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으면 장마철이 끝나면 한동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휴가철이 되곤 하였는데 요즘엔 우리나라가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 간다고 하더니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는 우기가 계속되고 있다. 산악회원들은 계곡을 찾아 강원도로

떠나고 나는 가까운 진안의 천반산으로 향한다.

 

 

천반산은 정여립과 기축사화의 슬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곳으로 진즉부터 가보려고 맘에 두고 있던 차에 여름

물놀이 야유회와 엮어서 산행 공지가 올라오고 보니 일 때문에 강원도 계곡행에 빠져 하는 나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수 없다.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이자 조선 500년 최대의 사건 현장을 찾아가는 천반산 산행은 마침 여름

이어서 더욱 반가운것 같다.

 

 

천반산 옆에 있는 죽도는 어릴적 부터 많이 들어왔던 곳으로 여름이면 많이들 놀러 갔던 곳 이다. 여름날 천반산 산행이

반가운것은 긴 능선을 따라 굽이 굽이 흘러가는 구량천의 물줄기를 바라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짧은 산행후에 만나는

죽도를 에워싼 아름다운 냇가에서의 시원한 물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천반산 능선을 따라가며 억울한 죽음을 맞은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천재였던 정여립을 회상해 보고 인기 많았던 죽도의 옛 영화를 떠올려 본다.

 

 

 

 

 

천반산 휴양림 앞에서 산행시작 (10시1분)

 

 

진안군 동향면 성산리 천반산 휴양림 앞에서 하차후 다리를 건너 우측의 산길들머리로 향하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찌는듯한 여름날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다리왼쪽편에서 구량천 물에 첨벙거리며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420년전 역모라는 이름으로 희생당한 대동계원들과 정여립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천반산으로 산행은

조선최대음모 라는 역사의 이야기를 화제로 삼으며 시작을 한다.

 

 

 

 

휴양림 우측 들머리에서 시작한 산길은 능선까지 어렵지 않은 편안 오름길 이다.

하지만 오랫만에 산행길에 동행해서 인지 그네님과 한방콜라님이 습한 날씨와 함께 힘들어 하며 우리팀은 두대의 버스에서

내린 많은 일행들 중에 맨 후미에서 천천히 진행을 한다.

 

산행시작 40여분이 지나자 능선길에 오르고 10여분을 더가니 나무가지 사이로 진안 지역에 오면 가장 눈에 띄는 이정표인

뾰족한 말귀를 가진 마이산이 보인다. (10시52분)

 

 

 

 

실제로는 더 크게 보이는데, 내 카메라 최대줌이 고작 여기까지 라서 멀게만 보인다.

 

 

 

 

능선을 따라 가며 바위 구간에 밧줄이 매어져 있는데....

등로 한가운데 (원안) 바위밑에 말벌집이 있다.

 

 

먼저 지나간 일행들이 벌집을 건들고 갔는지, 열댓마리의 왕팅이들이 나와서 윙윙 거리며 화를 내고 있다.

모르고 지나쳤으면 대형사고 날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 일행은 우측 사면으로 우회를 하여 지나갔는데, 우리와 코스를 반대로 잡고 삼삼오오 혹은 홀로 반대로

가능하면 만나는 분들마다 주의 하시라 말씀을 드렸지만, 위에서 내려오시는 분들에겐 저 바위밑의 벌집이

보이지 않을텐데 걱정이 된다.

 

 

 

 

정상으로 가는길에 만나는 암벽과 원거리 조망

 

 

 

 

 

멋진 조망을 렌즈에 담고 있는 반보님

 

지능선에서 주능선에 오르면 정상은 우측으로 가야 하는데, 조망을 찾아 왼쪽으로간 반보님이 기가막히다고

소리쳐 불러 가보니 오늘 산행에서 만날수 없는 능선 반대편 조망이 시원스럽게 열려있다.

 

 

 

 

멀리 향적봉에서 이어진 덕유 주능선을 따라 무룡산~삿갓봉이 보이고 다시 우측으로 남덕유산과 할미봉이 보인다.

