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전부터 여산인들이 2박3일로 지리산 종주를 한다고 하여 일정을 비워두었는데 여차 저차 하다보니 2박3일이 1박2일로 바뀌고, 

코스 또한 당일치기 산행으로도 가능한 백무동 원점회귀 코스로 변경이 되다보니 굳이 무거운 박배낭을 메고 산에 올라야 하는

당위성 마저 희석이 된 가운데, 그나마 마음을 끄는게 있으니 수십명이 움직이는 단체산행에서는 불가능한 청학연못을 포함한

몇몇 비경코스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꾼들에게 있어 비경 이라는 것은 대체로 통제된 구역내에 있는 곳을 말하는데, 조망이 기가막히게 좋은곳 이거나 용아릉 같은

스릴넘치는 곳 이기도 하겠지만, 이번의 경우는 스스로가 비처에 대해 공부를 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만이 비경으로써 가치가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 비경으로써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솔직히 아무런 가치나 감흥을 자아낼만한 그런 곳은 아닌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바위, 작은연못, 사라진 암자터, 작은굴 등은 스스로가 자료를 찾아보고 의미있는 시선으로 보아야만이 비경이 될 수

있는것 인데, 결론적으로 이번 산행에 참여한 멤버들은 이미 다녀와서 흥미가 없는 분 이거나 비경(?) 자체에 별다른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분들 이라서 결국 배낭무게에 짓눌린 그들의 몸과 마음이 굳이 힘들게 비경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외면케 하고 말았다. 

 

 

결국 이번에 계획했던 모든 비경들은 다음에 가벼운 배낭을 메고 당일치기로 진행을 해야겠다는 또 다른 계획만 세워주고 실패로

끝이 났고, 비박을 하며 가장 기대했던 아름다운 일몰과 환상의 일출 또한 구름과 연무로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만 영신대에서

침낭속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의 총총한 별들과 이튿날 낮에 해가떠서 안개를 걷어내니 비로소 눈부시게 화창한 오후에 간만에

찾은 연하선경의 아름다움은 힘들게 지리를 찾아와 헛탕을 치고 돌아가는 지친 심신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

 

 

 

백무동 통제소 앞에서 이번 산행에 동참한 불량감자 여섯 (12시14분)

 

 

 

 

백무동의 유래

 

원래 100명의 무당이 거처하던 골짜기라 하여  백무동(百巫洞)이  원이름이던 것이 와전되어 백무동(白武洞)으로 변해 있다고 한다.  또는 안개가 뒤덮고 있다고 하여 백무동(白霧洞)으로 일컫기도 했다. 현재는 백무동(白武洞)으로 쓰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이다.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 산신인 여신 성모가 천왕봉에 살고 있었는데 그 성모가 남자를 끌여들여 교회(交會)를 해서 100명의 딸을 낳아 세상에 내려보냈는데 이 100명의 무당들이 팔도로 퍼져나간 출구가 백무동이라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백무동에 항상 100명의 무당이 상주하면서 천왕봉의 성모여신을 모셨다고 한다.

 

 

 

오도재에 내려 오도봉쪽으로 10여분 올라가면 있는 관음정에 올라 지리 주능선을 감상하였다.

지난번 삼봉산 일주 할때처럼 멋진 조망을 기대하였는데 이날은 연무로 인해 조망이 썩 좋지 않아 아쉬웠다.

지난 2월달에 관음정에 오를때만 해도 정자에 문제가 없었는데, 군데 군데 마루가 뜯겨나가 구멍이 나서 보수를 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부득이한 스케줄로 이번 산행에 동행하지 못한 꿈산형이 이번 산행팀을 속리와 불량감자들 이라고 하였는데 산행내내

불량감자란 용어가 서로간에 통용이 되고 말았다.

 

 

 

 

25키로가 넘는 무거운 배낭을 지고가는 푸름과 속리...

날이 워낙 좋아서 텐트가 필요 없었는데, 그 무게만 덜었어도 조금 더 편했을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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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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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배낭 무게로 인해 느릿느릿 걸어가며 걷다 쉬다를 반복한다. 

무거운 맥주들은 그때마다 앞을 다투어 배낭을 빠져나와 땀으로 증발을 하고....

우리는 몇번의 출렁다리를 건너며 한신지곡 갈림길까지 진행을 한다.

 

 

 

 

 

한신계곡의 유래와 한신지곡

 

한신계곡의 이름에는 몇가지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그중 하나는 신라화랑 한신에 관한 것이다. 신라화랑 한신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를 만나서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이후로 비가 내리면 혼령들 꽹과리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 전설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한신계곡 이라고 하는데, 한신계곡은 등로에서 벗어난 가파른 곳에 있어서 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또 다른 이름의 유래로는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 해서 한신계곡 (寒身溪谷) 이라고도 하며, 또한 옛날 중국의 장수 한신이 잠시 몸을 피했던 곳이라 해서 한신계곡 (漢信溪谷) 이라고도 한다.

 

한신계곡은 백무동계곡의 상백무 마을 위쪽 골짜기를 말한다.  이 계곡은 중간에서 한신주곡과 한신지곡으로 크게 갈라지는데, 세석으로 곧장 이어진 계곡이 한신주곡, 장터목으로 이어진 계곡이 한신지곡 으로 현재 한신지곡은 안전시설이 안된 비지정 구간이다. 아름다운 한신계곡은 2010년 국가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이 되었다.
 

 

 

 

 

 

 

 

 

 

 

 

 

 

 

 

 

 

 

 

한신지곡 갈림길을 지나 한신계곡으로 접어들자 마자 오른쪽 아래로 가내소 폭포가 나온다. (13시34분)

지난번 보았을땐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스런 시커먼 물색이었는데 오늘은 그래도 좀 만만해 보인다. 

