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7월의 첫 주말. 전날 벌곡천에서의 정기모임을 하면서 마신 더덕주의 향기가 몸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버스에 올랐다. 도명산, 흔히 낙영산과 엮어서 산행을 하는 곳 이지만, 무더운 여름날에 길게 산을 타서 좋을게 없을것

같기도 하고 여름날 산행은 늘 짧게 줄여서 그 시간만큼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데 더 할애를 하는지라 이번에도 식후에

컨디션을 봐서라는 단서를 두고 길게 낙영산과 가령산을 돌아오는 종주코스를 선택할 것인지를 미뤄두고 산행을 시작한다.

 

 

다음날 전국적인 비가 예보되어 있는 토요일. 신령님이 보우하사 비없는 날에 산행을 해서 좋다고 하였는데, 산길은 안개가

가득하니 도저히 제대로된 조망을 할수가 없고, 마치 습식 싸우나에서 운동을 하는듯 습하고 더운 날씨에 바람한점 없는

산길은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서 계곡을 그리워 하게 만든다. 정상에서도 역시나 안개로 인해 조망을 할수 없으니 식후에

바로 하산을 결정하고 산을 내려오다가 온종일 머릿속에 맴돌던 시원한 계곡을 드디어 만나게 되니 비로소 땀에절은

뜨거운 몸을 식힐수 있게 된다.

 

 

우암 송시열이 즐겨찾았다는 화양구곡을 감상하며 과거 선비들의 흔적을 떠올려 보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산행을 마치고

후기를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면서 다시 만나게된 교과서 밖의 송시열과 서인, 노론파의 문제에 대해 괴리를 느끼고 

이틀밤을 새우며 그들의 행적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고민을 하게 된다. 과연 산행기로써 어디까지 글을 써야만

할까. 송시열과 화양구곡 그리고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대해 언급을 하자니 위로는 임진왜란부터 아래로는 조선망국까지

그들과 연관이 되어있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에 의해 조작되는게 다반다인 가운데 그들에 의해 잘못된 역사를 배운 나는

객관을 가장한 또 다른 주관적인 시각으로 송시열과 노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부끄러운 조선중,후기의 역사속에 감춰진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다만 나의 산행기가 종이 주가 되어 역사기행문으로 변질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팔각정이 있는 화양동 계곡 주차장에 내려 단체사진을 찍고 산행을 시작한다. (9시57분)

짙은 안개가 자욱히 내려앉은 산을 바라보는 마음이 안타깝다.

부디 언제적 그랬던 것처럼 점심 식후에 바라본 하늘이 파랗게 변해있기를 바랄뿐이다.

멋진 조망을 볼 수 있도록..

 

 

 

 

수중보를 쌓아 수위를 유지하면서 계곡을 보전하려고 하였다.

 

 

 

 

운영담

 

화양구곡중 제2곡 으로 제1곡인 경천벽에서 400m 가량 진행하면 맑은 물이 소를 이루고 있는데,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雲影潭) 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화양구곡중 제1곡은 화양동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지나고 없고, 9곡 파천(파곶)은 학소대 넘어

등산코스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 들르지 못했다. 나머지 2곡과 ~ 8곡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던 양반님네들의 한시를 통해 비교를 해보기로 한다.

 

 

운영담  - 권진응 -

 

二曲澄潭抱碧峰      이곡이라, 맑은 못 푸른 봉우리 감싸 안고

天雲終古倒寒容      하늘의 구름 시원스레 자태 언제나 거꾸로 비치네.

高山漠漠靈源秘      높은 산은 막막하고 영험한 발원지는 숨겨져 있는데

流水桃花渺幾重      흐르는 물결에 복숭아꽃 아득히 흘러가네.

 

 

 

 

 

화양구곡 기념비

 

 

 

 

송시열과 화양구곡

 

송시열과 화양동(華陽洞)과의 인연은 매우 깊다. 문헌상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볼 때 송시열이 화양동을 처음 찾은 것은 1651년(효종 2)이었으며, 1666년(현종 7) 화양동에 계당(溪堂)을 짓고 본격적으로 거처한 이래 1688년(숙종 14) 4월 마지막으로 화양동을 떠날 때까지 무려 23번이나 왕래하며 기거하였다. 송시열은 암서재(巖棲齋)에 거처를 마련한 이후 화양동 곳곳에 명나라에 대한 존모(尊慕)의 자취를 남겼다. 바위마다 ‘만절필동(萬折必東)’·‘비례부동(非禮不動)’ 같은 선현의 필체나 제왕의 어필을 새겼다. 특히 ‘비례부동’은 민정중이 연경에서 구해와 송시열에게 선물한 것으로 명나라 의종 황제의 필적 이었다. 송시열은 이를 바위에다 새겨 놓고는 그 곁에 ‘환장암(煥章庵)’이란 암자까지 지어 그 진본을 보관하게 했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유래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송시열이 지정하고 그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 송시열은 '화양(華陽; 중국 문화의 햇빛)'이라는 말에 걸맞게 화양동을 '작은 명나라'로 만드려 했다. 자신은 명나라풍의 옷과 망건을 착용했고, 부인과 아이들에게도 명나라의 생활 방식을 따르게 했다니 그의 광적인 명나라 사랑을 엿볼수가 있다. 

