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코스 : 청량지문 - 축융봉 - 입석 - 응진전 - 자소봉 - 하늘다리 - 장인봉 -  주차장

산행시간 : 12.58km, 5시간26분 (점심포함)











청량지문 앞에서 하차하여 우측의 목교를 건넌다.

산악회 일행들은 모두 입석에서 자소봉으로 바로 올라가는 여유있는 코스를 타고

축융봉에서 청량산을 바라보고 싶은 나만 홀로 환종주를 위해 청량지문에 내렸다.

주어진 시간은 6시간, 그 시간안에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축융봉 까지는 2.9km


초반부터 약 1km 정도 까지인가... 초입부터 가파른 데크 계단길이 이어진다.

청량산의 등산에 관한 소감을 단축하자면, 지긋지긋한 계단길 정도가 되겠다.

마지막 하산길 까지 가파른 계단이 줄을 잇는다.











잠깐 올라서니 조망바위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서면 정식으로 조망데크가 또 있다.


이날 날씨가 맑다는 예보를 봤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새벽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건지, 연한 개스가 시계를 흐리고 있다. 대전에서 3시간이 걸려 도착하느라 이미 10시가 넘어, 시간도 약간 늦은감이 있고, 단풍은 블친님들을 통해 2주전 절정을 맞고 이미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국발 미세먼지가 마지막 희망을 꺾는다. 마음을 비워야 하는 하루다.











35번 국도 옆으로 낙동강이 조용히 흐르고

조금전 지나온 청량교가 우측 아래로 보인다.











청량산 상가지구











청량산의 바위는 마치 콘크리트 같다.

자갈과 바위가 섞인 콘크리트가 오래되서 부식된것 같은 모습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으로, 진안 마이산도 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낙엽이 가득 쌓인 가을길을 걸어 축융봉에 도착한다.

축융봉은 사진과 같이 철계단 양쪽 봉우리로 나뉘어져 있다.

우측의 봉우리가 정상이고, 왼쪽 봉우리도 오를수 있다.











축융봉 정상


청량산은 온통 바위산이라 그런지 물이 귀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청량산으로 바뀌기 이전, 옛 이름이 수산(水山) 이었다는데

물이 많아서 수산이 아니라 물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그래서 청량산인 이라 불릴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던 퇴계선생도 청량산에 도산서원을 지으려다가 물이 부족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불의 신 축융의 이름을 딴 축융봉.

가뭄이 심할때 이 산에서 불의 신 축융에게 제사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도 단풍 절정일때 이 곳에서면 암봉을 타고 오르는 청량산의 화염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11개 봉우리

청량산은 육육봉 이라고 해서 총 1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한개는 지금 서있는 축융봉.











축융봉에서 바라본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의 하늘다리








축융봉에 올라보지 않고, 청량산에 갔었노라 말하지 마라 !



산에 들어가면 산을 볼 수 없다는 말처럼

청량산을 제대로 보려면 축융봉에 올라야 한다.


누군가 그랬던가

축융봉에 올라보지 않고선, 청량산을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고...


그리고 가능하면 나처럼 때 늦게 오지 말고

청명한날 청량산에 오색 단풍이 불꽃처럼 피어오를때 올라보시기를..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정상 장인봉과 왼쪽 뒤로 보이는 문수산, 옥석산, 선달산

미세먼지로 인해 원거리 조망이 아쉽게 되었지만 아쉬운대로 마루금은 살짝 보인다.












축융봉에서 바라본 만리산과 뒤로 소백산 마루금












축융봉에서 바라본 영양의 일월산












축융봉에서 바라본 문명산과 태백산

왼쪽 아래로는 청량산의 오지마을인 두들마을












청량산 축융봉에서 바라본 조망도 (소백산, 만리산, 풍락산, 선달산, 옥석산, 문수산) 











정상(동봉)에서 옆에 있는 서봉으로 가서 바라본 축융봉 정상











축융봉에서 바라본 장인봉과 왼쪽으로 지나온 능선 길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자소봉과 청량사 그리고 우측 벼랑 중간의 응진전











당겨본 자소봉

자소봉은 바위 봉우리의 2/3 지점까지 오를수가 있다.











