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우기가 끝이 나고 본격적으로 폭염이 시작되는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여름 산행지로는 역시 시원한 계곡이

있는 산이 최고 아닌가 싶다. 그것도 이렇게 더운날엔 가능하면 산이 크게 높지 않은게 좋은데, 작은 산에 큰

계곡이 있을리 만무하니 그런곳을 찾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몇발짝만 걸어도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고 

등산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자 마자 땀이 흘러내리는 날에 계곡을 버리고 산으로 가는것은 어찌 보면 유혹과의

한판 승부 일지도 모른다. 몸은 산길을 걷고 있지만 머리속엔 온통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환청처럼 오락가락 하니

말이다.

 

 

7월의 정기산행지로 예정된 금원산과 기백산은 장쾌한 조망으로 유명하지만, 여름날엔 시원한 계곡으로 유명한

곳이다. 황석~거망~금원~기백의 물이 흘러내리는 용추계곡이 용추폭포와 함께 유명하지만 또한 오늘 산행지로

예정된 금원산의 유안청계곡과 지재미계곡 또한 아름다운 폭포와 시원스런 물줄기로 유명한 곳이다. 유안청 계곡

으로 올라 지재미계곡으로 내려올수도 있지만 계곡 하나를 버리고 오늘은 기백산을 돌아서 금원산 까지 종주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용추계곡 건너편에 일망무제의 시원스런 황석산이 있다면, 이쪽엔 남자의 산 기백이 있기

때문이다. 지장암에서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지재미골은 다음번에 현성산과 함께 다시 찾으면 또 좋을것 같다.

 

 

뉴스에서 폭염주의보가 내리던날, 천삼백 고지의 기백산으로 오르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숲길을 걷기 때문에

햇볕을 직접적으로 쬐이지는 않았지만, 무더운 날씨는 그 자체로 사람들을 지치게 하였다. 굳센 산꾼들이 더위에

기운을 잃고 '안보이면 그냥 내려간줄 알아라' 라는 말들을 해가며 스스로에게 보험을 걸어 놓고 아득히만 보이는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결국 종주팀 11명 전원이 예정된 코스를 늦지 않게 돌아 내려오고 온종일 걸어가며

마음속에 그려보았을 유안청계곡의 시원한 물에 풍덩뛰어들고 나니 이날 산행길의 고통이 다시 망각속으로

사라지며 다음 산행지를 기약하게 된다.

 

 

 

여행과 산행 7월 정기산행

선녀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출발. (10시32분)

무더운 날씨에 코스는 2개로 나누어 기백산~금원산 종주팀과 금원산 또는 야유회 팀으로 나눠 진행을 한다.

 

 

 

 

선녀담

 

옛날 천상의 세 선녀가 이곳에 목욕을 하러 내려왔다가 올라갈 시간을 놓쳐서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곳 으로 여자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소원을 빌면 아기가

생긴다는 전설이 있는 곳 이기도 하다. 하산후 선녀담에 뛰어 들어 보니, 바닥이 평평한 통암반으로 되어

있는데 시원하게 물놀이 하기는 그만인듯 하다.

 

 

 

 

금원산 휴양림을 따라 가다가 기백산과 금원산 갈림길에서 종주팀은 기백산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도상 하산길에 계곡을 만나야 시원하게 알탕을 할수가 있어서 이며, 무더운 날이라 금원산으로

먼저 올랐을경우 먼길을 돌아가야 하는 심리적인 문제가 큰 부담이 될 수 있어서 이다.

 

 

 

 

기백산을 향하여 임도를 오르는 도중 휴양림 산장앞 지계곡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지역이라 그런지...

휴양림내 임도구간을 다들 빠른걸음으로 오르는데 초반에 오버페이스가 되었는지 이후 산행을 하면서 힘들어 하는

분들이 생겼다.

 

 

 

 

이렇게 임도를 잠시 걷다가 위와 같은 이정표가 나오면서 기백산으로 향하는 길은 넓은 임도를 버리고

좁은 산길로 들어선다. (10시55분)

 

 

 

 

임도를 버리고 산길을 30여분 올랐을때 기백산정상이 살짝 보이는데 아득하기만 하다.

다들 땀을 줄줄 흘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여름산행에 힘들어 한다.

