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모임, 부여에서의 하룻밤

백제의 술로 늦은 밤까지 분위기를 달궜다.

칠장주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맛은 정말 오래 기억될것 같다.










하룻밤을 묵었던 롯데리조트

이 근방에 롯데가 대규모 투자를 한것 같다.

리조트, 아울렛, 골프장 그리고 2017년부터 위탁운영을 시작한 문화재단지 까지


리조트를 나와 문화재단지 주차장에 도착할 무렵 이슬비가 살살 흩뿌리더니, 갑자기 거세진다.

주차장엔 평일 임에도 불구하고, 십여대가 넘는 관광버스가 서있고, 승용차들도 많이 보인다.

비가 거세지자 우산 없이 문화재 단지로 들어섰던 노인들이 서둘러 되돌아 나온다.


유치원 버스도 여러대 보이고,,, 도대체 여기에 볼게 뭐가 있다고 사람들이 이리 많지?

몇년전 부소산에 올랐을때 백마강 건너에 조성된 백제 왕궁이 살짝 보였다.

백제 왕궁을 작게 복원해논 거라고 대충 생각을 했었고, 언젠가 부여를 다 돌아보고나서

시간이 많이 남으면 한번 가볼 생각 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그날이 왔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게 대단히 잘못된 생각 이라는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문화재단지 입구인 정양문으로 가는 중간에 백제역사문화관이 있다.

문화재단지 입장권을 끊으면 역사문화관은 무료입장 이다.










정양문


비가 오면 휠체어를 밀고 들어갈수 없기에, 주차장에서 좀 더 기다려보다가 철수 하기로 했는데, 잠시 더 기다리는 사이에 비가 점점 잦아들더니 그쳐서 우산을 챙겨들고 부여문화단지 입구인 정양문을 통과한다.










여섯명 일행인데, 4명이 무료 입장을 했다.

버스를 타고 오신분들의 거의 대부분이 노인분들 아니면 유치원 꼬마들인 이유를 알았다.

노인분들과 미취학 꼬마들은 무료 입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6,000원 이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야만 한다.

처음엔 부소산성에서 보이던 작은 궁궐 세트 구경하는데 왜 이리 입장료가 쎈가 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보면 금새 알게 된다.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단지 입장료가 무료이기 때문에 많이 찾는게 아니라는 것을.










먼저 사비궁으로 향한다.

백제의 마지막 왕궁.










천정문


궁궐의 가장 중앙에 우뚝선 출입문으로 천정전의 남문을 뜻한다.










천정전


각종 사극에 나왔던 공간 으로 사비궁의 정전 이다.

천정전은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했던 취령봉 정사암 에서 이름을 따왔다.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 산5번지, 취령봉 정상에 있는 바위로 삼국유사에 보면 호암사(虎岩寺)에는 정사암(政事岩)이란 바위가 있는데 나라에서 재상을 뽑을 적에 후보자 3, 4명의 이름을 적어 함봉 한후, 이곳 바위 위에 두었다가 열어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정사암을 천정대(天政臺) 라고 부르며 신성시 했다고 한다.




















서궁과 뒤로 보이는 천정전











사비궁의 회랑











서궁 인덕전에는 의상체험 공간이 있는데, 비오는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하다.










서궁의 정전인 무덕전 실내에는 활쏘기 체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무덕전의 천정




















신하들의 집무 공간인 동궁 연영전









동궁 연영전에서 바라본 동궁의 정전인 문사전

사비궁은 중앙에 중궁을 두고 양쪽으로 동궁과 서궁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비궁 동궁전 회랑 뒤로 보이는 능사의 5층목탑










동궁을 나와 오른쪽 위에 있는 고분공원 부터 가기로 한다.

고분공원 가는길에 바라본 능사의 건물들이 웅장하다.










사비궁을 나와 고분공원으로 걸어가면서 이미 기존에 내가 가졌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부소산성에서 보이던 문화재단지의 모습은 작은 일부분으로..

대충 작은 왕궁 세트장 정도 일거라는 예상과 달리 마치 당시의 실제 모습처럼 엄청난 규모였다.









백제 고분공원


부여에서 출토된 고분을 이전 복원해 놓은 것으로 사비시대의 대표적 고분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고분공원을 둘러보고 능사로 향한다.

제향루는 가장 기대가 큰 조망터










장인의 꼼꼼한 손길이 느껴지는 능사 자효당의 천정










능사 회랑에서 바라본 대웅전 역할을 하는 능사 금당과 능사5층목탑

건물 주위로 화재에 대비한 물대포가 여러대 보인다.










