝핀 굵은 더덕줄기를 발견한다. 이내 근처 여기 저기에 더덕줄기들이 보인다. 가파른 구봉산에 산삼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건 알수 없고, 더덕은 꽤 있을듯 하다.

 

 

 

 

40분 가량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니 1봉 갈림길로 오르는 능선에 도착한다. (10시46분)

일행들은 방금 캐온 더덕을 안주삼아 소주 한잔을 기울인다.

 

 

 

 

 

 

잔대꽃

 

 

더덕이나 도라지와 같은 약초 이지만 향이 없어 크게 인기는 없다.

 

 

 

 

 

중간쉼터

 

 

오르는 중에 물병을 약초캐면서 놓고 왔다며 배낭을 두고 뛰어 내려간 속리님을 대신하여 잠깐 배낭을 메고

벤치가 있는 중간 쉼터 까지 가파른 길을 올라온 구름님이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다.

 

 

 

 

 

 

 

 

구봉산의 연봉들과 장군봉 (클릭)

 

 

아직까지도 장군봉은 그렇게 부담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능선에 오르기전 1봉이 잘 보이는 곳에 서니 충박님이 벌써 1봉에 올라 손을 들고 서 있다.

 

 

 

 

 

1봉 갈림길에 오르며 바라본 2봉과 뒤에 장군봉

 

 

 

 

 

능선 갈림길에 오르면 장군봉이 있는 주능선의 2봉쪽은 왼쪽이고

오른쪽으로 가야 1봉이다. 1봉에 다녀오고 나서야 2봉부터 이어갈수가 있는것 이다.

갈림길에서 1봉은 바로 지척이다.

 

 

 

 

 

1봉에서 바라본 2봉과 장군봉

 

 

 

 

 

1봉에서 아우리님이 준비한 닭고기를 안주로 금산의 인삼주를 한잔씩 하고 간다.

 

 

 

 

공유를 위해

 

 

 

 

 

 

 

조금전 내가 1봉을 담았던 곳에 도착한 속리 & 아로미님

카메라 줌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최대한 당겨서 잡아드렸다. ^&^

 

 

 

 

 

1봉에서 바라본 산 아래 725번 지방도로와 양명마을

나중에 하산은 사진 중앙에 주변머리가 좀 부족해 보이는 마을 뒷산 앞으로 내려올 것이다.

 

 

 

 

 

 

 

 

1봉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조망 (클릭)

덕유산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진안의 지명 유래

 

구봉산과 운장산의 이름이 당대의 유학자 송익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이 일대의 지명을

살펴보면 주천면, 명도봉, 정천면, 주자천, 정자천, 안자천 등의 이름은 조선중기 이후 조선사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송나라시대의 주자학의 대가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송나라 주잠이 이곳에 제자 7명을 데리고 찾아

왔다고 하여 그의 영향으로 주자천, 안자천, 정자천의 지명 유래가 되었으며, 구봉 송익필 등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조선 주자학의 종주라는 송시열의 스승이 김장생이고 김장생의 스승이 송익필이고 보면 아마도 주줄산이 운장산이

되고 보니 주자학의 대가들의 이름이 즐비한 땅에 조선 주자학의 대가 였던 송익필의 운장산과 구봉산이 우뚝 서있는

것을 보면 당시 주자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에게 송익필의 위명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구봉산 아래의 마을은 주자학도 아닌 양명학을 일으킨 왕양명의 이름을 딴 양명 마을이고 보니 송구봉이

왕양명을 내려보고 있는것과 다를바 없다.

 

 

 

 

 

1봉에서 바라본 양명마을과 뒤쪽 풍경

 

 

 

 

 

 

 

구봉산 2봉

 

 

2봉은 1봉에서 지척이고 능선에서 크게 오르내림이 없는데 2봉에서 3봉 가기전에 하나더 우뚝선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이 없다. 아마도 九峰山의 아홉봉우리에 맞추다 보니 봉우리 하나를 뺏나보다.

 

사실 어느 구봉산이나 정확히 아홉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은 드물다. 아홉이라는 숫자는 아홉개 이상의 많은것을 의미

하는 가장 큰 숫자를 부여한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각 봉우리마다 1봉 ~ 2봉 ~ 하는게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대전 구봉산의 봉우리는 10개도 넘는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어야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또 이와 다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장군봉 사진 밑에서 거론을 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왜 2봉과 3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 하나를 빼먹었는지와도 관련이 있다.

