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동성봉 암릉 산행
설날 연휴 주말이라 그런지 산행 코스를 정하기가 쉽지 않은 가운데 마침 가야산에서 못가본 비경코스를
간다는 산악회가 있어 따라 나섰다. 전날 긴 뒤풀이의 영향인지 비몽사몽 간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선다.
마치 실금간 유리잔 처럼 톡 치면 바스라 질것 같이 몸상태가 좋지 않다. 에고... 작심삼일 이겠지만
당분간 금주를 다짐한다. 술뚝 !!
가야산은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야산은 성주의 남서쪽 경계지역에 있는 산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 경상북도 성주군에 걸쳐있는 명산이다. 주봉인 칠불봉 (1,433m)과 우두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1봉,
매화산 등 1,000m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알려져 산세가 변화무쌍하다.
가야산 이라는 이름은 여러가지 유래를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가 성도한 인도의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불가의 산 가야산에서 따온 명칭이란 설도 있고, 가야산 인근에
있던 가야국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주봉인 상왕봉이 소의 머리처럼 보여서 우두산 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소가 범어로 가야 라고 해서 가야산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가야산은 또한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데...
우두산, 상왕산, 지환산, 중향산, 설산 등으로도 불리운다. 가야산은 전국적으로 일곱군데가 있는데 그중에 이곳
합천의 가야산과 서산의 가야산이 유명하다.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가야산 (10시 15분)
파란 하늘이 기분이 좋다.
요즘 같이 날이 따뜻해 지면 개스가 심해서 조망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공단 직원들의 설명을 듣고 나서 산행을 시작한다. (10시23분)
백운동 매표소를 통과하며 바라본 정상부
백운동이란 동성재 능선에 있는 백운대 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백운대는 옛날에 도인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했던 곳이라고 한다.
원래 오늘의 코스는 만물상으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제역 때문 이라는 이유를 걸고 매표소 앞에서 만물상으로 진입하는 등로를 단단히 잠가놨다.
구제역과 바위가 많은 만물상은 도대체 무슨 관계란 것인지... 쉽게 이해가 안된다. 쩝 ~ 아.쉽.다.
정상으로의 일반 등로는 모두 열어 놓았으니 더더욱 만물상을 통제한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물상 암릉에 산돼지라도 키우고 있다는 것인가?
아무래도 구제역 보다는 입춘이 지나서 산불 방지 때문에 그러는 것 일것 같다.
초반부터 일정이 틀어진다.
일단 선두에서 공단의 지시대로 얌전히 용기골로 오른다.
구제역과 만물상의 함수관계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가운데 다들 그 문제를 풀어 보려고 궁리중이다.
오늘의 경로는... 아무도 모른다. 작전권은 선두에선 지휘자에게 있는것이다.
역시나 오늘도 구름에 달가듯이 스며 들었다.
그 많은 인원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무장공비들 처럼 신속하다.
십여분 가파른 길을 오르니 건너편으로 구제역 파동으로 입장이 통제된 만물상이 보인다.
잘 찾아 보시라... 어디 산돼지 몇마리 보일지도 모른다. ^^
백운동 일대
다시 십여분 더 가파른 길을 오르니 만물상이 확인히 드러난다.
만물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렇게 만물상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것도 참 좋다.
가야산 만물상과 우측의 정상부
만물상과 정상부를 바라보니 암릉이 제법이다.
이전 처럼 서성재로 올라 칠불봉에 오를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정상부를 좀더 당겨 보니 암릉이 멋지다.
정상부 우측으로 진행방향의 봉우리가 보인다.
바위를 오르락 내리락 오늘 코스가 만만치 않게 즐겁다.
만물상을 배경으로선 일행분
건너편 백운대 능선길의 바위 위엔 다른 분들이 올라서 계신다.
정상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동성봉에 오르는 암릉 구간이다.
하늘이 오늘 내내 이래주었으면....
하늘색이 참 맘에 든다.
하늘과 바위 그리고 사람들...
바위 능선 아래론 바로 벼랑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들 옆으로 아름다운 만물상과 정상부가 눈을 즐겁게 한다.
만물상 능선...
뒤쪽으로 심원능선도 같이 보인다.
돌아 오는길에 그리움릿지 길을 탈수 있을까....
