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적산의 겨울
혹독하게도 추웠던 지난주 소백산행을 마치고 일주일을 동상과 감기를 치료하며 보냈다.
코끝의 동상부위는 거의 아물었고, 감기도 거의 완치가 되어 다시 산행을 하는데 문제가 없는데
새로운 복병이 이번주 원거리 산행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태백산이다.
태백산의 눈꽃축제를 맞아 전국의 수많은 산꾼들이 태백산을 찾게 되었고, 이번주말 대전에서만
안내산악회를 포함하여 스무개가 넘는 산악회에서 태백산으로 버스를 몰아 떠나고 있다.
거의 모든 안내산악회들이 태백으로의 행군에 동참을 하고, 몇개 있는 나머지 리스트 마저 올해
계획한 관심 밖의 코스 인지라 딱히 산행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주말을 맞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주말 태백산은 인파로 미어 터졌을 것이다.
몇년전 연속으로 타이밍 적절하게 태백을 찾아 환상적인 눈꽃을 구경하였었고 마지막에는 축제기간에
찾는 바람에 엄청난 인파속에 정체에 시달리며 휩쓸리듯 산에 올랐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데다
근래 태백산에 눈이 많이 없어서 어차피 정상에 올라도 눈꽃을 볼수 없을것 이라는 생각에 올해는
태백산에 대한 미련을 접은지 오래이다. 다들 우르르 태백으로 산꾼들을 데려갈게 아니라, 이럴때 일수록
일부 산악회가 다른 멋진곳으로 행선지를 잡았다면 더욱더 인기를 끌었을것이 분명하다.
축제기간에 엄청난 인파로 인해 태백산을 포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것을 안내산악회 운영진들은
잘 모르는것 같다. 등산객들에게 별 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축제로 인해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산행이
지장을 받는다면, 오히려 행락객이 붐비는 축제기간을 피해 태백산 코스를 잡아야 할것 이라고 본다.
소백산의 여파로 동호회 산악회엔 아직 감기환자가 있고, 그래서 대전 인근의 짧고 쉬운 코스로
선택한 곳이 바로 향적산 이다. 이곳 또한 가까운 근교산이라 여러차례 가본곳으로 큰 관심을 끌진 못했지만
태백산으로 인해 딱히 갈곳이 없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산악회 회원들이 많이 참여를 했다.
비슷한 이름의 덕유산의 향적봉은 향나무인 주목이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향적산(香積山)은
종교인들이 향을피워 향이 쌓여서 생긴 산 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계룡산의 한줄기로 옛날부터
영산으로 알려져 많은 종교인과 기복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소원을 빌기도 했다고 하니,
예전에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 같다
출발전 무상사 앞 주차장에서 단체사진 (준수님作)
무상사를 지나 한동안 차가 다닐수 있는 너른 산길을 따라 오른다.
워밍업 없이 바로 오름길이 이어지고, 사진에 보이는것 보다 경사도가 가팔라서
왕초보 코스라고 가볍게 보시고 오는 분들은 이곳에서 힘들어 하신다.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다는 국조선원을 지나간다.
저 안에 용바위와 거북바위가 있다는데, 몇번을 지나가면서도 국조선원 안으로 들어가 보질 못해서
아직 구경을 못했다.
김항(김일부) 선생이 공부를 하였다는 곳은 향적산방이며 그곳에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는데,
이곳에도 어찌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는지는 모를일 이다.
20여분 가파른 길을 올라 잠시 숨을 돌린다.
길은 다시 임도를 따라 이어 진다.
향적산방
향적산방은 충남대 총장을 지낸바 있는 학산 이정호 선생이 1950년대 초반 정역 공부를 위해 지어놓은
토굴이자 아카데미 라고 한다. 향적산방 옆에는 19세기 후반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토굴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향적산방에서는 학생들을 모아 정역 강의를 한다.
후천개벽원리인 정역(正易)을 저술한 일부 김항 선생이 공부를 하였다는 거북바위...
정역은 무엇보다 후천개벽을 중시한다. 한마디로 세상이 뒤집힌다는 것인데, 후천개벽이 되는 그때가 되면
지축이 바로 서고 1년 365일이 360일로 바뀐다는 등이다.
일부 선생은 계룡산 국사봉과 거북바위 등에서 기거와 수련을 했다.
이때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이들이 대부분 신흥 종교의 창시자가 됐다.