 

 

 

 

남덕유산 방향의 조망 (클릭)

 

 

 

 

 

 

천반산과 건너편 고산의 지능선을 따라 굽이 굽이 휘돌아 흐르는 구량천

 

 

 

 

천반산 정상 깃대봉 647m (11시21분)

정여립이 훈련할 때마다 천반산 제일 높은 곳에 ‘大同(대동)’ 이라는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 이다.

천반산은 정여립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산이다.

천반산을 오르면서 정여립과 기축옥사에 대해 모르고 갈수는 없는 일이다.

산행을 하면서 일행들과 정여립의 모반과 조선시대 최대, 최악의 사화인 기축옥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르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알고 다시 보면 420년전 도포를 입고 천반산 산길을 걸었을 정여립의 모습이

떠오르는듯 감흥이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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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반산의 이름 유래

 

천반산(天盤山)의 이름에는 3가지 유래가 있는데...

먼저 주능선 일원이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고

두번째로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세번째로는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천반락도 天盤落桃)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작금에 있어 천반산은 마치 天反山 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가 발생한 정여립 사건의 주인공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하고 죽은곳이 이곳 천반산 이기 때문이다.

하늘(임금)에 반대 했던 역신들의 산 천반산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억울하게 죽은 정여립은 그렇게 부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잔혹한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모반 사건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장계(첩보문건) 한 장이 조정에 당도한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정여립이

'세상을 전복시킬 엄청난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첩보는 구체적이다. 정여립이 자신을 따르는

일당과 호남, 황해도에서 동시에 봉기해 한강의 얼음을 딛고 한양으로 진입, 훈련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때까지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선조조차도 정여립이 모반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했다. 정여립과

한 길을 걸었던 동인 계열은 그가 스스로 한양에 올라와 무고를 주장하면 사건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판단은 어긋났다. 10월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당도했다. 변고는 거듭됐다.

10월18일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월20일 선조가 직접 나선 정옥남에 대한 친국을 시작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됐다. 옥남은 정여립의 아들이다.

 

이듬해 7월까지 무려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조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임진왜란을 4년 앞두고 동인인 이순신, 권율등이 음모에 휩쓸리지 않은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4~500만 명이었다. 모반에 대한 치죄는 매우 엄했다. 삼족을 멸하고, 정여립과 조금 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 죽였다.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된 뒤 조선팔도로 흩어지고 그와 서신 한 번이라도

주고받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말 한 마디 건넨 이력이 있는 사람도 죽었다. 이웃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집단이

죽임을 당했다. 전주와 한양에서 국문이 109일 동안 계속됐다. 심지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까지도 묘향산과

오대산 사찰에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정여립의 근거지 전주는 동래 정씨가 아예 살 수 없게 됐고, 그의 고향

금구는 현으로 강등됐다. 집을 파괴하고 역적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연못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돼 이후 인재등용에서 배제가 되었다.

 

여기 까지가 승자들의 역사속에 남겨진 정여립에 관한 기록이다.

서인들이 조선시대가 망할때까지 집권을 하였으니 결국 그들의 기록은 믿을만한게 못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역모가 아니라 잔인한 음모다!!

 

당시의 사건은 이렇게 추정되고 있다.

정여립 역모사건과 기축옥사는 조선역사에서 늘 문제가 되는 악적 서인들의 철저한 시나리오에 의한 잔인한 음모

라고 볼수 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역대 최악의 임금중 하나로 꼽히는 선조이며, 당시는 임진왜란을 고작 몇년 앞에

두고서 동인들이 주도적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을때 였다.

 

힘을 잃고 정권을 찾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은 완벽한 시나리오를 구성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모 사건이라 하면 조선시대에는 정권을 충분히 뒤엎을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이에 서인들은

진안 운장산/구봉산의 이름을 만들게한 간신 송익필(자가 운장, 호가 구봉)과 동인백정으로 불리웠던 송강 정철 등이

음모를 꾸며 율곡의 추천으로 서인에 들어왔다가, 1년후 율곡이 죽자 서인들의 행태에 실망하고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을 역모의 주역이자 도화선으로 삼아 동인정권을 끌어내리고 집권을 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정여립은 동인으로 옮겨간 이후 서인들의 행패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천반산 일대에서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한달에 한번씩 모여 무술훈련도 하고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도 하였는데, 열혈남아