<출처-참고 :: 디지털 청주>

 

 

 

 

 

중국 무이산의 절경 <출처 :: 인터넷>

 

오래전부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위 사진들을 보면서 무이산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송시열이 화양구곡을 만들때 본따 만들었다는 중국 무이산의 구곡을 다시보니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무이산은 중국 복건성의 명산으로 남송때 주자가 이곳에서 주자학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조선 주자학의 종주를 자처하고 주자의 글을 교리처럼 믿고 따랐던 송시열의 입장에서 무이산은 이상향 이었을 것이다.

우리야 사진으로 이렇게 보고 비교를 할수 있지만, 우암은 무이산이 이렇게 생긴줄이나 알고 있었을까...

 

 

 

 

금사담과 암서재

 

화양구곡중 제4곡인 금사담은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가 금싸라기 같아서 금사담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읍궁암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골짜기를 건너면 바로 금사담이다.  담애에 암서재가 있으니 우암이 조그만

배로 초당과 암서재를 통하였다 하며 현재는 흙에 묻혀 옛모습을 찾기 어렵다.

 

 

오늘은 안개로 인해 산의 조망은 틀렸고, 화양 구곡과 송시열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고자 한다.

 

 

 

새롭게 바라보는 송시열

 

송시열은 인조~숙종때의 문신으로 서인과 노론의 수장으로 조선의 주자 또는 송자라 칭해질만큼 철저한 주자학의 신봉자이자

현실과 시대상황을 외면하고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 명나라를 존숭하는 지극한 사대주의자 이며 비현실적인 숭명주의자 였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정권이 숭명반청 이라는 시대착오적이고 무책임한 논리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국가를 파탄의

지경에 빠지게 하고도 그들의 무능함을 이용하려는 청나라의 전략에 의해 패전의 책임을 지지 않고 지속적인 정권을 잡아 가는

가운데 훗날 송시열은 숭명주의 핵심인 노론의 영수가 된다.

당시의 상황에 맞지 않고, 조선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주자학을 극도로 신봉하여 이후 300년간 조선이 망할때까지 정권을 잡으면서

죽은 이론인 주자학으로 인해 국가의 성장 발전을 저해하는데 영향을 끼친 일등공신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정적들을 사문난적 이라는 모함을 씌워 공격을 하는데 그 대표적이자 첫번째 피해자가 바로 윤휴다. 송시열의 노론파는 나중에

친일파로 계보가 이어져 현재의 국가분단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였으며, 일제이후에도 친일 청산이 되지 않은 가운데

지금도 남아있는 그때의 사대주의 노론/친일 잔존세력은 또 다른 사대주의인 친미세력이 되어 현세를 이끌어 가고 있다.

 

 

 

 

화양 제3교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도명산 등산로는 화양3교 전에서 오른쪽 나무 데크길로 이어진다.

 

 

 

추천감사

 

 

 

마치 습식 싸우나에 들어와 있는듯...

한여름 습기 가득한 산길은 가파른 등로에 접어든지 십여분 만에 온몸의 땀을 다 쏟아내게 한다.

이제 산행 시작인데 저 아래 계곡 물소리가 환상처럼 들려온다.

컨디션을 봐서 낙영산-가령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갈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한발 두발 걸어갈수록

그 생각은 멀어져 간다.

 

 

 

 

능선에 이르기까지 산길은 가파르게 이어진다.

다음날 큰 비가 예정되어 있어서 그런지 마치 폭풍전야 같은 바람한점 없다.

습도 가득한 푹푹 찌는 날씨에 상의가 땀으로 축축히 젖어 간다.

 

 

 

 

아쉬운 조망

 

 

도명산 정상에서의 일망무제의 조망을 기대했건만 아쉽다.

바람한점 없는 산에 핀 짙은 안개에 마치 세상이 온통 습기 가득한 찜질방 같다.

 

 

 

 

능선에 올라 바라본 도명산 정상 (11시18분)

 

보이는게 없는 조망이니 조망이나 풍경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마음은 심드렁 해진다.

비온 직후도 아니고 이 무슨 여름날 안개란 말인가...

 

 

 

 

 

 

정상부로 오르는 길...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사진을 보고서야 내 상의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는것을 알았다.

내가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 아닌데도 이 정도니 다들 땀깨나 흘렸을 것이다.

 

 

 

 

안개에 가려 윤곽만 드러낸 코뿔소바위와 조봉산

 

 

 

 

조망바위에 올라 바라본 아래에서 쉬고 있는 우리님들

아래에서 보아도, 위에서 보아도 사방으로 보이는건 안개뿐이니 아쉬운 마음은 매 한가지 일터이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 되는것은... 이번 산행 끝나고 나면 사진 정리하는데는 시간이 얼마 안걸릴 거라는 것이다.

안개로 인해 풍경과 파노라마를 하나도 찍을수 없으니 뭐 정리할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정상부 근처에서 만나는 바위굴

 

 

 

 

정상 아래 마지막 철계단

 

 

 

 

배경은 안개로 뿌옇지만, 마음만은 즐거운 일행들

 

 

 

 

도명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

 

 

 

 

도명산 정상 (11시39분)

 

 

 

 

정상석 뒤로 있는 진짜정상.

뒤로 돌아 가면 쉽게 오를수 있다.

 

 

 

 

도명상 정상의 조망도

 

오늘은 안개로 인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 낙영산과 조봉산 라인의 윤곽만 살짝 보일뿐이다.

 

 

 

 

도명산 정상에 쥔 따라 올라온 귀여운 견공

짤막한 다리로 어찌 올라왔을까...

