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코스 : 임시주차장 - 동심정 - 석도골 - 최후항전지 - 마천대 - 구름다리- 임시주차장 (5.3km)

 

 

 

 

 

 

 

배티재에서 바라본 대둔산 칠성봉 암릉군

 

 

일요일에 계획했던 산행이 새벽에 갑자기 취소가 되고, 마침 기상청에서도 날이 흐리고 비도 온다고 하니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뭉그적거리다가 8시경 창문을 열어보니 구름한점 없는 파란 하늘. 이런... 서둘러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며 산행지를 정한다. 

 

대둔산 으로.. 지난 여름 다녀온 대둔산 산행기에, 식장산지기님이 한달전 '대둔산 동학 마지막 항전지' 산행기를 부탁한다는 댓글을 달아주셔서, 이후로 틈틈히 대둔산의 동학농민 최후의 항전지를 찾아보았는데, 인터넷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어떻게 가는지, 아니면 최후의 전적지 사진한장 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찾아봐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떠돌아 다니는건 전설과도 같은 옛 이야기나, 1999년 이 유적지를 처음 발견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특별기고문 형태로 실어놓은 신문기사 정도 뿐.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동심정으로 걸어가는 초입의 단풍이 곱다.

 

 

몇일간 인터넷 자료를 찾으면서 생각해봤다.

왜 이렇게 자료가 없을까? 일부러 감춘걸까..

1999년에 발견이 되었으면, 그동안 많은분들이 다녀갔을것이고, 그리고 동학농민 혁명 대둔산 최후의 항쟁 추모제 까지 지낼정도면, 많은 학자들이나 관련자들이 조사와 연구를 했을텐데, 왜 그런분들의 기록이 인터넷에 사진 한장 없을까.

 

 

 

 

 

 

 

2001년에 세워진 동학 농민 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

 

 

 

 

 

 

 

대둔산을 여러번 다녀 갔었는데, 최후의 항전지 라는 '형제봉' 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던것 같다.

어떤 자료에는 형제봉을 '미륵봉' 이라고도 부른다고 했으며, 이 미륵봉 정상이 넓어서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항쟁을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미륵봉은 어디고, 형제봉은 어디란 말인가?

그간 찾아본 대둔산의 어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혹시 대둔산의 장군바위를 장군봉으로 부르는 것처럼, 큰 산봉우리가 아니라 작은 바위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일단 형제봉을 찾아야 최후의 항전지가 어딘지 실마리를 잡을수 있을것 아닌가...

 

 

 

 

 

 

 

동심정으로 가는 초입엔 아직 고운빛 단풍이 남아 있었는데, 산길은 이내 가을 분위기만 무성하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둔산 단풍은 이미 주차장까지 다 내려와 있었다. 산속의 단풍은 거의 끝나가는듯 보였다.

 

 

 

 

 

 

 

새벽산행을 위해 진즉부터 산행 준비가 되어있는데,,,

이렇게 맑은 하늘일줄 알았으면 적어도 1시간 전에 왔어야 했다.

도착하니 9시전 이건만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등로에도 등산객들로 분주하다.

동심정으로 가는 금강계곡에 바람이 휘몰아 칠 때마다 가을이 우수수 떨어져 날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렇게 가을은 오는듯 하더니 순식간에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찬바람에 쫒겨간다.

 

 

 


 

 

 

 

 

 

 

 

 

이제부터 대둔산 동학농민 혁명군 최후의 항전지의 길로 들어선다.

동심정 바로 아래에서 왼쪽으로 계곡을 건너 암벽꾼들이 가는길로 향한다.

 

 

 

 

 

 

 

동심정 아래에서 계곡을 지나면 바로 양파A 라는 팻말이 보인다.

전문 장비를 갖추고 바위를 타는 양파A 라는 암벽 릿지코스를 안내하는 것이다.

 

 

 

 

 

 

 

 

 

 

 

 

 

조금 더 오르면 양파길은 A코스와 B코스로 나뉘어 지는데, 여기에서 A를 따라간다.