점점 운무가 끼면서 반대쪽으론 역광과 함께 원거리 조망이 잘 되지 않는다.
동장대 전의 백운대 암릉길...
그리고 잠시후 올라야할 저 앞의 높다란 바위 봉우리...
파란 하늘과 멋진 구름이 함께하는 암릉길은 아름답기만 하다.
오늘은 유격훈련 코스다.
사격 훈련만 두어 시간 시키면 바로 현장에 투입이 가능한 병력들 같다.
구제역 때문에 이 길로 왔는데...
이 길도 좋다.
뒤돌아본 지나온 백운대 능선길...
우뚝선 바위능선의 위용이 대단하다.
용기골 건너편 만물상과 골짜기 안쪽에 우뚝선 가야산 정상부
용기골이란 용이 벌떡 일어났다는 말인데... 골짜기에 용소라도 있는 걸까?
잠시후에 오르게될 오늘 최대의 난코스인 바위 봉우리
바위봉 수직 암벽에 오르기 위해 대기중인 일행들
능숙한 리더들이 선두에 올라 절벽에 긴자일을 매달아 두고 중간에 바위가 튀어 나와 위험한 구간에서
손을 잡아 이끌어 주고 있다.
위험구간 통과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바위의 자일 구간을 잘 오를수 있도록 일일히 발디딤을 안내해 주고 있다.
봉우리에 올라서 내려다본 지나온 능선길
시간이 지나 온도가 오르자 개스가 서서히 밀려 오는게 느껴진다.
청명한 하늘과 멋진 조망을 바라거들랑 일찍 와야 할것 같다.
잠시후 성터가 나온다.
동성봉 이라는 이름은 가야산 동쪽에 성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듯 하다.
가야산성은 서장대와 동성재와 동장대를 잇고 있으며, 용기사지와 백운사지를 품고 있는 큰 성이다.
칠불봉을 중심으로 동쪽 고개를 동성재, 서쪽고개를 서성재라고 이름을 붙혔다고 한다.
남근바위
남근바위에 올라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
선두는 동장대를 지나고 있다.
동장대 암릉 구간
동장대 암릉구간 뒤로 멀리 동성봉이 보인다.
동성봉에서 이어진 칠불봉으로 가는 능선
서장대와 더불어 아름다운 바위로 유명한 동장대
동장대 암릉 입구에 소원성취 돌탑이 있다.
이 돌탑을 세우신 님의 소원은 성취 되었을까...
잠시후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성주 백운리 마애여래입상을 지난다.
천년의 세월을 이고 있는 부처님 이다.
동장대가 끝나는 지점에도 돌탑이 하나 더 있다.
이 돌탑도 아까 그분의 작품인가?
하늘바위
하늘바위의 유래
하늘바위에 올라 내려다본 지나온 능선길
하늘바위를 지나 동성재에서 용기사터로 갔어야 했는데...
선두에선 일단의 일행들이 동성봉으로 올라갔고 이게 결국 오늘 산행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제 가야산 일대에도 운무가 끼어서 원거리 조망이 오전 같지 않다.
무덤에서 왼쪽길로 잡아 서성재로 길을 잡았어야 했는데...
덕분에 동성봉에 오르게 되었다.
동성봉은 딱히 정상석 같은것도 없는것 같고..
잠깐 앉아 식사를 한것 말고는 다녀갔다는 기억만 남기고 왔다.
오늘 산행의 즐거움은 여기까지...
동성봉에 오른 덕분에 두어시간 오전 산행으로 일정이 종료가 되버린 것이다.
동성봉 오름길에 바라본 칠불봉
지나온 능선길
만물상 능선도 개스에 뿌옇게 되어서 볼품이 없고...
동성봉에서 칠불봉으로 이어진 능선길의 암릉
칠불봉은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의 전설이 스며 있는곳 이다.
능선길을 버리고 가야산의 용아코스를 타려는 선두를 따라 공비산행이 시작되었다.
아예 후미따라 칠불봉이라도 갔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낙옆속으로 물이 얼어 붙어 길이 미끄럽다.
한 겨울에 약초 산행을 하는것 같다.
능선에서 정글 사면을 가로질러 용기사터로 길을 잡는다.
산을 헤치며 거친길에 미끄러 지고 넘어지며 공비 산행을 하고 있는 선두 그룹
가야의 아름다운 용아릉인 그리움릿지를 생각하며 열심히 잘들도 간다.