였던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씨에게 돌아갔는데, 한 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거침없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게 또한 서인들이 정여립을 역모의 주동자로 몰기에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준것이다. 당시 정여립의 거침없는 발언은 선조 앞에서도 할말이 있으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동사만록>에도 음모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정철 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한 서인은 계획된 대로 사전에 내통한 황해도 관찰사를 시켜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다는 비밀장계를

선조에게 보내면서 준비된 음모가 시작되는데 그때 이미 정여립은 서인들이 보낸 자객에게 천반산 앞 죽도에서 암살을

당한 이후 였다고 한다.

 

이율곡과 선조도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천재 정여립이 역모를 꾀할일이 없으니 같은 동인들도 가볍게 생각하고, 졍여립이

나와서 진실을 밝히면 아무 문제가 없을것으로 가볍게 보았는데, 죽은 정여립이 어찌 나와서 진실을 밝힐수가 있었을까.

서인들은 정여립을 죽여놓고 열흘이 넘게 시간을 끌면서 매일 매일 매수된 관원을 시켜 거짓된 상소를 올리면서 그가

도망중이다, 궁지에 몰리자 자살했다 는등 계획된 거짓정보를 왕에게 전달하여 점차 국면을 엄청난 역모로 몰아간다.

 

결국 음모는 성공하기에 이르고 조선시대 최악의 왕 선조는 동인의 반대파인 서인의 수장 정철을 시켜 기축옥사를 진두지휘

하게 하고 동인 사냥을 시작케 한다. 이때의 모사꾼이 송익필 이다 (정감록과 정여립을 결부시켜 거짓 소문을 퍼트린 이가

송익필 이다). 그렇게 동인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狂人 정철의 손에서 원래 계획된 동인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대로, 당시 

집권하고 있던 동인들은 수장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관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삭탈관직을 당하고 동과 서는 더 이상

말로써 회복할 수 없는 극한의 원수가 되어 버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 이라며 한탄을 했다.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또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을 쓴 신정일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 이상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가막리와 멀리 마이산

 

 

 

 

정여립의 역모가 거짖인 이유들

 

 

1. 당시 집권층은 정여립의 동인이다. 불만은 서인들이 가지고 있는데, 집권파인 정여립이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

2. 역모의 진원지는 전라도 천반산인데,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고변은 천리길도 넘는 황해도에서 했고, 전라도지역에서

    역도로 붙잡힌 사람들은 역모 자체를 부인하다 장살된 반면 해서지역 역도들은 역모를 사실이라 자백했다고 한다.

3. 정여립이 암살을 당할시 그는 천반산 앞에 있는 작은산 죽도에 아들과 수하 한명을 동행하고서 단풍구경을 하고 있었다.

4. 수백명의 무술을 하는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지만 그는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

5. 역모사건후 그의 집에는 그가 평소에 쓰던 그대로 방치되어 그와 교류했던 선비들과의 안부 편지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후 그 편지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었는데, 역모를 준비한 사람이 집안에 중요한 문서

   등을 집에 방치해 두며 단풍놀이를 간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단풍구경 갔다가 암살을 당한 것이다.

6. 그가 역모후 도주한곳이 죽도 라고 하는데, 잠시후 아래에서 죽도 사진을 올릴것 이지만, 죽도는 말만 섬이지

   밤톨만큼 작은, 그러면서도 사방이 강물에 에워 쌓여진 조그만 야산에 불과 하다. 정말 역모라면 지리산 같은 큰산으로

   도망을 가던지 해야지 마을 뒷산보다 작은 죽도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 이다.

 

 

 

 

 

능선상의 커다란 바위

 

 

 

정여립의 역모사건 이후 힘을잃고 망해가는 조선

 

 

서인들의 음모에 의해 일으켜진 기축옥사는 1,000명 이라는 엄청난 지식인 선비들을 죽이고 끝이 났다.