엄청난 규모의 능사5층목탑

외부의 물대포가 인상적인데, 내부에도 화재방지 시설이 철저하게 되어 있다.










능사는 부여 능산리 나성과 고분군 사이에서 발견된 유적을 1:1로 이곳에 재현해 놓은 것으로,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위해 지은 사찰 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백제 최고 유물로 평가되는 국보287호 <백제금동대향로>와 AD 56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려주는 국보288호인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능사의 목조건물들은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단청장, 번와장, 각자장, 칠장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모두 참여하여 복원하였으며, 특히 이 능사 5층목탑은 백제 공예기술과 건축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으로, 38m 높이의 국내 최초의 재현된 백제 목탑 이다.


현대의 최신 장비를 가지고, 최신 건축술을 통해서 복원을 하는데도 애로가 많았다고 하는데, 1450년전에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끼움과 맞춤 기법으로만 아파트 13층 높이의 목탑을 완성했다고 하는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건축술 이라고 한다.










능사 5층목탑의 내부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위로 올라가는 계단 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능사 금당 (대웅전)의 목조 삼존불

능사 대웅전은 금당 이라고도 부르며, 외부에선 2층의 구조로 되었고, 내부에선 통층 구조다.










목조삼존불 앞에 있는 금동대향로 모형










대웅전 앞에서 올려다본 5층목탑위 위용


사비궁과 능사를 둘러보고 있노라니 이곳 문화단지가 대충 만든 세트장이 아니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국내 최고의 장인들의 땀과 섬세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세트장이나, 관람용 모형 건물 수준이 아니라, 실제 백제의 건물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듯 보였다.










능사를 배경으로 조카 사진 한장











능사 남쪽 연지에서 바라본 능사

날씨가 흐린게 너무도 아쉽다.










이제 기대하고 있던 백제문화단지 최고의 전망대인 제향루로 향한다.

그런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이상하다.

나무들이 제향루를 가리고 있는듯한 모습.











위 사진 화단 사이의 계단위로 올라서 내려다본 사비궁


















상당히 규모가 있는 백제의 왕궁 이다.










계단을 따라 제향루로 향한다.










부여 문화단지의 화룡점정인 제향루


문화재단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제향루

원래 그런 목적으로 이 위치에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










제향루에서 내려다본 기가막힌 사비궁의 전경


정말 기가 막혔다.

화룡점정을 가리고 있는 저 나무들을

처음에 묘목을 심을때는 예상하지 못했을까..

문화재단지 최고의 전망대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날 둘러본 문화재단지의 유일한 옥의티라 는 생각이 들었다.










제향루에서 절망을 느끼고 내려오며 바라본 생활문화마을


















군관주택, 귀족주택, 중인주택, 서민주택 으로 구성되었으며

계백과, 건축가 아비지, 의박사 왕유능타, 주조기술자 인번의 집등 실존 인물의 집을 재현해 놓았다.










먼저 맨 위에 있는 위례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위례성은 한성시기의 도읍을 재현해놓은 것으로,

온조왕이 한성에 자리를 잡고 백제의 수도로 정한 곳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백제의 역사 기록은 거의 전무하기에

우리가 학교 교과서를 통해 배운 삼국의 역사, 백제의 역사는 완전 허구일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배운 삼국의 역사는 흔히 반도사관 이라고 불리우는

이 좁은 한반도 안에 삼국이 모여살며 아웅다웅 했다는 이야기인데


삼국의 기록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고작 고려 인종때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등에 의존하고 있다.

일제는 일왕의 칙명으로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20만권이 넘는 고대 역사서를 불태워버리고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역사왜곡에 앞장을 섰다.


그런 일제가 태우지 않고 남겨놓은 삼국사기

지금의 삼국사기는 고려 당시 김부식이 쓴 원본이 아닐뿐더러, 그 내용은 유교적 관점과 중화세계관을 바탕으로 일제의 입맛에 딱 맞는 왜곡된 내용이어서 일제가 대륙에 바탕을 둔 한민족의 시원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근거로 쓰기 위해 남겨두었다는 의견이 많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의 역사서를 태우고 조작된 역사를 만든 장본인들이 광복후에 친일청산이 되지 않고  역사를 가르치며, 역사 교사를 양성하면서 현재 이땅에 친일 식민사학이 뿌리를 내렸다는것을 이제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렇기에 우리의 역사를 안타깝게도 중국의 사서에 많이 의존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기록들과 우리가 배우던 역사의 기록들간에 간극이 너무도 크고 상충되는 내용들이 많다.

