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도립공원











조령산과 주흘산의 물이 모여 문경새재 계곡을 따라 1관문 아래로 흐르는 초곡천

이 물은 조금 아래 문경에서 신북천과 만나 조령천이 되어 흐르다, 고모산성과 레일바이크 진남역이 있는 산태극 물태극 진남교반을 휘감고 돌아 낙동강을 향해 흘러가는 영강이 된다. 











1관문앞에 있는 커다란 찻잔과 이를 빚는 도공의 모습은

이번주 토요일 (4/27) 부터 시작되는 문경찻사발축제 홍보를 하는것 같다.











벌써 몇차례 다녀가며 보는 문경새재의 첫 관문 이지만, 볼때마다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성벽이 웅장 하기만 하다. 오전에 다녀간 고모산성 옆 석현성의 진남문 처럼, 문경새재의 관문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즉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방비하기 위한 성문인 셈이다.


다만, 문경새재 3관문은 북쪽을 방비하고 있는데, 이로써 1관문과 3관문이 남북을 바라보는 협곡의 성벽이 되고, 서쪽의 조령산과 동쪽의 주흘산이 천연의 성벽이되어 유사시 커다란 하나의 산성을 형성하고 있다.











영남제일관, 주흘관(主屹關)


문경새재의 이런 관문들은 왜적을 방비하기 위한것 이지만, 사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고갯길에 이런 관문이 없었다. 문경새재의 현재 관문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사후약방문 이지만, 그래도 훗날을 대비하기 위해 세워둔 것이다.











오픈세트장으로 이어지는 다리











오픈세트장은 내려오는 길에 들러볼 예정이다.











시간제한만 없으면 천천히 느긋하게 걷고 싶은 문경새재길

발 씻는곳도 있어서 맨발로 걷는 분들이 많다.

천천히 걷다가 그늘 벤취나 계곡물가에 잠시 쉬어가도 좋을 것이다.











새재(鳥嶺)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는 세 가지 설이 있다.

- 옛 문헌에 초재(草岾)이라고도 하여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설 

- 충주 하늘재와 이화령의 중간 즉 사이에 위치해서 사이가 새가 되었다는 설

- 조선 태종 때 개척되어 새로 난 고개라는 설 


이 '새'를 한자로 옮기면서 鳥가 되어 진짜 새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엔 새도 넘기 힘든 고개 라는 말까지 생겼다.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은 바위 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출장떠난 공무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조령원터를 지나간다.











조령원터











영남대로중 이곳 문경새재는 특히 과거길로 유명했다.

주변의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는 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 이라고 한다.




















아침까지 내린비로 물소리는 더욱 싱그럽고

동행하는 분들이 계곡물에 잠시 쉬어 가지고 하신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데, 나는 조금 더 걷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 없는 지라, 물소리 들으며 잠깐의 여유와 풍류를 즐기고 싶은

멋쟁이 일행분들을 남겨두고 제2관문을 향해 바쁜 걸음을 서두른다.











옛 주막엔 벌조심이 붙어있다.

산속, 시골 빈집에가면 벌을 먼저 조심해야 한다.




















교귀정


멋진 소나무와 정자 앞 계곡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은 조선시대 왕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 하던곳 이라고 하며, 정자 이름인 '교귀'는 '거북모양의 관인을 주고 받는다'는 뜻 이다.











꾸구리바위


얼핏 잘못 읽으면 쭈구리바위로 읽는다.


전설에 의하면,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로 큰 '꾸구리(토종 민물고기)'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꾸구리가 물밑에서 움직이면 바위가 들썩거릴 만큼 힘도 셌는데, 이녀석이 별나게도 젊은 새댁이나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면 희롱을 일삼았다고 한다.


아무튼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물고기가 살았었다고 하니 지금도 깊어 보이지만 전에는 이 보다 훨씬 더 깊었을것 같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에 동래와 한양을 잇는 가장 빠른길로 개척되었다.

인근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길이고, 새재는 조선시대에 개통된 가장 새길 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428㎞인데 반해 새재를 통해 충주를 거쳐가면 380㎞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최단 지름길인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때 왜군의 진격루트 이기도 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조정은 깎아지른 형세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새재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정했다. 그 후 포졸들이 삼엄하게 지키는 새재는 선비나 관직에 적을 두고 있는 양반계층이 넘나들었고, 계립령(하늘재)은 포졸들의 간섭을 피하고 싶은, 길을 더럽히는 말이나 소를 동반한 보부상과 장사치들이 넘나드는 민초의 고개가 되었다.











응암(매바위)폭포와 물레방아











조곡폭포











이윽고 영남제2관, 조곡관(鳥谷關)에 도착한다.


2관문 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제일 먼저 세워진 관문이다.

문경새재 관문중에 제일 험준한 곳에 세워진 조곡관은 임진왜란중인 1594년에 세워졌다.