당시 인구가 400~500만 가량이고, 이중에 양반의 비율이 약 2%로 정도인데, 이중에서 동인과 정여립과 친분이 있던

당대의 최고 엘리트 지식인들 1,000명이 죽었으니 엄청난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참고 :: 1910년 호구조사에서 전국 가구수가 289만4777호로 집계되었는데 이때 양반은 5만4217호로 전체인구의

1.9%에 불과 했다고 한다) 

 

결국 4년후 임진왜란을 맞아 고전을 한 큰 이유중의 하나가 기축옥사때 당대의 지식층을 너무 많이 죽여서 임란때

주도적으로 전쟁을 치를만한 인재가 없었다고 한다. 더 웃기는 것은 지난번 화양구곡과 송시열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말했듯이 이 기축옥사를 일으킨 문제의 서인들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인물이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원균, 신립 = 서인, 도움이 전혀 안되고 그나마 있던 병력과 장비를 말아먹은 인사들이다)

 

참고로, 기축옥사로 조선의 인재들을 싹 죽이고 임란때 왜적을 맞아 싸운것은 곽재우, 권율, 이순신등 동인들

이고...서인들은 임란중에 이순신을 시기하여 백의종군케 하더니 기껏 한다는짓이 원균을 앞세워 그나마 잘싸우던

수군을 전멸을 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서인이 내세운 신립은 방어에 유리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조총의 위력을

모르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는 어리석은 전술로 육군을 몰살시켜 버린다. 이렇듯 임란때도 서인측이 한 공적 이라고는

아군을 몰살시켜 국가에 큰 위해만 끼쳤는데, 임란이 끝나고 다시 힘을 일케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는 계기가

바로 자신들 스스로가 실제 역모를 일으키는 인조반정 이다. 인조반정의 추악함에 대해서는 지난번 화양계곡과

송시열을 언급하면서 충분히 설명하였음으로 그만 하고자 한다. 다만 기축옥사에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거쳐

친일파로 이어지는 서인들의 끝없는 악행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참을수가 없다.

 

기축옥사 이후 재능있는 선비들은 왕 앞에 바른말 하기를 꺼려하고, 동인과 서인의 갈등의 골은 돌이킬수 없는 원수

지간이 되어 이후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에너지를 잘못된 곳에 소모를 하게 된다. 조선이 망할때까지 쭈욱

권력을 잡은 서인 정권은 주변 나라들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이 되어 가는 와중에 애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두차례나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고는 자신들은 싸움 한번 안하고 나라에 치욕만 안기고선 이후 주자학과

숭명사상에 빠져 결국 조선을 망하게 하더니 그 주역들은 죄다 친일파 주축이 되어 현재까지 그 부를 이어오고 있다.

 

 

 

 

전망바위에서 연호님

 

 

 

시인으로 만족했어야 했을 송강 정철의 두얼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

사미인곡, 속미인곡등 왕을 향한 절절한 충정의 글을 남겨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송강 정철의 이면은

송시열 만큼 다르다. 해방후 국사편찬 까지도 당시의 서인들이 맡고 있으니 현재 국사의 기록도 여전히 서인들의

왜곡한 잔재들이 남아 있을수 밖에 없을것 이다. 

 

선조실록에는 송강 정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사독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다.' <선조실록 145권>

- '정철이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역적의 변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오늘이야

   말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날이라 여겨 자신이 신문하는 관원이되어 일망타진 할 계책을 세웠다.' <선조실록 84권>
- '정철의 일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 듯하니 방치하는 것이 옳다.' <선조실록 54권>

 

이외에도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정철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정철이 기축년에 많은 그물과 함정을 만들었다.

정철이 기축옥사를 이용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고 전한다.

선홍복을 사주하여 이발, 이길, 백유양 등을 거짓으로 고변하게 하였다, 이는 정철 등이 꾸민 일이다

대단한 죄가 아닌데도 백성들이 연좌되어 감옥이 가득차고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 김천일의 상소

이는 모두 정철이 지휘한 것이다.

 

술을 좋아하여 늘 술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그때문에 실수도 많았던 천재시인 정철, 예술가의 피를 타고난 그는

타협할줄 모르는 고집센 성격으로 강원도 지역에 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등에선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동인의 수장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가며 대립각을 세우더니 서인의

수장으로서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세우는 음모를 꾸미고 기축옥사를 책임지며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해 버린다.