옆에서 개만도 못하다 라는 우스개 소리가 절로 나온다. ㅎㅎ

 

 

 

 

정상에서 바라본 낙영산

 

낙영산은 한문으로 落影山 으로  중국의 천자가 세수를 하려는데 물속에 아름다운 경치가 보여 찾았는데

그게 조선땅에 있는 이곳 이었다고 하는 팔영산 비슷한 전설이 있는 곳 이다.

 

 

 

 

정상 나무 그늘아래 자리를 잡고 점심을 해결한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낙영산-가령산으로 가는 종주팀과 하산팀으로 나눠지기 때문이다.

습한데다 조망도 없는날에 종주 생각이 싹 가신다.

이제 남은 위안은 시원한 계곡물 뿐이다.

 

 

 

 

정상석뒤 바위에 올라 내려본 도명산 정상부와 도명골

 

 

 

 

반대편 방향 조망

 

 

 

 

도명산 정상풍경과 건너편 보이는 조봉산과 도명골

 

 

 

 

식사를 마치고 학소대를 향해 내려간다 (12시26분)

 

 

 

 

철계단을 내려서며~

 

 

 

 

하산길에 조망 바위에 서서

 

 

 

 

하산길 조망바위에서 올려다본 도명산 정상부에 사람들이 보인다.

 

 

 

 

하산하며 바라본 낙영산

 

 

 

 

학소대로 내려가며 만나는 풍경

 

 

 

 

조망바위를 지나 편안한 숲길을 따라 조금 내려서면 마애삼존불이 나온다.

 

 

 

 

마애삼존불

 

낙양사라는 옛 절터인데 과거에 식수로 사용되었을 암반약수가 무척 시원하다.

차가운 약수를 떠와 돌계단 아래에서 머리위에 두어번 뿌려 열을 식히니 한결 개운하다.

 

 

 

 

 

 

옛 고려시대 낙양사 터 30m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 가장 큰 불상은 크기만도 14m에 달한다고 적혀있다.

맨 위쪽 바위는 덮개처럼 생겨 그 모양이 더욱 신기하기만 하다.

 

 

 

 

옛 절터의 흔적

 

 

 

 

낙양사 터를 지나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안개로 인해 조망터를 만나도 눈길만 한번 쓰윽 주고는 그냥 지나친다.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 지고 이내 습한 무더위에 산행내내 소망했던 계곡이 나타난다.

 

 

 

 

 

 

종주코스 가신분들 기다리려면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라고 생각하고 실컷 놀 생각을 한다.

시원한 계곡물에 들어 앉으니 땀에 절은 몸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듯 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금 군부대 유격훈련 시즌인지, 낙영산 유격장 바위에 타이어가 매달려 있고 통행을

금지 하고 있어서 종주팀도 계획한 산행을 하지 못하고 바로 돌아왔다고 한다.

 

 

 

 

학소대교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니 유명한 학소대가 보인다.

학소대 뒤로 계곡물이 합수가 되는데 몇분이 시원한 차림으로 물놀이를 즐기고 계신다.

 

 

 

 

 

 

학소대

 

 

학소대  - 임상주 -

 

鶴巢問何年           학이 깃든지 얼마나 되었길래

祗今猶有臺           지금은 오히려 누대만 남아 있네.
神仙不可見           신선을 볼 수 없으니
怊悵空徘徊           서글퍼 부질없이 서성이네.


安得安期生           어떻게 하면 안기생을 만나서

一問長年術           오래 사는 비결을 물어볼 수 있을까?

長年欲奚爲           내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願掃犬羊窟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려 함이네.


 

 

화양구곡중 제8곡 으로 큰 소나무들이 운치 있게 조화를 이루며 우뚝 솟은 바위산으로

'청학이 바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라고 해서 학소대라 부른다고 한다.

 

 

 

 

와룡암

 

 

와룡암  - 임상주 -

 

維彼臥龍巖           저 누워 있는 와룡암만은

若垺乘風雲           풍운 타고 오르는 것 같네.

宛在水中央           완연히 물 한가운데 있는데

蒼痕背成文           푸른 물결이 얼룩무뒤 되었네.

 

知是南陽翁           알겠도다, 제갈공명이

變化爲此石           변화해 이 암석이 된 것을.

平生興復意           그가 지닌 평생 부흥의 뜻

蜿蜿如宿昔           지금도 꿈틀꿈틀 예전 같네.

 

 

학소대교를 지나 조금 내려가면 냇가에 와룡암이 나온다.

와룡암은 화양구곡중 제7곡으로 바위가 용이누워 꿈틀거리고 있는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와룡암 이라고 한다.

와룡암 뒤로 학소대교와 우측으로 학소대가 보인다.

 

 

 

 

와룡암에서 반보님

 

와룡암 앞으로 길가에서 보이지 않는 천혜의 물놀이장이 있는데, 일행들이 그냥 지나친다.

모래사장도 있고 하니 학소대와 같이 여름철 물놀이 하며 쉬었다 가기 딱 좋은 곳 같다.

 

 

 

 

능운대

 

 

능운대  - 임상주 -

 

嵬磊石層層           우뚝 솟은 바위가 층층이 쌓여

屹屹仍作臺           높되 높은 능운대가 되었어라.

凜凜凌風雲           늠름하게 풍운 뚫고 솟아

迢迢絶塵埃           아득히 속세의 티끌에서 벗어났네.