원래는 금원산만 오르고 남는 시간에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놀기로 하였는데, 금원에 와서 기백을 안보고

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종주팀이 구성되고 11명의 멤버가 무더위에 종주길에 올랐다.

 

 

 

 

금원산 휴양림에서 기백으로 오르는 길은 내내 숲길로만 되어 있고, 조망터를 찾을수 없다.

지루하고 가파른 오름이 정상까지 계속되니 다들 재미없는 길 이라고 하는데, 전에 이 길로 하산을

했던 분의 후기에서도 참으로 재미없는 길을 따라 내려왔다는 글을 읽었던게 생각난다.

그래도 이길을 오르면 멋진 조망과 시원한 계곡이 기다리고 있다고 서로 위안을 삼으로 기운을 낸다.

 

 

 

 

한참을 땀을 흘리고 오르니 임도를 만난다. (11시40분)

 

 

 

 

등로는 임도를 가로질러 본격적으로 가파른 정상을 향한 산길로 이어진다.

 

 

 

 

무더운 날씨속에 흘리는 땀만큼 다들 힘들어 한다.

충박님이 준비한 죽염을 막걸리에 타서 한잔 들이키니 기운이 나고 방전된 몸이 살아나는것 같다.

 

 

 

 

끝도 없을것만 같은 길이 어느덧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며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능선에 도착을 한다. (12시57분)

이정표가 있는 이곳은 헬기장으로 추정되는 너른 공터로 기백산 정상은 이곳에서 200m 옆에 있다. 

 

 

 

 

공터에서 바라본 기백산 정상 (좌)과 책바위 (우)

 

 

 

 

기백산 (13시1분)

 

기백산 정상엔 수백마리의 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아 다니고 있다.

 

 

기백산의 유래

 

기백산의 이름은 이십팔수 별자리의 하나 이며, 청룡이 다스리는 동쪽의 일곱번째 별자리인 箕와 관련이 있다.

음양 가운데 양(陽)인 남성적인 산으로 보아 흰 것을 의미하는 백(白)자를 써 기백(箕白) 이라고 한다.

 

반면에 같은 줄기 위에 솟은 금원산은 음(陰)인 여성적인 산으로 검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검은산이 변형이 되어

금원(金猿)을 쓰고 있다. 이렇듯 같은 산줄기에 있는 기백과 금원은 양과 음의 성질을 갖고서 우주의 기본원리 라는

음양의 이치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기백산의 옛 이름은 지우산(智雨山)인데 거창, 함양 지역에서는 이 산의 날씨 변화에 따라 비가 올지 안올지를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기백산은 크고 작은 계곡과 지리에서 덕유까지 시원스럽게 보이는 아름다운 조망으로 유명한데 오늘은 개스로

인해 조망을 제대로 즐길수 없음이 조금 아쉽다. 기백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능선 반대쪽의 용추계곡(지우천)으로

흘러  굉음을 내며 포효하는 용추폭포와 함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추천감사

 

 

 

 

황석산 (왼쪽 M자)과 거망산 사이로 괘관산(대봉산)이 보이며 거망산 우측으로 백운산과 장안산이 보인다.

 

비온뒤 이틀이 지났을 뿐이건만... 폭염주의보가 내릴정도의 무더운 날 이어서 그런지..

개스가 끼어 가시거리가 좋지가 않아 멋진 조망을 할수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기대했던 지리산은 보이지 않고 용추계곡 넘어 바로 앞에 있는 황석산~거망산도 흐릿하기만 하다.

지난해 겨울에 올랐던 황석산에서의 아름다운 조망 사진을 참고로 몇장 올려 본다.

 

 

 

 

참고 :: 황석산을 오르며 바라본 지리능선

 

 

 

 

참고 :: 황석에서 거망산으로 가며 바라본 기백~금원 줄기와 남덕유~향적봉 까지의 덕유능선

 

 

 

 

참고 :: 황석산에서 바라본 기백산 ~ 금원산 (2010년 12월 촬영)

 

 

 

 

능선을 따라 지리산 반야봉 같은 엉덩이 모양의 금원산이 멀리 보이고

금원산 뒤로 덕유능선의 삿갓봉(좌측)과 무룡산(우측)이 보인다.

기백~금원 능선 왼쪽으로는 월봉산과 누룩덤을 지나 남덕유까지 조망이 되고 있다.

