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고모산성









진남역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오미자 테마터널로 이동한다.

일행들은 모두 오미자 터널로 들어가는데, 안내판에 고모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로 돌아오는 시간만 확인하고, 홀로 고모산성으로 향한다. 









오정산 등산 안내도


고모산성과 오른쪽의 오정산, 그리고 아래쪽에 토끼비리의 위치가 보인다.














촉촉한 소나무 숲길을 걸어 고모산성으로 올라간다.








고모산성과 연결된 석현성의 진남문














석현성 진남문


진남(鎭南)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문경새재가 쉽게 뚫린것을 반성하고 교훈 삼아 

정유재란때 이곳에 성을 쌓고서 남쪽(왜)을 경계하고 진압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같은 이름의 '鎭南'은 여수의 전라좌수영 본영에 있는 국보 304호의 진남관(鎭南館)이 있는데

여수에서 해마다 열리는 거북선축제의 다른 이름이 바로 진남제 이다.














진남문 안으로 들어와서 바라본 석현성














성곽길을 따라 고모산성으로 향한다.

고모산성과 석현성은 이렇게 이어져 있다.








석현성 성곽길 위쪽으로 고모산성이 보인다.








오정산 아래 자리한 석현성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진압한다는 진남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날개를 펼친 성곽이

한쪽은 고모산성으로 다른 한쪽은 위험한 벼랑길인 토끼비리를 향해 뻗어 있다.








문경 오정산(810m)과 석현성








고모산성에 도착한다.








고모산성의 높고 견고한 성벽

소규모의 성곽 이지만 성벽의 높이가 20m에 달해 보은의 다른 신라 성곽 처럼 견고한 모습 이라고 한다.











고모산성은 삼국시대 초기인 2세기경 신라에서 계림령로(문경-충주 미륵사지)를 개설하던 시기에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주흘산 이남이 한 눈에 보이며 남쪽으로는 불정지역 외의 다른 곳으로 길을 만들 수 없어 반드시 이 곳을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임진왜란, 동학농민운동, 한말 운강 이강년 선생의 의병항쟁시 전략적 요충지로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할미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의 둘레는 1,270m로서 장방형을 이루며 성의 높이가 낮은 곳은 1m, 높은 곳은 11m로 폭이 2-3m이며 동쪽에 암문 1개가 남아있고 남쪽 1km 위치에 옛길인 토끼비리가 있다. <출처 : 성내 안내도>








고모산성에서 바라본 경북팔경중 제일경인 진남교반

오정산 자락의 벼랑과 영강을 따라 토끼비리가 있다.


고모산성 아래에 써있는 토끼비리는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 층암절벽 사이로 난 길이 1㎞, 폭 1m의 벼랑길이다.  비리는 벼루, 벼랑의 문경 사투리 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 때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토천(兎遷)' 이라 부른데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고려태조 10년(927)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을 빼앗고 경주로 육박하니 신라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고려 태조가 보병으로는 따라 잡을 수 없어 정기(精騎) 5천으로 진군을 시작, 고모산성에 이르니 더 나아갈 길이 없다.


가을비가 내리고 길은 없어 고모산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냇물은 홍수 져서 도도히 흐르고 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진퇴양난이다.
그때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 바위 절벽을 가로질러 가자, 즉시 군졸에게 명하여 '토끼가 가는데 말이 못 가겠는가. 길을 내라' 했다.


이에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길을 내서 험로를 통과했다하여 지금도 토끼비리(兎遷)라 부른다.
옛날에 서울을 오가는 길손들은 이 길을 관갑잔도(串岬棧道)라 하여 가장 위험한 길로 꼽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석현성 성벽이 토끼비리와 닿아 천혜의 성벽을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때도 이 길을 지나가는데 험난했던것 같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일전쟁 당시 왜군은 이곳을 지키는 군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 춤추고 노래하며 지나갔다.>


마치 영동의 갈기산과 조헌에 관한 이야기와 흡사하다.