山靄半空浮           아지랑이 산 중턱에 감도는데

儼然天中入           위엄 있게 하늘 가운데 솟아있네.

有類豪傑士           호걸스런 선비가

唾手燕雲立           한가로운 구름 가운데 늠름하게 서 있는 것 같네.

 

 

화양구곡중 제6곡으로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서서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듯 하여 능운대라 했다고 하는데...

보시다 시피 하늘을 찌를듯한 높은 바위도 아니거니와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잡목과 잡풀만 무성하니

화양구곡의 명소라는 이름이 무색하기만 하다.

 

 

 

 

첨성대

 

 

첨성대  - 권진응 -

 

五曲蒼崖高更深      오곡이라, 푸른 절벽 높고도 깊어

霽雲和雨鎖空林      맑은 구름, 때맞춰 나리는 단비 공허한 숲속에 감도네.

煌煌寶墨腥塵外      빛나고 빛나는 신종․의종 황제의 어필 속세 밖에 돋보여

永激東民拱北心      오래도록 동쪽나라 백성 공북심(拱北心) 우러나게 하네.

 

 

화양3교에 다가서니 오전에 도명산 가는 갈림길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첨성대가 보인다.

첨성대는 화양구곡중 제5곡으로 큰바위가 첩첩히 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서 천체를 관측할수 있다 라고

해서 첨성대라 부른다고 한다.

 

첨성대 아래 바위벽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중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은 송시열이

새긴 글씨이며 옥조빙호(玉藻氷壺)는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의 글씨를 새긴것이며, 비례부동(非禮不動)은

명나라 의종의 글씨에서 따온 것이다 . 또한 첨성대 부근 바위에 새겨진 만절필동은 선조의 글씨에서 따온것인데 

만절필동이란 중국 강물이 만번을 돌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말인데 이는 명나라를 극존중하고 청나라를

배척한 송시열의 사대주의 숭명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송시열이 속한 서인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충정으로 인해 조선은 싸울 병사 하나 없이 무분별하고 관념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백성을 전장으로 내몰고,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되니 시대착오적이고 매국적인 사상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일으키고 패망한 전쟁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들 서인과

노론의 매국적인 행위가 현재의 남북분단에 까지도 관련이 있고 보니 수백년을 따로 살고 있는 우리지만  

그들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숭명 사대주의의 흔적들

 

 

대명천지 숭정일월

 

조선후기의 사대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대두되는 대명천지의 사전적인 의미로는 '밝고 환한 세상'을 뜻한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큰 명나라의 세상' 즉, '명나라가 중심이 된 세상'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토록

꿈꾸던 중화 명나라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숭정일월'도 비슷한 뜻으로 해석된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가

'숭정'이다. 그러니 결국은 두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대명 황제가 다스리는 밝고 환한 세상을 꿈꾸며 쓴 말인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정국을 휘어 잡았던 송시열의 노론파의 사대주의가 어느정도 인지 잘 알수가 있는

말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200년의 시간이 지난후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일부 비석에 숭정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옥조빙호

 

옥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투명하게 순결한 일심을 가진 마음을 말한다.

명나라에 대한 대쪽같은 충정과 절개를 표현한 말이다.

 

인조 쿠데타를 일으켜 백성들을 위해 중립외교를 펼치던 자립군주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들의 명분은 명나라에 대한

충절이다. 자신들의 진정한 왕은 명나라의 황제요, 조선의 왕은 자신들과 크게 다를게 없는 명을 섬기는 신하중의

하나일 뿐인데, 감히 광해군이 명나라를 업신여기고 청나라와 중립외교를 폈다고 하는게 그들의 논리 라고 한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에 (서인들은 임란중 공을 세운 이가 한명도 없다고 함) 세력을 잃게될까 불안해 하던 서인들이

명나라에 대한 충절이라는 개도 안물어갈 논리를 펴면서 인조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우면서 조선은 왕의나라가 아닌

일본에 망할때까지 서인과 노론 세도가의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자신들은 창,칼도 들지 않고 그 잘난 입으로만

숭명반청을 외치며 전혀 준비도 없이 전쟁을 일으켜서 제대로 싸움한번 못해보고 백성들을 죽이고 개망신만 당했던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다. 임란때 많았던 의병하나 없었다고 하니 이들 서인들의 작태는 안봐도 눈에 선하다.

 

 

 

만절필동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물었다. “군자가 물을 보고서 느껴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하니 의지가 있는 것과 같다(其萬折也必東 似志)”고 답했다.

여기서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이 나왔다. 황허(黃河)가 남과 북으로 수없이 꺾여도 중국의 지형이

서고동저(西高東低)인 까닭에 끝내는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결국 원래 뜻대로 된다거나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를 때 사용된다. 화양서원 안쪽의 만동묘의 만동은 이 만절필동에서 나왔다.

<출처 :: 순자의 유좌편>

 

 

 

 

화양3교를 지나면서 바라본 지나온 화양계곡

 

옛시절의 풍광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로부터 금강산 아래로는 괴산의 화양구곡이 으뜸 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고 하는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수 없다. 상류에 오염원이 있는지 장마철이 지난후 인데도 많지 않은 수량에

수질이 탁해보여 명경지수 옥류는 커녕 수영을 해보려는 일행들이 그냥 지나친 이유중의 하나가 되었고, 오랜세월 

퇴적토가 계곡 바닥에 쌓여서 그런지 아름다운 담(潭)과, 소(沼)도 볼수가 없으니 송시열이 극찬을 하던 화양구곡의

옛 찬사가 허무맹랑 하게만 느껴진다.