 

 

 

 

기백산 정상석 옆 돌탑 꼭대기에 기백산정상 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10여분 정도 후미를 기다려 책바위 아래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다들 맛난 도시락을 준비해 왔지만 특히 해송님이 이 더운날에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올라와서

지난밤에 직접 잡았다는 빠가사리를 손질해와서 특선 매운탕을 끓여 주시는데 이 더운날에 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면서 흘린 땀과 정성, 그 수고스러움과 더해 그 맛 또한 비교할수 없는 별미가 아닐수 없었다. 

 

 

 

 

40여분간의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식후에 책바위에 올랐다.

 

 

 

 

책바위에 올라 바라본 기백산 정상

 

 

 

 

책바위(누룩덤)의 기암

 

 

 

 

책바위 정상에는 바위 사이에 20여명 가량 식사를 할수 있는 너른 바위가 있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와 보니 시원한 조망이 펼쳐져 있는 곳에 다른분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계신다.

 

 

 

 

정상 등로는 책바위 앞에서 왼쪽으로 우회하도록 되어 있는데, 산을 오르는 내내 조망도 없는 지겨운 숲속 육산길을

걸었던 일행들은 책바위를 넘어서 진행을 한다. 책바위를 넘어 전방 능선에 또 다른 바위군이 보인다.

 

 

 

 

조두산

 

갈수록 날이 흐려지고 연무가 짙어져 가시거리도 짧아진다. 

 

 

 

 

 

책바위를 넘어가며 조망을 하고 있는 반보거사님

 

 

 

그리고 반보거사님이 남겨준 흔적 (반보님 作)

 

 

 

 

지나온 책바위 암릉과 뒤로 기백산 정상

 

 

 

 

금원산을 지나 이어지는 현성산을 당겨 보았다.

저기까지 가면 좋으련만 오늘은 날씨도 시간도 좋지 못하다.

 

 

 

 

책바위에서 바라본 조망도 (클릭)

 

왼쪽으로는 거망산에서 월봉산을 거쳐 남령지나 남덕유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이고...

중앙에선 능선길따라 멀리 금원산이 보이며 산길은 이후 왼쪽으로 수망령 따라 월봉산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현성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백산 책바위 (14시10분)

 

달리 누룩덤 이라고 불리우는 이 바위는 능선에 넓고 평평한 바위를 책을 놓듯 쌓아 올려논듯 하다.

신선들이 바둑두고 놀다갔다는 전설속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누룩덤과 썩은 도끼자루의 전설

 

이 고학에 큰 태 산이, 기박산(기백산)이라 카는 태산이 있었읍니다. 그 태산에 한 봉우리 가만 그 누룩봉이라 카는 봉이에, 두 봉이 있읍니다. 그 누룩배미(누룩봉)가 안 누룩배미, 바깥 누룩배미 카는 돌이 포개져가지고, 옛날에 누룩짝겉이 포개진 데가 있어요. 그 있었는데 그게서 옛날에 신선이 놀고간 증표가 있어요. 바둑도 뜨고 머어 돈도 치고 한 징표가 어 어슴하이 있는데.

그래서 그 신선 놀고 할 때 이 산꼴에서 어느 분이, 옛날에 어느 분이 그 근방꺼전 나무 하로 갔던가, 나무를 하다가 그 노인네들이 놀고 있어서 그 올라가서 과연 본께 참 바둑을 뜨고 있어서, 도치를 가져가서 그 노인들 놀고 있는데 한참 디다 보다 보닌께 도치자루가 팍 썩어 니라 앉아서, ‘그 저 이 어떻기 돼서 이렇기 됐노?’ 싶어서. 그래 참 노인들은 그러구러 헤여지고 자게는 참 집으로 와서는, 자게 집은 어느 새 쑥대밭이 되삐리고 없었는 기라. 그러니 그새 몇 백년이 흘러 갔던지 자게 집은 쑥대밭이 되고 자게 손들도 모도 어데로 헤어짔는지 요랑도 몬 하기 되가지고 있었는데... (출처 인터넷 :: 마을 주민 노인의 육성)

 

 

 

 

 

아까 책바위에서 보았던 두번째 암릉에 올라선 일행들

두번째 암릉도 등로는 왼쪽으로 우회 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암릉을 택해 올라선다.