 

가내소의 전설

 

먼 옛날 한 도인이 12년 수행의 마지막 시험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묶고 눈을 가린 채 건너가고 있었다. 

이를 본 지리산 마고할멈의 셋째 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해 물에 빠뜨렸다. 이에 도인은

“에이~ 나의 도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 하고 탄식하며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가내소

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내소 폭포

 

 

 

가내소 폭포는 여인전용 목욕터?

 

한신계곡의 맑은 물은 천왕성모 젊음의 비결 이었다고 한다. 옛부터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한신계곡의 맑은물에 피부미용에 관심있는 여인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중 옛부터 가내소 폭포는 여성 전용 목욕터 라고 하는데 그곳엔 나름대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가네소는 옛부터 기우제를 지내왔던 영험한 장소인데, 이곳에서 기우제를 주관할 여성들은 우선 목욕재개를 해야 하고 그 다음엔 알몸에 속치마만 걸치고 방망이를 두드렸다고 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일수록 기우제 효험이 크다는 믿음도 있었다니 12년 도를 닦고 마지막 시험을 넘지 못하고 반라의 지리산녀에 혹해 가내소의 유래를

남기고 떠난 도인이 나올법도 하겠다.

 

 

 

 

 

가내소 폭포를 지나니 풍덩 뛰어들고픈 아름다운 작은 폭포들이 기다리고 있다.

 

 

 

 

한신계곡의 명소 오층폭포는 등로 아래의 계곡에 숨어 있다.

층층히 용소를 이루며 떨어지는 폭포는 참으로 아름다운데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는 일행들 누구도 계곡으로

내려가 폭포구경을 하려 하지 않는다.  계곡아래엔 벌써 하산중인 십여명의 등산객들이 폭포위 암반에 앉아

한신계곡의 절경을 감상하고 있다.

 

 

 

 

선두팀 두명과 함께 커다란 바위가 폭포를 이루는 곳에 배낭을 내리고 세족을 하며 쉬어 간다 (16시40분)

30여분을 기다리니 후미팀 불량감자 일행이 도착을 한다.

 

 

 

 

불량감자 일행이 도착을 하고 나서 5분뒤에 산행 초입부터 불량감자팀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가던 세명의 여인네들이

도착을 한다. 일명 서울산 불량감자 팀이다. (17시05분)

 

 

세명의 여성분은 지리산행이 처음인지... 박산행을 나왔는데, 어째 차림이 너무 간편해 보인다. 누군가 물어보니 산장 예약은

안했고, 짜파게티 하나 챙겨서 침낭만 배낭에 달고 올라간다고 한다. 가벼운 차림으로도 무거운 배낭을 멘 우리팀 불량감자

보다 걷는속도가 느린걸 보니 이 서울 여자분들이 얼마나 산행에 초보인지 알수가 있다. 결국 한신계곡 마지막 1키로 처절한

깔딱고개에서 이분들은 힘겨운 사투를 벌이게 되고 우연히 만난 산악회 동료분 두명을 포함해 건장한 남자들 세명이 세석에

올라와서 배낭을 내려놓고 이분들 구조활동에 투입된다. 덕분에 영신봉에서 한시간 이상을 기다리게 되고 비박터로 예정된

영신대의 잠자리는 다른팀에게 양보를 해야만 했다.

 

아무리 지리산이 밋밋한 산이라 해도, 그리고 산 능선에 산장이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만 하는데 이처럼 준비없이

무턱대고 큰 산을 찾는 것은 삼가를 해야만 할 것 이다. 자신들의 체력을 고려해야 하고, 특히나 비박을 하려하면 음식물등

꼭 필요한 준비를 해서 산에 올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수가 있다는 것을 이분들은 이번 기회에 깨달았을 것이다.

요즘같이 산에 다니기 좋은 날 주말 산장은 많은 인파로 북적대고, 이분들이 잠을 자려 했다는 취사장은 물론 산장 앞 마당까지

다들 자리를 펴고 눕기 때문에 적어도 매트리스 정도는 준비를 했어야 했다.

 

 

 

 

세석평원엔 아직도 지지 않은 연분홍 철쭉이 예쁘게 피어 있다.

 

 

 

 

세석 취사장은 물론 데크 앞쪽은 극심한 혼잡을 보이고 있고, 앞마당 헬기장에도 서둘러 비닐을 깔고 자리를 만들고 있다.

이마저도 늦게 도착하면 세석 앞마당에 조차 자리를 펼 수 없기 때문이다.

 

걸음이가 백무동에 오후 3시20분에 도착을 하였는데, 백무동 통제소에서 너무 많은 인원이 산을 올랐다고 3시부터 출입을

막고 있는 통에 대전서 백무동 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야 했을 정도로 이날 지리산엔 많은 산객들이 찾아 들었다.

 

 

 

 

세석을 일별하고 영신봉으로 오른다. (클릭)

 

 

 

 

영신봉에 오르며 바라본 천왕봉-제석봉-촛대봉-세석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 (클릭)

 

 

 

 

내가 파노라마를 만들었던 자리에 지나는 산객님이 올라서 늦은해가 비추는 지리산을 담고 있다.

 

 

 

 

영신봉 (18시20분)

 

영신봉 정상은 반대쪽 금줄 너머에 있고, 영신봉 이라 씌여있는 표지목 뒤로 창불대와, 영신대, 남부능선이 있다.