 

 

 

 

잘못된 역사 (1) - 왜곡의 시작과 주류는 노론

 

한국 주류 사학계의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 현재를 살지만 조선후기의 역사관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고 오늘 화양구곡을 만든 화양동주라는 송시열은 그런 노론의 영수였다.


일제 가담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 거쳐 사학계 주류로, 조작된 국사교과서 바로잡을 필요!!


서인은 국왕 축출의 명분이 필요하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진정한 임금인 명나라 황제를 배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쿠데타가 명 황제에 대한 충성이란 논리였다. 서인들은 인조반정 때 체제 내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남인들에게 뜻밖에도 2차 예송논쟁으로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 도륙했다. 죄 없는 남인들을 역모로 꾀어 죽인 정치공작에 반발한 서인 소장파가 소론이 되고, 당을 위한 행위라고 옹호한 서인 노장파가 노론이 된다. 노론은 경종 때 소론에 잠시 정권을 빼앗겼던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 멸망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 말 노론 일부 세력은 외세에 맞서 성리학 사회를 수호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에 가담했지만 다른 일부는 일제에 협력해 망국에 가담했다. 이런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이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에도 한국 사학계 주류가 됨으로써 국민들은 여러 그릇된 역사 인식을 갖게 되었다.  <참고 :: 한겨레신문>

 

 


 

 

화양3교에서 반대편 하류쪽으로 보이는 암서재

 

 

 

 

잘못된 역사 (2) -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허구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가 1948년 발간한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에 싣고 그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 기재함 으로써 국민적 상식이 된 내용이다. 그 요체는 ‘임란 전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으나 선조는 말이 없고 유성룡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만양병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인조반정 후인 효종 8년(1657)에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 15년 9월 1일자에 사관의 논평으로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이를 주장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1548~1631)의 행장을 보고 쓴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 이이)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송시열은 주자학파로써 이기일원론을 이이의 계보를 이은 사람으로 자신이 속한 서인을 위해 거짖 기록을 남긴 것이다.

 

십만양병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된 것처럼 기록한 데 있다. 서인 영수 이이의 선견지명을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해 전란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잠곡 김육이 쓴 ‘이순신 신도비’에는 이이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였으나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출처 및 참고 :: 한겨레신문>

 

 

또한 <조선의 왕을 말하다> 에서 저자인 이덕일 소장은 십만양병설의 허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십만양병을 하려면, 당시 정규군이 8천인데, 국방비를 열배 증액해야 하는 거지. 율곡은 변방에 3년간 자원 근무를 하면 노비는 양인으로 신분상승을 시켜주고, 서얼은 과거 응시할 자격을 주자면서 신분제 틀을 흔들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돈 안들이고 신분상승하고 싶은 노예나 서얼이 자원복무할 거 아니냐. 그러나 이것 다 조정에서 부결됐다. 율곡은 1만 양병도 얘기한 적이 없다.”

 

그는, 율곡이 임란이 발발하기 10년 전, 십만양병을 주장했다가 임금은 물론 류성룡의 반대에 부딪혀 안 됐다는 ‘십만양병설’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임란 극복의 두 영웅을 꼽자면, 무장에선 이순신, 문신 중에는 류성룡이다. 헌데, 류성룡의 자리를 율곡으로 대체하고 조작한 것이 십만양병설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십만양병설은, 실은 없는 이야기다. 임란 극복은 류성룡의 개혁정책 덕분인데, 십만양병을 반대한 죽일 놈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덕일>

 

 

 

 

 

금사담(金沙潭)과 암서재(巖棲齋)

 

 

금사담  - 송흠학 -

 

四曲金沙繞碧巖      사곡이라, 금사담은 검푸른 바위로 둘러싸이고

巖棲逕仄草毿毿      암서재 길옆에 풀이 하늘하늘하네.

琴書咫尺開光影      거문고와 서책이 지척에서 빛을 발하니

認是山南第一潭      산남의 제일가는 못인 줄 알겠네.

 

 

 

화양구곡중 제4곡인 금사담은 맑은물과 깨끗한 모래가 보이는 계곡속의 못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화양구곡중

중심이 되는 곳 이라고 한다.

 

바위 위에 있는 암서재는 조선 숙종때 우암 송시열이 정계에서 은퇴한후 이곳 반석위에 집을 지어 암서재라 하고

조그만 배로 초당과 암서재를 오가며 이곳에 은거하여 제자 권상하와 함께 책을 읽고 시를 쓰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예전엔 암서재 앞에 간이 철다리가 있어서 건너가서 암서재를 구경할수 있었는데, 국립공원측에서 철거하여 현재는

이처럼 계곡 건너편에서만 볼수가 있다. 암서재를 보려면 채운사를 통해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송시열이 북벌을 주장?

