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지리산 1박2일 산행때 방문하기로 하였으나 배낭의 무게와 불량감자팀의 이동속도 등등으로 찾아볼수 없었던  비경

코스를 다녀왔다. 단풍이 예쁘게 물든 가을에나 다시 오려 했는데, 마침 거림에서 원점회귀를 할 수 있는 산악회가 있어서

주저 없이 신청하고 다시 지리산으로 떠났다. 지난주 전혀 예습이 없이 산행에 따라갔다가 혼자 청학을 찾아야 하는 상황

에서 팔진도에 감춰진 청학연못을 보지 못하고 온게 아쉬움으로 남았었고, 이번에는 누구의 리딩없이 혼자서 대부분의 비등

코스를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에 수십시간에 걸쳐 경로를 분석하고 철저한 예습을 하였다.

 

 

금단의 지역. 원래 산에는 딱히 정해진 길이 없었으나 국립공원이 생기고 관리공단이 만들어 지면서 전국의 모든 국립공원은

금단의 지역이 되고 말았다. 그네들이 허용하는 일부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위험하지도 않은 구간에도, 바위밖에 없어 식물

보호가 필요 없는 구간에도, 국토의 등줄기 백두대간길에도 산꾼들이 쉽게 이해할수 없는 논리로 금줄을 그어 두고 있다.

국립공원 편입 이전에는 자유로이 걷던 길을 공원에 편입시켜놓고 행정편의주의 적으로 막아두고 있는 길이 얼마나 많은가.

국립공원 입장료를 징수 할때는 입장권 판매직원이 아침에 출근하기 먼 곳을 비지정으로 막아둔곳이 많은데 입장료가 폐지된

지금에도 그것을 풀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는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두대간길 700km, 이중 국립공원을 통과하는 구간이 237km 이고, 그중에 통제구간은 95km에 달한다고 한다.

약 40%의 구간이 통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동부에 유명한 애팔래치아 산맥, 그 산맥길을 따라 이어진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길이는 약 3,400km에 달한다고 한다. 텐트와 버너 등 야영장비를 담은 배낭을 짊어지고 야영을 하면서 진행을

하는데 어느 곳에서도 관공서나 공원관리소 직원이 길을 막은 적은 없다고 한다. 오히려 트레일 하이커들이 식수가 떨어질

때쯤에는 샘터가 나타나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하루 정도 도보 거리마다 대피소나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니, 과연

어느게 행정편의주의적이고, 어느게 자연친화적이고, 산객들을 위한 것인지는 명약관화 하지 않나..

 

 

물론 좁은 국토에서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다보면 오염이 심화될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산을 오염시키는 것은 산꾼들

보다는 행락객들이며, 등산객들이 찾지 않는 인적이 드문 비지정 구간에는 숲을 감시하는 산객들이 없음으로 인해 몰래

도채가 횡행 하고 있다니 아이러니 한 일이다. 진정으로 숲과 환경을 보호하겠다면 무분별하게 금줄만 그어댈게 아니라

지자체에서 시행하려 하는 케이블카 설치 사업같은것 부터 관리공단에서 극렬하게 반대를 해야 옳지 않을까? 각종 이유로

지자체에서 허용한 통행구간 까지 비지정으로 통제하는 일에만 나서지 말고 정작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전국의 강줄기를 파헤쳐 환경을 훼손하는 문제도, 관리공단에서 국립공원에 금줄긋듯 강력하게 나서서 반대

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거림계곡

 

 

 

 

거림매표소 통과 (10시19분)

 

 

45인승에 산객들을 가득태운 버스는 먼저 중산리에서 절반가량 하차를 시키고 거림골로 와서 나머지 절반을 내려준다.

일명 A 코스와 B 코스 인데, A코스는 중산리를 출발하여 천왕봉 - 세석 - 거림으로 오는 구간이고, B코스는 거림에서 출발

하여 세석-자유코스-거림 으로 원점 회귀 하는 코스 이다. 거림으로의 최종 하산 시간은 5시30분으로 중산리 기준 8시간의

산행제한시간을 두었다. 

 

오늘 산행은 나홀로 코스다.

A코스도 B코스도 아닌 혼자만의 C코스를 만들어서 시간내에 하산을 하면 된다.

 

 

 

 

거림에서 세석으로 가는 길에는 돌깔기 공사가 한창이다.

너덜길이나, 비오면 질퍽한 흙길에 돌을 까는 공사를 하고 있다.

 

 

 

 

거림갈림길에서 음양수로 가는길에도 돌깔기 공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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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천팔교 (11시7분)

 

북해도교 (11시13분)

 

무명2교 (11시47분)

 

세석교 (11시56분)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부능선

 

날씨는 화창한데, 어제와 달리 가시거리는 좋지 않다. 연무로 인해 원거리 조망이 안되는게 아쉽지만, 오늘의 목표는

원거리 조망이 아닌 죄다 근거리 조망이니 전혀 불만스러울게 없다.

 

 

 

 

거림갈림길 (12시10분)

 

예서 산장이 10분 거리니 세석에 오르는데 2시간이 걸렸다.

이곳에서 음양수로 가기위해 의신마을 쪽으로 향한다.

 

 

 

 

이 사진을 찍었던게 오늘의 운명이었던가...

혹시나 해서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시루봉에서 거림갈림길로 오는 옛길 들머리로 추정되는 곳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달리 들머리라고 할것도 없고, 그냥 정글이다.

 

 

 

 

음양수위 기도터 (12시20분)

 

 

 

 

음양수위 바위에서 바라본 지리산 남부능선

 

 

 

 

 

 

음양수

 

왼쪽에서는 양수가 오른쪽에서는 음수가 흘러나와 함께 합쳐진다.

배낭에 얼린물이 있지만 시원한 음양의 맛을 음미해본다.

 

 

 

 

음양수의 유래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 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 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 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지리산 탐험중에 만난 음양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산공(山公)도 이 못난이의 호소를 가엾다 함인지 얼마 아니하여 수림을 드뭇드뭇 틔우면서 이 높은 산 위에 어디에서인지 물소리를 마중보냄은 분명히 어디 무슨 영천(靈泉)의 성구(聖區)가 있음이겠다. 어리둥절한 채로 눈을 귀 따라 급히 힘두르매 길 왼편에 큰 바위가 솟고 암극(岩隙) 사이로서 새어 떨어져나오는 석천(石泉)이 대번에 지금까지의 모든 난고를 돈망(頓忘)케 한다. 이것이 소위 ‘음양수(陰陽水)’ 이다. 두 갈래의 천류(泉流)가 있기 때문이어니와, 때때로 자식을 원하는 남녀들이 여기에 분집(坌集)하여 이 물을 먹고 하늘에 빌어 득자(得子)의 기쁨을 얻는다 한다.