겨울에는 암릉으로 오르는데 크게 주의해야 할 구간이 하나 있으니 가능하면 겨울에는 우회하는게

좋을것 같다.

 

 

 

 

두번째 암릉에서 바라본 기백산 책바위 (누룩덤)

 

 

 

 

오랫만에 산행을 같이한 길치

 

 

 

 

우회로를 택한 구름형이 등로와 합류 지점에서 이쪽을 사진에 담고 있다.

 

 

 

 

두번째 암릉과 뒤로 책바위 암릉을 당겨 보았다.

 

 

 

 

잠시후에 왼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난다.

직진은 금원산 가는 길이고, 왼쪽에 리본이 많이 매달려 있는곳은 시흥골을 통해 용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이다.

 

 

 

 

등로에 피어 있는 나리꽃

 

기백산에 더덕이 많다고 하더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능선길 등로에 작은 더덕줄기가 몇개 보인다.

금원산 산행을 하신 분들도 심지어 산죽밭에도 더덕이 하늘에서 씨를 뿌린듯 많다고 하니 기백산에 더덕이 많다는

옛 전설이 지금도 그렇다고 하더니 정말 사실인듯 하다.

 

 

 

 

잠시후 수망령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난다. (14시54분)

임도는 이곳 능선까지 올라와서 차를 돌릴수 있는 너른 공터를 능선에 만들어 두고 있다.

 

 

 

 

다시 20여분 진행을 하니 헬기장이 나오고 전방에 금원산 동봉이 보인다. (15시16분)

 

 

 

 

갈림길 정자로 내려가며 바라본 금원산 동봉

정상은 동봉에서 왼쪽으로 250m 를 가야만 한다.

 

 

 

 

정자에 도착을 하니 다들 이곳에서 바로 내려간다고, 오르려거든 배낭을 두고 가볍게 다녀오라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위 봉우리는 금원산 정상이 아닌 동봉이며 등로는 동봉에서 유안청계곡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유안청 폭포까지 3km 라고 되어 있고, 동봉에서는 2.1km 인데

동봉은 완만한 경사로 가볍게 오를수 있으니 동봉에 올라 하산을 하는게 좋을듯 하다.

 

후미로 늦게온 충박님 일행이 이곳에서 새로 만들고 있는 나무 계단을 따라 하산을 시도 하였으나 중간에

길이 없어져서 다시 동봉으로 올라와 하산을 했다고 한다.

 

 

 

 

동봉에 오르며 바라본 기백산은 아득하게만 보인다.

 

 

 

 

동봉정상 (15시25분)

 

금원산 정상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250m를 더 가야 한다.

 

 

 

 

금원산 (15시29분)

 

 

금원산의 유래

 

금원산(金猿山)이란 이름은 옛날 이 산에 금빛 원숭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원숭이가 하도 날뛰는 바람에

한 도승이 원숭이를 잡아 원암(猿岩)이라는 바위에 가두어 버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한 금원산의 원래 이름은 '검은 산'이었다고 한다.

옛 고현의 서쪽에 자리하여 늘 산이 검게 보인다 하여 '검은 산'으로 부르다가, 그 검은 산이란 발음이 변하여

마침내 '금원산'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하는 유래도 같이 전해지고 있다.

 

 

 

 

 

금원산에서 바라본 기백산

 

대충 육안으로 보기엔 기백산이 더 높아 보이는데 정상석에 씌여 있는 높이는 금원산이 몇미터 더 높다고 하니

이해할수 없다. 왼쪽으로 방금 지나온 금원산 동봉이 보이고 그 아래로 배낭을 두고온 정자가 지붕만 보인다.

 

 

 

 

금원산에서 바라본 희미한 황석산 ~ 거망산

 

 

황석산은 정유재란때 황석산성을 지키며 20배의 왜군과 맞서 싸우다 결국 백사림 이라는 아군 장수의 배신으로

함락이 되자 많은 부녀자들이 살아서 왜적들의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벼랑으로 뛰어내려 그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산 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 바위를 피바위 라고 부른다.

 

거망산은 6·25 때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의 활동무대로 알려져 유명해진 산이다.

