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때 : 2009년 9월 20일 일요일
어디로 : 전북 남원시 금지면 & 대강면
날씨는 : 맑음
누구와 : 여행과 산행 10명
코스는 : 방촌리 버스정류장 - 천만리장군묘 - 만학재 - 고리봉 - 삿갓봉 - 능선 - 큰골 - 방촌리
시간은 : 약 7시간
설악 공룡이냐 지리산 동부의 달뜨기 능선이냐를 고민하고 있던 찰라에 전혀 기대치 않았던 이름이 정기산행지로 올라오고 나니
고민이 생긴다. 고수님들은 어디를 가느냐 보다는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들 한다지만 산행경력이 일천하여 안가본 산이 대부분인
나에게는 가고싶은 산이 너무 많은지라 누구와 가느냐 만큼 어디를 가느냐 또한 아직까지는 중요한것 같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라고
'누구와'도 챙기고 '어디로' 도 신경쓰고 싶은게 초보의 욕심인것 같다. 물론 모든 산이야 결국엔 다 가고픈 산이고, 등산을 하는데
이산, 저산 가린다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골고루 먹어도 젓가락이 한번 더 가거나, 먼저 손이 가는 반찬이 있듯이 아직 못가본 명산들을
먼저 보고픈게 나같은 초보들의 공통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면에서 안내산악회 산행 리스트에서도 보지 못했고, 도립공원도, 군립공원도 아닌 남원의 고리봉은 이전에 한번 산행공지를 통해
이름을 들어는 보았으나, 그때도 이번과 똑같은 이유로 '누구와'를 포기하고 더 끌리는 다른곳으로 홀로산행을 택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다시 두번째 공지를 보고나니 그래도 이산이 나름대로 뭔가 한가락이 있는 산이기에 정기산행 공지를 통해 또 올라왔으리라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결국 지리산을 가슴에 담고 '누구와'를 선택하였다.
* * * *
고리봉의 유래는 소금배를 묶어두었던 '고리(還)' 에서 유래한다. 지금 남원 시내를 관 통하며 흘러내리는 요천은 남원 관광단지 앞 물줄기만
둑을 쌓아 뱃놀이가 가능하지만,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하동을 출발한 소금배가 섬진강에 이어 요천 물줄기를 거슬러 남원성 동쪽 오수정
(참나무정)까지 올라와 닻을 내렸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홍수설로 옛날에 큰 홍수가 나서 대강면 일대가 모두 물에 잠기는 바람에 고리봉과
광동리에 고리를 달고 배를 운항했다고 하는데, 현재 광동리에는 당시 고리를 맨 흔적이 남아있는 바위가 있지만, 고리봉에는 없다고 한다.
당시 소금배가 중간 정박지로 금지평원에 머물기 위해 배 끈을 묶어두었던 쇠고리를 바로 고리봉 동쪽 절벽에 박아 놓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금배와 얽힌 전설이 전하는 고리봉은 조망도 좋지만 산세가 뛰어난 산이다. 동서 양쪽 사면은 거대한 바위 병풍을 연상케 할 만큼 웅장한
산세를 과시하고, 능선은 소나무가 울창한 가운데 부드러운 육산과 아기자기한 암릉이 번갈아 이어져 산행의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고리봉에 올라서면 지리산 서북능선의 장쾌한 조망이 한눈에 들어오며 고리봉 남쪽 섬진강 건너편엔 8월 정기산행을 다녀온 곡성의 동악산이
솟아 있다. 산세는 아기자기한 바윗길과 울창한 숲길에 동서면의 기암절벽으로 일명 남원의 용아장성 이라고도 한다. 전라북도에 5대 바위명산
으로 꼽히는 대둔산, 장군봉, 구봉산, 고정봉, 고리봉 중에 고정봉과 고리봉이 이 환봉산 능선에 있는 것이다.
고리봉 지도
원래는 삿갓봉에서 만학골로 내려올 생각이었으나 어찌하다 보니 능선을 타고 큰골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능선길이 평탄하지가 않고 하산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으니 삿갓봉에서 두바리봉을 거쳐
그럭재로 하산을 하는게 좋을뻔 했다.
그럭재에서 서재교까지 큰골 하산길은 길이 좋기 때문이다.