신립이 왜적을 조령에서 방어하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다가 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령이 중요한 요충지로 새롭게 부각되었고,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며 숨을 헐떡거리는 말들을 보며, 이렇게 험한곳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을 한탄한 데 이어 명 장수 송응창까지 조령에 관방을 설치할 것을 주문하기에 이르자 임란 3년째인 1594년 2월, 유성룡이 조령의 사정을 잘 아는 신충원을 조령 방어 책임자로 천거하여 양쪽 절벽이 험준하고 계곡이 깊은 지형인 이곳 2관문 자리에 축성케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후에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조령 방어 전략과 성을 더 쌓아야 한다는 상소가 끊이지 않아 2관문을 증축하고 숙종때에 이르러 1관문과 3관문을 연이어 축성하게 되었다. 유사시에는 하나의 큰 산성으로 대군을 수용할수 있으며, 또한 남쪽의 왜적을 3중으로 방비할수 있도록 축성 하였는데, 관문을 짓고나서 단 한번도 왜적을 상대로 써먹지 못했으니 결국 사후약방문이 되었다.











삼도 순변사 신립이 선조의 명을 받고 북진하는 왜적을 물리치려고 내려갈때

신립의 부장 김여물 등은 이곳 험준한 조령에서 적과 싸우자고 했으나 

무예가 출중하고 명궁으로 소문난데다 기병8천을 이끌고 있던 신립은 이를 무시하고 

개활지인 충주천 달천평야로 향한다.


북쪽에서 소수의 기마병을 동원하여, 개인의 무력을 뽐내며 여진족과의 비정규전만을 경험해본 신립,

이처럼 대규모 사단병력의 정규 전쟁을 경험해본적이 없던 그는 소시적 여진족과 싸우던 생각만 하고 기병의 잇점을 최대한 활용할수 있는 개활지를 선택했다.


그런데,

신립이 기병하나만 생각하고 둘을 모르고 있던것들이 있었으니



신립이 모르던 두가지



첫째로, 기초적인 현장 정찰도 하지 않았던 신립은 달천평야가 기병에 유리한 단단한 개활지가 아니라 논과 갈대와 진흙 때문에 말이 제대로 뛸수 없는 지형 이라는것을 몰랐다. 게다가 당일 아침부터 비가내려 기병이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왜군은 100년이 넘는 전국시대의 전쟁을 거치면서, 조총을 다루는 방법이 대단히 발전하여, 조선에서 생각하던 조총의 단점들이 크게 개선이 되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상주전투에서 패한 이일이 신립에게 달려와서 적들의 놀라울 정도의 빠른 사격에 대해 경고를 주었음에도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당시 왜군은 전국시대의 전쟁통에 노무나가의 3단 철포 사격방식을 개발하여 기병을 상대하는 전술을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무대뽀' 신립의 기병은 애초부터 상대가 될수가 없었다.



무대뽀의 어원은 조총, 신립의 무대포 전략



우리가 조총이라고 부르는것을 일본에서는 철포라고 불렀는데 이걸 일본말로 뎃포 라고 한다. 1575년 일본 전국시대의 패자가 다케다 가문에서 오다 노부나가로 바뀌는 계기가 된 유명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최고의 기마병을 가진 다케다 가쓰요리軍을 상대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은 당시로서는 최대의 철포(조총) 부대를 동원하여 완전히 격파하였는데, 이때 이들이 개발한것이 3단철포 방식이다. 조총부대를 3열로 포진시켜 3인 1조로 3단 순환사격하는 방식으로 쉼없는 연사로 기마부대를 괴멸 시키는 전술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기마전술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경보병 개인전술이 유행하였으며, 철포는 전투에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고, 철포(뎃포)도 안들고 전장에 가는것을 무뎃포(無鐵砲)라 부르게 되었다. 조총 없이 싸우러 가는건 그만큼 무모 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기병을 상대로한 조총전술을 발전시켰던 왜군 입장에선 탄금대 개활지에서 왜군이 진흙탕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조선 기병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한마디로 무대포 였을게다. 연사속도가 조총보다 빠르고, 사거리가 두배나 되는 활을 이용해서 새재의 험준한 계곡에서 적과 싸울 전략을 세울줄도 모르고, 전장의 상태가 어떤지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삼열로 늘어선 조총부대 앞에 질퍽거리며 뛰지도 못하는 기병을 몰아 돌진하는 그가 바로 무대포 정신 아니겠는가. 그러고보니 마침 오늘(4/27)이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 패해 죽은 날 이다.











3관문도 몇번 가봤고, 이번엔 시간상 여기까지만..