그의 주옥같은 문학작품속에 광기어린 이면이 감춰지고 있는데 기축옥사를 통해 정철의 다른 모습을 알수가 있다.

그런 정철도 결국은 선조의 눈밖에 벗어나고 결국엔 선조가 정철을 일컬어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 등으로 부르며, 선조실록에 험한 평가가 올라가고 내처지게 된다.

 

당시 정철과 언쟁을 벌이며 정철이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던 정철의 정적 동인 출신 이발의 식솔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

종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여 극적으로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광산 이씨 이발의 후손들은 지금도 명절이나 제사때 고기를

다지면서 '철, 철, 철' 하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다고 한다.

 

광기어린 천재 정철이 선조를 이용해 음모를 꾸미고 정적을 제거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 순진한 시인이 정치9단

선조의 계략에 이용당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정철이 기축옥사를 이용해 엄청난 살륙을 저지르고 정권을 잡은건

사실이다.  또한 전라도 지역에서 성장하며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닦고 결혼을 하고 관직에 들어선 정철이 음모로

시작된 거짖 역모와 기축옥사를 통해 호남지역의 인재들을 몰살 시키고 이후 호남이 역적의 땅이 되어 그쪽 인재들의

등용을 막았던 것은 자신이 살기 위한 몸부림 이었을까?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선각산~덕태산 라인 (중앙 뒤쪽)과 마이산 (우측)

 

 

 

 

마이산 우측으로는 운장산 ~ 복두봉 ~ 구봉산 능선이 보인다.

 

 

 

 

천고의 간흉 송익필

 

 

사진에 보이는 운장산은 송익필의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고, 구봉산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 이라고 한다.

송익필은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세우고 천여명을 죽게한 조선 최대의 사화인 기축옥사의 주범이라고도 할수가 있는데,

그의 아비 송사련 또한 송익필을 능가하는 간악한 자였다.

 

송익필의 아비 송사련은 서얼 출신으로 그의 어미 또한 서녀로 당시 중종때 좌의정이던 안당의 서매가 되니 촌수로는 

외삼촌 이지만 거의 노비신세 였다고 한다. 안당의 신세를 지던 그는 벼슬 욕심에 안당의 정적인 심정에게 붙어

미관 말직을 얻으면서 외삼촌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을 모함하여 신사무옥을 일으키는 만행을 자행한다.

결국 은혜를 입은 안당을 멸문지화로 만들고 자신은 그 공로로 당상관이 되었다.

 

그러나 30년후 안당이 복권되고 나서 그의 자손들이 송사련을 무고죄로 고발을 하게 되자 음모가 드러나고 이미

죽은 송사련은 관직이 박탈되고 송익필등 가족은 다시 노비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철과 친하게 지내며 뛰어난 문장가로 어떻게 신분상승을 꾀하던 그를 제지하는  동인세력은 그에게 눈의 가시였고

결국 전국의 서인세력을 규합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는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며 언변에 거침이 없던 정여립

으로 타겟을 잡고 치밀한 계획하에 전라도의 정씨가 왕이된다는 유언비어를 전국적으로 유포시키고 백성의 관심과

의심병 많은 선조의 관심이 이쪽에 쏠리게 만든다. 드디어 기축년에 황해도에서 왕에게 장계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시나리오에 천여명의 생목숨이 끊어지니 이게 바로 기축사화다. 그의 아비는 신사무옥을 일으키고

그는 기축사화를 일으키니 신분상승을 꾀하던 '쌍놈' 父子가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을 몰살시키고 국란을 맞아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동인백정 이라는 송강 정철 보다도 더 악질 간흉임에 틀림이 없다.

 

운장산은 그 악적의 이름을 버리고, 본래 이름인 주줄산으로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조망 (클릭)

 

 

 

 

가막마을과 독재봉

 

 

 

 

시원한 조망을 다시 편안한 능선을 걷는다.

 

 

 

 

정여립이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널찍한 바위가 말 등처럼 생겼다.