승병대장 영규대사가 갈기산 벼랑길에 매복하여 왜적과 싸우려고 했는데, 조헌은 선비의 품격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험한 벼랑길에서의 매복 게릴라전술을 외면하고, 당당하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왜적을 막지 않았는데, 왜군이 그곳을 지나가며 기쁨에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한다.








고모산성에서 바라본 석현성과 오정산














고모산성은 고모할미와 마고할미가 성 쌓기 내기를 해서 하룻밤 만에 쌓은 성 이라는 전설이 있다.

몇해전 둔덕산을 다녀오면서 무대륙과 마고할미의 전설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클릭


그 글에서 나는 우리나라 및 해외 수백곳에 산재해 있는 대홍수 및 배바위와 관련된 전설을 이야기 하고 수천년 오래전의 대쓰나미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뮤' 라는 게임으로 더 유명한 MU 대륙

단군이전 지금으로부터 12000년전에 태평양 으로 가라앉은 엄청나게 큰 무대륙의 침몰과 그로 인한 대 쓰나미. 태평양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들에 이와 관련된 공통되고 비슷한 전설이 남아 있고, 1926년 티벳 라사 고사원에서 그 기록이 발견되며 비로소 무대륙에 대한 이야기가 세계 고고학계를 깜짝 놀래키며 전설 밖으로 나왔다. 


태평양에서 무대륙이 침몰할때 대서양에서는 아틀란티스가 가라앉았다.

플라톤에 의해 처음 제기된 아틀란티스의 침몰은 서구 학자들의 꾸준한 연구로 이제는 전설이 아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1926년 제임스 처치워드(James Churchward 1851~1936)는 인류의 태초 문명사를 탐구한 저서 '인류의 조국 무우 잃어버린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 Motherland of Man)'을 발표하면서 그 책의 서문에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 책에 쓰여 있는 사건들은 모두 두 종류의 고대 비문판(Stone Tablets)에 근거하고 있다. 그 하나는 나 자신이 몇십 년전에 인도에서 발견한 나아칼(Naacal)의 점토판이며, 또 하나는 월리엄 니이벤씨가 멕시코에서 발견한 2천5백여점의 석판이다. 이 두 종류의 비문판은 모두가 무우 대륙의 성전 '거룩한 영감의 책'을 바탕으로 하여 기록된 것이다.


나아칼(Naacal)의 점토판은 고대 나가마야(Naga-Maya)의 표상과 문자에 의해서 엮어져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어머니의 나라' 무우에서 쓰여져 버마를 거쳐 인도로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 전의 일이다.


멕시코의 석판이 어디에서 기록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북방의 고대 위글계의 표상과 문자가 쓰여지고 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이 무우대륙에서 쓰여지고 있었던 알파벳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멕시코 석판의 연대도 아주 오랜 옛날인 약 1만2천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어머니의 나라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 석판에 의해서 내가 발견한 나아칼(Naacal)의 비문 가운데 특히 천지창조에 관한 기술에서 빠져 있는 부분 즉, 우주의 4대 원동력의 발생과 그 활동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내가 동양에서 볼 수가 없었던 나아칼(Naacal)의 점토판은 '잃어버린 고리'(밋싱링크)처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자기 자신의 체험에 의해서 이들 비문판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을 보증하고 증명해 보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약 50여년의 귀한 세월을 소비하며 세계 각지를 싸돌아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중대한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시기에 이 지구상에 아주 크나 큰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며, 그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 문명을 훨씬 능가하는 고도의 문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위대한 고대 문명이라 하여 경탄해 마지 않는 인도, 바빌로니아, 페르샤, 이집트, 유카탄 '마야문명의 중심지'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문명의 흔적은 사실 그 대문명의 타다 남은 잔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수반하여 이해되었던 것은 인류 탄생의 땅,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일어났던 발상지는 나일의 강변도, 유우프라테스의 강 유역도, 미국도, 오리엔트의 어떤 고장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씀에 있어서 영국박물관, 호놀룰루의 민속박물관, 아메리칸 위클리지, 로스앤젤리스의 E. A. 솔즈베리 대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새뮤얼 하버트 씨, 텍사스주 오스틴의 윌리암 니이벤씨 등의 협조에 뜨거운 감사를 보내는 바이다. 또 인도 및 티베트의 몇 군데 승원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그 쪽의 희망에 따라 사원의 이름, 지명 등은 일체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성을 고모산성이라 부르지 않고 마고성 이라고 부른다.