 

 

 

 

 

 

 

지난주 지리산에서 혼자 걷다 곰팅이를 만났을때 상당히 놀랐는데,,

대둔산이니 적어도 그런 맹수는 없을것 아닌가.

누군가는 자연은 동물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나 역시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 땅은 곰과 같은 맹수를 풀어놓기엔 너무 좁다.

 

 

 

 

 

 

 

그렇게 능선에 오르니 양파길 안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솔봉이길이 등장을 한다.

바로 솔봉이길, 오늘 내가 가야하는 곳 이다.

능선에 서면 양쪽으로 기세등등한 바위 암벽들이 난공불락 요새의 굳건한 성벽처럼 서있다.

아마도 양파A길은 능선에서 능선을 따라 위쪽으로 가는듯 하다.

 

최후의 항전지를 찾기 위해 몇일간 이 근방 여러 암벽길들의 산행기들을 많이 찾아봤다.

암벽하시는분들이 바위타고 지나가는 사진에 혹시라도 무심코 남긴 사진 한장 있을까 해서..

그리고 솔봉이길의 어느님 사진 한장에서 단서를 찾았다.

 

 

 

 

 

 

 

솔봉이길은 능선을 넘어 다시 계곡으로 내려선다.

그 계곡이 바로 문제의 석도골 이다.

 

 

 

 

 

 

 

내려서는 길 나무 사이로 거대한 암벽이 보인다.

솔봉이길 첫번째 암벽인듯 하다.

 

 

 

 

 

 

 

능선을 내려와 석도골로 내려섰다.

석도골, 대둔산 동학농민 최후의 항전지가 있다는 그 골짜기..

대둔산 지도, 다음 지도에도 안나오고, 통합 검색해도 전혀 찾을수 없는 그 골짜기가

허무하게도 네이버 지도에 나온다. 금강계곡 바로 왼쪽 옆에 있는 다음 골짜기다.

 

 

 

 

 

 

 

기묘하고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 뒤쪽으로 연이은 암릉이 보인다. '솔향기 그윽한 일봉길' 이다.

이 바위 오른쪽으로 작은 협곡이 있고, 왼쪽으로는 더 크고 넓은 계곡이 보인다.

오른쪽 협곡은 양파A길과 일봉길 사이의 골짜기고, 왼쪽의 넓은 계곡은 형제봉으로 오르는 '솔향기 그윽한 일봉길'과  '솔봉이길' 사이에 있는 석도골 이다. 왼쪽 넓은 골짜기로 가야한다.

 

 

 

 

 

 

 

 위의 기묘한 바위 앞 작은 바위 위에 솔향기 그윽한 일봉길 개념도가 놓여있다.

개척자 이름중에 친구 이름도 보이고..

 

 

 

 

 

 

 

왼쪽의 넓은 석도골 골짜기로 오른다.

골짜기 양쪽의 나무 뒤쪽 배경의 하얀색은 바위 절벽이다.

사실 지도를 보면 석도골은 솔봉이길 암릉 바로 아래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

동학군이 솔봉이길 암벽에서 최후의 항쟁을 할때 토벌군은 이 석도골을 따라 양쪽으로 진입을 시도했을 것이다.

아마 당시엔 이 계곡 나무들도 많이 베어져 계곡을 오르는 관군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오르다가 바위 동굴을 만났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입구에 안으로 휘어지며 상당히 깊어 보였다.

뱀이나 짐승이 있을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왼쪽으로 보이는 100미터가 넘어 보이는 높다란 직벽이 바로 솔봉이길이며

저곳 꼭대기에서 동학군이 겨울에 70일 버티며 최후의 항쟁을 했던 곳이다.

오두막도 지어야 했고, 대둔산의 산중 추위와 바람이 혹독했을테니 겨우내 불도 피워야 했을 것이다.

또한 다가오는 적군들의 동태도 살펴야 했을테니, 양쪽 계곡의 위쪽과 뒤쪽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냈을 것이다.

아랫쪽은 그럴 필요도 없는게, 당시에 이 직벽을 누가 오르겠는가..

 

 

 

 

 

 

 

 

 

 

 

 

삼면이 이런 바위 절벽으로 되어 있어 뒤만 조심하면 되었다.