산행을 준비하는 새벽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본 여명
산행출발점인 방촌리 버스정류소를 지나 천만리장군묘로 오르는 능선을 향해 떠난다.
길을 잘못들어 사과 과수원 주인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보고 사과도 몇개 얻어왔다.
다들 이쪽길이 초행이라 정확히 길을 아는분이 없어 대충 감으로 방향을 잡고 간다.
천만리장군묘로 가는 능선길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듯 희미한 등산로엔 덤불과 잡초가 무성하다.
능선을 오르면서 바라본 방촌리 방면
금지평야와 금지면 일대
몇몇 선두는 높은 바위위에 올라서서 자세를 잡는다.
뒤늦게 올라가서 같은 자세를 잡아보려 했는데....허그덩... 바위가 너무 좁아 서있는게 무섭당.
엉금엉금 주춤주춤 앉아서 볼일(?)을 마치고 후다닥 내려왔다.
왼쪽 능선 뒤로 문덕봉이 살짝 보인다.
깜박하고 카메라를 스팟측광으로 설정을 해두어서 이날 측광점에 따라 달라지는 하늘색에 감탄을 하였는데
쩝, 바쁘다고 후다닥 날린 샷은 하늘이 희멀건 하니 죄다 망치고 말았다. ㅡ,.ㅡ
조금전에 엉거주춤 하니 무서워 했던 바위
날씨가 좋아 조망은 더할나위 없이 시원스럽다.
드디어 올라선 주능선에서 진행방향의 반대로 10여미터 알바를 하면 천만리 장군묘가 있다.
영양천씨의 원래 시조는 중국 명나라 사람인 천엄이다. 그가 중국 영양에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영양이라 했다.
영양 천씨(潁陽千氏)의 중시조 천만리(千萬里) 장군은 명나라 장수로 1571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총절사가 되어
북방의 몽고5부병을 섬멸시킨 공으로 내위진무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장군은 황제의 명을 받아 총수사 이여송과 더불어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서
두 아들 상(祥)과 희(禧)를 데리고 철기군 2만을 인솔하여 조선에 건너와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전란이 평정되자 명나라 장병들은 귀국했으나 천만리 장군은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땅에 남아 우리나라 천씨(千氏)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에 봉했으며
그후 숙종때 왜란 평정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명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화산군 천만리(千萬里)도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했으며
순종때는 가헌(家憲)의 뜻이 담긴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무덤은 풍수지리에도 능한 이여송 장군이 직접 정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여송의 지리참모인 두사충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 또한 전쟁이 끝나고도 조선의 아름다운 산수에 반해
명나라에 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전국을 돌면서 명당의 위치를 기록한 소위 `두사충결(杜四忠訣)`이라는 비기를 남겼다고
하는데 아마 그가 이 묘자리를 잡은게 아닌가 싶다.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는 천만리장군 묘자리는 아들은 없으나 많은 자손이 태어나는 ‘무자천손지지(無子千孫之地)’로 꼽으며
천하 명당이요 길지로 꼽고 있다고 한다.
천만리 장군묘는 멋진 조망터로도 손색이 없다.
바로 앞에 동악산과 청계계곡이 시원스럽게 조망이 된다.
천장군묘를 지나 점심식사를 하고 바라본 고리봉 정상
고리봉 우측 능선을 따라 삿갓봉이 보이고 뒤로 문덕봉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문덕봉 우측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금지평야
고리봉으로 출발하기 전에 삿갓봉을 배경으로 대박님과 속리님이 자세를 잡았다.
스포츠는 살아있다. 광고 촬영중(?)
대박님의 멋진 포즈는 광고의 한장면 같다.
시원한 조망터에서 속리님
고리봉에서 삿갓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고리봉으로 오르는 길에 큰 바위를 기어오르는 대박님
잡을곳도 발 디딜곳도 여의치 않아 맨무릎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사이 10초만 버티라고 외치고
재빨리 옆길로 돌아올라 카메라를 들이댔다.
고개도 못들고 힘들어하는 얼굴 표정은 연출이 아니다 ^__^
머얼리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이 보인다.
고리봉 정상의 황당한 전경
조선시대 종5품 하계의 무관인 창신교위를 지낸 경주김씨 부부의 합장묘 인데...