산 아래 마성면 또한 원래는 마고성면 이었는데, 1916년 고(姑)를 떼고 마성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실, 현재는 폐허 상태지만, 인근 마원리 우무실 마을 뒤 봉명산에 마고산성이 따로 있다.

마고할미와 고모할미가 서로 경쟁하듯 이 성들을 쌓았다는 전설을 떠나, 마고할미와 고모할미는 동일인물로 보인다.

마고할미, 고모할미, 그리고 지리산과 경남 양산의 노고할미는 결국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것 같다. 


한가지, 우리나라의 마고, 노고, 고모할미, 제주도 선문대할망의 공통점은 거인 이다.

여기 저기서 성을 하루만에 쌓았다고 하고

얼마나 몸집이 큰지 노고산과 불국산에 다리를 걸치고 오줌을 누었다고 하고

선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졌다고 하고

이스터섬의 엄청난 석상들도 무대륙의 유물 이라고 한다.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을 빛내던 무대륙

낮은 동산 외에는 높은 산이 없는 평평한 대륙이 화산폭발에 의해 한순간에 6000만명을 수장시키며 태평양 한가운데에 침몰했을때 지구에는 엄청난 쓰나미가 발생을 하였고, 우리나라의 수많은 배바위의 전설들이 당시 생겨난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이곳으로 살아 넘어온 무대륙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고할미나, 노고할미, 고모할미는 그때의 무대륙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의 해변에 키가 수십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거인의 시체가 떠올랐다고 한다.

우리나라 외에도 태평양 주변의 말레이시아, 태국, 멕시코, 브라질, 페루 등에도 거인과 관련된 전설과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 2. 661년
문무왕 법민


왕이 처음으로 즉위한 용삭 신유(661년)에 사비수 남쪽 바다에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데 몸 길이가 73척이요, 발 길이가 6척이요, 생식기 길이가 3척이나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몸 길이가 13척이며, 건봉 2년 정묘(667년)이라고도 한다. (73척=21.9m)





정사인 삼국사기에 기록된 거인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의자왕(義慈王)
十九年秋八月  여자 시체가 떠내려오다  (659년 8월 미상 음력)

가을 8월에 여자 시체가 생초진 (生草津)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 이었다. (18척=약5m40cm)








고모산성 남문


고모산성의 서문지에서는 최대 깊이 4.5m까지 땅을 파고 내려간 다음 가공한 다양한 목재를 마치 성냥개비를 쌓아올리듯이 축조한 이 지하건축물이 발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껏 발견된 이와 유사한 지하 건축물들이 모두 백제의 유적인지라 이 점은 의아하기만 하다.








고모산성에서 바라본 오정산









전설을 뒤로하고 고모산성을 내려선다.














석현성 안쪽에는 옛 과거길 주막거리를 조성해 두었다.

문경에 남은 마지막 주막인 영순주막과 예천에 남은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을 재현해 놓았다.

결국 이 길이 옛날에 과거보러 다니던 길이고, 왜란때 왜적들이 다녔던 길 인것 같다.

그러고 보면 고모산성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새재와 문경으로 들어서는 길목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들을 막기위한 요충지의 관문인 셈이다.









그런 진남문을 다시금 돌아보며 오미자 터널을 구경하고 나온 일행들을 찾아 내려간다.

대서양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 그보다 훨씬 더 컸던 태평양의 무대륙의 침몰과 대홍수

고모할미와 마고할미,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한 신라의 고모산성 그리고 임진왜란

또한 조선말 항일 의병들의 거점 이었던 이곳, 많은 생각이 함께한 짧은 탐방을 마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