 

 

 

 

 

 

곧이어 천반산 성터가 나온다 (11시56분)

 

 

 

선조의 열등감이 빚은 참극

 

선조는 애초부터 왕의 자질이 많이 부족했는데 어릴적에 왕이 되어 당대 최고로 뛰어났던 천재 정여립에게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열등감은 이후 몇십년이 지나도 씻겨 지지가 않았는데, 당시 국내 정세가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좋지 않게 흐르자 변덕스럽고 의심병 많은 선조는 민심을 회복하고 정치적인 돌파구를 찾으려 고민하던

차에, 집권당인 동인을 누르고 정권을 잡으려는 서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뻔히 보이는 음모로 인해 시작된 역모를   

눈감아 주면서 왕권을 회복 하고자 정철을 앞세워 기축옥사를 단행 하였다.

 

또한 낙향한 정여립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 수백명의 대동계를 조직하여 전라도 지역에 상륙하여 전혀 대비가 없던

관군들을 물리치며 승승장구 하던 천여명의 왜적을 물리친 일이 발생하자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민심이 정여립에게

쏠리게 되자 불신감 가득한 새가슴인 선조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서인들을 부추켜 정여립과 동인들을 몰살하게 한다.

서인들의 뻔히 보이는 음모의 배경에는 이렇게 선조의 문제가 오버랩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정여립 역모사건 이전에 정철과 선조의 밀약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역사의 기록에는 없지만 양자간의 이해관계로 볼때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 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이어 2주 연속 우연한 동행을 하고 있는 바람재님 ~

 

 

 

 

성터에서 우리는 죽도쪽으로 길을 잡고 우측능선을 타고 간다.

 

 

 

 

풍경을 담고 있는 바람재님

 

 

 

 

바람재님이 서있던 자리에서 바라본 그림같은 풍경

 

 

 

 

잠시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정표는 성터에서의 이정표와 거리가 일치하지 않는다.

 

 

 

 

천반산 깃대봉과 지나온 능선길

 

 

 

 

뜀바위

 

 

 

 

뜀바위에서 바라본 건너편 봉우리

 

 

정여립이 말을타고 뛰어 넘었다고 하는 뜀바위다.

이정도면 정여립이 대단하다기 보다 그 말이 더 대단스러운것 같다.

 

 

정여립과 용마(龍馬)

 

정여립이 타고 다녔던 말이 용마 라고 하는데, 정여립의 이야기에는 그 용마의 전설도 함께 전해 내려온다.

그 말은 워낙 빨라서 정여립이 상두산에서 6km쯤 떨어진 김제 황산으로 활을 쏘면, 용마가 더 빠르게 달려가 그 화살을

물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살을 쏘았는데 용마가 화살을 물어오지 못하자, 정여립이 화가 나서 곧바로 그

용마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이 용마 엉덩이에 꽂혀있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크게 자책하며

그의 칼과 함께 용마를 묻었다고 하는데, 그 무덤이 김제시 금산면 쌍룡마을앞 논 가운데 있는 무덤 이라고 한다.

 

 

 

 

뜀바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래로 산행종착 지점인 장전마을이 보인다.

 

 

뜀바위에서 내려가기 직전에 시야를 가리는 잡목을 제끼고 능선 반대편의 가막골로 흘러가는 금강을 담았다.

 

 

 

 

굽이굽이 산을 끼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 천반산 산행의 가장 큰 즐거움 이다.

 

 

 

 

뜀바위의 건너편 봉우리 뒤로 운장산(왼쪽), 구봉산(오른쪽)이 숨어 있다.

 

 

 

 

능선 반대편 죽도를 돌아 흘러가는 금강과 마이산 조망

 

 

 

 

 

반대편 구량천과 장전마을

 

 

 

 

 

장전마을 지나 죽도쪽으로 흘러가는 구량천 풍경

 

 

 

 

대던산의 모습과 그 앞 죽도 사이를 돌아 가는 금강

 

 

 

 

뜀바위에서... 사진에 안보이는 오른쪽은 구량천 왼쪽은 대덕산과 금강

 

 

 

 

뜀바위를 내려가면서...만난 바위손

 

 

 

 

뜀바위 건너편 봉우리에서 방금 지나온 뜀바위를 바라보며

 

 

 

 

뜀바위 건너편에서 바라본 금강

 

 

 

 

 

멋진 비박쟁이 바람재님

 

 

 

 

하산길에 바라본 죽도

 

이 송편모양의 작은 섬이 죽도 인데... 정여립이 역모를 하고 이 작은 산에 숨을 이유가 없는것이다.