정순덕에게 잡힌 국군 1개 소대가 무기를 빼앗기고 목숨만 건져 하산한 사건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용추계곡을 끼고 있는 황석-거망-금원-기백 이렇게 네개의 큰 산은 종주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금원산에서 바라본 월봉산

 

 

금원산의 능선은 서쪽으로는 수망령을 넘어서 월봉산~남령~남덕유로 이어지고, 동북으로 벋어나간 능선은

지재미골을 감싸안은 연화봉(서문가바위)을 거쳐 현성산(955m)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서봉을 거쳐 현성산까지

종주하여 상천 마을로 내려설 수도 있고, 반대로 수망령을 넘어서 거망산, 황석산으로 종주를 할수도 있다.

 

 

 

 

 

금원산에서 바라본 기백산~황석산~거망산 (왼쪽부터) 파노라마 (클릭)

 

 

 

 

동봉으로 돌아오니 정자에서 쉬고 계시던 분들이 모두 올라오셨다.

배낭을 정자에 두고 뛰어 왔는데, 해맞이님이 내 배낭을 앞에다 메고 올라 오셨다.

 

 

 

 

금원산 동봉에서 멋진 종주팀들

 

 

 

 

동봉에서 바라본 안부에 있는 정자와 기백으로 가는 능선... 그리고 뒤로 황석~거망 라인

다들 기백부터 올랐으니 금원으로 넘어올 생각을 했지~ 이 날씨에...

금원부터 올랐으면 절대 저 능선끄트머리에 희미하게 보이는 기백으로 가지 못했을 거라고 말들을 한다.

폭염주의보가 내린날 무더위 속에 땀은 비오듯 흐르고... 아마 금원부터 올랐으면 다들 지나온 계곡의

물소리만이 머리속에 맴돌고, 아마 다들 계곡으로 바로 내려갔을것이 분명하다.

 

 

 

 

동봉에서 바라본 금원산 정상

뒤로 남덕유 ~ 삿갓봉 ~ 무룡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하산하며 뒤돌아본 금원산

 

 

 

 

하산길 조망터에서 바라본 현성산과 연화봉(서문가 바위)

아마 가을에 왔으면 금원에서 저곳까지 돌아서 내려섰을 것이다.

 

 

현성산의 유래

 

그렇게 높지 않게 보이지만 제법 높이가 있는 현성산(玄城山 965m)은 멀리서 보면 시커먼 성채처럼 보인다고

해서 현성산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가바위(연화봉)의 유래

 

왼쪽으로 있는 서문가바위(연화봉)는 중국의 5대 복성 중 하나로서 감음현을 식읍으로 받아 입향한 서문씨(西門氏)

에 얽힌 전설이 있으며, 또는 임진왜란 때 이 바위 아래 석굴에서 서씨와 문씨 성을 가진 두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함께 피난살이를 하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아비가 서씨인지, 문씨인지 알수 없게 되자 두 남자의 성을

모두 따서 서문가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산중 조망을 즐기는 일행들

 

 

 

 

하산중 - 저 멀리 보이는 기백산

 

 

 

 

산아래 위천면 일대와 왼쪽으로 보이는 현성산, 그리고 오른쪽으로 조두산 

이렇게 크고 둥글게 원점 회귀가 가능하다. 조두산~기백산~금원산~현성산...

 

 

 

덕유산에서 내려와 금원산을 경유해서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의 이동경로를 찾아보는 중에 6.25때 있던 거창의

양민학살 사건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믿을수 없는 진실과 그리고 최근에 이루어진 대법원 판결까지...

감악산 아래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이때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 이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우리가 일본에 정신대 할머니들 배상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나 있는가?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신원면(神院面) 일대에서 있있던 양민 대량학살 사건. 6·25 당시에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는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던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연대장 오익균(吳益均) 대령,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것으로, 같은해 3월 29일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이 당시 부산에 피난중이던 국회에서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1951년 2월 11일 신원면에 진주한 제 3대대는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약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 경찰 및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낸 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준다며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 집단학살 한 뒤 휘발유를 뿌려 시체도 찾을수 없게 불태워 버렸다. 이같은 사건은 10일 대현리, 덕산리 일대에서도 자행되었다. 이때 학살된 사람은 경찰 추산으로도 6백명에 이른다. 학살을 마친 제 3 대대는 학살자의 숫자를 187명으로 줄여 공비 및 통비분자들을 소탕했다는 일일전과를 연대에 보고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망자는 719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출신 국회의원인 신중목 의원의 끈질긴 추적과 재조사에 의해 결국 밝혀진 이 사건은 51년 7월 17일 대구에서 열린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이어 12월 26일 선고공판에서 김종원 징역 3년, 오익균 무기징역, 한동석 징역 10년, 이종대 무죄를 선고하여 거창사건의 책임추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년만에 모두 석방되고 오익균, 한동석은 현역으로, 김종원은 경찰 고위간부로 재기용되었다고 한다.