 

이 물을 마십시다

하늘에 비옵시다

내 마음 이어나갈

뒷사람을 얻읍시다

한 잔은 못 미덥구려

실컷 量껏 마십시다.

 

이 음양천이라 함은 벌써 그 이름부터가 민간신앙의 기도장임을 정(定)함이려니와,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음양천 바위 뒤에 돌로 쌓은 제단이 꽤 대규모적이요, 방금도 한 노파와 장정 두셋이 말로는 병을 빙탁(憑托)하나 무슨 소원을 기도하러 왔는지 밥을 지어 먹으며 머물고 있음을 본다. 민신(民信)을 실증하는 일단이다.

 

<출처 :: 1938년 이은상 선생 지리산탐험기 中>

 

 

 

 

음양수를 지나 낙남정맥길을 따라 창불대로 향하는 길에 바라본 청학연못뒤 슬랩바위 (원안)

 

 

음양수에서 능선을 타고 영신봉까지 오르는 길은 오늘 산행에서 처음 만나는 소위 금줄 구간이자 처음 가보는 미답지 이다.

처음 1분 가량은 등로가 확연하더니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오고 나서부터 등로가 어디로 이어졌는지 찾을수가 없다.

직진도 해보고, 우측길로도 가보는데 죄다 가다가 길이 없고 정글이 나온다... 헛... 초장부터 헤매고 있으니... 이건 미처

예상치 못한 복병이다. 3-4분간 길을 찾아보니 희미한 등로가 공터 왼쪽끝으로 해서 위쪽으로 꼬불꼬불 이어진다.

 

 

 

 

창불대 가는 길에 보이는 시루봉과 그 앞의 청학연못

 

이각도의 사진을 수백번을 보았다. 구글 지도에서도, 네이버 지도에서도 이제 티끌만한 점으로 나와도 콕 찍어 찾아낼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막상 이 사진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막상 이렇게 위에서는 바위가 보인다 해도 저 안은 빽빽한

정글 숲속이라 저 바위는 숲안에서는 도저히 볼수가 없는것 이다.

 

다행스러운것은 오늘의 예상경로가 촛대봉에서 내려가는 가장 쉽고 확연한 코스이다 보니 이렇게 까지 불안해할 이유가

없겠지만 지난주에 예습없이 가서 헛탕을 치고온 전작이 있느니 만큼 청학연못뒤 슬랩바위의 모습과 기준점과의 방향

그리고 각도, 거리 등은 보고 보고 또 보고를 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다.

 

 

 

 

남부능선 따라 삼신봉 까지는 잘 보이는데, 그 뒤로 멀리 광양 백운산 라인은 아주 희미하기만 하다.

 

 

 

 

큰세개골-작은세개골-덕평골-불무장등 능선 뒤로 왕시루봉이 보인다.

우측의 반야봉은 지난주와 달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구름속에 숨어 있다.

 

 

 

 

지리산 남부능선(중앙)과 왼쪽 거림골, 오른쪽 대성골 그리고 주변의 계곡과 능선줄기들... (클릭)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남부능선과 삼신봉

 

 

 

 

창불대

 

 

웅장한 바위군과 까마득한 바위벼랑들...

드디어 창불대에 도착을 했다.

사진을 찍는 내 발밑도 까마득한 낭떠러지

 

 

 

창불대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中>

 

 

 

 

 

창불대와 병풍바위  (클릭)

 

 

 

 

자살바위

 

 

빨치산 여성대원들이 국군에 포위되자 이곳 자살바위에서 대성계곡 방향으로 몸을 날려 생을 마감 했다는 이야기는 한국

근대사의 슬픈 이야기로 남아있다. 아마도 대성골 전투에 앞서 빨치산들이 모두 포위되고 대성골로 몰려 몰살을 당하자

빨치산 여성 대원들이 모두 이 바위에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을 하지 않았나 싶다.

 

 

 

 

병풍바위

 

 

 

 

한참을 조망하며 쉬고 있는데 낙남정맥을 하시는 분들인지 영신봉에서 내려가며 후다닥 사진을 찍고 내려가신다. 

 

 

 

 

창불대 옆 기도터 (12시57분)

 

지리산의 유명한 기도터 중의 하나라니... 어차피 점심시간도 되었고...

캔맥주와 과일, 점심도시락을 열어놓고 산신님께 세번 절 하며 기도를 드린다.

오늘 안전 산행을 위하여...

병원에 계신 연로한 아버지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하여...

 

 

 

 

왼쪽 나무에 가려진 작은 공간이 오늘 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를 한 조망터 인데, 까마득한 벼랑위로 최고의 장소이다.

 

 

 

 

점심을 빠르게 마치고 영신봉으로 올라가면서 바라본 촛대봉과 시루봉

저렇게 안보이는듯 해도 오늘 최종목적지인 청학연못은 내눈에 잘만 보인다.

 

 

 

 

좀 당겨 보았다. 확연히 잘 보인다.

나침반을 들어 방향과 각도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길을 나선다.

 

 

 

 

빨치산 비극의 현장 대성골

 

 

 

 

왼쪽으로 영신대 뒤 커다란 바위가 머리 끝만 살짝 보인다.

 

 

 

 

영신봉 (13시18분)

 

지난주의 그장소에 다시 왔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일주일전 과거로 돌아온 것 처럼

 

 

 

 

일주일새 더 짙어진 세석평의 푸르름

 

 

 

 

반야봉과 마찬가지로 천왕봉은 구름에 가려있다. (클릭)

 

 

 

 

세석으로 조금 내려가면 만나는 공터 앞

오늘 코스상 영신사지로 가기위해서는 이곳에서 우측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분홍색으로 유명한 세석 철쭉꽃 사이로 좌고대가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좌고대

 

 

 

 

좌고대 옆 바위

 

좌고대 쪽으로는 이와 같이 좌고대와 옆에선 바위 까지 2개의 바위가 있는데 읽어본 사료와 일치 하고 있다.