 

효종의 북벌에 사림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효종은 사림의 영수 송시열의 도움과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두 송씨에게 병권과 인사권을 넘겨 주면서까지 힘을 실어주며 북벌에 집착했건만 송시열의 생각은 효종과 달랐다.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도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 중의 제1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국왕이 아닌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권력을 쥐고 있는 노론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결국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하며, 북벌을 도와주면 더 큰 힘을 실어주겠다 라며 설득을 했지만 이미 두번의 호란을

통해 청나라에게 크게 데인 데다가 그들 덕분에 패망의 책임을 지지 않고 간신히 세도를 유지 하고 있는 서인측과

송시열의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독대후 두달만에 귀밑에 종기가 나서 침을 맞던 어느날 의문스런 급서를 하게

된다. <참고 인용 ::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

 

 

 

조선의 王 효종은 죽어서 누더기 관에

 

효종이 과연 독살됐는가 하는 문제는 그 후의 정치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증거는 없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고

추정까지 되지 않는것은 아니지 않는가. 왕의 독살에는 늘 반대세력이 있고, 이익을 얻은 세력이 있는 법이다. 다만 역사

속에 드러난 사실은 손 떨리는 수전증을 가진 신가귀라는 어의가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에 침을 놓은 직후 피를 쏟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내용 뿐이다.

효종의 시신은 팅팅 부어 있었으며 관이 맞지 않자 송시열과 대신들은 널빤지를 덧대고 넓혀 왕의 시신을 관에 넣게 한다.

조선의 왕이, 수전증 의사에게 침을 맞고 죽었으며 관이 작다고 새로 마련한 관도 아닌 널빤지를 덧붙인 누더기 관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송시열이 효종 승하후에 읍궁암에서 매일 새벽같이 통곡을 했다니 아무리 역사가 승자들의 기록

이라지만 우습기만 하다.

 

 

 

 

읍궁암

 

 

읍궁암  - 임상주 -

 

吁嗟彼盤石           아! 저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

云胡名泣弓           어찌 하여 읍궁암이라 이름 했나?

孝廟之諱日           효종임금 제삿날이면

有臣號蒼穹           우암선생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네.


年年是巖上           세월이 지나도 이 바위에는

淚痕磨不磷           눈물 흔적 닳아 없어지지 않았네.

侵晨慟哭語           새벽에 통곡하며 탄식한 말씀,

可以泣鬼神           귀신을 울리겠도다.

 

 

 

화양구곡중 제3곡으로 송시열이 조선시대 효종임금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 하시자

이에 크게 슬퍼하며 새벽마다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하여 읍궁암 이라 부른다고 한다.

악어의 눈물인가...

 

 

 

 

잘못된 역사 (3) 효종의 ‘정적’ 송시열이 충신으로 탈바꿈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송시열은 효종과 함께 북벌을 추진한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노론정권이 조선이 망할때까지 300년간 조선을 지배하면서 만들어낸 승자들을 위한 역사 왜곡에 불과 하다고 한다. 

 

효종 8년(1657) 올린 <봉사>(封事)에서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습니다.” 라고 효종의 치세를 전면 부인한 인물이 송시열 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사사건건 효종의 발목을 잡았던 효종의 정적이었음에도 국사 교과서는 효종의 충신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숙종때 허목은 송시열을 중종 때 사형당한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비교하면서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며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거꾸로 송시열은 효종 독살의 주범으로 의심이 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 그런 송시열이 새벽마다 읍궁암에서 죽은 효종을 위해 통곡을 했다는것은 승자가 기록한 그들만을 위한 왜곡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참고 :: 한겨레신문>

 

 

 

 

사대주의와 우리 역사가에 의한 국사의 왜곡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의 병화보다, 조선사를 저작하던 기인들의 손에서 더 탕잔 되었다 하노라.  

우리 조선 사람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 아닌 특색이나

노예적 특색이다." <단재 신채호>

 

 

사대주의적인 춘추필법

 

철두철미한 공맹(孔孟) 제자가 되어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여 자신이 조선사람인지도 모른체 마치 중국인 인양

중화사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다. 예를들어 이(夷)는 본래 중국인이 동방의 활 잘 쏘는(大+弓=夷)

우리 민족을 지칭하던 말로 ‘뿌리’, ‘어질다’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융적(戎狄)과 동일한

명칭으로 사용한 이래로 우리 나라 사대주의자들이 그대로 답습하여 한문 교과서에까지 이(夷)를 오랑캐라 부르고 있다.

 

 

 

 

운영담을 배경으로...

 

 

 

노론파 -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원흉

 

먼저 인조반정부터 돌이켜 봐야 하는데, 인조반정은 율곡 이이를 뿌리로 둔 서인들이 일으켰다. 말이 반정이지,

중립외교를 지키는 왕(광해군)을 내쫓는 쿠데타였다. '내가 섬기는 왕은 오직 명나라 황제뿐이다', 인조반정의

주축세력인 서인들의 논리는 이랬다. 조선 임금도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신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균형적인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에게 불충을 저질렀다는 게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숭명반청(숭명배금)'은 큰 틀에서 후금과 전쟁하자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전혀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인조 5년, 결국 후금이 쳐들어왔고 조선은 처참하게 패했다. 그게 정묘호란이다. 그리고 불과 10년 뒤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도 조선은 똑같은, 아니 그 전보다 더 치욕적이고 뼈아픈 패배를 당하게 됐다."

 

한가람 역사연구소 소장 이덕일님은 다음과 같이 서인을 평가하고 있다.

"서인들은 나라를 망친 장본인들이다. 전쟁을 통해 지배권력의 무능이 여실히 드러났다. 백성들은 신분제 완화 등

사회체제의 변화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들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다. 오히려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더 확고히 했다. 인조반정은 조선이 과거로 역행하는 계기가 됐다.