 

 

 

 

2봉에서 바라본 다음 봉우리와 장군봉

 

 

 

 

물병 찾느라 힘들게 내려갔다온 속리님

 

 

 

 

2봉에서 바라본 풍경 - 왼쪽 끝으로 구암마을도 보인다.

 

 

 

 

3봉으로 가면서 바라본 4봉

 

 

 

 

3봉을 가볍게 통과하고

 

 

구봉 송익필

 

지난번 인근 천반산 후기를 올리며 정여립과 정철 그리고 송익필에 대하여 거론을 하였는데, 오늘 다시 구봉산에 오고나니

구봉 송익필에 대하여 논의를 안할수가 없다.

 

송익필에 대한 평가는 송시열 만큼이나 극과극이다. 송시열 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정권을 잡았던 서인 일당들, 그리고

이후 친일파(서인)를 거쳐 해방후 어이없게도 역사편찬위 까지 도맡아 버린 서인의 후손들로 인해 현재 배우는 조선역사

까지도 신뢰할수 없게 만들어 버린 철저한 승자들의 기록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승자들이 기록한 저서에서 송시열은

조선 주자학의 종주요 하늘같이 위대한 학자며 선비겠지만, 반대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들은 임진왜란을 자초하고

역모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현명하게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쫒아내고 무능한 인조를 앞세워 대책이 전혀 없었던

두번의 호란을 일으키고 주변국가들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 할때에 고리타분한 죽은 주자학의 뒷다리나 만지며

자신들의 권력유지에만 급급하다 결국 사상초유의 40년간 왜적에 국가가 침탈을 당하는 대수모를 겪게 만든 조선 최대

역적들의 종주에 불과할 따름인 것이다. 송익필 또한 평가는 송시열과 다르지 않다.

 

승자들의 기록에서 바라본 송익필은 당대의 천재이며, 조선의 제갈공명 이겠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해악을 살펴보면

당대의 유학자고, 천재이며 제갈공명이라는 것은 맞을지 모르지만, 그 뛰어난 머리로 인해 수천명의 억울한 선비들이

목숨을 잃고, 국가는 도저히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수 없는 파탄지경에 빠지게 되며, 이를 파악한 왜적으로 하여금 침략의

구실을 제공하여 수백만을 전쟁으로 인해 죽게만든 천고의 원흉임에 틀림없는 것 이다. 또한 송익필의 간계에 의해 조선

후기에 나라를 좀먹는 암적 존재라는 사화와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니 그가 끼친 해악은 이루 해아릴수 없는

것이다.

 

 

 

 

4봉에 오르며...

 

 

 

천재 송익필은 왜 수천명을 죽인 엄청난 음모를 꾸미게 되었나?

 

 

송익필은 억울할수도 있다. 모든 사건은 그의 아비 송사련으로 부터 시작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복수의 행위는 그의 억울함의 댓가라고는 말할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으니, 그 아비의 죄를 반성치

못한 한 천재의 한맺힌 복수 행위에 수많은 억울한 목숨이 사라지고, 국가는 존멸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문제의 발단 - 송익필의 아비 송사련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은 천첩의 자식이었다. 송사련의 외삼촌은 조선 중종 때 사림의 존경을 받았던 안당(安糖)이었다.

노비 신분인 송사련은 자신을 돌보아주던 외삼촌 안당 집을 드나들면서 막혀 있는 벼슬길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그는 안당의 반대세력인 심정에게 빌붙어 노비신세를 면하고 드디어 미관말직 하나를 얻었다. 그 뒤 송사련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심정에게 자신을 보살펴준 외삼촌 안당과 아들 안처겸을 모함하여 신사무옥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은혜를 입은 자신의 외가집을 송두리째 멸문지화로 만들어 버리고 그 가산을 빼앗았다. 이후 송사련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당상관 신분으로 상승하여 승승장구 했으나, 그가 죽은 뒤 30년이 지나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죽었던 안당의

신원이 회복되고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서 송익필의 불운이 시작이 되었다. 즉, 송익필의 아비는 죽을죄를 지어 마땅한

죄인으로 은혜를 배신하고 천출인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자신을 보살펴준 외가를 멸문시킨 악적중의 악적인 것이다.

이 사실만 봐도 송익필은 억울할것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반성을 하고 아비의 죄를 빌어야 마땅치 않았을까?