블방 이웃 숯댕이눈썹님이 영신봉을 두고 마누라봉 이라고 한것을 보니 사모님 이름이 영.신. 인가 보다 ^^

 

 

지리산에는 신(神)자가 붙은 3개의 산이 있다. 내삼신봉(內三神峯), 외삼신봉(外三神峯), 영신봉(靈神峯)이 바로 그곳이다. 지리산의 영신대(靈神臺)는 신령해서 지리산에서 최고로 영험한 기도처이자 영혼의 안식처로서 지리산 최고의 경승지다. 영신대는 대성계곡의 상류 맨 끝이자 영신봉 아래에 위치한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다. 의신마을에서 대성계곡을 따라서 1시간 정도를 오르면 대성동에 닿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영신봉과 칠선봉의 방면으로 진행할 수 있고 지리산의 명소인 영신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출처 :: 풍수칼럼니스트 노병한> 

 

 

 

 

 

영신봉에 앉아 40여분을 기다리니 우리팀 불량감자들이 도착을 하고....

서울 불량감자 팀을 돕고 있는 푸름님을 기다리는 사이에...

지리산 주능선에서 훈련이 있는지 군인들이 완전군장에 행군을 하고 있다.

 

 

 

 

덕평봉과 명선봉으로 가는 주능선 위로 짙은 구름이 드리우고....

소망했던 지리에서의 멋진 일몰은 이렇게 물 건너 가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해 잠자리라도 마련해 두려 영신대로 내려서면서 바라본 영신대

영신대위의 큰 바위의 모습이 마치 무서운 눈을한 힘쎈 역사의 얼굴 같다. 

 

 

 

 

큰세개골

 

 

영신대로 내려서면서 보니 누군가 이미 영신대에 도착을 해서 텐트를 설치 하고 있다. ㅠㅠ

얼핏보니 국방색 타프를 치고 있는 사람들이 좀전에 지나친 군인들 복장같아 내려서는걸 망설이다가 보니 산꾼들 이다.

쩝.... 영신봉에서 한시간 넘게 후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진즉 들어왔어야 했는데...

 

영신대 옆으로 통나무 다리를 건너 영신대 기도처로 가니 간신히 그곳은 자리가 비어 자리를 잡고 식사준비를 한다.

다들 아침을 먹고는 지금껏 술만 마셨지 제대로 식사를 안했기 때문이다.

 

 

 

 

잠자리를 다듬고 식사준비가 끝나고 나니 벌써 20시 40분이 넘었다.

다들 허기진 상태라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나니 그제서야 피로를 느낀듯 하나 둘 잠자리에 들어간다.

 

서쪽하늘에 짙은 구름과 연무로 일몰을 보지 못했는데 침낭에 누워 하늘을 보니 지리산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있다. 핸드폰으로 산악회에 접속하여 한줄 소감을 남기고 나도 잠을 청한다.

 

 

추천    감사

 

 

1박  2일

 

산중이라 그런지 아침 5시에 눈이 떠지고...

마음은 서둘러 출발을 하고 싶었지만 다들 아침은 분주하기만 하다.

 

지난밤 영신대에서 주무신 분들중 몇분이 큰 카메라를 들고 우리 근처를 오락 가락 하신다.

이쪽 기도터도 사진에 담고 대충 말을 들어보니 영신사지를 찾는것 같다.

영신사지는 이쪽이 아니고 창불대 아래쪽인데...

 

간밤에 별일 없었냐고들 물어보신다.

우리가 비박을 한곳은 지리산에서 가장 기가 쎈 영신대 중에서도 기도터로, 이곳에서 혼자 잠을 자려면 꿈에

꼭 할아버지가 찾아와 "너 여기서 잘래, 그냥 갈래 ~" 라고 묻는다고 한다. 

어떤이는 텐트 안으로 그 할아버지가 들어오는것을 봤다고도 하고.... 여하튼 우리는 일행이 많아서 그런지

아무도 그런꿈을 꾸지 않았다.

 

 

 

기도터 바로 옆에 있는 샘터, 용왕당 이라고 하는데 물맛이 시원하고 좋다.

 

 

 

 

기도터 위쪽의 새로운 기도터

무속인들이 돌과 시멘트로 터를 닦아놓은듯 하다.

아래쪽은 숙소로 사용하던 곳 같고, 위쪽은 제단 같은데 유사시 비박터로 사용이 가능할것 같다.

 

 

 

 

그 옆엔 큰 바위 밑에 굴이 평평한 굴이 있는데, 비가 올시에 들어가 누우면 비를 피할수 있을것 같다.

 

 

 

 

아침에 바라본 영신대 바위

 

 

 

 

대성골로 이어진 큰세개골

 

 

 

 

 

대성계곡의 대성폭포

 

'대성계곡 깊숙이 똑같은 형상의 암봉 세개가 적절한 간격으로 서있다. 그 첫째 암봉 아래 대성폭포가 장대무비하게 서있다. 지그재그 4단 폭포인데 길이가 120미터나 된다. 폭포는 왼편으로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 있고, 또 중간 부분에 100여명이나 앉아서 놀 수 있는 넓은 반석이 전망대처럼 따로 자리해 있으며, 그 뒤편엔 선녀탕으로 불리는 직사각형의 욕조 반석이 절묘하게 물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웅대한 대성폭포가 지리산 등산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또한 원시수림에 둘러싸인 암봉과 계곡미는 설악산을 방불케 한다.
영신대를 찾아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고 청정하다. 아, 대성폭포를 지나 깊은 협곡을 오르며 신선세계와 같은 선경에 얼마나 황홀해 했던가.


출처 :: 지리산 365일 - 최화수

 

 

 

지리산 대성골은 빨치산의 최후 격전지로 유명하다.

토벌대의 지리산 총공세에 빨치산들이 전부 대성골로 몰려들었다가 몰살을 당했던 피의 격전지 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대성골엔 큰 나무가 없다고 한다.