아니 뒤쪽도 4~6m 직벽으로 되어 있으니 어느 정도는 맘을 놓았을 것이다. 

유사시 접근도 불가했겠지만,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부쪽 옆면만 조심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쪽에 돌담을 쌓고 그 틈새로 총구를 밀어넣어 방어를 했을 것이다.

 

 

 

 

 

 

 

대둔산 석도골의 가을

 

 

 

 

 

 

 

어느정도 올라서 커다란 암벽이 끝나갈 무렵 산죽밭을 만난다.

 

 

 

 

 

 

 

직감적으로 바로 저 위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진잠의 현감 출신으로, 당시 소모사(召募使)로 관군을 이끌고 토포에 앞장섰던 문석봉의 기록에 의하면 대둔산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지는 새나 드나들수 있는 곳 이라고 했다.

 

아이러니 한것이, 문석봉은 훗날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척왜를 외치며 의병을 조직하여 회덕현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을 하고, 을미사변 이후 전국 최초로 의병활동을 전개한다. 척왜를 외치던 동학 혁명군을 토벌하던 관군이 다시 척왜를 외치는 의병장이 된것이다.

 

 

 

 

 

 

 

이 웃픈 역사적 현실은 신분제를 배척하는 동학사상과, 신분제를 지키려는 유교사상의 대립 이기도 했는데, 호시탐탐 침을 흘리며, 발톱과 이빨을 감추고,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 이라는 늑대 앞에서, 이땅의 순진 용맹한 진도개와 풍산개가 힘을 합쳐 늑대와 싸우는게 아니라, 바보처럼 서로 싸우면서 공멸하는 형국이 아닐수 없다. 마치 작금의 현실과 거의 비슷하다. 누구는 국고를 빼먹고, 누구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싸우고, 누구는 늑대와 내통하고, 누구는 사이비 언론을 통해 거짖 소문을 퍼뜨리고.. 늑대는 웃고 있고.

 

 

 

 

 

 

 

산죽밭의 희미한 길을 따라가다 왼쪽 바위쪽으로 접근했다.

사진에 보이는 바로 저 오른쪽 커다란 바위 사이가 최후의 항전지에 오르는 제일 쉬운 길 이다.

그걸 모르고 저곳까지 갔다가 능선에서 내려오는 뒤쪽으로 옆으로 바위를 타고 돌아가는데

오른쪽은 크게 떨어지는 곳인데, 이끼에 신발은 미끄덩 하고, 잡을곳 하나인 나무뿌리는 흔들리고..

간신히 매달려 기어 돌아갔다. (산죽밭을 다시 내려와 계곡을 따라 올라서 돌아오면 안전한 길 이다)

 

 

 

 

 

 

 

힘들게 바위 뒤쪽 능선에 오르니 이런 모양이다.

인터넷에 1999년 최초 유적지 발굴할때 원광대 교수님이 3m가 넘는 절벽을 겨우 기어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던데 정면은 5-6m 정도 되보이고, 오른쪽 틈새 직벽이 제일 낮은데 그곳도 3m가 넘어 보였다.

 

 

 

 

 

 

 

일단 교수님이 넘었을것으로 추정되는 낮은 직벽에 붙어 보았다.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상당히 높고 위험해 보였다. 중간쯤 매달리다 내려왔다.

아니 그 교수님은 암벽 훈련을 받은 분 이었던가..

사학과 교수님이 넘었다길래 너무 가볍게 봤던것 같다.

 

운명의 그날 일본군 특공대는 이곳에 인간 사다리를 놓고서야 넘을수 있었다고 한다.

사다리를 들고 이곳으로 진입을 시도하던 일본군은 산세가 워낙 험해 사다리를 중간에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 사다리를 쌓아서 올랐다고 하는데, 한명을 먼저 올려보낸후, 밧줄을 내렸을 것이다.

 

 

 

 

 

 

 

정면은 5-6m 정도 되보이는데 처음에 저 3m 가량 툭 튀어나온 바위만 올라가면 어찌 해볼수 있을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붙어보니 이것도 만만치 않고 내려오는게 문제가 될것 같다.