 

송익필의 가계도

 

송익필의 증조모 중금은 천출로써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는 노비인 중금을 천첩으로 삼았는데 이때 중금은 출신을 모르는 다른데서 낳은 감정 이라는 딸을 데리고 있었고, 이 서녀 감정이 송씨와 결혼을 하면서 송익필의 아비 송사련이 태어나게 된다.

 

결국 안당 집안과 송사련 집안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노비나 다름없는 천출외가 였지만 송사련은 자신을 보살펴준 외숙 안당을 배신하고 음모에 빠뜨려 외가를 멸문케 한다.


 

 

 

 

 

 

 

 

 

 

 

 

 

송사련의 간악한 음모에 의해 좌의정 안당을 비롯한 일가들이 모두 처형되고 순흥안씨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게 된다.

송사련은 그 공로로 천출로 당상관에 오르게 되며, 안씨 집안의 가산 까지 차지하게 되니 억울하게 변을 당한 안씨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복권과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이후 신사년의 무옥(송사련의 무고)는 거짓으로 밝혀지고 먼저 1566년에

안당의 관작이 복작되자 안당의 증손인 안정란은 형수인 윤씨를 통해 장예원에 판결을 구하는 송사를 제기한다

또한 천출인 송씨들이 안씨를 모함하여 벼슬을 하고 그들의 재산을 차지하여 호위호식하는것을 볼수 없어, 본디 송씨

집안은 안씨 집안의 노비였음으로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천해 달라는 송사를 제기한다.

 

이로인해 송익필 형제들과 일가 70명은 하루 아침에 신분이 급락하여 안씨의 개인 노비가 되버리고 안씨집에 끌려가

그들의 피맺힌 복수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자 도망 노비가 되게 되며, 안씨들은 추노꾼을 풀어 이들을 뒤쫒게

된다. 하지만 당대의 천재로써 당시 실력자인 이이와 정철의 신임을 얻고 있는 송익필은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도망

노비생활을 이어가며 애써 부당함을 호소하며 노비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이이와 정철의 반대파인 당시

집권층인 동인의 반대로 인해 그 뜻을 펼수 없게 되자 비로소 복수에 불타 거대한 음모를 꾸미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당대의 천재이자 조선의 제갈공명 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의 지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알수가 있을것

같다. 최근 조선의 숨은왕 이라는 책을 낸 저자는 송익필을 조선 중기 통치원리 대부분을 만들어낸 사상계의 군주로 보고

그를 '조선의 숨은 왕'이라고 할만큼 대단하게 평가하며 책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말대로 조선의 숨은왕 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노비 신분으로 정철등을 뒤에서 사주하여 조선 최대 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능력은 있지만 출신 때문에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최고의 모사꾼 송익필과, 정권창출에 눈이 멀고 귀가 얇은 아부꾼 정철이 만나서 조선 당쟁의 시작이자

임진왜란을 자초하고,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정여립의 역모 사건과 기축옥사를 조작하게 된다
 

 

 

 

 

4봉에 오르며 되돌아본 3봉

 

 

 

 

 

장군봉을 제외하고 제일 높다는 4봉

 

 

 

치밀했던 음모

 

송익필 일가가 노비로 전락하여 도망노비 신세가 되었을때 당시 황해감사 이산보는 송익필이 아끼던 사람 이었는데

송익필의 동생 송한필은 이산보의 배려속에 조생원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훈장노릇을 하며 점괘 뽑아주는 일로 소일

하면서 송익필이 계획한 거대한 음모에 동참을 한다. 송한필은 황해도에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왕이 된다는 설을 유포

시키며, 정씨성을 가진 성인이 새나라를 열고 백성을 구제한다고 거짖으로 설포를 하기 시작한다.

 

이어 다시 정씨성을 가진 성인을 정수찬으로 변경하여 유포하면서, 새로운 인물 길삼봉을 등장시켜 정씨를 돕는 신선과

통하는 사람으로 둔갑을 시킨다. 물론 길삼봉은 (홍길동+삼봉 정도전) 송익필이 만들어낸 거대한 시나리오의 가공인물에

불과 한데, 학자들은 괴수 홍길동과 조선초 역적 정도전을 묶어서 작명한 거대한 음모속의 송익필의 섬세한 부분까지도

놀랍다고 언급을 한바 있다.