하여간 정역의 사상체계는 동학(東學), 원불교, 증산교(도)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무속인들에 따르면 향적산의 계룡산의 마지막 혈맥이며, 이곳의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주역의 하도와 낙서에
해당하는 계룡산의 중심이며, 우리나라의 중심 이라고 한다
향적산방 오른쪽의 집은 지난번에 올때는 비어 있는 폐가 였는데...
향적산방에서 깨끗하게 수리하여 수행을 하는 암자로 만들었다.
저 안쪽으로 산길이 나있는데 어디로 가는 길일까?
멋진 바위나 조망이 좋은곳에 있는 기도터로 가는길 같은데, 입구에 수행중 출입금지 라는 팻말을 걸려 있다.
장군암
여름엔 시원한 약수가 나오는 곳인데, 겨울이라 모든게 얼어 있다.
암자 왼쪽엔 커다란 바위(장군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에 기도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바위 밑에서 석간수가 나와 용궁기도터를 만들어 두었다.
장군암을 지나 다시 헬기장을 향해 가파른 길을 오른다.
큰 산도 아닌데, 오름길 중간에 못보던 대피소가 하나 만들어져 있다.
눈, 비 올때 피하라고 만든곳 인데, 등산객들 간식 먹기 딱 좋은곳 같다.
산이 워낙 작아서 비올때 아니면 멋진 정상을 두고 저곳에 들어가 식사를 할일은 없을것 같다.
헬기장을 지나 정상 전망대 바로 밑에서 바라본 계룡산
천황봉의 이름
계룡산 천황봉은 자태가 백성을 품안에 안고 있는 제왕의 모습이라 하여 상제봉(上帝峰)이라고도 했으며,
백제때에 상봉으로 불리다가 현재 천황봉으로 불린다.
녹색연합에서 천황봉은 일제의 잔재이며 천왕봉이 되어야 옳다고 개명을 주장하였으나 공주시에서
근거자료가 없는 추론으로 판단하여 기각을 하고 여전히 천황봉으로 부르고 있다.
천황봉 옆에 천왕봉이 따로 있어서 만일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변경을 하게되면 천왕봉이 2개가 되는셈 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일제시대에 많은 문헌이 사라지고 소각이 되어 정확한 근거를 찾을수 없는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천황봉 정상에는 1948년에 설치한 철탑이 우뚝 솟아 미관을 저해하고 있으며 현재는 이 곳 일대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출입에 제한이 있어 정맥을 하려는 산꾼들에게 큰 시련을 주기도 한다.
계백장군의 결사대가 신라군을 맞아 결전을 벌였던 황산벌과 황산성 으로 뻗어내린 남부능선.
다음에는 저 능선을 따라 황산성으로 가보고 싶다.
연천봉에 올라 향적산을 바라보면 천황봉에서 향적산을 지나 황산성으로 이어진 능선이 긴 꼬리를 늘어 뜨리고
아름답게 뻗어 있다.
연천봉에서 바라본 천황봉 ~ 향적산 ~ 황산성 방향의 아름다운 능선 (2009년 5월)
계룡대와 뒤로 백운봉-금수봉 방향
향적산 국사봉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할 때 친히 올라가 국사를 논했다하여 국사봉이라 유래된 이 곳은
두마면 향한리와 도곡리 일대의 산으로 천황봉에서 뻗어내린 계룡산의 남쪽 능선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이다.
향적산은 사방이 일망무제라 이곳에 올라 맞는 일출과 일몰은 과히 장관이다.
계룡산 천황봉과 왼쪽의 상월면으로 뻗어내린 아름다운 능선 사면
능선을 따라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향적산의 유명한 전망 바위인 상여바위를 만날수 있다.
향적산 상여바위 (009년 11월)
상여바위의 전설
상여를 따가라는 듯한 모습의 이 바위를 상여바위 또는 행상 바위라고한다.
고려 말엽 한 선비가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티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선비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모두가 총명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느날 이었다. 계룡산에 산다는 한 스님이 찾아와 아들을을 가르쳐 보겠다고 하여
조선의 관리로 키우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데리고 갔다. 세아들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버지 의 말씀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삼형제는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비는「이제 두 임금을 섬기게 되었구나!」 하고는 자결하였다.