 

내가 이러고 있을 정도니 이 위에 있는 동학군들은 뒤쪽도 맘을 놓았을 것이다. 보초 한명만 세워놔도 끝.

아마 그들은 나무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갔을 것이다.

이 근방의 나무들은 땔감으로 죄다 베어내서 올렸을테고

사다리를 위에다 끌어놓고, 필요할때만 내렸을것 같다.

 

 

 

 

 

 

 

뒤쪽 바위 위에 올라가서 바라본 모습

 

배낭과 스틱을 내려놓고 고민을 한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를 할 수도 없고, 3m 직벽쪽에 돌 계단을 쌓아볼까...

그리고 또 어찌 내려올 것인가...

인공암벽 훈련이라도 좀 받았으면 이리 난감하지 않을텐데...

앉아서 물 한모금 마시며 쉬며, 이곳이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 되었다는데 사다리나 하나 놔두지

하는 푸념을 하다가 찬바람 부는 대둔산 능선에서 자켓까지 벗고 카메라 가방만 메고 일어선다.

 

 

 

 

 

 

 

제일 높은쪽의 5-6m 벽이 그래도 좀 상대적으로 쉬워보였다.

아까 오르다 내려왔던 튀어나온 3m 못되는 바위를 매달려 올라섰다. 이제는 돌이킬수 없다. 

그 위로도 아래에서 대충 보는것보단 더 위험했지만 느릿느릿 조심스레 기어 올랐다.

아마도, 전문 암벽 훈련을 받은 분들이라면 보다 쉽게 오를수 있을 것이다.

 

 

 

 

 

 

 

제일 높은 곳으로 오르니 먼저 그림같은 조망이 반긴다.

아직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로 심호흡을 하고 바위 위에서 풍경을 담는다.

 

 

 

 

 

 

 

 

 

 

 

 

저 곳이 솔봉이길 끝인 11피치 마지막 지점이다.

솔봉이길은 이 아래쪽에 7피치 까지 있고, 8피치 부터는 조금 떨어져 저곳에서 시작한다.

능선의 등산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데, 봉우리 정상의 터가 넓고 조망이 빼어난 곳이다.

나중에 이곳을 내려선후에 능선에 올라 저 봉우리에 올랐다.

1시간만 일찍 왔더라면 이렇게 맑은 날씨에 저 위에 섰을텐데..

 

 

 

 

 

 

 

대둔산 형제봉

 

오른쪽으로는 마천대 정상을 비롯하여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방향의 비경이 펼쳐진다.

사진 왼쪽 아래에 있는 높게 솟은 뾰족한 두 바위가 바로 대둔산 형제봉 이다.

일반 등산객들은 제대로 알수 없는 바위로 이곳 보다는 양파길 쪽에서 봐야 형제봉이 뚜렷하다.

 

형제봉 이라기 보다는 형제바위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리고 누군가, 형제바위 (미륵바위) 위가 터가 넓어서 그곳에서 항쟁을 했다는 말은 잘못된듯 하다.

대둔산 형제봉에 터를 잡은게 아니라, 형제바위 근처 새둥지 같은 암봉 꼭대기에 터를 잡은 것이다.

 

 

 

 

 

 

대둔산 동학농민 혁명 최후의 항전 유적지

 

힘들게 넘어오니 말 그대로 위는 새의 둥지 같은 곳 이다. 새나 드나들수 있는 곳.

삼면은 깍아지른 절벽이고, 통로라고 해야 고작 내가 방금 힘들게 올라온 4-6m 암벽 이다.