 

 

 

 

좌고대의 각자는 돌이 오래되고 풍화작용으로 삭아서 찾을길이 없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中> 

 

 

 

 

 

가섭대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中>

 

 

 

 

 

넓은 영신사지

 

 

 

 

옛날의 흔적은 너른 터만 남아 있고 영신사지엔 풀들과 꽃들만 가득하다.

 

 

 

옛 사찰은 국립공원 산장

 

옛 선인들의 산행기를 보면 당시 교통 이라는게 없고 요즘과 같은 뚜렷한 등로도 없는 가운데, 보통 몇일씩 걸려서 지리산

산행을 하는데 있어서 대부분 숙소로 사찰이나 암자를 이용하고 있는것을 볼수가 있다. 조선시대 이니 만큼 사찰의 승려

들이 관직에 있는 사대부 양반님들 에게 사찰을 숙소로 제공하는게 크게 이상할것은 없어 보이며, 이곳 영신사는 현재의

세석산장의 역할을 했던것으로 추정이 된다.

 

 

 

 

옛 문헌속의 영신사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中>

 

14일 임자에 영신사(靈神寺)에서 유숙하였다. 이 절의 앞에는 창불대(唱佛臺)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座高臺)가 있어 천 길이 솟아 올라가면 먼데를 바라 볼 수 있고,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어 쪼개 놓은 흠대 안으로 쏟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중의 말이 매[鷹]가 마시는 물이라고 한다.

<출처 :: 1489년 김일손의 속유두류록 中>

 

산의 절정에 있는 향적사(香積寺) 등 두어 절은 다 목판으로 덮고 거처하는 중도 없는데, 오직 영신사는 기와를 덮었다. 그러나, 거처하는 중은 역시 한두 명에 불과하다. 산세가 동떨어지게 높아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접촉할 기회가 없으니, 자연 고승(高僧)이 아니고서는 안착할 수 없게 되었다.
<출처 :: 1463년 이륙의 지리산기 中>

 

<발췌 출처 :: 지리99 옛산행기>

 

점필재와 그의 제자 김일손은 각각 17년의 간격으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점필재는『유두류록(流頭流錄)』을,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김일손은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의 저서에 '속' 자를 붙힌 것 이다.

 

 

 

 

영신사지에 흐르는 맑은 물, 옥천

세석산장의 약수터 보다 많은 물이 흐르고 있어 옛날에도 식수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영신사의 영계와 옥천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10)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출처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中> 

 

 

 

 

 

세석산장

 

 

 

 

세석평

 

 

 

 

세석평 

 

이 일대를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 부르는데 ‘평’은 물론 ‘坪’의 와오(訛誤)일 것이요, ‘전’은 ‘坪’을 다시 한번 더 역(譯)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석평(細石坪)이라 쓴 것이 옳은 것이려니와, ‘세석’이란 것은 지금 속(俗)이 ‘잔돌밭’이라 하니 세석은 분명히 세석이겠지마는 실제에 있어서 ‘잔돌’이라고는 한 덩이도 없으니 그 원뜻이 자못 의심스럽다.

 

오히려 잔돌 대신 산청, 함양 군경(郡境)의 등척이로 나가며 키 큰 바위들이 서 있음을 보아 ‘선돌’의 ‘서’ 음이 ‘세(細)’로 역전(譯轉)하고, 그것이 다시 ‘잔돌’로 재역(再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무등산의 ‘서석(瑞石)’이라는 ‘서’와 동일한 택자(擇字)로 보아 일종의 입석문화의 유적으로도 해석하여 보았으나, 그 역시 위태한 해석법이기로, 그 명칭에 대하여는 의혹만을 품고 지날 따름이다.

 

여기가 벌써 1682. 얼마 남지 아니한 최고봉 ‘천왕’이 저기 보인다. 성자(聖姿)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절을 드린다.

세석평은 제 자신이 적막한 들판이라 제 자신의 경치도 남에게 뒤지는 것은 아니지마는, 여기서 천왕을 정면으로 똑바로 가까이 볼 수 있기에 세석평의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몸을 다시 돌이켜 천산만수(千山萬水)를 내려다볼 때, 옳지, 세석평의 진실한 값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천왕 상봉이 흘러내려 기관(奇觀), 장관(壯觀), 웅관(雄觀), 성관(盛觀)의 지리영산을 만들기 위하여 그 호걸찬 기상을 여기에 한 번 축적하였다가, 한 번 호령으로 크고 적고 넓고 깊은 온갖 봉수동곡(峰岫洞谷)을 삐쳐내린 그 저기적(貯氣的)인 곳에 이곳의 위대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겠다.

천왕의 모든 명령을 이 세석평이 맡아 전하고, 천왕께 사뢰는 모든 탄원도 이 세석평이 대언(代言)하는 곳이라 하겠다.

 

<출처 :: 1938년 이은상 선생 지리산탐험기 中>

 

 

 

 

 

연분홍빛 세석 철쭉

 

 

 사실 세석의 철쭉은 연한 빛으로 창백하기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설가와 문장가들이 자극적인 붉은빛으로 묘사한 이유는 과거 빨치산 투쟁 때 이곳에 김일성대학이 있었고, 또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라서 이들의 흘린 피와 절규가 한(恨)의 꽃으로, 즉 과거 이데올로기의 비극의 채색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고인용 :: 김명수의 역사기행을 겸한 지리산 산행 완벽가이드, 돌베게 출판사>

 

 

 

 

 

촛대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14시5분)

 

 

서둘러 촛대봉에 오르는데 군인들 위장 복장으로도 제격일듯한 제복을 입은 국공파 (공익요원 추정) 1人이 무전기와

카메라를 들고 앞서 걷고 있다.  어라 분위기 묘해진다. 설마...

혹시나 저 요원이 촛대봉 사수하러 올라가나 했는데, 불행하게도 역시나가 되버린다.

 

 

국공파 요원은 촛대봉 금줄을 넘어 가더니 한참후에야 돌아온다.

촛대봉을 넘어 청학으로 가고 있는 일단의 산객들을 쫒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당연히 헛탕을 치고 온것 같다.

아마 산꾼들은 빛의 속도로 정글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일단 쪽수가 안되니 정글속으로 잡으러 갈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글속에서 야생 반달곰이 무서운지 아니면 화가난 산객들이 더 무서운지 누가 장담할수 있을까? ㅎ

 

 

아직 시간도 여유가 있고, 성급한 판단을 내릴일도 아니어서 촛대봉에서 오늘 최대한 느긋하게 조망을 한다.