<참고 ::  "시대착오적 인조정권… 조선 망국의 길로 이끈 원흉" - 이덕일>

 

 

 

역사스페셜을 촬영중인지... KBS 방송 헬기가 상공을 계속 선회하고 있고 지상에선 방송카메라가 화양구곡과 송시열의

유적을 담고 있는듯 하다. 방송에서 화양구곡과 송시열에 대해 뭐라고 언급을 할지 모르겠으나 이번 후기를 준비하면서

찾아본 송시열은 그동안 수십년간 내가 알고 있던 그런 훌륭한 인물이 아닌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최악의 

사대주의자로 남아 있으니 방송 내용이 궁금해 진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요, 우리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땅의 사대주의자들은

명나라가 망한이후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중화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 고대 한중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우리 역사를 중국의 들러리로 전락 시켰다. 바로 송시열이 주축이된 노론계 벽파의 사대주의적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주차장을 향하여 가는길...

 

 

현재의 남북 분단을 초래한 송시열의 서인정권

 

병자호란으로 인질이 되어 심양에 연행된 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1612~45)는 현명하고 국제정세에 밝아서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맥을 이어갈 만한 인물이었으나 서인정권은 청과 관계가 가까운 소현세자가 왕이 될경우  자기네 서인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해서 광해군과 같이 당쟁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거세하고 만다. 이와 같이 명청(明淸) 교체기에 친명파와

친청파가 국론을 크게 두 편으로 갈아놓고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친청:: 광해군-主和--소현세자 ---- 실학 ---개항
친명:: 인조---斥和-봉림대군(효종)-위정척사 -의병

 

다시 말해서 17,8세기의 조선왕조가 갈 길은 친청이냐 친명이냐의 두 길밖에 없었는데 조선은 친청의 길을 택하지 않고

친명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실리를 버리고 의리를 택한 것이다. 이(利)보다 의(義)가 더 중요하다는 의리론에 입각한

대외정책이었다.(박성수, 377~378)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인 명에 대한 의(義)를 중시하는 대외정책이 서인 정권에 의해 지속되었고, 이러한 흐름의 연장

선상에서 광해군 축출ㆍ소현세자의 정치적 살해가 일어나면서 중립외교 추진세력-주화파가 거세된다. 거세된 자리 위에서

실학파(북학파)가 사대 모화주의를 비판했으나 대명사대(對明事大)의 대외정책을 폐기하는데 까지 이르지 못한 채 조선

말기의 개항이라는 정치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끝에 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또한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일제 지배의

유산이 분단체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서인들의 사대주의 숭명사상은 이렇듯 현실의 남북 분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프레시안>

 

 

 

 

화양서원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가 우암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조선후기 정국을 주도했던 사림의 중심지로써

당시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당당한곳 이었다고 한다. 그림중 맨 위에 있는 1번이 바로 문제의 만동묘다.

 

 

화양서원

 

화양서원은 전국에 걸쳐 36개소에 이르는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명소다.
건립 당시부터도 여러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때마다 노론의 강경한 요구와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허용되었다.
그 뒤 당쟁에서 우암 송시열이 노론의 상징으로 추앙됨에 따라 이 서원은 노론 사림의 본거지가 되어 숙종 말년의

노론 집권 시기에는 국가로부터 유례없이 20결(結)의 면세(免稅) 토지와 다수의 노비를 지급받았으나, 반면 경종 때

소론 집권 하에서는 철폐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또 우암 송시열이 문묘(文廟)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여

국가로부터의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의 기부에 의하여 서원 소속의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三南) 일대에 산재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서원은 점차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다.

결국 훗날 대원군이 집권한 뒤 가장 먼저 철폐한 곳이 바로 만동묘와 화양서원이다. 공자가 다시 살아나도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며 전국 곳곳의 서원을 철폐할 때 그 첫번째 본보기가 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최근 충북 괴산군에서는 터만 남은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수백억원을 들여 복원했다. 사대주의의 온상이자 조선중기

이후 국가를 망국으로 이끌고 결국 현세의 분단을 초래한 원흉들의 옛터를 복원하는데 수백억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것은 아직도 망국노론의 잔재세력이 청산되지 않고 현세에도 권세를 떨치는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

 

 

 

송시열의 노론과 조선멸망 그리고 친일 매국노

 

인조반정후 조선은 노론 일당 독재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어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이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이제 조선은 노론 일당독재에서 노론의 한 일가(一家) 독재로 더욱 전제화된 것이었다. 이후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은 인조반정 이후 약 300여 년간을 집권해 온 노론이 국망(國亡)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는 데 있다. 노론 인사 어느 누구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층 중에서는 그나마 야당

이었던 소론[주화파의 후예]과 재야 남인들 중 일부만이 독립운동에 나섰다.(이덕일, 2005, 16~20)

 

일제는 조선 점령 직후인 1910년 10월, 76명에 달하는 한인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다. 대부분 이씨,

민씨 등 왕족들과 집권 노론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합방공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귀족의 지위를 누렸다.

일본이 비록 영토를 점령했어도 이들 매국 사대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 순조롭게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노론이 대다수인 '한일합방 공로작 수여자 명단'은 대한제국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론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잠시 동안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고 조선 멸망 때까지 집권했다. 300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집권한 정당의 당인들이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선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이런 노론 당파의 일부 후예들이 조선사 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을 형성

하면서 역사권력을 독점한다.

 

노론과 서인의 매국행위는 임진왜란으로도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은 실질적으로 동인(東人)들이 치렀다.