 

 

 

 

 

 

 

석도골은 솔봉이길 아래에서 Y자로 갈라지고

방금 내가 올라선 오른쪽 계곡 말고, 반대쪽 왼쪽 계곡 쪽으로는 돌담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돌틈으로 총을 겨누고 석도골을 오르는 토벌군을 상대했을 것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촉발된 동학혁명은 잘 마무리 되는듯 싶더니, 조정이 고부의 난을 해결하기 위해 보낸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으로 인해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1차 봉기를 한후 전라도를 휩쓸고 나아가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이제 조선 조정은 커다란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때처럼 청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시에는 일본도 동시에 출병한다는 텐진조약 때문에 일본군 개입의 빌미를 제공한다. 조선 조정도 텐진조약을 알고 있었겠지만, 중국을 너무 우러러 봤고, 일본을 너무 쉽게 봐서, 이전 처럼 청군이 일본군을 막아줄거라고 오판을 했다. 하지만 조정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은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던날 바로 다음날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에 깜짝 놀란 조정과 외세의 침입에 빌미를 줄것을 두려워한 동학군은 황급히 합의를 보고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날것을 종용하였는데, 제국주의의 야욕과 조선침략을 벼르고 벼르다 작정을 하고 들어온 일본군은 갖은 궤변을 늘어 놓으며 철수를 하지 않고 각국의 중재도 거부한채 경복궁을 기습하는 상상밖의 만행을 저지르며 고종을 인질로 잡고 협박을 하여 조선군이 보유한 8문의 개틀링 기관총, 신형소총 3000정과, 대포등을 빼앗고 해산시켰으며, 갑오개혁을 벌이고,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반발해 동학혁명군은 1차와 달리,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새로운 기치로 삼고 2차 봉기를 하게 된다. 일본군이 청군과 청일 전쟁을 벌이고 있을때, 동시에 조선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조일전쟁을 벌인 셈이다. 그러나 불꽃처럼 일어난 60만에 이르는 동학 농민 혁명군은 고작 2000명의 일본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퇴를 하게된다.

 

 

 

 

 

 

 

당시 일본군의 기록에 의하면 1당100도 아닌 일본군 1명당 200~300명을 상대했다고 한다.

이건 양측의 무기 수준과, 무기 숙련도의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동학 농민군은 기껏해서 2분에 한발 쏠 수 있는 화승총에 그것도 사거리가 고작 150m

그나마도 얼마 안되고, 대부분은 죽창을 들었다고 한다.

화승총은 사격속도도 느리지만, 엎드려 계속 쏠 수 없는 전장식 구조로, 사격후엔 일어나서 총구에 화약과 탄약을 넣어야 하기에 어쩔수 없이 상체를 일으켜야 해서 총을 맞고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비가오면 쓸수도 없고..

일본군은 일어설 필요가 없는, 총알을 뒤에다 넣는 후장식 구조에, 4초에 한발씩 쏠 수 있는 사거리 800m의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최신식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을 했고, 특히 개틀링 기관총은 동학농민군을 대량학살 하였다고..

 

한마디로 상대가 될수 없는 싸움을 한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때 투입된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는 경력과 전쟁경험이 많은 최고의 베테랑들 이라고..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한 동학군은 험준한 이곳에 지도부의 근거지를 갖춰놓고, 염정골과 연계하여 인근에서 수시로 산 아래로 내려가 진산 인근의 동학군을 결속 시키고 게릴라 방식으로 투쟁을 하였다. 초막 한개로 시작하였으나, 인원이 50여명으로 늘어나 초막 3개를 짓고, 접주급 간부들이 동학 농민혁명의 최후의 항쟁에 들어가게 된다.

 

그 겨울 70일간의 투쟁. 그들도 살아서 내려갈수 없으리란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관군과 민보군이 수차례 이곳을 공격하였으나, 험준한 산과 천혜의 요새 때문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등반장비를 갖춘 일본군 3개 분대와 관군 30명으로된 특공대를 조직하여 음력 1월24일(양력2월18일), 새벽에 3면에서 맹렬히 공격하여 동학군의 시선을 뒤에서 떼어 놓은뒤에, 간신히 뒤로 접근한 일본군들이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후면 직벽 바위를 넘었다고 한다. 70일의 항전과, 당일 9시간의 전투가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다.

 

관군들과 교전중이던 동학 농민군들은 생각지 못한 배후 공격을 받고, 총을 맞아 죽거나, 천길 낭떨어지로 뛰어렸다.  일본군들이 살아남은 자들은 사로잡으려 했는데, 뒤늦게 사다리를 놓고 올라온 관군들이 이들을 모두 쏴죽이고 소년 한명만 살렸다고 한다. 이때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고,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쯤되는 여아를 안고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비통 했을까..