 

송한필은 우매한 민생들을 선동하여 그들의 '조상묘 덕으로 3년내에 장상이 될수있고, 호남에 왕기가 왕성하니 무리를

모아 내가 알려준 사람을 찾아가서 대사를 도모하면 부귀를 누리리라 하며, 정수찬을 추천 한다. (정여립에게 보낸다)

 

그의 거짖 참언은 포장되고, 가공되면서 세상에 빠르게 유포되고, 송익필의 계략으로 황해도 사람들이 진안 죽도의

정여립에게 몰려드는데, 대부분 세상에 실패한 선비나 떠돌이, 한량들 이었다.

송한필의 거짖 참언에 현혹되어 해서지방에서 내려온 이들은 정씨가 왕이되고, 전주에 왕기가 있다는 거짖 참언을

정여립의 대동계원들에게 퍼뜨리며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들중 정여립에게 잘 대접받고 황해로 돌아간 이들은 다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데,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소문의 눈덩어리는 겉잡을수 없이 부풀어지게 되고 확산이 되니

송익필이 구상한 역전의 대하드라마는 이렇게 그 화려한 오프닝을 기다하며 오랜시간 준비를 한다.

 

 

 

왜 하필 정여립 이었나?

 

사실 송익필과 정여립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 이었다.

하지만 송익필은 자신이 억울하게(?) 당하도록 하고 복권되는것을 방해한 동인들에게 원한을 갚고자 했고,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서원을 열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왜적을 소탕하는등 대책없는 조정과 관군에 비해 크게 인심을 얻어가고

있었는데, 역시 또 다른 당대의 천재인 정여립의 성격이 호방하여 대동사회를 주장하며 군주제를 비방하는등의 위험한

발언을 하는등 역모의 재료로 써먹기 딱 좋은데다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는 동인의 수장 이발과 막역하게 지내고 이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백유양의 아들이 정여립의 조카사위다 보니 동인을 일거에 뒤집어 엎고 서인세상을 만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에 같은 목적을 가진 정철을 선동하고 사주하여 모든 사건을 총괄 계획하고

시행하기에 이른다.

 

결국 정철의 수하인 진안현감 민인백으로 하여금 정여립을 암살케 하고 황해감사의 고변에 의해 해서지방에 거짖 참언을

퍼뜨리면서 시작된 장기간 계획되고 조작된 역모의 서막이 오른다. 역모 고변 초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정여립이 출두

하여 진실을 밝히면 아무 문제 없을거라 했는데, 이미 암살당한 정여립이 무슨수로 왕 앞에 나와 진실을 말할수 있겠는가?

정여립의 인맥이 넓은만큼 수천명의 억울한 인재가 몇년간 역모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고, 나라는 도저히 전쟁을 수행

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첩자를 통해 이를 파악한 풍신수길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임진왜란때 그토록 고전을

했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싸울만한 인재들이 임란 직전에 송익필과 정철의 음모로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도 정여립 사건에 휘말려 큰 고초를 당했으며 이순신 장군 또한 정여립과의 교분으로 목숨을 잃을뻔

하였는데 이이와 성이 같다는 이유로 풀려났다고 한다. 하마터면 조선이 왜국의 속국이 되버릴뻔한 아찔한 순간 이기도

했던 것이다.

 

훗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정여립을 4백 년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혁명성을 지닌 위대한 사상가로

표현하며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 이라며 그로 인해 조선이 국운을 잃어가게 되었다고 언급을 했다. 

 

 

 

 

 

4봉에 서니 지나온 봉우리들이 시선 아래로 보인다.

 

 

 

 

4봉에서 바라본 용담호, 지장산, 적상산

 

 

 

 

4봉에서 바라본 5~8봉과 장군봉

 

 

송익필의 말년

 

정철이 몰락할때 송익필의 죄상도 같이 드러나게 된다.

정철이 송익필을 숨겨주고 온갖 흉악하고 비밀스러운 음모를 함께 계획하였으며, 이미 환천된 신분을 뒤엎으려고

기축년 겨울에 송사를 맡은 관리를 협박하여 이를 실현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며 언관들이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사노 송부필, 익필, 한필 등은 사대부 집안에 드나들면서, 조정의 시비와 사대부의 인사에 끼어들지 않은것이 없으며,

사악한 말로 선동하여 나라 전체를 어지럽히고, 남에게 상소하도록 사주하여 사림 모함을 평생의 능사로 삼았습니다.