그런데...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선두에선 리더분이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빠듯할것 같다고 그냥 내려가자고 한다.
허그덩....
2시간 가까이 공비코스를 타면서도 즐거울수 있었던 목표가 신기루가 되어 허물어 지는 순간이다.
산행중에 리더의 결정엔 무조건 따라야 하는게 옳지만... 아쉬움은 어쩔수 없다.
다들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 난다. 아.쉬.움.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후미에 있었으면 칠불봉 이라도 다녀왔을 텐데... 라는 생각도...
결과적으로는 선두로 내려가서 뒤풀이를 하며 2시간을 기다렸으니... 충분히 다녀올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쉬움을 접고 용기사터로 내려왔다.
용기사지의 맷돌과 석조유물
지금은 폐사되고 그 터만 남아 있는 용기사(龍起寺)에서 생활했던 승려들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석조(石槽)와 맷돌이다. 석조는 가로 160㎝, 세로 120㎝, 높이 73㎝, 깊이 52㎝정도의 크기로 길쭉하게 모를 죽인
직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으며 완형으로 남아 있다. 속이 깊고 안쪽 바닥 한켠에 구멍을 뚫어 놓아 배수가 되도록 하였으며,
안쪽 구멍은 매끈하게 다듬었는데 비하여 바깥쪽은 적당히 다듬었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편이나 소박한 멋이 있다.
용기사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에 성주목사를 지낸 황준량(黃俊良)의 시를 통해 볼 때
16세기 무렵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실록』과『성산지』에는 임진왜란 시 경상우도 총섭승(總攝僧) 신열(信悅)이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화살을 만들었으며 가야산산성(용기산성)을 수축하고 남문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따라서 이 절터는 신열이 본영을 두고 수백 명의 승군들이 주둔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남아 있는 석조와 맷돌은
승군들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인터넷 문화재자료)
예전 이정표
용기골 계곡
현대불교 란
조선시대 때에는 조직적인 불교활동이 불가능했고 산속에 도피해서 개별 사찰 단위의 활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내려 일본 불교를 본따서 31개 본산을 중심으로 행정조직을
갖추면서가 현대 불교의 시작 이다.
1941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불교조계종"이란 종명을 확정지었고, 일제시대의 조계종은 조선총독부에서 본산사찰
주지 뿐 아니라 말사 주지승까지 임명하는 총독부 예하 행정기구 였다.
그래서 국유림을 사찰에 불하해 주었고, 이것을 근거로 지금 조계종은 매년 120억원 이상을 등산객들에게 징수하고
있는데, 친일재산환수법에 따르면 모두 국고환수감인 토지들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임야의 사적소유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임야조사후 50%를 일본인에게 불하하고 나머지를 조선총독부가 국유지로 관리하며서 예하관청이나
마찬지였던 사찰들에게 임야를 관리하게 한 거고, 해방후 사찰들은 토지를 조계사 사찰임야로 보존등기를 한것.
숭유억불정책을 펴며 사대문안에 승려의 출입을 금했던 조선시대에 국법을 어기면서 사찰들에게 그많은 토지를 관리를
맡겼을리가 없으니 조계종의 사찰토지의 역사성 운운은 허구이다. (출처 : 인터넷 아고라)
백운동으로 다시 원점 회귀를 해서 죄송합니다.
가야산 곳곳에 위와 같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지난번에도 블로그 게시글에 따로 언급을 했었지만 해인사는 내려 올때도 돈을 받는 유일한 절이다.
<시사저널>은 968호에 조계종이 소유하고 있는 임야에 대해 단독으로 보도를 했다.
시사저널의 내용에 의하면 조선시대까지 사찰에게는 임야에 대한 소유권이 없었다.
주변 산림을 관리할 수 있는 관리권만 주어졌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사찰이 임야 소유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불교계는 31본산 주지들에서 말사 주지들까지 전방위로 친일에 가담했다.
불교계가 임야 소유권을 가진 배경에는 ‘친일 행위’에 대한 대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또 법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국가가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 사찰들이 패소할 수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기독교와 함께 우리나라 거대 종교인 불교에 사정의 칼날을 던질 용기있는 정객이 없었음인가?