아들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상여는 장지로 향했다. 상여가 산능선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먹구름이 일더니 천둥번개가 내려쳐 그 아들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후 그 자리에는 상여 모습의 바위와 아들들이 뒤따르는 듯한 바위가 생겨났다.
그래서 이바위를 「행상바위」또는「상여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향적산 국사봉에서 (준수님 作)
탁 트인 논산평야를 지나 상월면사무소 뒤로 노성산이 보인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노성산(348m)은 정상에 백제 시대 쌓은 삼태기 모양의 둘레 894m의 산성이 있으며...
280년전 조선 윤증 선생때 지어진 명재고택은 주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문화재로 노성산 등산코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지난번 왔을때 새로 만들어진 향적산 전망대
향적산 조망도
향적산 전망대에 오르면 위와 같은 조망도가 마련되어 있다. (파)
※ (파)노라마 사진은 클릭하면 크게 보실수가 있습니다.
향적산은 계룡8경중 제2경으로 계룡산 천황봉에서의 조망보다 더 멋진 조망을 보여주는 곳 이라고 한다.
계룡시 전경
오늘의 시계는 썩 좋지 않다.
개스가 끼어 원거리 조망도 흐리고, 기상청에서 눈이 내린다고 예보가 되있어서 그런지 하늘 또한 청명하지 않다.
쾌청한 날엔 원거리 산군이 시원하게 조망 된다.
향적산 정상의 천지창운비와 오행비
국사봉 정상에는 오(五), 화(火), 취(娶), 일(一) 등 네 글자가 음각된 오행비와 함께 천지창운비라는 비석이
있는데 천지창운비는 한 변이 약 3m 쯤 되는 정사각형의 얕은(20cm 정도) 담 안에 머리에 판석을 얹은 높이
2m의 사각 돌비다.
이 비의 동쪽 면에는 천계황지(天鷄黃地), 서쪽 면에는 불(佛), 남쪽 면에는 남두육성(南斗六星) 북쪽 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담을 이루고 있는 네 귀퉁이의 기둥 돌에도 원.형.이.정
(元.亨.利.貞.)이 한자씩 새겨져 있다.
이 천지창운비와는 별도로 그 옆에 오행비(五行碑)도 서있다.
이 오행비는 높이 약 1.6m의 사각 돌기둥으로 서면에 화(火) 남면에 취(聚) 북면에 일(一) 동면에 오(五)자가
새겨져 있다. 천지창운비는 향적산에서 비롯되는 천지의 운세를 나타내는 비로 북쪽의 묘향산과 구월산에 흩어져
있는 단군성조의 얼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가 1000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단군성조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천지창운비
천지창운비의 의미
천지창운비의 유래나 의미는 정확히 알려진바 없다.
아래 설명은 나름대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한 것이다.
동 (천계황지)
하늘닭과 누런땅이란 아마도 계룡산과 논산평야를 말하고 있는듯 하다. (약수 생각)
서 (불)
부처님의 고향인 인도가 여기서 서쪽 이련가?.... (정확한 통일된 근거가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약수생각)
남 (남두육성)
여름밤의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궁수자리의의 6개 별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닮아 한국과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남두육성이라 하였으며, 두수(斗宿)라고도 하여 장수(長壽)를 다스리는 별로 여겼다.
북 (북두칠성)
북두칠성은 우리 겨레가 특별히 사랑해 온 별자리다. 북두칠성에 있는 삼신 할머니에게 명줄을 받아 태어나고,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은 북두칠성이 주관 한다고 생각했으며 죽으면 북두칠성을 그려 넣은 칠성판을 지고
저승길에 오른다고 한다. 단군조선 사람은 고인돌 뚜껑 위에 북두칠성을 새겨 넣었고 고구려인은 무덤의 벽화 속에
북두칠성을 크게 그려 넣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칠성판을 지고 묻혀야 편안히 저승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칠성각은 우리 고유의 칠성 신앙이 불교에 녹아 들어간 것이며 우리네 할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칠성님이 바로 북두칠성 이다.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의 전설
중국 위나라에 관로라는 점성술의 대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남양현이란 시골 동네를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밭 한가운데서 일하고 있는 안초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런데 안초의 관상을 보아하니 머지않아 죽을 운명이었다. 관로는 “아아, 안타까운 일이다.
이 잘 생긴 소년이 고작 스무살까지밖에 살 수 없다니!”라고 중얼거렸다.