 

 

1) 중략...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심영병(沁營兵=壯衛營兵)과 일본군 3개분대가 터골에 도착하여 사태는 급전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895년 1월 24일(양 2월 18일) 새벽에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안개와 비가 내려 날이 밝아서야 공격을 개시 하였다. 그가 보고한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 의하면 동학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하였다.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요지 (1895년 2월 18일 특무군조) 1). 2월 17일(양)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시 30분 출발하여 오후 4시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했다.
2). 그 날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했다. 남쪽에선 6㎞, 북쪽에서 8㎞ 남짓했다. 적은 절벽 위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하자 몇 차례 사격을 가해왔다. 작년 음력 11월 중순경부터 5, 6명의 적은 이 산 위 암굴 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공주 군대는 이것을 알고 15, 6일 전에 3일간 공격하다 돌아갔다.
그 후 민병이 와서 공격하다 1명이 총상 당하자 달아났다. 2, 3일 전에는 전주에서 군사가 와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여러 곳의 적들은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관군이 공격하면 큰돌과 거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총을 쏘기도 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적굴은 바위 위에 있으므로 사다리가 있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3). 18일 오전 3시에 야습할 계획이었으나 바람 비가 심하고 안개마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동이 트기만 기다렸다. 오전 5시 고마쯔(小松直幹)에게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적의 배후로 40리 남짓 우회하게 했다. 그리고 소관은 6시 30분 일본군 1개 대대와 장위영병 30명을 인솔하고 적의 정면을 기어올랐다. 적의 소굴 100m전방까지 접근하자 돌과 나무토막을 떨어뜨렸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여 적은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말소리만 들려왔다.
4). 오전 9시 30분, 배치를 마치니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시 10분 경에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적은 5, 6명을 아래쪽에 배치하자 정면에 있던 한병이 저격했다. 다리를 맞고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 적의 소굴은 큰 바위로 삼면이 뒤덮여 지붕만 겨우 보일 뿐이었고 큰 돌을 쌓아 정면에 총구멍을 내었다. 위에는 거목을 올려놓아 우리 군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것 같았다.
1시 40분,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는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이 소년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적은 25, 6명이 있었는데 대개는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또 28, 9세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 짜리 여아를 안고 천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 즉사했다.
5). 압수된 서류를 조사해 보니 주요한 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열(李是悅),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煥),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이다. 명단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이 보고서는 과장되고 조작된 곳이 몇 군데 있다. 첫째, 동학군 전사자가 25명이라 했으나 노획한 화승총은 50자루였으니 절반도 못된다. 지방민들이 지금 50명 정도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나머지 20여 명은 좌우로 흩어져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동학사(東學史, 吳知泳』에는 접주 최공우가 벼랑에서 뛰어 내려 살아났다 했으며, 주민들도 다래 넝쿨로 뛰어내려 많이 살았다고 한다. 초막에서 4m 가량 내려오면 좌측 암벽에 뛰어 내릴 곳이 있었고 초막에서 6m 정도 내려오다 좌측 암벽사이로 빠지면 좌·우에도 뛰어 내릴 곳이 있었다.>
다음은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고 하였다. 일본군은 뒤쪽 바위 2m 거리에서 일제히 사격하였다. 그런데 10m 아래쪽에 있던 한병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모두 죽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일본군은 자기들이 임신부까지 죽인 만행을 한병에게 떠 넘기려 한 기록이다. 또한 "몇 길의 암석이 담벽처럼 서 있었다"고 한 것도 과장된 기록이다. 암벽 높이가 4m 정도이니 젊은이면 누구나 기어오를 수 있는 바위이다.
출처 : 천도교 홈페이지 (금산지역 동학혁명운동 - 표영삼-)

 

 

 

 

 

 

 

 

동학혁명은 청일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일본이 제국주의로 출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일본은 저항하는 동학농민군만 죽이라고 명령한게 아니라, 모든 동학군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누가 동학군인지 구별이 안되다보니, 수많은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때 사망한 동학군이 3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얼마나 잔혹하고, 참혹했을까

동학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이 자행한 잔인한 살육은 차마 열거할수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죽어서 역적으로 낙인까지 찍히게 되니...