사진도 찍고, 주변 산들도 보고, 간식도 먹고.... 오늘 여기까지 얼마나 숨가쁘게 달려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보고 싶었는가... 이 먼길을 두번이나 그냥 돌아갈수는 없다.

 

 

잠시후 본부와 무전교신을 하는 내용을 슬쩍 들어보니 마치 화성연쇄살인범을 눈앞에서 놓친 형사들처럼 분개해 한다.

위에서 놓쳤으니 아래서 잡아달라고 하는데, 풋~ 그 책임감이 대단스럽다.

하지만 청학에서 등산로 까지는 길어야 30분.... 산아래 관리소에서 그곳까지 어느 누가 30분만에 올것인가? ㅎㅎ

 

 

세석에서 아니 지리산에서 청학동과 청학연못에 대한 전설은 얼마나 유명한 것인가....

그런 역사적인 흔적을 찾아서 보고자 하는게 그렇게 큰 범법자 인가?

오히려 등산로를 신설하고 청학연못을 제대로 공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어차피 과태료 처분 이라는 것은 불법주차나 무단횡단과 비슷한 질서위반의 문제인데...

도로교통법은 이해가 되어도, 국립공원에 여기저기 금줄을 그어놓은 관리공단의 처사는 쉽게 이해할수가 없고

내 지금껏 저렇게 열심히 근무하는 교통경찰을 보지 못했다.

 

 

국립공원이 입장료가 폐지되서 혹자들은 과태료 끊어서 충당하려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알고 있는 일이다.

관리공단 직원들은 과태료를 부과할 권한이 없고, 다만 위반사항을 사진을 찍고 서명을 받아서 해당 지자체에 보내서

지자체가 과태료를 끊어서 보내는 것이다. 즉 수입은 지자체의 수익이 되는 것 이다. 그럼 저 국공파 요원은 무엇을

위해 저렇게 분개해 하고 열심히 눈이 벌개서 근무를 서는가... 아마도 공익요원 이다보니 상사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환경보전을 위하여?...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공단이 환경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케이블카 반대

운동을 주도해서 촛대봉에서 금줄 넘어가는 사람들 눈이 벌개서 볼게 아니라 케이블카 반대서명 이라도 받고 있어야

하는게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밖에서 비박하는 사람들 뭐라고 할게 아니라, 산장을 증설해서 산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수용할

계획을 세워야 마땅하지 않을까? 지금의 산장이 수용인원 부족으로 예약 시스템이 비정상적 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알것 아닌가... 환경을 생각한다면, 부디 일관성 있는 정책을 취해주기를 바랄뿐이다.

 

 

 

 

국립공원 대피소 실태

 

2010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신영수 의원이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총19개 대피소 중 12개소를 직영으로 운영하며 이 중 9개소는 인터넷 예약제로, 나머지 대피소는 선착순으로 운영하고 있다.

 

신 의원은 “대피소의 주요기능 첫 번째는 탐방객의 안전관리 및 조난자 구조라고 명시돼 있지만 현실은 구조자가 발생할 것을 대비한 공간은 확보하지 않고 오로지 일반 예약자와 먼저 찾는 손님에게 모든 공간을 제공한다”며 “이는 규칙에 어긋난 변칙운영이며 탐방객의 안전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꼬집었다. 신 의원은 최근 지리산을 종주하던 한 중년부부가 다리부상을 입어 대피소(벽소령)를 찾았지만 대피소측이 수용인원이 초과했단 이유로 숙박을 거절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신 의원은“어떻게 더 큰 부상을 피하기 위해 대피소를 찾은 사람을 수용인원이 초과되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문전박대 할 수 있느냐”며 부상자 관리에 최우선으로 만전을 기해야 할 대피소가 오히려 부상자는 외면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공단에 따르면 2007년 1월1일부터 입장료를 폐지한 후 국립공원의 탐방객 수는 입장료를 징수하던 2006년(2100여만명)과 비교했을때 급격히 늘어났고 지난해 탐방객 수는 3554여만명으로 3년만에 무려 1400만여 명 증가했다고 하는데, 입장료 폐지 이후 산꾼들이 늘었다고 생각하는 발상은 참으로 어리석지 않을수 없다. 아마 행락들이 약간 늘었을 가능성은 있다. 신 의원은  또한 "대피소를 예약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며 "탐방객 수가 계속 늘어가는 상황인데도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대피소 및 야영장 수용능력 확대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출처 :: 인터넷 뉴스기사 인용>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

 

 

아... 저 국공파 요원... 대충 하다 내려갈 것이지, 근무수칙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ㅎ

금줄을 조금이라도 넘어서 있는 사람들 죄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금줄과 상관없이 사진찍으러 바위봉우리 올라간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오라 소리친다. 훔...

산객들이 누려야할 우리나라 산에 자기들 마음대로 줄을 그어놓고 그 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듯 눈을 부라리는

공단과 요원의 행태가 우습기만 하다. ㅎ

 

 

다시 생각해본다.

국립공원에서 법적으로 비지정 구간은 어디인가?

지정구간이랍시고 금줄 그어논 곳만 출입가능 지역이면 우리나라 국립공원 전역이 출입금지구역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국립공원에서는 지정된 탐방로만 허용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네들 생각이고...

자연공원법에는 분명히 통제금지 구역의 명칭, 구역, 목적, 기간을 정확히 명시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반대로 통행금지 구역이 아닌곳은 비지정으로 묶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저 요원 처럼 금줄에 걸친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게 위법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따진다는 것은 웃기는 소리라는

것인데, 원칙에 충실한 공익요원이 조금전 놓친 화성연쇄살인범에만 분개해 하고 있는데 뭘 알겠는가...  ^^

 

 

 

  

바위에 올라가 세석평원(습지구역)을 통해 청학으로 스며드는 산객이 없나 감시하는 요원 (원안)

수시로 바위뒤에 숨어서 (복장도 위장복장이고 보니) 지나가는 산객들을 노리고 있다.

이때 요원이 숨어 있는줄 모르고 청학연못에서 올라온 부부 산객이(네모) 요원의 단속에 그대로 걸리고 말았다.

이러고 보니 지난주 배낭을 촛대봉에 두고 청학을 찾으러 다녀온 나의 행태가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나 다시금 생각해

본다. 저렇게 열심인 요원이 경계근무를 서는 촛대봉을 겁도 없이 넘나들었다니... ㅎ

 

 

이렇게 요원이 숨어서 단속하는데 재미붙히고 있는가운데....