수십년 이래 선비들의 논의가 갈라지고 조정이 시끄러웠던 것은 모두 이자들의 소행 입니다. 그들의 속사정을 살피건데,

주인에게 죄를 지은뒤, 온가족이 도망나와 세력가에 의탁해 소굴로 삼고 기어이 세상을 뒤엎어 옛주인에게 보복을

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지난번 정철이 쫒겨난 이후로는 몸을 숨길데가 없어지자 더욱 간악한 독기를 부려 때로는

서울 근교에 숨고, 혹은 지방에 의탁하여 마치 귀신이나 물여우 처럼 기회를 보고 틈을 노려 또 일을 꾸미려고 합니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뒷날의 화가 이루 말할수 없을것 입니다." (선조실록)

 

이후 송한필과 익필 형제는 잡혔는데, 이들이 동인들에게 맞아죽게 될것을 염려한 선조가 이들을 각각 제주와 남해로

유배를 내렸다가, 머리가 똑똑한 간악한 이 두 천재 형제가 왜적이 자꾸 출몰하는 시기에 왜적에 잡히거나 접촉하여

왜적과 부화한다면 기축옥사를 능가하는 엄청난 국난이 생길것을 우려해서 다시 각각 함경도 이성과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지를 변경 하였다. 하여, 임진년 1월 송익필은 평안도 희천에 도착한다. (천하는 천하다 - 양자허언님)

 

 

 

 

 

4봉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클릭)

장군봉 우측으로 능선 중앙에 뾰족한게 지난번 다녀왔던 운장산 복두봉 이다.

 

 

 

운장산의 이름은 언제부터?

 

운장산이 송익필의 이름(자)을 따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은 다들 아는 내용이다. 하지만....

진안군지를 보면 ‘운장산의 옛 이름은 구절산인데, 송익필이 운장산의 서봉 아래 오성대에 은거한 뒤로 그의 자를 따서

운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송익필이 세상을 떠난 이후인 18세기의 택리지, 19세기의 대동여지도

등도 모두 주줄산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죽은 송익필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것도 아닐텐데 주줄산이 다시 언제부터

운장산으로 불리우게 되었을까?

 

 

 

 

 

도라몽님이 4봉을 내려가면서 밧줄을 잡고 몸이 휘청하며 돌아가는 일을 겪으며 구름님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내려서고 있다.

 

 

 

 

 

4봉을 내려서며...

 

 

 

 

 

복두봉(왼쪽)과 명도봉(오른쪽)

 

어떤 이들은 복두봉의 원래 명칭은 북두봉이 분명한데, 후손들이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현재 복두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송익필이 칠성대와 오성대를 명명하면서 북두봉이라 했을것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근거 자료는 없는것 같다.

 

 

 

 

 

 

 

4봉을 내려서며 바라본 5봉

빨간모자를 쓴 구름님이 5봉에 오르고 있다.

 

 

 

 

 

5봉에 오르며

 

 

 

 

 

4봉의 가파른 암벽

 

 

 

 

 

5봉에 오르며 쉬어가던 조망터

 

 

 

 

 

뒤돌아본 4봉

등로가 매우 가팔라서 겨울에는 위험할것 같다.

 

 

 

 

5봉 직전의 조망터에서...

 

 

 

 

5봉

 

 

 

 

 

자그마한 6봉과 그 뒤로 7~8봉과 맨 뒤에 우뚝선 장군봉

 

 

 

 

 

 

 

 

5봉을 내려서는 길도 가파르다.

 

 

 

 

 

 

 

 

6봉에 가며 돌아본 5봉 (클릭)

 

 

 

 

 

구봉산 장군봉 능선뒤로... 운장산 복두봉 능선을 따라 명도봉 - 명덕봉 그리고 우측으로 진악산이 멀리 보인다. (클릭)

 

 

 

 

 

6봉에서

 

 

 

 

6봉에서 바라본 7봉과 8봉

 

 

7봉과 8봉은 바로 오르지 못하고 우회를 하도록 되어 있으나 현재 7봉에 바로 오를수 있도록 안전시설 공사를 하기

위한 자재를 날라서 쌓아두고 있는걸 보니 몇달 후에는 7봉에도 올라 볼 수 있을것 같다.

 

 

 

 

 

절벽 중간에 7~8봉은 우회를 하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그 앞에 공사를 위한 자재를 쌓아두고 있다.

 

 

 

 

7~8봉을 우회하는 일행들

어찌 오르면 7봉에 오를수도 있을것 같지만 매우 위험해 보인다.

 

 

 

 

 

7~8봉을 우회하는길

가파른 벼랑 중간에 우회할수 있는 루트가 만들어져 있다.