 

 

 

빨치산 몰살의 비운을 간직한 대성골

 

3개월 동안의 토벌작전 중 가장 본격적인 작전은 1952년 1월 18일 있었던 대성골 전투였다. 수도사단 3개 연대는 1월 중순부터 지리산 남쪽 산자락에서 벽소령 세석평전 일대 주능선으로 압박해 들어가는 혹한기 작전에 돌입했다.

고지대의 최저기온이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기에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적은 밀리고 밀려 주능선까지 쫓겨갔다. 그들은 1월 17일 밤 세석평전에서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大成里) 쪽으로 흘러내리는 대성골의 여러 골짜기에 숨어들었다. 눈이 한길이나 쌓인 곳이었다.

 

<출처 :: 국방일보 - 노병이 걸어온길 - 대성골전투>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 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의 방면에서 빨치산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힌 대성골 전체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순덕(정순덕)이 가늠하기에도 1만 명의 대병력이 대성골에 빽빽히 들어찬 것이다.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스무 발 이상이 동시에 작렬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 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체들이었다. 하루종일 퍼부어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추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에 떨어지는 시커먼 물체는 휘발유가 가득 차 있는 '드럼통'이었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 쯤인가 대성골 골짜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날려보냈다. 바로 소이탄(燒夷彈)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혀 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출처 :: 정충제 기록, [실록 정순덕], 상권>

 

 

 

 

 

지리산에서 가장 기가 쎈 곳이라 하니 그냥 갈 수 없다.

누구는 일부러 힘들게 기도하러 찾아도 온다고 하는데...

떠나기 전에 지난밤 편안한 잠자리를 감사드리고,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기도를 드린다.

 

 

 

 

숙박지에서... 기도터 제단을 배경으로.. (08시10분)

자 출발 하자구요 ~

 

 

 

 

영신대에서 우리가 숙박한 바로 옆 기도터를 가려면 이렇게 바로 옆에 나있는 통나무 다리를 건너 석문을 통과 해야만 한다.

이 다리만 없으면 이속에 기도터와 샘터가 있는줄은 아무도 모를 것 이다.

 

 

 

 

영신대에서...

 

지난밤 야영을 했던 팀들은 이미 떠나고 없다.

영신대는 지리산의 주 능선과 남부능선이 교차 하는 지점에 자리하여 기운이 영험하고 쎄다고 한다. 

 

『지리산의 10대 기도처 중에서 가장 기(氣)가 강한 곳이 영신대(靈神臺)와 관음대(觀音臺)다.

특히 지리산의 영신대는 영혼의 안식처로 신령하고 영험한 곳이다』
<출처 :: 풍수칼럼니스트 노병한님>

 

 

이번 산행후기를 준비하면서 조선시대 김종직의 유두류록 몇차례 읽어 보았다.

유두류록을 누가 해석을 했는지 몰라도 김종직은 영신사에서 1박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찾는 분들중 많은 분들이

영신사에서 숙박을 해결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해석 하신분은 영신사와 영신대를 동일시 하고 있는듯 하다. 현재 영신사에 관한 

고문헌에 나와있는 가섭대나 좌고대는 영신대가 아닌 창불대 아래쪽 영신사지에 있는 것이다. 

 

 

 

김종직이 느낀 지리산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11)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12)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13) 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출처 ::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에서...

 

 

 

 

 

 

대(臺)란 무엇인가?

 

◆ 대(臺)자가 붙은 곳들이 신령하고 영험한 기도처

 

산의 높이에 관계없이 산의 높은 봉우리를 봉(峰)이나 대(臺)자를 붙여서 쓴다. 봉(峰)자는 주로 산의 정상에 붙여지는 것이고, 대(臺)자는 봉(峰)보다는 높이가 낮은 곳에 붙여서 쓰인다. 물건을 얹는다는 의미의 돈대의 대(臺)자가 붙은 산(山)과 지명들이 대체적으로 신령한 기운들을 머금고 있어 영험한 곳들이다. 그래서 유명한 기도처들에는 대부분 대(臺)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산의 가장 높은 곳이 정상이다. 산의 정상부근에 대(臺)자가 붙은 지명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臺)자를 붙여서 쓰는 곳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산의 정상과 정상부근이 아닌 곳들도 있다.

신령하고 영험한 기도처로서 대(臺)자가 붙은 곳들을 몇 가지 찾아보자. 서울의 삼각산에는 백운대(臺)와 만경대(臺)가 있고, 관악산에는 은진전(應眞殿)이 세워진 불꽃바위와 함께 연주대(臺)가 있다. 강원도의 설악산에는 비선대(臺)와 유선대(遊仙臺)가 있고, 원주의 치악산에는 입석대(立石臺)가 있다. 충청도의 속리산에는 문장대(文藏臺), 신선대(神仙臺),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가 있다. 전라광주에는 무등산의 입석대(立石臺)와 서석대(瑞石臺)가 있다.

지리산(智異山)에도 문창대, 금강대, 가섭대, 영랑대, 소년대 등이 있다. 최고의 수도처로서 영험한 기도처로서 전해 내려오는 지리산의 금강대는 어디에 소재함인지 확실치는 않다. 현재 알려진 지리산의 대(臺)들 중에서 수도처로서 가장 좋은 최적지가 문수대이거나 상무주암이라고들 한다. 한편 지리산의 묘봉치 아래에 있는 묘봉대도 석축이 남아 존재함이니 한번 찾아볼 일이다.

부산에는 지명의 끝에 대(臺)자가 붙은 경관이 뛰어난 6대(臺)가 있다. 그 6대(臺)가 바로, 이기대(二妓臺), 해운대(海雲臺), 태종대(太宗臺), 몰운대(沒雲臺), 신선대(神仙臺), 오륜대(五倫臺)이다. 그 외에도 부산에는 학소대(鶴巢臺)와 동장대(東將臺=望月臺) 등도 있다.