촛대봉에서 청학으로 내려가려는 산꾼들이 삼삼 오오 몰려들고 있다.

어리숙한 내눈에 척봐도 촛대봉에서 방황하는 산꾼들은 죄다 잠복근무중인 요원의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

이런 산꾼들을 매일같이 보는 요원의 눈에는 얼마나 가소롭고 재미있을까... 저러니 안가고 놀지... ㅎ

한편의 코메디가 따로 없다. ^^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이제 남은 시간은 거림으로 바로 내려가면 딱 맞을 시간. ㅡ,.ㅡ

지난주에는 예습을 못해서 헛탕을 쳤고...

오늘은 불타는 책임감과 사명을 가지고 단속에 재미를 붙힌 열혈요원 때문에 시간을 다 소비해 버렸다.

아 ~  청학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 일까...

또 언제 다시 올수 있을것인가..

 

 

천근만근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걸음을 세석으로 돌린다. 터벅터벅...

눈치를 보며 기다리던 다른 분들도 난감해 한다.

이제 그분들도 하산 제한시간에 걸린 상태... 경험많은 요원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다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다.... 에이~ 오늘은 틀렸네.. 나는 가네..

가내소의 전설이 이렇게 만들어 졌던가...ㅋ

 

 

산꾼들에게 알리노니 주말 낮시간에 도장골이나 촛대남릉을 타고 청학을 거치게 되면 절대로 촛대봉으로 오지 마시라.

아주 유능한 요원이 잠복근무를 서고 있으니, 알아서 세석으로 헤쳐모이시기를... ^^

 

 

그리고 오늘 비지정을 변론하고 옹호를 하였지만, 청학연못을 보지않으면 정말 미치겠다 하는분 아니면 괜스레 잠복

근무중인 국공파 요원들 만나서 기분 상하지 말고 정규 등로로 오르시기를 권해드린다.

 

 

 

 

 

앞으로 산에 갈때 예약을 하고 가야 하나?

 

환경부는 2009년 1월15일 ‘국립공원 구역조정 및 자연공원 제도개선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추진일정은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검토하고 연말에 자연공원법 개정안을 정기국회에 상정시키겠다고 못 박았다. 자연공원 제도개선 추진 항목에서 환경부는 “특별한 보전이 필요한 지역을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겠다. 또한 탐방계획지구(Eco-Village)를 신설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정상이나 능선 등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지역은 예약입산제를 실시하겠다”며 구체적인 방안까지 발표했다.
 

2007년 9월 공단은 국립공원 특별관리대책을 발표했었다. 공원 관리사무소가 시행하는 등산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보여야 입산시키는 이수증확인제, 입산예약제, 공원별 1일 총량 인원제, 입산시간제, 주민등록번호 2부제, 국립공원별 휴식일제, 정상등산료 징수, 능선통과료 징수를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90년대에는 국립공원협회와 공단, 내무부 등이 주축이 되어 거의 해마다 입산예약제를 제안했다. 2000년대는 국시모, 우이령보존회 등의 환경단체와 산악계가 나서고 있다. 1997년부터 공원입장료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공단 직원수의 약 60%에 해당하는 약 800명의 직원들이 하던 업무가 증발해버렸다. 또한 공원입장료로 충당하던 직원 봉급도 문제였다. 그래서 공단은 국립공원에서 새로운 할 일을 찾아야 했다. 국고지원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단은 입장료 폐지로 입산객이 늘어 국립공원이 위기에 놓였으며, 불법행위 단속과 등산통제가 시급하여 직원 수가 모자란다고 홍보했다. 신문과 방송은 공단이 내준 보도자료 그대로 보도했다. 그러자 공단은 입산예약제 시행, 정상 입산료 별도징수, 특별보호구 지정 등을 시행하겠다고 한 술 더 뜨며, 입산자수 자동계측기와 CCTV 감시탑을 설치했다.

 

공단은 지난 1월15일자로 특별보호구 시행 변경공고를 내고 특별보호구를 확대했다. 자연휴식년제 구역으로 조만간 개방예정이던 점봉산 일원, 설악산 화채능선, 마등령~미시령, 용바위골~냉천골 코스다. 가야산은 최고봉인 상왕봉, 그리고 이웃한 동성봉 일대다. 월악산은 무위사~미왕재 구간. 점봉산, 미시령 등 백두대간 구간조차 입산예약도 안 통하게 아예 출입을 봉쇄시켜 버린 것이다. 대간령~신선봉~미시령~마등령 구간과 한계령~점봉산 구간의 백두대간과 한계령~가리봉~쇠밭골, 설악동~권금성~화채봉~대청 등의 능선종주 코스를 막아놓고, 2~3시간의 반나절 가벼운 관광코스로 오색 주전골, 흘림골 코스를 개발했다. 등산을 막는다는 게 국립공원 이용정책의 실체인 것이다.

 

<출처 :: 월간산 부분발췌 - 이장오 아름다운산하(전 국립공원시민연대) 사무국장>

 

 

 

 

환경문제를 거론 한다면 칠선계곡을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칠선계곡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쪽 마천면 추성리까지 9.5km 길이로 뻗은 지리산 최장의 계곡이다. 중간에 9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암반지대들이 산재해 경관이 뛰어난 한편 식생도 풍부해 등산동호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공단은 99년 4년 기한으로 이 계곡에 휴식년제를 처음 적용했다. 4년 후인 2003년 1월 공단은 3년을 연장한 데 이어 2006년 초 2년간 재연장, 총 9년간 휴식년제로 묶었다. 여기에 올해 초 재연장하려 하자 주민들이 참지 못하고 집단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추성리 주민 130여 명은 9년간 등산객들 발길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하며 많은 주민들이 빚을 지는 신세가 됐다며 더 이상의 연장은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추성리 주민 허상옥씨는 “공단은 그간 공단과 밀월 관계를 맺어온 국시모(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의 운영위원직을 맡고 있는 학자에게 칠선골 자연 생태계 조사 용역을 의뢰했는데, 이는 미리 공단이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시작한 조사가 아니겠느냐”며 공정성을 가장하고 관리상 편의만 도모하는 공단을 비난했다. (채식주의자에게 육식에 대한 평가를 내려달라고 한다면 어떤 답이 나오겠는가?)