혹자들은 신립이 조령에서 막지 않은 이유가 인근에 죽령이나 계립령등이 있어서, 왜군의 다른 군단이 돌아서 오게 되면 포위가 되어 위험할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주변의 산길들은 모두 험준한 외길로 소수의 병력으로 충분히 다수를 상대할수 있는바, 만육천이 넘는 신립의 군대가  기마병을 포기하고 산중에 분산배치 했으면 충분하고도 남을 숫자인데, 인근 산길이나, 심지어 전장인 탄금대도 정찰 한번 안해보고, 개인의 무위만 믿던, 병법에 문외한 이라는 의견이 더 설득력이 있다. 결국 왜군 1진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와, 2진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도 모두 조령을 통과했다.











신립의 행동이 너무도 이해 할 수 없자 조선시대에는 '신립이 귀신에 홀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중 하나가, 새재 골짜기에 살던 처녀가 신립을 짝사랑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원한을 품은 채 죽었는데, 이 처녀가 귀신이 되어 신립의 꿈에 나타나 충주 남한강변에 배수진을 치고 싸우라고 일러준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가 잘못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렇듯 임진왜란때 조총에 크게 타격을 받은 조선에선 왜란후 조총 붐이 불었다.


일본말로 무뎃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였는지..

그런데 음식도 편식을 하면 탈이 나듯, 군대 조직도 편식을 하면 탈이 나게 되는것을 간과했다.

전군이 조총으로 무장할게 아니라, 적의 돌진을 막을 창병등 충분한 수의 근접 전투요원이 필요했고,

유사시 연사가 빠른 궁병과, 일정수의 기병도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전군이 조총으로 무장을 한데다, 더욱 심각한건 그런 조총을 제대로 다루는 충분한 훈련을 안했다는 것이다. 총만 들면 임진왜란때의 왜군같은 힘을 발휘 할거라고 단단히 착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후 병자호란때 단군이래 이나라 전쟁사에서 최고로 황당한 패전이 발생했다.



4만 조선군 조총병이, 3백 청나라 기병에게 전멸



임진왜란과는 완전 반대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637년 1월 2일, 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경기도 광주시근처, 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4만의 조선군은 고작 3백의 청군 기병에 대패 하였으며,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계기가 되었다. 신립은 8천의 기병을 가지고도 대패를 했었는데 말이다.



결국 무기가 아니라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경상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은 급히 대부분 조총병으로 구성된 4만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나아갔다.  이들은 쌍령에 도달하여 목책을 세우고 전투에 대비하였는데,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던 6천명의 청군이 지금의 곤지암인 현산을 점령한 뒤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쌍령으로 약 30여명의 기마병들로 구성된 척후를 보냈다.


청의 척후병들이 조선군 목책에 다다르자 군율도 엉망이고, 훈련도 부족하여, 아직 조총에 숙련되지 못했던 병사들이 상당수였던 조선군은 청의 기마병이 사정거리내에 들어오기 전에 지휘관의 사격명령에 따르지도 않고 겁이나자 모두 발포해 버렸다. (이때 조선군은 소량의 화약을 개인 지급해 주었던 상태다)


첫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모든 화약과 총알을 거의 다 써버렸고, 조선군 진영은 재보급을 요청하는 수많은 병사들로 인해 혼란이 야기되었다. 혼란에 빠진 조선군의 동태를 눈치챈 청나라의 팔기병 300명이 돌진하여 닥치는대로 공격하여 순식간에 조선군의 선두진영을 깨부수자  조선군들은 살려고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근처 좁은 계곡으로 피하려 들면서 서로 밟혀죽고, 화약더미가 폭발하는등 대 아수라장이 발생하고 말았다. 청 기병 300명 손에 4만의 조총병이 박살나고 경상 좌, 우병사, 충청 병마절도사가가 사망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황당한 패전이 발생했다.











교귀정 앞 용추





























다시 교귀정을 지나간다.











오픈세트장으로 들어선다.

문경찻사발축제 행사는 이곳 오픈 세트장에서 진행이 된다.










문경찻사발축제 안내도
#문경찻사발축제

행사기간 : 4/27 ~ 5/6

행사소개 : http://www.sabal21.com/home/










오픈 세트장 내부는 문경찻사발축제를 준비 하느라 복잡하다.

주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간이 시설물에 차들도 왔다갔다 하고..

제대로 구경하며 사진찍기는 틀린 날 이다.





























세트장 뒤쪽의 조령산 암봉들이 멋지게 다가온다.




















백제궁





























세트장 뒤쪽의 숲에 일지매산채가 있는것 같은데, 시간상 가보지 못했다.




















1관문을 나선다.





















가을이 되면 예쁠 단풍터널을 지나 문경새재 트레킹을 마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문경새재길은 변함없는 편안함과 푸근함 그대로다.

비오는날 아침부터 레일바이크에서, 고모산성, 그리고 문경새재까지

멋진 분들 덕분에 문경 아름다운 곳들을 두루 잘 둘러볼수 있었다.

모든 일정에 수고하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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