아니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달 무모하거나, 용기 있는 쥐가 없었음인가...
친일재산 환수 문제가 전국적으로 불어 닥칠 때에도 조계종은 조용히 피해 갔다.
시사저널의 이런 메가톤급 엄청난 기사가 나간 후에도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은 침묵을 지켰다.
광우병 문제가 대두 되면서 이문제는 조계종의 미소뒤로 조용히 숨어 버렸다.
그러면 부끄러운줄 알고 조용히나 있던가....
산을 내려오는 등산객들에게도 돈을 받겠다는 저 몰염치한 플래카드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조계종 주지를 맡고 있는 현응 스님은 기자들과 간담회에서 “사찰 소유지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관람료 징수가 부당하고
물리적으로 거부하겠다는 대한산악연맹을 포함한 일부 환경단체들이 사찰 소유의 산림을 무제한으로 사용하겠다는
주장은 파렴치하다”며 “정부당국 또한 ‘국립공원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입니다’란 현수막으로 사찰의 소유지를 혼동케 하여
무분별한 등산객 유입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야산이 언제부터 해인사의 소유였나?
그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거론해야 옳지 않을까?
이어 현응 스님은 “대한산악연맹은 산악운동을 범국민 운동화에 목적을 두고 있어 자연환경과 문화유산보존에는
뜻을 두고 있지 않고 버스를 불러 온산을 무료로 등산하는데 목적이 있는 단체” 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또“국립공원을 지키는시민의모임(이하 국시모)과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등의 환경단체들은 주5일 및 공원입장료
폐지에 따라 폭주하는 등산객과 그에 따른 자연환경 훼손에 대해 대안하나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라고 비난했다.
해인사 출입료만 받으면 되지 가야산을 찾아온 등산객들에게 왜 문화재관람료를 받는냐는 질의에 현응 스님은
“가야산은 종교, 문화, 자연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어우러져 있는 민족문화이며, 불교도의 천년성지이어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곳이 없다”며 “가야산이 무분별한 등산객에 의해 훼손되고 유흥업소 및 문란한 개발발전으로 인해
타격을 입을 수행환경을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발 이와 같이 이기주의적인 생각만 가득한 불교인들과 더이상 논쟁하기 싫으니 국립공원 관리공단 측은 해인사를
경유하지 않고도 그쪽으로 등/하산을 할수 있는 새로운 등로를 만들어 주어야 할것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가야산사무소 관계자는 “지난해 경북 성주군에서 수차례 대체 탐방로 개설을 요청해 왔으나
환경단체들이 신규 탐방로 개설을 반대 하는 입장”이라며 “해인사와 환경단체들이 주장하는 특별보호구역 지정은
해인사와 관리공단, 지역민들이 참여하는 공동조사를 실시한 후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도대체 환경단체 집행부는 모두 해인사측 대변인들 이란 말인가?
또한 조계종은 문화재관람의사가 없는 시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징수된 문화재관람료의 사용내역에 대한 투명한 공개가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 문화재관람료의 대략적인 사용내역을 보면 ▲개별 사찰운영비 53% ▲조계종 종단운영비 12%
▲승가대학 운영비 5% ▲문화재보수 관리 30% 가 사용되고 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징수된 문화재관람료는 문화재의 관리와 보수비에 사용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징수된 문화재관람료를 민간사찰의 운영비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라 할 것이다.
문화재의 유지 보수는 모두 국민의 혈세인 국고가 한 해 1,000억원 지원된다.
사찰측에서는 과연 어떤 예산으로 문화재를 지키고 가꾸고 있나...
심지어 문화재와 관련 없는 선방을 짓거나 일주문을 짓는데도 국민의 혈세가 지원되었다.
사찰문화재에 대한 복원, 중건, 보수, 관리는 모두 국민의 혈세인 국가예산이 투입된다.
국가에서 더이상 사찰에 문화재 유지보수를 목적으로 국민의 혈세를 지원해 주지 말거나, 문화재 유지보수를
100% 전담하여 더이상 사찰에서 엉터리 문화재 유지보수 비용을 징수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것이다.
만일 사유재산 운운 하면 친일재산 환수의 법을 강력하게 개정해서 일제시대에 불하받은 엄청난 사찰땅을
죄다 국가에 환수 시키는 강경책도 펴야 할 것이다.