 

2008년  5월 29일, 거창양민학살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지 8년 만에 대법원 최종판결이 있었다. 그 결과 '소송을 낸 시점에 이미 소멸시효가 지나 국가에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원심을 확정했다. 유족들은 20만원씩의 국가보상을 요구했지만 사건책임자들을 51년 12월 군법회의를 통해 무기징역 등을 선고하였으며, 그 후 3년이 지난 54년까지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단돈 20만원 받기위해 8년 동안 소송을 하였을까?

 

결국 우리나라에서 국군이 자행한 범죄도 시효가 만료되었다며 국가가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는데, 법 조항의 해석을 떠나서 과연 이런 우리가 일제시대의 일제의 정신대 할머니등의 범죄에 책임을 지라고 일본에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  그들이 1엔 판결을 내며 우리를 조롱하고 모독해도 할말이 없는 부끄러운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수 없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배경에 대한 야사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공식적 발표는 위와 같고,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한 사병의 증언으론 아래와  같다.

 

국군 11사단의 1개소대가  공비 토벌 작전으로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마을 뒷산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낮에  000 사병이 속한 소대가  마을뒷산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개 소대 전부 35명이 마을로  감을 따먹으러

대낮에 내려 간지  약 30분후 마을쪽에서  따콩  따콩 하는 인민군(빨치산)의 아카보 소총  소리를 듣고  주둔하던

타 소대원과  마을로 내려가  보니...(본인은 설사가 나서 감을 따러 가지 못하였다고 하였음)

 

소대원 전부가 감나무 아래 총맞고 즉사 했다고 한다. 가지고 갔던  엠원소총이나 카빈 소총을  감나무에 기대어놓고

감을 따먹으러 모두 감나무로 올라갔다가, 설사로 감따러 가지 못한 000사병을 제외하고 몰살 당하였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촉발되어  모든  마을의 주민을  국민학교에 몰아넣고, 심사후  경찰,공무원 가족을 제외한  주민을

모두 사살한 사건으로,  그 죽은 주민중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조카가  한명 있어  그걸로 인해 온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인터넷)

 

 

 

 

바위틈에 단단히 뿌리를 심고 바위와 한몸이 되어 살아 있는 소나무의 놀라운 생명력

 

 

 

 

동봉에서 부터 정확히 1시간을 내려서니 유안청폭포에 도착을 한다.

오른쪽으로 시원한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는 폭포는 유안청 1폭포로 80m에 달하는 큰 폭포다. 

이곳에 오니 오늘 함께와서 다른 코스로 하루를 보낸 일부 회원님들이 보인다.

 

 

 

 

일단 동행하던 반보거사님 배낭을 냅다 벗어 던지고 폭포로 달려간다.

온종일 흘렸던 땀과 뜨거운 몸이 비로소 차분해 지는 순간이다.

이 시원함을 생각하며 폭염속에 땀에 절어가며 먼 길을 왔으니 이 순간이 얼마나 반가운가.

 

 

 

 

 

 

유안청폭포

 

유안청 1폭포 라고 되어 있고, 바로 아래 긴 와폭으로 되어 있는 유안청 2폭포가 있다.

직폭과 와폭으로 약 2백미터에 걸쳐 흘러내리는 유안청 폭포는 부근에 있었던 가섭사라는 절 이름에서 비롯하여

예전엔 가섭연폭 이라 불렀으며 골짜기도 가섭동계곡 이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지방향시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방인 유안청이 자리하면서 유안청계곡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유안청 2폭포는 이 다리 밑으로 길게 늘어진 와폭 이다.

 

 

 

 

 

 

유안청 2폭포

 

와폭이 아주 길어서 등로에서는 한장으로 담을수 없다.