축융봉을 내려와 입석을 향해 걷다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공민왕당과 산성길을 둘다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입석에서 왕복 산행을 해야 한다.

산성길을 택해 왼쪽으로 향한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축융봉 정상





























산성길을 내려서며 바라본 청량산의 연봉들

연꽃의 한 가운데 자리한 청량사




















금탑봉 벼랑 중간에 요새처럼 자리한 응진전

등로는 응진전을 지나 왼쪽으로 벼랑 중간의 나무를 따라 이어진다.




















밀성대를 안쪽으로 한바퀴 돌아보고 간다.

밀성대(密城臺) 바깥쪽 삼면은 벼랑이다. 

이곳은 공민왕이 군율을 어긴 병사들을 밀어 떨어뜨려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밀성대를 한바퀴 돌아보고 나와서 하산길이 이어진다.



홍건적의난과 공민왕의 이동경로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충북 영동의 천태산 영국사에 가면 공민왕의 전설이 있고, 인근의 어류산 역시도 임금이 (공민왕) 머물렀던 산 이라는 말인데,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남하를 했던 공민왕이 언제 충북 영동을 거쳐 이곳 경북 안동에 왔단 말인가? 공민왕의 피난경로를 연결해 보기에도 안동과 영동은 너무도 멀다.


실제로 홍건적의 침입때 공민왕은 개경을 출발하여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죽령-영주를 지나 안동에 이르러 3개월을 머물게 된다. 안동(당시 복주)에 도착한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건적의 난이 진압이 되자 귀경길에 상주에 들러 6개월을 보내고 청주에서 4개월을 보낸후 이듬해에 개경에 들어가게 된다. 전란 이후에 공신들간에 알력다툼으로 변란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상주에 머무는 6개월동안 가까운 영동 천태산 영국사에 들렀을 가능성이 있고, 또는 청주에 머물면서 고려 태조의 진전이 있는 연산 개태사에 2번이나 가서 점을 쳤다고 하는데, 그때 청주-옥천-영동-진산-연산 으로 이동하면서 영국사에 들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군율을 어긴 병사를 밀어 떨어뜨렸다는 밀성대의 벼랑











입석마을로 내려서며 바라본 오마도재 방향


축융봉 아래에서 두리봉을 지나 오마도재를 건너는 크게 도는 환종주길도 있는데 

두리봉은 청량산 12봉에 속하는 산도 아니고, 주어진 시간도 6시간이 못되니

청량산만 한바퀴 도는 코스를 선택했다.




















입석으로 내려섰다.

왼쪽 금줄로 테두리된 안의 커다란 바위가 입석 이다.

이곳에서 우측의 등로 입구에서 자소봉을 향해 다시 오른다.











조금 오르니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 응진전 방향으로 향한다.

응전전에서는 청량사를 볼 수 있지만, 청량사에서는 응진전을 볼 수가 없다.

청량사는 다음에 금탑봉-경일봉-탁립봉 코스를 가면서 들려볼 생각이다. 











응진전으로 오르는 길

단풍은 이미 끝났지만, 단풍색 계단에 가을 분위기가 조금 난다.











응진전으로 가면서 바라본 금탑봉

노란색 가을잎이 금탑처럼 보이는 봉우리 상단의 바위 벼랑 중간에 응진전이 보인다.











응진전과 뒤쪽의 암벽위에 올려진 작은 바위가 동풍석(動風石) 이다.




응진전 동풍석의 설화


어느 스님이 좋은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자리를 찾았다. 다만 바위 하나를 치워야 했다. 그래서 힘센 스님이 절벽 아래로 그 바위를 밀어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떨어진 바위가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절을 짓지 않았다. 현재 응진전 뒤 높은 절벽 위에 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세게 밀어도 건들거리지만, 한 사람이 밀어도 건들거리고 바람이 불어도 건들거릴 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동풍석이라 부른다.











응진전 뒤쪽의 기묘한 바위

왼쪽의 푹 파인 바위가 부처님 발을 닮았다는 불족암(佛足岩) 이다.











