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논개 생가지 주차장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708)


남원 운봉에서 출발하여, 동화호가 있는 번암을 거치고 동화리 지지계곡을 지나, 장안산과 영취산 사이에 있는 무룡고개를 넘어가는 743번 지방도로가 대곡호를 지나기 직전에 우측으로 논개생가지를 지나간다. 무룡고개를 넘어 고속도로를 타기위해 대곡교차로에서 좌회전 하지 않고 직진을 하면 된다.




















의암 주논개의 충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20,000 여평의 부지에 50억원을 투자하여 2000년 9월에 논개생가지 복원사업을 완료 했다. 가까운 곳에 장안산 군립공원과 지지계곡, 봉화산 철쭉이 아름다워 매년 봄이면 철쭉제를 여는 장수 번암면 노단리와 마을에 있는 예쁜 이름의 동화댐이 있어 연계하여 등산 및 관광을 할 수도 있는 곳 이다.











멀리 보이는 논개상











의랑루











변영로님의 논개 라는 詩를 옮겨 본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의암 주논개 (義巖 朱論介)


의암 이란 진주성 촉석루 암벽아래 남강 물속에 있는 바위로, 임진왜란 전에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危巖)이라고 불리웠는데, 논개가 이 바위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후 의로운 바위라하여 의암 이라 불렀으며, 바위에 義巖 이라 새겨지게 되었다. 이후 예문관은 의암(義巖) 이라는 사호(賜號)를 내리고 의암바위 옆에 논개 사당을 지어 그 넋을 추모하게 되었다.











논개 동상을 지나면 안쪽으로 생가터가 자리한다.











1987년에 완공된 바로 옆의 대곡저수지로 인해 생가터가 수몰되자 현 위치로 옮겨서 복원이 되었다.











논개의 성은 주(朱)씨로 관향은 신안(新安)이고, 이곳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논개 라는 이름은 그녀의 사주에 개(戌)가 4개나 있어서 (개해, 개달, 개날, 개시), 개를 놓았다 (낳았다) 하여, 논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친의 센스인지, 개를 의미하는 구(狗) 대신에, 음을 딴 介자를 썼다.






























논개는 13살에 서당 훈장을 하던 아버지를 여의고, 우여곡절 끝에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의 보호를 받다가, 최경회 부인이 죽자, 17살에 40살 연상 최경회의 후처가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로 발령을 받게 되어 진주에 부임 한다. 1593년 6월 11일 2차 진주성 싸움이 시작되고 19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최경회는 수하 장수들과 패배에 대한 굴욕으로 남강에 투신하게 되고 참혹한 진주성 전투는 막을 내린다.


왜구는 7월7일 남강에서 승전축하행사를 치르게 되는데, 이때 논개가 축하행사에 기생으로 가장해 열 손가락에 열개의 가락지를 끼고서 들어간다. 그리고 왜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의 의암 바위에 서서 투신한다. 그 당시 그녀의 나이 열아홉 이었다.












어쩔수 없는 선택 이었겠지만, 논개의 마지막이 기생의 모습 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유교 사회의 어찌할수 없는 한계 였을까.


그녀의 의기로운 순국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사대부들의 편견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논개의 충절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논개가 공식적으로 의기로 호칭이 된 것은 1721년인 경종 1년 경상우병마절도사 최진한이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품의하여 그녀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부터였다. 그렇지만 결국 의기란 의를 행한 기녀 라는 말로,끝내 그녀는 포상에도 기녀로 남았다.




















논개생가지가 있는 마을 풍경

이곳에는 장수도깨비 전시관 이라는 볼거리도 있다.











한바퀴 돌아 위쪽으로 올라선다.

전망대는 나무에 가려 조망이 그렇게 좋지 않으며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지 벌집이 자리 하고 있다.











다시 돌아내려와 아래로 내려섰다.

연못과 단아정(丹娥亭) 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아름답다.

주논개가 어릴적 친구들과 노닐던 곳을 재현해 놓은것 이라고 한다.











생가지 공원을 빠져 나가며 뒤 돌아본 논개상


 

  

말고 말근 강남수(江南水)야 임진(壬辰)이를 네 알니라.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덜이 몃몃치나 빠져난고.
아마도 여중장부(女中丈夫)는 논낭자(論娘子)가 하노라.

 

 











의랑루를 빠져 나가며 생가지 탐방을 마친다.


단풍이 끝난 직후 들렀던 곳을, 가을의 마지막 날에 정리해서 올린다.

가을은 꿈처럼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가버리고

꽃이 다시 피기까지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잔인할까

가을의 마지막 날에 마지막 추억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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