그는 이곳에 단풍놀이 왔다가 암살을 당하고 조선시대 최대 음모사건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산을 하면서 바라본 죽도의 흉물 (명물?)

 

 

 

죽도의 슬픈 상처는 명물이 되고

 

버스에서 회장님이 저곳을 죽도의 명물 이라고 설명을 하신다.

원래 죽도는 오메가 Ω 형태의 섬같은 곳 이었다.

수려한 바위산 절벽을 맑은 물이 휘돌아 흘러 마치 섬과 같았던 곳 이다. 용담댐이 만들어지기 전 이야기다.

 
그런데 70년대 중반 물줄기 일부를 돌려 논을 만들려고 병풍바위 중간을 폭파하여 지금의 폭포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구량천이 곧바로 폭포 아래로 흘러가게 되면서 물길이 바뀌어 죽도를 돌아 흐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논만들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인간의 욕심이 남긴 결과만이 죽도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훼손한채 영원히 복구할수 없는 흉물스런 절단면이 되어 죽도의 슬픈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용담댐 건설 이후 다 떠난 죽도에 민가 한채가 보인다.

사진에 보이는 곳이 합수부 인데... 구량천과 연평천이 합수하여 죽도 반대편으로 돌아 내려갔었는데 오른쪽 구량천에서

오는 물줄기의 맥이 죽도폭포로 다 빠져 버리고 조금만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볼수가 있다.

 

 

 

 

죽도 합수부와 건너편 대덕산

 

 

 

 

죽도폭포가 있는 상죽도쪽 풍경

 

 

 

 

파괴된 병풍바위로 인해 죽도폭포 라는게 만들어 졌다.

이 끊어진 절벽 때문에 장전마을 사람들은 ‘혈맥이 끊겼다’고 말한다.

사람 욕심 때문에 훼손되는 자연산천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말인데, 이렇게 한번 훼손된 자연은 복구 할수가

없으니 그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세월은 흘렀지만 지금도 자연을 회복불가능한 상태로 훼손하는 이런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죽도 입구의 파괴된 병풍바위에 도착하여 일단 산행을 마치고 야유회 모드로 전환한다.

 

 

 

 

 




 

 

 

 

 

 

 

 

 

 

 

 

냇가 한쪽에 그늘막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부침개도 부치고, 여름날 보양식 백숙에 갈비까지 땀흘린 여름 산행후에 즐기는 야휴회의 즐거움 이다.

 

 

 

 



 

 

 

 

 

 

 

 

 

 

 

 

 

 

 

 

 

 

시원한 막걸리 한잔에 갈증을 털어 버리고, 산행후에 허기진 배를 맛난 음식으로 채운다.

이날 음식을 준비하는데 고생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술자리 이후 물놀이를 하면서 방수카메라로 몇컷 담았는데 화질이 좋지 않다.

죽도폭포앞 구량천의 수심이 깊어 냇가를 가로질로 보조자일을 설치 하고 수영으로 열심히 팔다리를 저어서 푸짐하게

먹은것을 소화 시켰다.

 

 

 

 

 

물놀이를 마치고 냇가 길을 따라 장전마을에 주차한 버스로 돌아오는 길

우측능선은 오늘 진행한 산행길 이다.

 

 

 

 

걸어오다가 다시 물속에 시원하게 몸을 담그신 회원님들

 

 

 

 

구량천 냇가엔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장전마을 입구로 돌아와 하루 일정을 마무리 한다. (16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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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le of Inisfree-Celtic Woman

 

천반산 - 죽도 지도

 

산행코스 :: 천반산휴양림 - 천반산 깃대봉 - 전망바위 - 성터 - 뜀바위 - 죽도폭포 - 장전마을 (약3시간)

산행일시 :: 2011년 7월31일, 금강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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