응진전의 요사채


축융봉에서 볼때는 벼랑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듯 보였는데, 와서 보면 꽤 여유가 있다.

요사채 한쪽으로는 텃밭도 조성되어 있다.











응진전과 요사채 사이 벼랑 밑에는 감로수가 흘러나온다.

총명수, 청량약수, 김생폭와 더불어 청량산 4대 우물이라고 한다.











감로수를 시원하게 한잔 마신다.

그러고 보니 축융봉을 물 한모금 안마시고 넘어와서 비로소 처음 마시는 물이다.




















청량산 응진전


응진전은 나한들을 모셔놓은 전각으로서 나한전(羅漢殿)이라고 한다.

응진전의 이름은 나한에서 유래한다. ​

산스크리트어 '아라하트'의 음역, 음사 한 것이 아라한이고, ​그 준말이 나한 인데

그 뜻이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인 '응공'

또는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 이라고 한다.
청량사 응진전은 고려말 노국공주가 16 나한상을 모시고 기도 정진한 곳 이라고 한다.











응진전을 지나 어풍대로 가다 바라본 연화봉











연화봉과 청량사











신라 시대 최치원이 수도하면서 이 물을 마시고 정신이 총명하여졌다고 해서 유명해진 총명수(聰明水)











어풍대에서 청량사를 구경하며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다.




















김생굴 앞의 화사한 단풍











김생굴


김생은 해동서성 이라고 불리우는 신라시대의 서예가로 이곳 청량산에 암자를 짓고 10년간의 노력끝에 신필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생폭포




















철계단을 오르면 자소봉의 2/3 지점에 정상석이 만들어져 있다.











자소봉에서 바라본 탁립봉과 뒤로 일월산











자소봉











자소봉에서 바라본 풍락산(좌)과 문명산(우)











연적봉에서 바라본 탁필봉과 자소봉

바로 앞의 탁필봉과 뒤쪽의 높은 자소봉이 겹쳐 보인다.

탁필봉과 연적봉의 정상석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기다리다 지나쳤다.











이후로 하늘다리 까지는 특별한 조망처가 없는 평범한 육산 이다.

산속에 들어오니 멀리서 잘 보이던 산세가 보이지 않는 셈 이다.











하늘다리는 이쪽 자란봉과 건너편 선학봉을 잇고 있다.

처음 조성할땐 국내 최고 긴 산악 현수교 였는데, 지금은 이 보다 긴 다리들이 있다.











하늘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건너편 선학봉의 명품송











뒤돌아본 자란봉 왼쪽의 암벽과 문명산











건너편 선학봉 암벽과 문명산











하늘다리에서 바라본 문명산











선학봉에 건너와서 바라본 자란봉 방향의 하늘다리











선학봉에서 정상인 마지막 장인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안부까지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장인봉으로 오르며 바라본 멀리 자소봉

장인봉은 조망이 좋지 않다.











김생의 필체로 쓰여졌다는 장인봉


원래는 장인봉 대신 의상봉, 자소봉 대신 보살봉 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풍기군수 주세붕이 불교식 이름을 싹 없애고 유교식 이름으로 바꿔놓았다고 한다.


이곳 장인봉 이름의 유래는 중국 태산 장악(丈岳)의 장인봉에서 따온것 이라고 한다. 중국 태산의 장인봉은 산세가 노인의 여유로움과 같이 평탄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 이라고 한데, 여기 우뚝선 장인봉은 노인의 여유로움은 커녕 하산길이 온통 가파른 계단길의 연속에 바위벼랑을 타고 도는 길로 까칠하기만 하다.




그 장인이 그 장인 이더라


그런데 태산의 장인봉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당나라 현종이 태산제를 지낸 후 장씨 성을 가진 권신의 사위가 진급을 하게되자 사람들이 태산의 힘 덕분이라고 농담을 하였다는데, 그 후 사람들이 그 장인을 태산 이라고 부르기도 해서 장인봉이 되었다는데, 정상으로 가는 길에 반보님이 전화를 해서 어디쯤이냐고 묻는 말에 장인봉으로 가고 있다고 하니, 자신은 장인봉은 진즉 넘고, 처제봉도 넘었다고 농담을 했는데, 결국 그 장인이 그 장인인 셈이다.