 

 

 

 

 

우회하며 바라본 지나온 봉우리들

 

 

 

 

 

일행들은 8봉을 지나 너른곳에 자리를 잡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달려 8봉에 올라선다.

가파르지만 충분히 오를수 있는데, 아마 다음엔 이곳도 안전시설이 세워질것 같다.

 

 

 

 

 

장군봉과 그 아래에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일행들

제9봉 장군봉은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야 하니 그 위용이 엄청나 보인다.

장군봉을 요즘엔 천왕봉이라 하는데, 마치 봉우리가 장군같기도, 천왕같기도 해보인다.

 

 

 

 

 

 

 

 

8봉과 지나온 봉우리들

 

 

8봉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더 진행을 해야 실제 8봉 정상에 갈수 있다.

 

 

 

 

8봉정상으로 가는길의 통천문 닮은 바위

 

 

 

 

 

8봉 정상에서 바라본 1~7봉

 

 

 

 

8봉 정상에서 바라본 장군봉과 8봉 정상석 (우측아래)

 

 

 

 

8봉정상에서 바라본 장군봉 방향 파노라마 (클릭)

 

 

 

 

 

방금 올라 서서 조망사진을 담았던 8봉의 진짜 정상

 

 

 

 

 

8봉을 내려와 식사에 합류한다.

다들 음식을 너무 많이 준비해와서 푸짐한 점심이 되었는데도 음식물이 많이 남았다.

배가 불러갈수록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는 장군봉의 높이가 그만큼 계속 올라가는것만 같다.

포만감이 느껴질때 다시 올려다본 장군봉은 지리산 천왕봉 만큼이나 높게 보였다.

급기야 다들 하나둘 장군봉 산행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식사터에서 바라본 지나온 구봉산 연봉들

 

 

 

 

산아래 저수지와 양명마을

 

 

 

 

 

7봉 안전시설 작업을 하기 위한 시설물들과 7봉 정상석

다음에 구봉산에 오면 7~8봉을 우회하지 않고 바로 올라갈수 있을것 같다.

 

 

 

 

 

한숨 자고 돈내미재에서 바로 내려가겠다는 일행들을 놔두고 충박님, 브라운슈가님과 셋이서 장군봉으로 향하는데

속리님이 바로 따라오신다. 가파른 길에 철계단이 만들어져 훨씬 오르기가 수월해 졌다.

석간수가 후두둑 떨어지는 이곳은 겨울이면 엄청난 고드름이 공포스럽게 매달려 있는 곳이다.

 

 

 

 

긴 철계단을 지나서 만나는 밧줄 구간

 

 

 

 

 

이윽고 조망터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고 쉬면서 조망을 한다.

 

 

 

 

 

 

 

방금 지나온 구봉산 연봉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윽고 식사터를 출발한지 약 55분 만에 구봉산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에 올랐다 (15시17분)

 

 

장군봉과 천왕봉

무엇이 진실인가?

천황봉은 일제의 잔재인가?

 

진안군지에 구봉산의 주봉은 장군봉으로 나오는데, 얼마전까지 천황봉이라 새겨진 정상석이 떡하니 놓여있었다.

구봉산에 천황사라는 절도 있고, 천황암 이라는 암자도 있지만, 일제의 잔재가 분명할 이름을 정상석에 떡하니

올려 놓고 있으니 지역 산꾼들이 크게 반발을 하였는지 어느새 천왕봉으로 바뀌어 있다. 하지만 천왕봉 또한

천황봉의 대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 찾아봐도 그 유래를 알수가 없다. 만일 뚜렷한 유래가 없이 천황봉에

대한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만든거라면 원래의 이름인 장군봉으로 돌려놔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게 얼핏 보기에

쉽게 떠오를수 있는 생각이다.

 

자 문제는 여기서 비로소 출발을 한다.

 

진안군지는 일제시대 이후의 자료이다. 즉 최근의 자료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일본에 40년동안 침탈을 당하면서

수십만권의 역사책을 그들에 의해 불살리우고 기록된 역사들이 구전으로 밖에 남지 않게 되었으며, 40년 동안,

강산이 네번이나 변하는 동안, 우리의 역사기록이 얼마나 많이 사라지고 망각속으로 흩어져 버렸던가.