<출처 :: 월간 산 부분 인용>

 

 

지리산 생명연대는 "지역주민들이 말하는 '환경단체 때문에 공단에서 개방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그동안 민원에 대해서 솔직하고 적극적인 해결에 나서지 않고 '환경단체의 저항' 등을 바람막이로 삼아왔던 태도에 기인 한다"며 "이런 식의 태도는 임시방편으로 책임회피는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가려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인터넷 뉴스 부분인용>

 

 

여기서 이해할수 없는것은 대한산악연맹 이라는 단체다.

얼핏보면 산꾼들을 위한 단체 같은데... 아래는 지리산 매니아 '중봉'님의 글과 월간 산의 기사를 일부 인용한다.

 

 

칠선계곡 개방문제로 관리공단에서 공청회를 마련했을때 마을주민,환경단체와 함께 산악인 대표로 대한산악연맹을 초청했다고 합니다.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아니면 관심이 없었는지, 연맹에서는 참석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바위,빙벽을 하는 소위 전문 산악인은 워킹만 하는 등산 동호인을 날라리로 무시합니다.

지리산 종주 100회, 1대간 9정맥 종주보다는 히말라야 원정 한번이 더 대접을 받는 실정입니다. 공단에서는 지정 등산로인 탐방로만 다니라고 하지만,
박제된 지리산을 찾는 것은  관광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칠선계곡은 2027년까지 계속 통제 구간으로 남게 되었다. <출처 :: 부분인용-지리산꾼 중봉님글>

중봉님의 의견은 나 역시  무척 공감이 가는 내용 이다. 희말라야만 올라야 산꾼인까? 각자의 입장이 다르겠지만 일반 산행을 즐기는 나는 희말라야 14좌 완등보다는   1대간9정맥 하신분이 훨씬 더 존경스럽고 대단해 보인다.  

 

 

대한산악연맹은 2008년 11월15~16일 1박2일간 환경보전위원회 워크샵을 열었으며, 전국 시도연맹 환경보전위원 15명이 참가했다. 백두대간 종주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위원들 상당수가 등산로 훼손과 쓰레기오염 방지방안으로 입산예약제와 가이드동행제를 제안했다. (산꾼들을 위한 연맹이 맞나?)

 

송윤기 위원(울산연맹)은 “뒤도 안 돌아보고 빨리 가는 팀들이 있다. 이건 막무가내식 노가다다. 쓰레기도 버리고 있어서 훼손과 오염이 계속되고 있다”며 “대책으로 인증교육을 받은 가이드가 있는 단체만 입산예약제로 종주케 해야 한다. 코스에 따라 인원을 제한해야 한다”며 “국립공원 구역이든 공원 밖이든 백두대간 입산은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게 좋다”고 발표했다. 또한 송 위원은 “현재 중앙연맹에서만 가이드 인증교육을 하고 있는데, 전국 지방연맹에서도 교육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해용 위원(충북연맹)은 “새벽에 입산하는 경우 많다.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것은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 주말에 몰리지 않게 주말에는 사전 입산예약제로 인원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인규 위원(서울연맹)은 “입산허가제와 가이드동행제를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현 위원(중앙연맹)은 “가이드는 교육인증 수료자에 한해 해야 한다”고 가이드의 자격을 말했다.

 

백두대간 입장료 징수방안도 제시되었다. 권용주 위원(충남)은 “지난 날 국립공원처럼 백두대간 입장료를 징수하여 인원을 줄일 수도 있다. 입산자에게는 가이드를 동행케 하여 불법을 방지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환경보전위원들이 말하는 가이드인증 교육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산림청은 2007년 1월 ‘국가등산로 지정 관리계획’을 발표했다. 백두대간과 정맥에 등산로를 지정하고 등산로만 이용케 하며, 그 외의 등산로는 레인저를 파견하여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두대간과 정맥 종주는 산림청이 시행하는 인증교육을 받은 자이거나 인증교육을 수료한 가이드를 동행하여 입산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림청 등록단체인 한국산악회가 산림청으로부터 예산을 배정받고 가이드 인증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등록단체인 대한산악연맹도 가이드인증 교육에 나서고 있다. 양대 산악단체가 국립공원과 백두대간의 입산예약제 필요성을 인정한 셈이다. (누구를 위한 가이드 동행제 인가?)

 

가이드 인증이라며 이론교육 받았다고 자격이 갖춰지는 걸까? 등산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에 기상조건 등 여러 상황에서 산에서 직접 터득할 수 있는 체험이다. 정부기관에서 예산을 준다고 한국 산악계가 가이드 1급, 2급 자격증을 줄 수 있는 것일까? 그냥 ‘등산 소양교육 이수증’이라면 모르지만-.

(한쪽눈을 감고 대충봐도 양대 산악단체 라고 하는 두 단체에서 가이드동행제와 입산예약제를 주장한 목적과 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분출처 :: 월간 산 - 이장오 아름다운산하 (전 국립공원시민연대) 사무국장>

 

 

 

 

 

 

자연휴식년제는 사기극

 

자연학습 탐방로와 생태관광제도도 입산예약제처럼 줄기차게 제안되어 왔다. 환경부가 특별보호구와 생태관광을 자연공원법에 법제화하겠다고 공언했다. 자연휴식년제는 사기극이다. 시행 18년이 지났건만 등산로가 자연회복이 이뤄진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당시 공단은 등산로가 훼손되고 있다는 국민들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자연보호대책을 세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성 행사인 것이다. 3년 주기의 전시성 행사를 영구 통제하겠다는 게 특별보호구다. 역시 사기극인 제도를 자연공원법에 법규화하겠다는 것이다.

<출처 :: 월간 산 - 이장오 아름다운산하(전 국립공원시민연대) 사무국장>

 

 

 

 

 

알만한 사람만 아는 잔돌평원의 어느 바위

 

 

이제 시간도 부족하고....

세석산장을 지나서 허탈하게 걸어가며 펜으로 그려간 지도를 꺼내본다.

에효...빨치산 특공작전도 아니고 이건 뭐하는 짓거린지... ㅡ,.ㅡ;;

 

알바는 커녕 그냥 걷기에도 넉넉치 않은 시간,,,,

거림까지 뛰어갈 생각을 하고 나침반 하나만 믿고 최후의 선택을 한다.

거림 갈림길... 그곳에서 청학연못을 향해 직진을 한다.