정상석 뒤쪽엔 주세붕의 시가 적혀있다.



登淸凉頂 (청량산 정상에 올라) - 주세붕 -


我登淸凉頂(아등청량정) :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兩手擎靑天(양수경청천) :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白日正臨頭(백일정임두) :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銀漢流耳邊(은한유이변) :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俯視大瀛海(부시대영해) :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有懷何綿綿(유회하면면) : 감회가 끝이 없구나.
更思駕黃鶴(갱사가황학) : 다시 황학을 타고
遊向三山嶺(유향삼산령) :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하산길, 아래 작은 봉우리에 있는 전망대를 당겨본다.

이 방향은 역광에 오후들어 미세먼지가 심해지는지 온통 희뿌옇다.





























장인봉을 내려서는데 끝도 없이 계단이 이어진다.

경사가 워낙 가파르니 계단의 폭이 매우 좁아 정면으로 내려가기 어려울때가 많다.

축융봉에 오르기 시작할때부터 한바퀴 돌아 장인봉을 내려설때까지 엄청난 계단의 연속이다.

혹자는 청량산이 세상에서 계단이 제일 많은 산 일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충분히 공감을 한다.

개조심도 아니고, 청량산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문구는 계단조심 이다.











오전에 지나왔던 축융봉




















조금전 위에서 내려다본 전망대에서 바라본 장인봉











장인봉에서 뻗어내린 사면의 단풍

앞 능선 작은 봉우리 위의 이빨같은 암릉과 그위로 난 소나무들이 신기하다. 











탁립봉과 비슷하게 생긴 496봉

저 아래 입내비골의 암자는 무엇인가?











하산지점인 청량교와 상가지구











벼랑 중간에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는다.











퇴계의 급문제자 였던 1566년 한달간 이 곳에서 공부를 했고, 정안 이라는 승려가 머물렀다는 금강암이 있었다는 금강굴


매우 위험한 곳을 지나 마침내 금강굴에 이르니, 굴에는 작은 암자가 있고, 암자 밑은 절벽 이었다. 시렁처럼 얹힌 바위가 기와지붕을 대신하고 층계구름이 고요히 일었다. 여기는 곧 정안(靜安) 이라는 승려가 거처하던 곳 이지만, 돌아올 시간까지 기다릴수 없어 내려왔다.


바위 끝에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먼곳을 바라보니 벼랑이 갈리진곳에 한줄기 물이 철철 흘러 아래로 빙 둘러 내려사서 더욱 이 암자의 빼어난 경관을 도와주었다. - 김득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삼부자송


청량산 장인봉 아래에 있는 금강암에 어떤 부부가 세상의 풍파를 피해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었는데, 부부는 금강암 아래에 있는 엽광동(葉廣洞, 입너비)의 산비탈을 옥토로 바꾸면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한지 수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엽광동으로 가는 길목에 세 갈래로 뻗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를 발견하고 밭일을 하러 오가며 자식을 바라는 열망을 소나무에게 지극정성으로 빌어 쌍둥이 아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부부는 이 소나무의 이름을 '삼부자송'으로 명명하고 정월 보름과 칠월 백중을 맞아 정성스레 당산자렐 울리며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산을 다 내려오니 제대로된 단풍이 반긴다.

에어건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청량교를 건너 버스 주차장으로 향한다.











청량교를 건너서 바라본 청량산 입구

오전에 산행을 출발했던 청량지문 오른쪽의 다리가 보인다.











학소대의 폭포


단풍철 시기도 이미 지난데다, 미세먼지의 기습으로 인해 시계가 맑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손오공의 파초선으로 먼지를 주인에게 돌려줄 수고 없고 어찌할 것인가. 특히 북서풍이 부는 계절엔 툭하면 민폐를 끼치는 이웃집 왕서방이 야속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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