산정상에 묘를쓰면 그 댁은 큰 부자가 되나 아랫마을에는 가뭄이 크게들어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묘자리로 사용하고 싶어도
정상에 묘를 쓰는것은 금기사항으로 누구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명당이 좋다고 하지만 이렇게 환봉산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고리봉 정상에 묘를 쓴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리봉은 명산이라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만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고 한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과(대추, 밤, 곶감)과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 하였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아낙네들이 기우제에 참가하여 남자들 보다 아낙네들이 주축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1973년 6월과 7월에 걸친 극심한 가뭄때
대강면 사석리 아낙네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도중 큰 비를 만났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천수답이 아닌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이제 전설로 남아 있다고 한다.
1962년 가뭄이 극심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고리봉 정상 부근에 있는 묘를 파헤쳐야만 가뭄이 해소된다는 풍문이 떠돌아
대강면 사석리로 갓 시집온 어느 아낙이 자기 증조모님의 묘인줄도 모르고 파헤쳐 버렸다 한다.
그후에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금잔디를 심었다고 한다.
고리봉 정상에서 ~
사진의 수평이 맞지 않았다.
똑딱이라고 한손으로 대충잡고 찍으면 이렇게 된다.
고리봉 하산길에 바라본 삿갓봉 능선
선두그룹은 벌써 건너편 555봉으로 향하는 능선을 오르고 있다.
위험한 구간엔 밧줄이 있어 전반적으로 크게 위험한 산행은 아니지만
전북의 5대 바위 명산에 손꼽히는 고리봉은 명성에 비해 등산로 정비나 관리에 크게 신경을 쓴것 같지가 않다.
좀더 가꾸고 홍보를 한다면 사람들이 훨씬 많이 찾는 산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삿갓봉을 가기위해 안부로 내려서 뒤돌아본 고리봉
산 전체가 통 바위산 이다.
삿갓봉에 오르면서 만난 고사목
겨울에 눈이 얼어붙으면 멋진 모습일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삿갓봉 정상 부근에서 다시 고리봉을 조망해 본다.
삿갓봉 정상
삿갓봉 정상을 10미터 남겨두고 우측 능선을 탔다.
속리님이 정상석이 있어야할 지점에 없다고 했는데, 정상석은 내가 가리킨 곳에 있었다.
지도를 보면 우측으로 빠지는 굵은 능선줄기를 바로 지나서 있는데 다들 지도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이처럼 정상석은 두바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쪽으로 10여미터를 더가서 살짝올라있는 곳에 있다.
그럭재의 철탑과 그 뒤로 보이는 고정봉 ~ 문덕봉 능선
능선을 따라 큰골로 갈게 아니라 그럭재 까지 좀더 가서 편안한 큰골길로 하산을 하는게 좋았을것 같다.
삿갓봉에서 큰골로 이어지는 능선길에서 속리님과 올리브님
능선 하산중에 뒤돌아본 고리봉
하산길 조망 포인트에서 속리, 올리브, 소라님
다시금 문덕봉을 더 자세히 보고
올망 졸망한 강아지들이 잔뜩 들러붙은듯한 바위 사면을 보며 신기해 한다.
하산길에 만난 새끼 두더지
환봉서원의 안내문
근래의 대표적인 천만리 장군의 후손분들은 전 국방부 장관을 지낸 천용택, 그리고 전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라고 한다.
방촌리에 있는 환봉사는 천만리 장군을 기리는 사당으로서 매년 4월첫주 일요일에 제향을 모신다고 한다.
이때 천만리 장군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분이라서 매년 중국 허난(河南)성 등봉(登封)현 천촌(千村)을 중심으로 참배하러 온 일가들이
20여분 이상 머나먼 한국까지 오신다고 한다. 현재의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조상을 두고 있는 가까운 한가족 인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씨중에 많은 성씨가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이처럼 정확한 계보를 가지고 있어서 양국 연합으로 제사를 모시는
성씨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궁금함도 생긴다. 아무튼 어릴적 물놀이 하러 온 이후 처음 방문한 금지면과
우리나라 천씨의 역사가 있는 이번 고리봉 산행은 시원한 조망과 함께 '어디로' 를 버리고 '누구와'를 택하기를 참 잘했다는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즐거운 산행이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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