많은 재야의 고수들이 논리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고대사의 허구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데, 많은 부분에서 놀라울 정도로 우리가 배운 역사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위례성 주위에 작은 해자까지 파두었다.



만일 그 기록들이 힘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현재의 역사교과서를 대폭 수정해야 할 것이며, 반도사관에 얽매여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역사기록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득권을 가진 역사학계의 벽은 너무 두텁고 쉽게 자신들의 권리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위례성 또한 마찬가지다.

하남 위례 도읍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곳이 아니고

백마강 또한 지금의 백마강이 아니며

황산벌 또한 논산의 그곳이 아니고

심지어 부여의 사비성 또한 현재의 그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들..


단지 설이 아니라, 중국의 사서의 기록이 너무도 절묘하게 그들의 주장과 부합되고 있으며

우리측의 기록과 주장들이 많은 부분에서 논리에 맞지 않는 다는 점 이다.

이땅의 지명과 동일한 지명이 중국에도 존재한다는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중국 사서에 나오는 각종 지리적 상황과, 군사들의 이동거리, 시간, 방향등이 반도사관의 관점 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수 없음을 다들 알고 있는데도 우리의 기득권 역사 학계는 이 땅의 역사를 반도 안으로 쑤셔 넣고만 있는것 같다.


고려 이전의 고대 역사는 너무도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 사실이 아닐수 있다는 것도..

심지어 현재의 경주가 당시의 계림이 아니고

현재 경주에 있는 왕릉들이 사실은 왕릉이 아니라는 것들도...

경주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 이전의 유물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것이 백제 멸망후의 첨성대 라고...


삼국의 역사는 모든게 미스테리다.


















백제의 멸망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예식진과 흑치상지


백제는 당과 신라의 기습을 받고 채 병력을 제대로 모으지도 못하다 개전 5일만에 사비성을 빼앗기고 의자왕과 태자가 웅진성으로 피한후 전세를 역전시킬수 있는 기회를 앞두고 성주 예식진의 배신으로 부하에게 체포되어 항복을 당하게 된다. (예식은 이후에 당으로 가서 정3품 좌위위대장군에 이른다.)


백제의 멸망에는 웅진성주 예식의 배신 말고도 유명한 흑치상지 장군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계백과 더불어 달솔의 직책을 갖고 있던 흑치상지는 백제가 망한 이후에 단 10일만에 3만의 군사를 모을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던 명장 이었는데, 신라와 당의 침공당시 의자왕의 동원령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훗날 백제부흥군을 도우러 오는 왜국 병사들의 상륙을 방해하여 당수군에 당하게 하고, 배신하여 본인이 지키던 난공불락의 임존성을 본인이 함락시켜 백제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이후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토번과 돌궐군을 상대하며 연전연승하여 외국출신 장수로는 아주 드문 종1품의 연국공(燕國公)에 이르게 된다.


당의 측천무후는 "왜 의자왕은 흑치상지같은 뛰어난 장수가 있음에도 나라를 잃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으며, 백제의 멸망에는 흑치상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병력을 움직이지 않은것이 가장 큰 패인 이라고 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689년 '한번 배신한자는 또 배신한다' 라는 측천무후의 지침에 따라 역모의 모함을 받아 토사구팽을 당해 처형된다.




































이 작은 해자엔 철갑상어들이 헤엄친다.










주조기술자 인번의 집











술빚는 서민의 집의 술독과 병들










화룡점정 제향루가 아니라, 옥의티 제향루가 보인다.










제향루를 답답하게 에워싸고 있는 저 나무들을 어떻게 좀 해줬으면 ..










왼쪽에 주막도 보이지만 운전 때문에 패스..










일행들 모두 한결같은 표현으로 입을 모은다.

고향 전주의 한옥마을 보다 낫다고

6천원 입장료가 아깝지 않게 잘 해놨다고.










계백장군 주택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역사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얼마만큼 왜곡되었든지

부여의 문화재단지는 부여를 방문할때 빼놓지 말고 방문해야만 하는 명소임에 틀림이 없다.  











규모가 웅장한 사비궁


















비오는 가을 날, 가족모임 덕분에 백제문화단지를 둘러보게 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규모와, 최고의 장인들의 솜씨에 다들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도 부여 최고의 역사 유적지라 생각하며, 조감도를 보니 주변에 추가적인 단지가 세워질것 같다.


여름엔 야간개장도 한단다.

맑은 여름날 오후에 다시 오고 싶다.


백제문화단지 홈페이지 : http://www.bhm.or.kr/htm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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