현재 조계종은 전국에 2천4백55개의 사찰을 거느리고 있다. 소속 승려만 해도 1만4천여 명에 달한다.
조계종이 보유한 임야의 면적은 7억7천7백98만㎡(2억3천5백34만평)나 되었다.
이는 제주도(18억4천7백2만㎡)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규모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3분의 1이 모여 사는 서울시(6억5백52㎡)의 땅을 다 합쳐도 조계종의 임야보다 적다.
조계종은 국가 다음으로 땅이 많다.
지난 2006년 기준으로 국내 상위 100대 법인이 소유한 토지는 1억8천8백㎡(5천6백86만평)다.
한국전력, KT, 삼성전자 등 100대 법인의 땅 전부를 합쳐도 조계종이 보유한 임야 면적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대산 월정사는 5천7백82만㎡(1천7백49만평)의 임야를 가지고 있어 단일 사찰로는 최대 규모다.
월정사의 임야는 8백48만㎡(2백56만평)인 여의도 면적의 7배에 해당한다.
여의도보다 넓은 임야를 소유하고 있는 사찰은 월정사 외에 19곳이나 더 있다.
설악산 신흥사가 3천8백13만㎡(1천153만평), 가야산 해인사 3천2백53만㎡(9백84만평),
천황산 표충사 2천160만㎡(6백53만평), 속리산 법주사 2천156만㎡(6백52만평) 순이다.
조선왕조시대까지는 대부분의 산은 주인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의 개념이었는데,
근대에 한일합방이 되어 부동산등기제도가 시행되면서 친일의 댓가로 총독부로 부터 불하와 인가를 받은 땅이다.
한마디로 오래전 부터 불교계가 국가의 토지를 무단점유 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라도 절간이 있는 부지는 제외 하더라도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국가에 다시 환수시켜야 옳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부당한 상황에서 등기가 올려진 만큼 정당성이나 합당성도 크게 없어보이고 말이다.
2007년 5월16일자 기사에 의하면 15일 해인사와 국립공원 가야사무소에 따르면 가야산성역화사업의 일환으로
매화산 청량사 ~남산제일봉구간(1.9km)을 지난 4월 2일부터 이미 폐쇄한데 이어 6월10일부터
해인사관광호텔~남산제일봉 코스(2.6㎞)를 2차로 폐쇄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6월10일부터는 매화산 등산은 완전 폐쇄 되는 셈이다.
해인사측은 가야산을 종교적인 수행과 신앙적 목적의 참배객과 문화유산을 애호하는 문화탐방객들의 방문은 허용하고
체육과 레저목적의 등산객들의 입산을 억제해 불교성지이며, 문화재의 보고인 가야산과 매화산을 보호해 후세에
전승하기 위해 매화산 진입로를 폐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매화산의 자연과 산림보호가 주된 핑계거리다.
절에서 산림과 자연을 보호한다고 나선다니 웃음만 나온다. 조용히 염불이나 외우셨으면...
제발 그 욕심 사나운 플래카드는 치웠으면 싶다.
아무리 봐도 돈 몇푼 더 벌자고 불교계 전체를 욕먹일 짓거리가 분명하다.
덕분에 이렇게 조사를 하여 조계종 땅의 근원 부터 문화재 관람료 까지 부끄러운 일들이 마구 들춰지지 않는가...
불교를 비방하고 폄하 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일부 목사들의 그릇된 행태로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듯이...
한 종파나 승려의 그릇된 방침이나 주장 그리고 행동에 불교인들 전체가 욕을 먹을수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는 조계종의 한 사찰이고, 조계종은 불교의 한 종파 이겠지만, 불교가 해인사고 조계종은 아니지 않는가?
산행종료 (3시)
이후에 길가에서 뒤풀이를 하며 2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시간이 부족할것 같아 두고온 길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뭐 기회야 언제든지 또 있을테니, 날 좋은 봄날에 오늘 미처 가지 못한 같은 코스를 다녀올수도 있을 것 이다.
거친산길을 리딩하느라 수고하신 분들 덕분에 쉽게 다녀올수 없는 아름다운 코스를 다녀왔다.
가야산 등산 지도
산행코스 : 백운리 - 동장대 - 동성봉 - 공비코스 - 용기사터 - 백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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