유성룡 이순신 그리고 곽재우 정인홍 등 영남 의병 등이 그들이다, 반면 서인(西人) 가운데 공을 세운 사람은 별로 없다.

임진왜란의 뒤에 그 공로로 동인이 집권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임란때 공을 세우지도 못한 서인은 '명나라=임진왜란 승리자=이 나라 구원자'로 규정했다. 송시열이 말한 바,

재조(再造)의 은혜를 준 나라였다. '다시 이 나라를 세우게 해 준 은혜', 그것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해 주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참전해서 이 나라를 구원해준 전쟁이었다. 이에 반하여 동인이 보기에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수군과 곽재우 등의 의병이 싸워서 이긴 전쟁이다.

 

서인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물론 쿠데타[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단 동인이 세웠던 공을 부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호 이익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낸 것은 명나라의 방어를 위해서였으므로 지나친 은혜의식, 즉

송시열이 말하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바로 사대 모화주의자(事大慕華主義者)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참고 출처 :: 프레시안>

 

 

 

 

 

만동묘의 좁은 계단 - 반보님 作

 

중국의 황제를 배알하러 가는 성스런 곳에 정면으로 오르지 못하고 옆으로 게걸음으로 오르도록 계단이 좁게

만들어져 있다. 청나라로 바뀐지 수백년... 중국에서도 하지 않는 중국 황제의 제를 이곳 조선땅에서 올리는 웃기는 일이

뼈속까지 사대주의로 물든 노론파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송시열과 만동묘

 

우암의 명나라 존숭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화양계곡에 있는 만동묘다. 송시열이 수제자 권상하에게 남긴 영결편지

에는 '괴산 화양동에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제사 공간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워라'라는 유언이 들어 있었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도운 인물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표현된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준 은인이라는 뜻이다. 의종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 북경으로 처들어오자 처첩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징산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송시열은 명나라 신종의 휘호인 비례부동(非禮不同.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을 입수해 자신이 죽은 뒤 만동묘를 짓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만동묘는 '모든 강물은 꺾어져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에서

나왔다.  이는 중국에서 흐르는 강물을 빗댄 말로, 중국에 대한 숭명주의와 사대주의를 바로 나타내는 곳 이기도 하다.

또한 왕보다 더 높은게 만동묘지기다 라는 말이 나올정도 였다고 하니 이들의 권세와 폐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은 만동묘는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영조 이래 노론정권이 장기 집권하고 송시열의 화이론이 그 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세가 날로 증대하여 폐단도 자못 컸다. 만동묘는 그 당시 전국의 서원이나 사당 중에서 가장 위세를

부려 폐해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 결국 대원군때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대보단에서 지낸다고 하고 만동묘를 철폐 하였다.

 

이렇게 노론은 재조지은을 앞세워 맹목적인 숭명반청을 내세우며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여 결과적으로

주위의 모든 나라들이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 홀로 뒤떨어진 국가를 만들어 일제 침략의 단초를 제공 하였을뿐만 아니라 조선

망국시 친일에도 앞장을 섰다하니 이들이 도대체 누구의 신하고, 어느나라의 국민인지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하산완료후 주차장옆 계곡 풍경 (15시11분)

 

 

 

 

주차장 팔각정 옆의 성황당

 

뒤풀이를 마치고 대전으로 출발하기 전에 기가 뻗치는 듯한 영험해 보이는 성황당을 보니 비로소 파란 하늘이 보인다.

산에 있을땐 온통 안개만 가득하더니 떠나려고 하니 .... 된장, 고추장, 쌈장...

 

 

도명산에 올라보니 안개로 뿌옇게 되어 풍경 사진을 몇장 담을수 없었다. 하여 이번 산행후기 정리하는 일은 여느때

보다 수월할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어쩌다 보니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거치면서 송시열에서 딱 멈추고 말았다.

왕족도 아니면서 실록에 3천번이나 등장하는 우리역사의 신화이자, 한국사 최대의 금기라는 거유 송시열 !!

송시열이 만든 화양동의 화양구곡 그리고 그와 관련된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조사 하면서 서인 - 노론 - 소론을 살펴보게

되었고, 위정척사를 거쳐 친일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위로는 서인이 득세를 하기 시작한 인조반정과 광해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수 밖에 없었으며 임진왜란까지의 숨겨지고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찾아 엄청난 자료를 정리하며 몇일간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극과극을 달리는 평가라는 말처럼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극을 달리고 있다. 하나는 위에서 서술한 바처럼 송시열은 정묘,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조선을 말아먹고, 친일의 주범이 된 근본적인 악의축인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 극도의 맹목적인 숭명,

사대주의자 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300년간 이땅을 지배 하며 역사 왜곡과

자신들의 미화로 인해 탄생한 노론 지배계층과 일부 사대부사이에서 나타나는 극렬한 칭송 이라는 것이다.

 

구린내 나고 썩은내 나는 모화사상과 사대주의에 환멸을 느끼면서 고고한 선비들의 흔적이 아닌 위정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화양구곡을 다시 떠올리며, 과연 자주 자립을 추구한 군주인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뜻을 펴거나,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도입하려했던 소현세자가 왕통을 이어 개화를 수백년 앞당겼다면 19세기 이후 조선과 한국의 역사는 어찌 바뀌었을지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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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 : 천년학

 

 

도명산 산행지도

산행코스 :: 휴게소 - 화양2교 - 화양3교 - 도명산 - 마애불 - 학소대 - 휴게소 (약 9.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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