그렇게 머나먼 과거속으로 사라진 왜곡된 역사가 입을 통해 전해내려 오면서 진실을 변질시키는 일제시대를 거쳐

만들어진 자료가 진안군지다. 즉, 온전히 신뢰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전 (1872년)에 만들어진 기록인 용담현지에

따르면 구봉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래 지도 참조)

 

 

용담현 지도 1872년도

 

위 지도를 보면 용담현 남쪽으로 현재 운장산인 주줄산이 보이며, 그 바로 밑에 천황산이 보인다.

또한 그 왼쪽으로 구봉산이 따로 보이며 맨 왼쪽으로는 험준한 절벽사이로 난 잔도가 그려져 있는 운일암 반일암이

보인다. 자 그러면 이 지도만 봐도 뭔가 느껴질 것이다.

 

현재의 구봉산 1~8봉과 장군봉(천왕봉)은 1872년도 조선말에는 별개의 산 이었던 것이다.

현재 1~8봉이 구봉산이고, 작금의 천왕봉은 천황산 이라는 별도의 산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독립된 산 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2봉과 3봉 사이에 명패 없는 봉우리가 하나 더 있더라니, 구봉산은 장군봉을 제외하고 독립적으로 9봉산 이었던

것이다.

 

또한

 

천황봉 또한 일제의 잔재가 아닌 우리의 전통이다 !!

여기서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현재 장군봉 즉 천왕봉의 이름이다.

우리는 그동안 친일잔재 청산을 한다는 핑계로 <천황> 이라는 이름에 대해 무척이나 터부시 하고 거부 해왔다.

하지만 이런 <천황> 이라는 명칭을 쓴다고 해서 전부다 일제의 잔재가 아니고, 우리민족도 예전부터 <천황> 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해왔다는 점에서 <천황>을 모두 일제의 잔재로 몰아붙혀 쌩뚱맞은 천왕으로 일괄 개명을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해야 한다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크게 공감을 한다.

 

우리가 부르던 천황은 <옥황상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먼 조상인 환웅을 이야기 할때도 환웅천황 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예로부터 천황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왔는데, 일본이 천황을 자기네 우두머리를 지칭

하는데 사용하는게 알려지면서 부터 우리들 또한 <천황> 이면 무조건 일본의 천황 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일제의

잔재라고만 치부해 왔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중의 대표적인 例 중의 하나가 바로 진안의 천황산 이며

현재의 구봉산 장군봉 또는 천왕봉 이라고 부르는 곳 이다.

 

또한 일본인들은 우리가 지칭하던 천황과 자기네들의 천황을 명확히 구분하여 표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던 기존의 <천황> 지명에 그들의 천황을 의미하는 てんのう(덴노)를

쓰지않고 외래어표기인 가타카나로 チョンハン또는 チョンフヮン으로 써서 천황에 가까운 음으로 기재했다.

그 대표적인게 바로 월출산 천황봉이며 현재 구봉산의 천왕봉 이라고 불리우는 천황산도 그 한 예라 말할수 있다.

즉 이러한 <천황>은 일제의 잔재가 아닌 전통적인 의미의 <천황>인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에

의해 <천황> 이면 무조건 일제의 잔재인줄 알고 기존의 전통적인 이름을 헐고 엉뚱한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옛 기록에 모두 천황봉, 천황산이 나오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장군봉, 천왕봉의 유래는 또 무엇인가?

일제이후의 진안군지에 장군봉이라 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 기록인 용담현지도에 뒤쳐지니 그 유래를 따질것도

없을것 같고, 천황봉이 일제의 잔재라고 지역 산꾼들이 건의를 해서 천왕봉으로 바뀐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현재의 천왕봉이 원래 조선시대에 천황산 이었으니 작금에 와서 천황봉으로 불리워도 그 개연성이

충분할것이고, 뚜렷한 기록은 없지만, 최근의 진안군지를 빌어 장군봉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

잔재 청산을 빌미로 엉뚱하게 <천황>을 <천왕> 으로 고친 것은 시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제부터 구봉산 + 천황산이 현재의 구봉산이 되었을까?

그것은 알수가 없지만, 일제 이후의 일인것 같다.

또한 1872년 용담현 지도에 나오는 천황산에는 崇岩寺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현재의 天皇寺라 볼수가 있으며

현재의 구봉산이 그 의미를 제대로 찾으려면 조선시대 처럼 구봉산과 천황산이 분리가 되거나, 최소한 현재의

천왕봉을 천황봉이라 고치고, 그 유래를 제대로 설명해 놓아야 할것이다.