 

◆ 대(臺)자는 큰 바위가 있고 바위주변에 샘(泉)이 있어야

 

대(臺)의 일반적인 의미는 웅장하고 거대한 바위다. 그런데 이러한 대(臺)자의 의미가 중요함은 명산들에 소재한 수도처의 이름들에는 대부분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도처나 암자의 뒤쪽에는 반드시 집 한 채만한 바위나 그보다 훨씬 큰 암봉(巖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대(臺)자는 큰 바위가 있고 바위주변에 샘(泉)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다.

옛날에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양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짜리 암자를 지어 수행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수행자가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했다. 즉 토굴이란 혼자서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낮추어 일컫는 수행처 토굴을 불가(佛家)에서는 암자(庵子)와 구분해서 대(臺)라 칭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닌 셈이다.

바위는 기(氣)를 모이게 하고 끌어당기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를 행하면 영험하고 효험이 많다. 그래서 수도처와 기도처로서 큰 바위 주변에 대(臺)자가 붙은 지명이 많다는 것이지 반드시 큰 바위만이 대(臺)의 필수조건만은 아닌 셈이다.

 

출처 : 풍수칼럼니스트 노병한

 

 

 

 

 

영신대

 

 

지리산에는 33대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중요한 10대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지리산 10대는 사람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다고 한다.

 

 

지리산 10대
 

1. 문수대

 

노고단에서 돼지평전으로 진행하다보면 헬기장 만나기전에 오른쪽으로 돼지평전~왕시루봉 휴식년제구간 이란 입간판이 있다. 이 입간판 뒤 산죽 사이로 노고단 정상에서 왕시루봉으로 내려서는 등산로와 만나는 길이 열려있다. 삼거리에서 2미터 정도 내려서면 공터에서 다시 삼거리가 형성되고 내려서면서 우측으로 열려있는 등산로가 문수대를 경유해 노고단 중계탑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2.우번대

 

성삼재 뒤쪽의 바위봉우리다. 백두대간상에 있으며 노고단에서 보면 종모양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바위에 부딪치는 바람소리가 돌종을 울리는 소리와

같다고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며 혹자는 관음대라고도 한다. 우번암을 찾아가는 길은 정상에서 성삼재 방향으로 2~3분 나아가면 조그만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남쪽방향으로 길이 있다. 그길로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번암의 붉은색 지붕이 보인다. 그곳에서 좌측길로 내려서면 된다. 우번대사가 깨우쳤다는 곳이다.

 

3.묘향대

 

반야봉에서 중봉을 지나 동북동 방향 약700미터 아래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수도처로 알려진 곳. 반야봉에서 가장 아늑하고 깊은 맛이 있는 수도처이다.
반야봉은 일명 <깨달음의 산> 또는 <어머니 산>이라 하기도 한다.


4.서산대

 

찾기가 좀 까다로운 곳에 있다. 돼지령 약간 못미쳐 1435봉 피아골산장쪽 능선 상에 있으며 산길도 끊어졌다가 이어졌다한다. 해발 1100미터쯤에 이른뒤 능선을 벗어나

우측 너덜사이 5분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얼마전 헐린 집터와 가재도구들이 있다.)


5.무착대

 

피아골 직전마을 깃점으로 원점회귀 가능한 무착대 직전마을에서 불무장등 능선1.2KM 좌측 10분거리 희미한 길따라 걷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명당터임을 알수 있다.

바위벽 아래 기도처에서 바라보는 왕시루봉 능선의 조망이 일품이다.


6.향운대

 

국골 사거리에서 두류능선에 붙어 말봉을 넘어 가다보면 자리를 잡고 내려서는 곳이 계속나오는데 두번째 내려서는 곳에서 얕은 능선을 우측으로 우회하듯 안부에 닿았다가 다시 올라가는데 그 안부의 우측으로 열려있는 길이 향운대 들머리다. 조금 내려가다가 두류능선과 평행한 너덜 사면길을 고도의 낮춤 없이 우회하며 약 15-20분 진행하면 좌측에 어마어마한 바위가 나타나며 그아래 평지에 절 터 흔적이 있으며 샘도 있다.


7.문창대

 

문수보살의 지혜가 햇살처럼 찬란하다는 뜻이니 곧 지혜를 구함이다. 예전에는 법계사 남쪽2Km지점으의 암봉으로 알고 있었으나 1979년 진주 산악회 학술조사반에서 법계사 서쪽 헬기장 옆으로 재정립하였다. 근거로 바위에 "고운 최선생장리지소",즉 고운 최치원 선생의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 두었던 장소라는 바위암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8.영신대

 

영신봉 남서쪽 약500m 아래 있고 대성골의 발원지이다. 대성골에는 예로부터 도를 닦거나 푸닥거리 하는 곳이 많았다. 도를 깨우치겠다며 자기 나름대로 은밀하게 수도하는 사람들이 산세가 절묘한 명당자리를 찾아내 구도생활을 한다. 이런 구도자들이 '최고의 기도처'라고 즐겨 찾은 명당터이다. 낙남정맥과 백두대간의 분기점.

 

9.향적대

 

향기가 쌓여 있다는 뜻이니 그 산의 기운이 모여있는 곳이다. 장터목 산회샘에서 좌측으로 10여분 들어간 곳에 있다는 설과 제석봉을 지나 통천문을 지나기전 오른쪽

아래에 있다는 설이 있다. 고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곳으로 이륙의 지리산기, 김종직의 유두류록,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김일손의 두류일록,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김선신의 두류전지 등에 보이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10.금강대

 

뱀사골에 있다는 것만 알려졌을뿐 장소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김일손의 기록에 향적사 앞에 우뚝한 바위가 있는데, 올라 조망하면 흰구름이 감싸고 있는 기이한 무수한 봉우리들이 보였다고 적고 있다.