지금은 사라진 옛길로 추정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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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없고 정글만이..,.

거림갈림길에서 청학까지 방향만 잡고 직진을 한다.

작은 계곡을 몇개 지나고, 무조건 직진... 

나무키가 제법 높아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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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숨어 있었더냐...

험난한 여정을 생각하니 감동을 넘어 눈물이 나려고 한다.

 

 

 

 

하.... 이눔아...

너 보기가 이렇게 힘들줄이야... 반갑구나

 

 

 

 

 

청학연못과 주변을 기록한 귀중한 문헌자료

 

무자일(8월 5일)에 거림촌에서 미금동(美禽洞)[*현 청학연못 아래에 위치했던 옛 마을 터]으로 갔는데, 지(誌)에서 말하기를 ‘두류산 남쪽 산기슭에 푸른 학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었는데, 동(洞)의 이름이 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옷을 벗고 관을 벗고 몸을 굽혀 20 리를 가서 중봉(中峰)[*촛대봉으로 추정]에 이르렀다. 꼭대기에 있는 석각(石刻)은 고려(高麗)의 낙운거사(落雲居士) 이청련((李靑蓮)이 열 글자를 쓴 것인데, 필력이 고풍스러우면서도 건장하다.

 

왼쪽에 도장동((道藏洞), 오른쪽에 적석평(積石坪)[*세석]을 두고 동북 쪽 사이로 우뚝 선 것이 천왕봉이다. 남쪽으로 뭇 산들을 바라보니 언덕 같고 말(斗)을 엎어놓은 것 같다. 여러 산 밖에는 하나의 큰 바다가 있는데 하늘과 물이 서로 맞닿아 다만 하나로 파랗게 보일 뿐이다.

남쪽으로 내려와 몇 리를 가서 만경대(萬景臺)[*청학연못의 바위]에 이르렀는데,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적석동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노송나무(편백나무)가 많고, 잣나무가 많고, 푸른 명아주가 많으며, 반은 상수리나무이다. 이곳의 풀은 청옥, 당귀, 작약, 사삼 같은 부류로 다 적을 수가 없다.

 

돌에 ‘학동[鶴洞]’ 두 글자를 새겼고, 그 아래 또 ‘임[壬]’자를 새겼는데, 같이 간 사람 가운데 권씨 성을 가진 이는 바로 산 아래 사는 사람이지만 오늘에야 처음 보았다면서, ‘옛부터 전해오기를 청학동은 동해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이인로 이후 숨어사는 이들을 몰래 찾던 사람들을 헤아려보자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끝내 찾지 못하였으니 이곳이 도원경이라는 설은 황당한 이야기에 가까운 듯하다’고 말하였다.

 

<출처 :: 1851년 하달홍의 두류산기>

<옮긴이 :: 박해당 / 자료출처 :: 지리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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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올리려다 같은 버스를 타고 산행하신 분의 사진을 보다가 쓰러질뻔했다....

그분은 나보다 15분 가량 늦게 청학에 도착하여 사진을 담았는데... 코스를 보니 촛대봉에서 바로 청학으로... 헛

그럼... 내가 촛대봉에서 철수하자 마자 그 열혈요원은 촛대봉을 사수하지 않고 바로 하산을 해버렸다는 말인가?? ㅎ

책임감이 투철한 요원으로 생각했건만... 덕분에... 나만 죽어라 고생했다. ㅋ

 

 

 

 

만경대(슬랩바위) 상단 소나무 밑에 있다는 '학동임' 이라는 파자를 찾을 겨를도 없다. 

 

 

 

 

청학연못 이야기

 

세상사람들은 청학동을 세세히 모르듯이 숨어있는 청학연못은 더욱 모른다. 지리산 구석구석 누빈 산꾼들 조차 청학연못 이름조차 생소하다고 한다.

찾아서 가본 사람은 더욱 드물다. 세석고원의 절묘한 곳에 숨어있어 아무나 쉽사리 찾을수 없도록 천왕할매가 진법을 펼쳤다고 한다.


우주의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청학동으로 빨아들이는 구멍이지 않을까 허풍도사는 말하고 고운동의 수도꾼 원만선사는 옛날에 세석에 사는 선인이 만들어 노닐던 곳이란다. 주위로 야생 잣나무 삥 둘렀고 멸종 직전의 지리산 세발당귀가 여기와서 밭을 이뤄 살고 있었다.
 

몇년전 MBC <청학동을 찾아> 프로에 첫모습을 나타 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만은 감춰 놓았다. 촬영 당시에 신비한 일이 몇번 있었다. 조립하여 세워놓은 아주 무거운 찰영장비가 갑자기 나둥그라지고 연못을 가로 질러 물줄기가 하늘높이 솟구쳐 올라 달려 가면서 주위를 온통 물 벼락을 맞게 했다 한다. 다들 혼비백산 했는데 거대한 뱀이 연못에서 나와 맞은편 바위로 사라진줄만 알고서는 멍하니 한동안 넋을 놓았다. 한참 지나서야 모두들 정신 차려 생각해 낸건 동해의 용오름 현상을 닮은 힘이 아주 센 소시랑 바람이 청학연못 수면에서 일어났다고 믿을수 밖에 별도리 없었다.


또하나 이상한 일을 겪은 것은 헬리콥터를 전세내어 청학연못 위를 돌았는데 연못 바로 위에서도 찾지를 못해 서너바퀴 너댓번 돌아와서야 겨우 청학연못 찾아 내자 조종사도 어이없는지 혀까지 찼다

 

<출처 :: 인터넷>

 

 

 

 

 

 

청학은 없고 

 

올챙이만 가득하다... 

 

 

 

 

 

 

 

 

 

 

 

 

 

 

 

 

 

 

 

 

 

 

거림갈림길에서 어떻게 청학까지 찾아 왔는지 밝히는건 무의미 하다.

다만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에 그저 정글 숲속을 직진한것뿐...

 

 

 

전설의 고향 청학동은 서양으로 말하면 에덴의 동산이자 파라다이스 이며 동양에서 보자면 별유천지비인간과 같은

개념이다. 유독 난리도 많고, 정변이 많았던 우리 역사, 그 수많은 부침의 시련을 피해서 찾은곳이 바로 청학동 이다.