소년의 부친은 이 소식을 듣고 관로에게 찿아와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관로는 안초를 불러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청주 한통과, 말린 육포를 준비해, 묘(卯)일에 자네 밭의 남쪽 끝 뽕나무 아래로 가게,
거기서 두사람의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테니, 그 옆에 술을 따르고 육포를 놓아두면, 두사람이 술을 마시고
육포를 먹을 것이네. 그들이 잔을 비우면 술을 따르고 이렇게 해서 술을 다 먹을때까지 기다리게.
만약 그들이 무어라고 말을 하더라도 아무말 하지말고 그저 머리 숙여 인사만 하면 되네, 그러면 그들이 자네를
구해줄 걸세." 안초는 관로가 일러준 날짜에 그 뽕나무 아래에 가봤더니 과연 두 노인이 바둑에 몰두해 있었다.
북쪽에 앉은 노인은 검은 도포를, 남쪽에 앉아있던 노인은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이들의 풍모가 신선 같았다.
안초는 관로가 시킨대로 그들 앞에 술과 안주를 가만히 놓아두었다. 두 신선은 바둑에 푹 빠져 무의식중에 술과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신선들은 기분좋게 취하게 되었다.
그때 북쪽에 않아 있던 검은 도포를 입은 신선이 안초를 보고 꾸짖듯 말했다. "이런데서 뭘 하는게야, 저리 가거라."
그러나 안초는 머리만 조아려 인사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방금 우리가 이 청년이 가져온 술과 안주를 먹었으니, 그렇게 박대하지 말게."
그러자 검은 도포노인은 "그럼 저 소년의 수명을 늘려주자는 말인가? 이 소년의 수명은 태어나서부터 정해져 있네.
자네 명부에 적혀 있는 탄생일과 내 명부에 적혀있는 죽는 날을 우리 맘대로 고친다면, 이 세상의 질서는 금방 어지러워질
것이 아닌가?"라고 응수했다.
"그렇긴 하네만, 이미 저 친구에게 실컷 얻어먹은 우리가 아닌가? 그것도 빚은 빚이니 우리 어떤 방법을 강구해보자구."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의 끈질긴 설득에 검은 옷 입은 신선은 하는 수 없이 "그 친구 참 끈질기기도 허이,
그래 여기 수명부가 있으니 자네 요량대로 해보게."라고 말하며 승낙하고 말았다."
붉은 도포의 신선은 수명부에서 소년의 이름을 찾아보니 소년의 수명은 19(十九)세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붉은 도포 신선은 붓을 들어 열십(十)자에 한 획을 더해 아홉구(九)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소년의 수명은
아흔 아옵(九九)살이 되었다.
안초가 돌아와 관로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니, 관로는 "북쪽에 앉은 검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북두칠성이고,
남쪽에 앉은 붉은 도포를 입은 신선은 남두육성일세,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하고 남두육성은 삶을 관장하지.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 깃들면 남두육성은 탄생일을 기록하고, 북두칠성은 사망일을 기록하는 거야." 말하고는 멀리 떠나갔다
향적산 정상에서 바라본 시원한 조망 (파)
국사봉 정상에서 살짝 내려오다가 걸리적 거리는 통신탑을 피해 시원한 파노라마 사진을 담았다. (클릭)
우측 아래에 헬기장이 있고 능선을 따라 천황봉 쪽으로 걷다가 우측으로 원점회귀 하산을 할것이다.
지난번에 왔을때는 저 바위에도 올라가 보았었다.
천황봉으로 가는 능선의 고운 사면을 따라 왼쪽으로 논산 상월면 일대와 금강대학교가 보인다.
불교 대학인 금강대학교
헬기장을 지나 능선길 따라 진행 한다.
사람이 쌓아 올린듯한 4층의 누룩바위를 지나 간다.
마지막 조망터 - 더 이상 갈수 없는곳 !!
우리나라에서 벌금이 제일 쎈 구간이다.
우측의 계룡대로 인하여 군사시설 출입금지 구역에 따라 진입시 벌금 200만원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벌금 50만원, 합계 250만원의 엄청난 벌금을 부과 하는 곳이다.
금남정맥의 한구간이라 그래도 산꾼들은 죽자살자 지나가는곳
무엇을 위한 통제인지 알수가 없고, 여기 까지는 선량한 등산객인데, 이곳을 지나면 천황봉을 넘어
관음봉 삼거리의 정규 등로를 만날때까지 잠정적 범법자를 만들어 내는 구간...