 

출처 :: 인터넷 (정확한 출처 미상)

 

 

 

금강대에 대해서는 많은게 신비스럽다. 아직도 정확한 위치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풍수칼럼니스트 노병한님의 의견이다.

 

금강대(臺)라 불리는 금강굴(窟)이 싸리봉 근처의 어떤 암봉 주변에 있다고도 전해진다. 한국 선가(仙家)의 이상향이었던 ‘청학동’과 불가(佛家)의

이상적인 수도처인 ‘금강굴’이 바로 지리산의 칠불사와 반야봉의 주변에 감추어져 있다고 도인(道人)들 사이에서 입으로 은밀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이 ‘금강굴’에는 일명 나한(羅漢)의 경지인 아라한과(阿羅漢課)를 이루고 2백세가 훨씬 넘은 개운조사가 은거해 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금강굴’이라는 그곳에 접근되지 못하고 인간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것은, 그곳에 8진법이 쳐져있기 때문으로 시공(時空)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출처 :: 풀수칼럼니스트 노병한님>

 

 

 

세석을 내려서며 돌아본 창불대.

옛 선인들이 지리산행을 하면서 꼭 묵고 갔다는 영신사지는 저 아래 있다.

청학연못을 간다고 하니 창불대를 못가보더라도 아쉬움이 덜하다.

창불대 아래에도 반야낙조를 감상하고 잔돌평원을 살펴볼수 있는 기가막힌 비박터가 있다고 하는데...

 

 

 

 

촛대봉을 오르며 바라본 세석산장

 

 

 

 

푸름님이 독초라며 조심하라고 알려준 동의나물

곰취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독초라고 조심해야 한다고...

 

 

 

 

세석습지에 동의나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쥐오줌풀

 

 

 

 

촛대봉에 오르며 천왕봉쪽 능선....

 

 

 

 

촛대봉 (9시36분)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세석의 이름에 대하여

 

이 일대를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 부르는데 ‘평’은 물론 ‘坪’의 와오(訛誤)일 것이요, ‘전’은 ‘坪’을 다시 한번 더 역(譯)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석평(細石坪)이라 쓴 것이 옳은 것이려니와, ‘세석’이란 것은 지금 속(俗)이 ‘잔돌밭’이라 하니 세석은 분명히 세석이겠지마는 실제에 있어서 ‘잔돌’이라고는 한 덩이도 없으니 그 원뜻이 자못 의심스럽다.

 

오히려 잔돌 대신 산청, 함양 군경(郡境)의 등척이로 나가며 키 큰 바위들이 서 있음을 보아 ‘선돌’의 ‘서’ 음이 ‘세(細)’로 역전(譯轉)하고, 그것이 다시 ‘잔돌’로 재역(再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무등산의 ‘서석(瑞石)’이라는 ‘서’와 동일한 택자(擇字)로 보아 일종의 입석문화의 유적으로도 해석하여 보았으나, 그 역시 위태한 해석법이기로, 그 명칭에 대하여는 의혹만을 품고 지날 따름이다.

 

여기가 벌써 1682. 얼마 남지 아니한 최고봉 ‘천왕’이 저기 보인다. 성자(聖姿)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절을 드린다.

세석평은 제 자신이 적막한 들판이라 제 자신의 경치도 남에게 뒤지는 것은 아니지마는, 여기서 천왕을 정면으로 똑바로 가까이 볼 수 있기에 세석평의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몸을 다시 돌이켜 천산만수(千山萬水)를 내려다볼 때, 옳지, 세석평의 진실한 값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천왕 상봉이 흘러내려 기관(奇觀), 장관(壯觀), 웅관(雄觀), 성관(盛觀)의 지리영산을 만들기 위하여 그 호걸찬 기상을 여기에 한 번 축적하였다가, 한 번 호령으로 크고 적고 넓고 깊은 온갖 봉수동곡(峰岫洞谷)을 삐쳐내린 그 저기적(貯氣的)인 곳에 이곳의 위대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겠다.

천왕의 모든 명령을 이 세석평이 맡아 전하고, 천왕께 사뢰는 모든 탄원도 이 세석평이 대언(代言)하는 곳이라 하겠다.

 

<출처 :: 노산 이은상 선생 지리산 탐험기 中에서>

 

 

세석(細石) 평원에 이르렀다. 이곳은 비록 산등성이에 있지만 그 흙은 검고 언덕을 이룰 정도로 많았고 그 나무들은 소나무와 노송뿐이었지만 매우 넓고 평탄해서 자랄 만했다.

 

<출처 :: 1807년 하익범의 유두류록 中에서>

 

 

 

 

 

촛대봉 고개 풍경

 

 

 

 

영신봉에서 내려뻗은 능선에 우뚝선 바위 창불대

 

 

 

 

영신봉에서 창불대를 지나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

 

 

촛대봉에서 청학연못에 들기로 했다. 배낭무게에 눌려 지친 분들은 제외하고 남자들 둘셋만 후닥~ 다녀오면 될 줄 알았는데

여기서 그만 청학연못을 다녀와서 길을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인 속리님이 못가겠다고 한다. 배낭무게가 천하의 산꾼인 그의

어깨도 힘들게 했나 보다. 어차피 불량감자팀 이동속도가 뻔하니 혼자라도 다녀오려하니 속리님이 대충 설명을 해준다.