 

청학연못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청학동의 전설

 

옛날에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나무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쫓아가다 어떤 굴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곳은 캄캄한 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 나무꾼이 한사람을 붙들고 이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 사람이 옛날에 세상의 난을 피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무꾼은 푸짐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나무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학연못이 있는 세석이야 말로 진정한 청학동의 이상향이 분명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고 그렇게

생각했던 과거의 옛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또한 많은 분들이 현재의 쌍계사, 불일암이 있는 지역을 청학동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다.

 

 

 

쌍계사 불일암 일대를 청학동이라 생각한 기록

 

청학동을 찾아 몸을 숨긴 가장 오래된 사람은 신라가 망할 무렵의 최치원(崔致遠?857∼?)을 들 수 있다. 조선 선조때인 1619년 하동 악양에서 먹글씨가 마르지 않은 최치원의 싯귀가 발견되었다고 소동이 날 정도로 지리산에 숨어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조선왕조 연산군 때 무오사화 피해로 유명한 김일손(金馹孫?1464∼1498)도 청학동을 찾은 기록이 있다. 그는 하동 화개골짜기의 불일암을 찾아가 이곳 스님으로부터 '몸둥이가 푸르고 목이 붉고 다리가 긴 새떼들이 6월이면 이 암자곁 학연(鶴淵)에서 목을 축인다'는 말만 들었을 뿐 확인하지 못했다.
화개사람들은 이곳 계곡을 청학동으로 믿는다. 쌍계사(雙溪寺)란 '두 시내사이에 있는 절'이란 뜻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쌍학형국을 이뤘고 이 절을 지나가야 청학동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절 어귀에 <石門>이라고 각자된 돌문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절 위 불일암 곁에 있는 폭포를 '청학동 불일폭포'라고 부른다. 김일손의 얘기를 사실화 한 것일뿐 이곳 스님이 김일손에 설명한 학은 일반 두루미와 새일뿐이지 중국 <십유기>에 나오는 청학과는 너무나 다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청학동은 진주에서 서쪽으로 1백47리에 있다'고 못 박고 있다. 이곳은 오늘날 불일폭포주변을 이른것같다. 이 대목 때문인지 1618년 나주에서 태어나 중이 된 침굉스님(尹縣辯?枕宏)은 불일암을 중심으로 <청학동가>라는 글을 남겼다.

 

<출처 :: 운조루>

 

일반적으로 지리산에는 청학동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탁영 김일손도 그의 유람기인 「두류기행록」에서 “쌍계의 동쪽 수 리에서 마을 하나를 찾았다. 넓고 평평하여 농사를 지을 만하다. 세상에서 청학동이라 여긴다.”고 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도 역시 탁영이 한 말과 같이 칭찬하였다. 내가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곳은 불일암 근처 땅이고 암석이 많고 계곡이 깊어 사람들이 거주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세석평이 청학동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산이 험난한 곳에 있으니 만약 산성(山城)이 아니라면 역시 절이 들어서기가 적합한 곳이다. 악양(岳陽: 경남 하동군 악양면) 땅이 크고 평평하며 넓어서 이 지리산 내에서는 거주할 만한 지역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세석평을 보니 산의 정기가 모여있으며 남쪽으로는 일백 리를 달려 악양에 당도하여 그친다. 주변을 삥 둘서 싼 형태를 하고있으며 백운산*[광양 백운산]을 마주보고 섬진강을 허리로 두르고 있다. 미수 이인로가 말한 청학동이 이곳에 있지 않겠는가?


<출처 :: 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

 

 

또한 김종직은 그의 저서 두류록에 남긴바와 같이  연곡사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내동리 일대를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내려가는 길 - 어느 이름모를 님의 노란색 리본을 만나고

 

예습하는데 도움을준 빛고을 노스페이스 산악회 청이당님의 비닐리본도 발견한다. 

 

 

 

 

 

 

 

 

 

 

 

 

 

 

 

 

 

 

 

 

 

 

 

 

청학연못을 떠난지 20분만에 주등로에 접속을 하고 거림으로 신속하게 하산을 한다. (17시)

촛대봉 다녀오느라 1시간 이상 낭비한것 치고는 생각보다 빨리 내려왔다.

하산을 완료하고 계곡물에 시원하게 땀을 씻고 옷을 갈아 입으니 비로소 본의 아니게 금줄을 넘어야 했던

오늘의 비등 탐구산행을 마친다.

 

 

 

 

지리산 세석인근 비경지도 (영신대, 창불대, 영신사지, 청학연못)

 

산행경로 :: 거림 -  갈림길 - 음양수 - 창불대 - 영신봉 - 영신사지 - 촛대봉 (시간낭비) - 세석 - 거림갈림길 -

                청학연못 방향으로 직진 - 청학연못 - 거림

 

 

버스앞에서 뒤풀이를 하면서 중산리에서 출발한 A코스 멤버들을 기다리는데 몇분 외에는 다들 중산리로 하산을 했다고

한다. 사연인즉, 중산리에서 출발한 산꾼들이 워낙 많다보니 정상에 오르는데 많이 지체가 되고 결국 주어진 시간에

세석으로 돌아 거림으로 하산을 할수가 없게되자 중산리로 되돌아 온것이다. 우리는 중산리 - 세석 - 거림 코스에 8시간을

할당 하였는데, 요즘 주말 중산리 코스에 산꾼들이 많으니 산행계획을 세우는 분들은 참고를 해야만 할것이다.

 

 

이 글을 포스팅 할것인가 말아야 할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하였다.

아무리 빨간불도 심야에 차없고, 사람없으면 지나간다지만, 비지정 다닌게 뭐 자랑할일도 아니고, 또한 인터넷 자판만

두드리면 청학연못이니, 창불대에 관한 자료가 줄줄히 나오지만, 나 또한 일조를 하여 통제된 비경을 공개하는게 옳은

일인가...를, 하지만 이날 촛대봉에 몇십분 앉아 보니... 청학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경... 이글이 악용이 될지

선용이 될지는 그네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같은 이유로 산행경로와 지도 또한 함께 올린다. 어차피 다 나와있는

지도, 내가 지도라고 깨작거린게 뭐 별거라고 숨길것도 없고, 숨긴다고 숨길일도 아니거니와 나는 이렇게 다녀왔는데

당신들은 가지마시오 라고 말할수 없는것 아닌가.. 법을 확대 해석 하면서 까지 열심히 단속하는건 요원들의 몫이고,

단속의 대상이 될것인가 아닌가의 현명한 선택은 산꾼들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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