 

 

 

 

유안청 계곡과 금원산 자연휴양림의 이모 저모 

01

02

03

 계곡을 건너는 멋진 다리

숲속의 무대를 꾸미는중 

시원한 계곡가에서 쉬고 있는 피서객들 


 

 

 

 

 

 

 

 

 

 

 

 

 

 

 

 

자운폭포

 

자운폭포는 붉은색 화강암반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물이 마치 노을이 비친 구름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폭포와 소들이 많은 금원산의 유안청 계곡은 참으로 시원하고 아름답다.

이태가 가 쓴 남부군에 보면 "기백산 북쪽 기슭 어느 무명골짜기에 이르러 오백여명의 남부군들이 남녀가 모두

부끄러움도 잊고 옥 같은 물속에 몸을 담그고 알몸으로 목욕을 하였다"는 곳이 바로 이 유안청계곡이며 그만큼

수량이 풍부한 곳이다.

 

영화 남부군을 보면 실제로 수백명의 남녀 빨치산들이 계곡에 뛰어들어 홀딱벗고 목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책속의 실제 장면은 이곳 유안청 계곡 이지만 영화는 용소로 유명한 장안산의 덕산계곡에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유안청 계곡에서 목욕하는 500명의 빨치산들

 

때는 이미 한여름에 접어들어, 소백준령을 넘고 넘어 이동하는 긴긴 대열은 땀에 젖어 미역을 감은 듯했다. 모두가 겨우내 걸쳐온 동복차림 그대로였다. 그냥 동복이 아니라 그것만 걸치고 눈속에서 뒹굴고 자고 하던 투박한 겨울차림으로 폭양의 산악을 달리는 것이니 더울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산악지대에서는 밤낮의 일교차가 심해서 이슬을 맞으며 노숙하자면 두꺼운 옷을 아주 벗어버릴 수도 없었다. (중략)

 

이 때 315부대가 승리사단과 동행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남한 빨치산의 최대 최강이라 할 5백여의 대병력이 그 골짜기에 집결한 셈이었다. 골짜기 어귀 산등성이에 보초가 배치되고 교대로 시냇물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더위도 더위려니와 실로 9개월 만의 목욕이니 그 상쾌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출처 :: 남부군 - 이태)

 


두꺼운 동복을 입고 9개월간 목욕을 못한채 덕유산에서 남부군으로 재편성되 우리가 아는 산길인 남령~월봉산~수망령~

기백산을 거쳐 금원산 유안청계곡에서 계곡물에 뛰어들었을때의 시원함이 상상이 된다.

 

영화 남부군에서 빨치산은 젖으나 마르나 24시간 신발을 신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유안청 계곡에서는 군화를

벗어 던지고 거리낌없이 계곡물로 입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만나 남녀 빨치산들이 부끄러움도 잊은채 

목욕하다 말고 벌떡 일어서서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의 촬영지는 장안산 덕산계곡 이지만 위 사진의 장소와 매우

흡사하기도 하다.

 

영화 남부군 밖에서 이태(안성기)는 병원부대를 따라 변산지구로 간 박민자(최진실)을 끝내 만나지 못했을까?

 

 

 

 

좀 더 내려가니 약초산행을 즐겼던 몇분이 멋진 곳에서 물놀이를 하고 계신다.

일단 나도 역시 배낭을 내려놓고 옷 입은채로 뛰어 들어 온종일 흘렸던 땀을 씻어낸다.

 

 

 

 

다시 배낭을 메고 조금 더 내려가니 오전에 산행을 시작하면서 담아 두었던 선녀담이 보이고..

오늘 종주산행 하느라 고생했던 일행들은 물에 다시 뛰어들어 남은 열기를 식힌다.

보름달이 뜨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다는 선녀담에 대낮이라 그런지 선녀는 한명도 안보이고

땀에절은 나무꾼들만 몸을 식히고 있다. (17시28분)

 

 

 

 

근처의 대밭골 이라는 식당에서 뒤풀이를 하고 나와 바라본 길건너 황석산에 노을빛이 감돈다. (19시16분)

 

 

 

 

131

배경음악 :: Serenade To Summertime

 

기백산 ~ 금원산 원점회귀 등산지도

 

산행일시 :: 2011년 7월17일 일요일, 여행과산행 7월 정기산행

산행코스 :: 매표소 - 복합산막 - 기백산 - 동봉 - 금원산 - 동봉 - 유안청폭포 - 주차장 (약14km/식사포함 6시간 30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