촛대봉 정상암릉 지나 쭈욱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쪽에서 오른쪽으로 바위가 나올때까지 가라고.... 큰 나무밑에

푹 들어간 지대에 있다며....해서 정상을 넘어가면 뚜렷한 외길이 있는줄 알고 배낭을 벗어두고 카메라만 챙겨서 뛰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5분 늦게 출발을 하더라도, 나는 촛대봉에서 인터넷에 접속을 하여 청학연못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갔어야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고 백마디 설명보다 한장의 사진이 더 확연할때가 많은 법이니 말이다. 촛대봉에서 인터넷이 되었

는데 설명한대로만 가면 되는줄 알고 성급히 달려갔던 자신을 후회했다.

 

이날 산행의 최고 포인트로 청학연못을 생각했는데, 상황이 이리될줄 모르고 당연히 안내를 받을걸로 생각하고 미리 예습을

안해온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굴 탓하랴.

 

 

 

 

촛대봉 정상부를 넘고보니.... 뚜렷한 길은 없다.

능선을 따라 내리막을 가는데 자꾸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샛길이 나온다... ㅠㅠ

속리님 말을 기억하며 샛길마다 들어가보고 길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와 내려가기를 반복...

한참을 내려서는데 더이상 진행방향으로 길이 없는듯하고 우측으로 더 선명한 길이 나있어 그곳으로 내려가서

이리 저리 잔돌고원을 헤매다 온 것 이다.

 

 

 

 

참고사진 :: 인터넷 YOON님 블로그

 

나중에 장터목에 와서 인터넷을 켜보니 바로 이 바위가 나온다. 검색해서 찾는데 1분도 안걸렸다.

촛대봉 정상부를 지나 능선을 타고 이 바위가 나올때까지 쭈욱 직진 하다가 이 바위를 만나면 우측 갈림길로 200여 미터를

계속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촛대봉에서 잠시만 검색을 하고 출발했어도 그런 바보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을 터인데...

 

 

 

 

청학연못의 모습, 뒤편으로 큰 슬랩바위가 있고 큰 나무들에 둘러 쌓여있다.

 

 

 

 

청학연못 :: 참고사진 :: 인터넷 YOON님 블로그

 

 

 

 

 

 

참고사진 :: 창불대에서 바라본 청학연못뒤 슬랩바위 (원 안)

 

 

사전에 조금만 조사를 했더라면 청학연못을 못찾고 헤매지 않았을텐데... 누구 말처럼 비등엔 때론 알바가 약이

된다고 하더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친격이 되버렸지만 다음에 오게 되면 이젠 대번에 찾아갈수 있을듯 하다.

 

 

 

 

 

청학연못에 대하여

 

청학연못은 세석고원의 촛대봉 조금 아래에 있다. 대략 고도는 1500m정도 된다. 연못의 모양은 타원형인데 지름이 10~15m정도이며, 연못가운데 깊이는 약 두 자가 된다. 북쪽 바위벽 아래서 샘물이 솟아나 연못을 이룬다. 연못주변은 북쪽으로 바위벽이 막았고 전면은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서 연못을 인공으로 만든 흔적이 보인다.

 

◆ 청학연못이 언제부터 있어 온 것인지 자연적인 것인지, 인공적인 것인지에 의견이 분분하다. 더러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고원에서 화랑들이 말타고 훈련할때 말에 물을 먹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화랑지'라는 이름에서 부터, 이조시대 사람이 청학동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에서 샘을 만들어 졌다고도 하고, 옛날 청학동의 중심터라고도 한다.

 

◆ 일설에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우리 땅의 정기가 지리산에서 제일 많이 솟구치는데 지리산에서도 청학연못이 제일이라고도 한다.

  

◆ 청학연못은 지리산의 비밀을 많이 간직한 곳이다. 지리산의 신비함이나 신령스러움이 오래 간직되려면 사람들이 전혀 가지 않은 아름다운 경관을 하나쯤은 감추어져야 된다고 본다. 다 함께 아름다운 곳을 구경하는 것이 행복하다면 그곳을 아끼는 일도 소중한 일이다. 청학연못 하나쯤은 지리산을 사랑하는 우리가 숨겨 놓아신비함이 계속 샘솟는 연못이 되게 함도 나쁘지 않다.'고 씌여 있다.

 

<출처 :: 연인과 숨어 살고픈 지리산 - 성락건 著>

 

 

와암(臥巖) 벼랑에 학동임(鶴洞壬) 3자가 새겨져 있다. 바위아래는 작은 못이 축조되어 있고, 못 아래로는 샘이 있어 연수대(延壽臺)라 한다.

 

<출처 :: 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

 

 

 

 

 

청학연못 찾는 것을 포기하고 촛대봉으로 돌아가는 길에보니 중간에 샘이 하나 있다. 촛대봉 샘 인가 보다.

그 옆에는 비박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어떤분이 다녀가셨는지 비박지 한 가운데에 제대로 흔적을 남겨놓고 갔다. 쩝.

 

 

 

 

촛대봉을 내려와 일행을 쫒아가며 뒤돌아본 촛대봉

 

 

 

 

그 옆으론 세석뒤로 영신봉이 보이고 칠선, 덕평봉지나 주능선 뒤로 반야봉이 흐릿하게 서있다.

 

 

 

 

반야를 좀더 당겨 본다.

 

 

 

 

삼신봉으로 가면서 바라본 천왕봉

 

 

 

 

삼신봉에 올라 바라본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길 연하선경

목표했던 비경은 다 놓치고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선경

 

 

 

 

백무동 방면 조망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길을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삼신봉을 내려와 연하봉으로 가면서 뒤돌아본 그 길.

 

 

 

 

1667봉에 서서 쉬면서 도장골을 조망 한다.

 

 

 

 

뒤돌아본 삼신봉과 오른쪽 뒤로 서있는 반야봉

 

 

 

 

연하봉에서 (11시51분)

 

 

 

 

장터목으로 가면서 뒤돌아본 연하봉

아침엔 연무로 인해 일출이나 조망을 볼 수 없게 만들더니 해가 뜨면서 날이 쾌청해진다.