통제의 주 원인인 계룡대는 여기서도 잘만 보인다.
정감록에서는 '신도는 산천이 풍부하고 조야가 넓고 백성을 다스림에 모두 순하여 8백년 도읍의 땅이다'라고 예언했다.
신도안은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을 답사한 후 새 도읍지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한데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그러나 ‘정씨를 가진 왕조가 집권하면 좋을 땅’이라는 도참설과 뱃길, 교통이 불편해 도읍으로 부적합하고 물이 부족하다는
무학대사의 말에 따라 결국 한양에 도읍를 정했다고 한다.
근래에도 이 부근에 있는 세종시가 신행정수도로 선정이 된것을 보면 이 일대가 '명당'임에는 틀림 없는것 같다.
신도안의 정확한 행정 구역상의 위치는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이다.
현재 계룡대 군사 시설이 들어와 있는 곳 이다.
이 곳에는 지금도 동문턱, 북문턱, 서문턱 등의 땅이름이 있는데, 이 곳이 도읍터로 에정됐을 때 각각 신도안의 동-북-서쪽의
성문 자리로 정해졌던 곳이다. 두마면 용동리의 상원(桑園) 마을에는 큰 능만한 봉우리인 '신터리봉' 이 있다.
이 이름은 도읍터 공사를 할 때 동원된 인부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신에 묻은 흙을 털어 그것이 쌓여 이루어졌다는
'신을 털다' 의 '신털이' 가 '신터리' 란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라고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에 들어 오다 보면 계룡휴계소를 지나면서 기골이 장대하게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를 하나
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위왕산 이다. 대전시 서구 원정동과 유성구 방동의 경계에 서있는 위왕산은 신도안의 수구막이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산으로 신도안에 자리하고 있는 임금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왕산(衛王山) 혹은
위왕산(爲王山)으로 부른다고 한다. 신도안부근의 모든 산들이 신도안을 향해 굽히고 있는 모습인데 비해 이 산만은 신도안을
등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구막이를 호위하는 대장이 말을 탄 자세로 외곽을 경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 : 계룡시가 복원한 신도안 추측도
마지막 조망터에서 우측으로 길을 잡아 513봉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중간에 513봉으로 오르기전 안부에서 다시 우측으로 계곡을 따라 무상사로 원점회귀를 한다.
513봉 오르기전 안부에서 쉬고 있는 일행들
무상사로의 원점회귀 하산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나 있다.
직진은 513봉을 거쳐 청송 약수터로 가는길...
약수암
맨재골 최상단에는 약수와 같은 샘물이 난다하여 약수암이 있고 이는 논산, 연산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장군암과 달리 약수암(물탕집)에는 시원한 약수가 나오고 있다.
이곳에서는 민박도 하는데, 대부분 처사(處士), 거사(居士), 법사(法師), 보살(菩薩) 등으로 불리는 토속종교인들이
일정기간 동안 묵으며 기도(祈禱)하거나, 이른 새벽에 250만원 구간을 통과해야 하는 금남정맥을 하시는 분들이다.
최근 귀국한 신정환이 공항에서 쓰고온 모자와 비슷한 구멍이 나있는 나무땔감
물탕집에서 부터 하산길은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다.
무상사
향적산 산행 들머리와 끝머리가 되는 맨재저수지 위에 규모가 큰 국제선원 무상사가 있다.
숭산 큰스님이외국인 스님을 위한 선원은 서울의 화계사와 이곳 무상사 두 곳이라 한다.
하버드 대학 출신의 유명한 현각 스님이 여기서 수도한 바 있다고 한다.
모두들 산을 내려와 향적산 밑에 있는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농가로 이동을 했다.
마당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다.
주방에선 여자회원님들이 닭복음탕과 백숙을 준비하고 있다.
즐거운 뒤풀이 시간 (준수님 作)
어차피 향적산 산행이야 짧은 초보 코스니 만큼...
산행은 핑계고 다들 고기 구워 먹으러 모인듯 하다. ^^
백숙까지 든든히 먹고 나니 그제서야 기상청이 예보한 눈이 내린다. (준수님 作)
향적산 등산지도
등산코스 : 무상사 - 향적산방 - 헬기장 - 정상 - 헬기장 - 맨재 삼거리 - 물탕집 - 무상사 (2시간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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