누가 보든지 현재의 천왕봉과 구봉산은 동떨어진 별개의 산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군봉 정상에서 바라본 구봉산 1~8봉

 

 

 

 

 

남쪽으로 마이산과 그 우측으로 부귀산이 보이며, 마이산 왼쪽 뒤로는 여름 초입에 다녀온 덕태산과 선각산 라인이

희미하게 보인다.

 

 

 

 

쉬어갈 벤치가 있는 구봉산 장군봉 정상

바람을 쐬며 쉬고 있으니 아우리님이 혼자 올라 오신다.

 

 

 

 

타이머를 맞춰두고 구봉산 장군봉에서 기념샷 ~

 

 

 

 

장군봉을 내려가며 바라본 조망

바로앞의 능선이 자루목재에서 휴양림으로 가는 능선이며,  그 너머가 복두봉에서 운장산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갈거계곡이 있는 곳 이다.

 

 

 

 

천황사 쪽으로 능선을 타고 하산을 하며 바라본 구봉산

가을에 단풍이 지면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나온다.

 

 

 

 

 

용담호

 

 

 

 

 

조망터에서 바라본 구봉산과 용담호 파노라마 전경 (클릭)

 

 

 

 

 

용담호로 인해 운해가 가득하고...

밤낮으로 기온차가 심한 단풍이 예쁜 가을날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구봉산 일출은 황홀하기만 하다.

 

 

 

 

 

진안 구봉산

 

구봉산에 봉우리는 과연 몇개일까?

 

 

 

 

 

하산길에 아름다운 명품 소나무에서 기념을 남긴 속리님

 

 

 

 

바랑재 갈림길에서 천황사로 가려던 것을 원점회귀를 위해 바로 주차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바랑재에서 주차장으로 장군봉을 내려가는 하산길은 끝까지 무척 가파르다.

구봉산은 오를때나 내려갈때나 가파르기가 그지 없다.

 

 

 

 

중간에 하늘이 활짝 열린곳을 찾아 조망을 보러 올라갔더니 기가막힌 자리에 경주김씨 묘가 있다.

 

 

 

 

다 내려와서 교회 뒤로 보이는 구봉산

 

 

 

 

주차장으로 가기위해 도로를 따라 양명마을앞을 지나는데 멋진 솟대들이 구봉산을 배경으로 서있다.

 

 

 

 

 

주차장으로 되돌아 가는길 (17시2분)

 

 

 

 

땀을 식히러 오는길에 12폭포 입구에 주차를 하고 봉황천에 뛰어들었는데 이날따라 물색이 참 맑다.

 

 

 

 

 

 

 

 

 

 

 

 

 

 

 

 

 

시원하게 알탕후에 오늘캔 산더덕을 조각내 향기 좋은 더덕주를 만들고, 아로미님의 골뱅이무침을 안주삼아 가볍게 하산주를 한잔씩 한다.

 

 

 

 

 

곤드레 만드레 막걸리

 

대전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려고 들렀는데, 대박이가 내려오면서 강원도 정선의 특산물인 곤드레 만드레 막걸리를

사가지고 왔다. 이번 여름 정선 덕산기 계곡 산행을 떠난 속리님 일행이 정선의 아라리 휴게소에 들러서 가볍게 목을

적시고 간다며 마셨다는 곤드레와 만드레 막걸리. 그 맛에 반해서 다들 곤드레 만드레가 될때까지 술을 마셨고...

결국 덕산기 계곡 트레킹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 계곡 입구 부근에서 다들 아라리가 나서 트레킹을 포기하고 계곡가에서

한숨 푹자고 대전으로 돌아왔다는 웃기는 전설을 안고 있는 그 유명한 곤드레 만드레 막걸리.

 

오는길에 상사에게 붙잡혀 곤드레는 상납하고 만드레주와 강원도 특산 막걸리를 들고 왔다는데, 하여튼 맛이 기가 막히다.

아쉬운점은 수량이 많지 않은지 정선에서만 판매를 하여 그곳에 가야 맛을 볼수 있다니 이날 먹어보지 못한 곤드레주는

다음에 정선에 가서나 맛을 볼수가 있을것 같다.

 

 

 

참고 :: 2012년8월의 구봉산 : http://blog.daum.net/boxer123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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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 :: Desperado - Fujita Emi

 

진안 구봉산 등산지도

 

산행일자 :: 2011년 8월27일 토요일

산행코스 :: 구봉산주차장 - 1봉 ~ 8봉 - 장군봉 - 바랑재 - 주차장 (식사포함 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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