뒤로 보이는 노고단과 반야봉이 선명하게 보이며 그 오론쪽으로 만복대와 고리봉도 뚜렷하게 조망된다.

 

 

 

 

연하선경을 중심으로 바라본 지리산 파노라마 (클릭)

 

연하봉 왼쪽으로 촛대봉과 지리산 남부능선이 조망되고...

오른쪽으로는 반야봉뒤로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이 보인다.

 

 

 

 

일출봉

 

 

 

 

장터목에 도착해 보니 지리를 찾은 많은 산객들로 인해 취사장 및 나무데크 의자는 자리가 없고

마치 옛날 장터의 현장 처럼 앞 마당 양쪽에 산객들이 그냥 쭈욱 늘어져 앉아 쉬며 식사를 하고 있다.

 

 

 

 

장터목에서 바라본 중산리

 

 

 

 

장터목에서 바라본 백무동 (오른쪽) - 서북능선 - 반야봉 (왼쪽)

 

 

 

 

마침 데크 테이블에 자리가 나서 앉아서 허기와 목마름을 달래가며 쉰다.

다들 힘들다고 천왕굴 가는것도 포기하고 장터목에서 하산하기로 하여 천왕봉이 처음이라며 장터목에 오는 중에

먼저 가서 배낭을 장터목에 벗어두고 천왕봉에 홀로 달려간 잠보님을 기다린다.

그사이에 푸름님이 중산리쪽으로 20여미터 내려가면 있는 산희샘에 빈 수통들을 들고 다녀와 물을 채워 온다.

 

 

 

산희샘

 

연하봉,연하천,산희샘,총각샘등의 명칭이 구례의 연하반(지리산악회)에서 60년대에 지도 제작을 할때 명명했다고 한다. 원래 있던 옛지명들은 잊혀져 가고 근거가 부족한 새로운 이름들이 현재 지리산에 가득하다고 하는데, 장터목 부근의 산희샘도 그중 하나라고 한다.

 

원래의 장터목샘 이라 불리던 장터목 산장 아래의 샘이 산희샘이란 별칭을 얻은 데는 사연이 있다. 구례의 지리산산악회가 지리산 종주산행에 나설때 대원 안기호의 부인이 출산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을 기대하고 미리 산이란 이름을 정해 놓았었는데 그의 부인은 딸을 낳았다고 했다. 안기호는 딸의 이름을 원래 정했던 산(山)에다 희(姬)자를 덧붙여 산희(山姬)로 정했다. 이를 기념하여 지리산산악회원들이 장터목샘을 산희샘으로 불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리산산악회가 제작한 등산지도가 배포되면서 장터목샘이 산희샘으로 이름이 바뀐 채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산희샘이란 이름 이전에 장터목샘이란 원래의 이름이 있었으니 원래 이름을 쓰는게 옳지 않을까..

 

 

 

 

 

백무동 하산길에 망바위에서 바라본 조망

나무에 가려 조망이 그렇게 시원치는 않다.

 

 

 

 

망바위 정상에 올라서니 멀리 반야의 엉덩이가 선명하게 조망된다.

 

  

 

 

망바위 건너편 바위에 올라서니 지나온 장터목이 조망이 된다.

 

 

 

 

 

 

망바위 건너편 소나무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하봉-중봉-천왕봉-제석봉-장터목 파노라마 (클릭)

중앙의 삼각형이 천왕봉이고 가운데 우뚝선 봉우리가 제석봉이다. 원 안은 장터목산장

 

 

 

 

참샘에 도착하여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후미를 기다리며 한참을 쉬었다가 하산을 한다.

 

 

 

 

야영장 인근에서 차가운 계곡물에 땀을 씻으니 이틀간의  피로가 싹 가시는듯 하다. (17시)

한신계곡과 달리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길의 백무동 계곡의 지류엔 풍덩 뛰어들만한 물이 흐르지 않아 아쉽다.

백무동 주차장에 배낭을 내리고 근처 주막에서 시원한 맥주와 막걸리로 목을 축이니 비로소 산행이 종료가 되었다.

 

 

배낭무게로 인해 모든 일정이 뭉그러진 산행 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겁고 배운게 많았다.

또한 이번산행을 통해 느낀것은 자주하면 어깨등이 단련이 될지 모르겠지만, 무릎이 자신이 없는 나에겐 이런식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장거리 비박산행을 하는것 보다는 가볍게 다니면서 조망을 즐기는게 더 좋겠다는 것 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은 무릎에도 부담이 되며 평지를 걷는 트레킹과는 또 다른 중력의 힘을 느끼게 한다.

굳이 박산행을 가야할 경우엔 산장을 이용하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챙겨서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낭의 무게가 산행의 즐거움을 넘어서거나 이번처럼 지쳐서 계획된 일정에 차질을 주기 때문이다.

  

끝으로 장거리 운전을 하며 동행들을 위해 무거운 야영 장비를 챙겨 메고 고생한 푸름님과 속리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창불대와 영신사지터 참고지도 (출처 :: 인터넷)

 

이번에 놓친 비경들을 위해 다음에 당일치기로 거림-영신사지-창불대-세석-청학연못-거림 코스를 생각해 본다.

가을에 단풍에 물든 청학연못의 경치가 일품이던데 아마도 그때쯤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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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음악 :: 김두수 - 산

 

지리산 한신계곡 ~ 백무동 지도

 

산행코스 :: 백무동 - 세석 - 영신봉 - 영신대 - 영신봉 - 촛대봉 - 청학연못찾기 - 장터목 - 백무동 (약 2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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