조선말 대원군과 민씨 일파들, 그리고 이땅의 관료들은 너무나도 무르고 썩었다.

 

 

 

 

 

 

 

새 둥지같은 최후의 항쟁터를 가려주던 한쪽의 바위

 

 

 

 

 

 

 

항쟁터에서 바라본 솔봉이길 6피치 독립바위 꼭대기

 

 

 

 

 

 

 

어릴적에 잘못된 교과서에서 동학의 난 이라고 배웠다.

조선말, 권력에만 눈이 멀었던 무능하고 썩은 조정과, 자신들 이익만 챙기기 급급했던 양반들과 지방관들

망해가는 이땅의 백성들을 위해 일어섰던 범 국민적인 혁명이었으며, 썩은 국가를 대신해서,  

60만 백성이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일본의 무뢰한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뜨거운 농민군 이었다.

그렇게 국가가 해야될 전쟁을 대신해 주면서도, 관군에게 총질을 당하고, 역적으로 몰려야 했던 그들..

최근 정부는 시간이 오래지나 보상은 못해주지만, 반란군이 아닌 혁명군의 후예로 명예회복을 추진중이다.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항쟁터에서 바라본 대둔산

최후가 자명할수 밖에 없던, 70일 혹한의 겨울동안 얼마나 서럽게 아름다웠을까..

 

 

 

 

 

 

 

참으로 어이없고 분한 것은...

동학봉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고부군수 조병갑

동학농민혁명때 간신히 도망쳐 살아남아, 파직되었으나

1년만에 고종에게 사면을 받고, 나중에 고등법원 판사가 되어

동학의 2대교주 최시형이 체포되어 재판을 할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의 아들은 일제강점기때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서 일했으며

친일신문인 동광신문에서 주필겸 편집국장을 하는등 친일파로서 한 세상 잘 살았다고

아직도 친일 청산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애국자의 후손들이 힘들게 사는 세상 이다.

 

 

 

 

 

 

 

아래쪽으로  쌓여 있는 돌담

아마 돌담을 빙 둘러 총알이나 화살 공격을 대비했을것같다.

이 많은 돌들이 어디서 왔을까...

아마 사다리를 타고 항전지 아래 대둔산 계곡에서 주워 날랐을 것이다.

움막짓는데도 쓰고, 돌담으로 방어벽을 세우고, 유사시에 냅다 들어서 토벌군 머리위로 던졌을 것이다.

 

 

 

 

 

 

 

위 터에서 가파른 계곡을 따라 조금 내려서면 솔봉이길 5피치 끝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우뚝선 독립바위 아래 테라스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전 사진속에서 보이던 돌탑은 그새 누군가 무너뜨렸다.

 

 

 

 

 

 

 

일본군 기록엔 3개의 움막이 있었다고 하니, 아마 여기도 또 다른 움막터가 아니었나 싶다.

솔봉이 라는 말은 나이가 어리고 촌스러운 티를 벗지 못한 사람 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로, 이 코스는

청주에서 솔봉이란 실내암장을 만들고, 타기클라이밍센터를 운영했던 고 민준영씨가 2007년 희말라야 등정에 앞서 훈련을 겸해 개척한 5피치 짜리 코스였는데, 훗날 이 미완성의 코스를 타기클라이밍 센터 출신들이 5피치 종료지점 뒤로 6피치를 내서 11피치 암릉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민준영씨는 2009년 안나푸르나 산군의 히말출리 북벽을 등반하다 실종되었다고 하며, 이곳의 돌탑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놓은것 이라는데 지금보니 무너져 있다. 이렇게 이 바위길은 개척자와 동학농민군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계곡 바람이 아프게 스쳐간다.

 

 

 

 

 

 

 

 솔봉이길 5피치 끝 테라스에서 바라본 조망과 앞쪽 아래로 솔봉이길

 

 

 

 

 

 

 

다시 동학동민 최후의 항쟁터로 돌아와 내려서기전 모자를 벗고 엎드려 절을 올린다.

이제 그 비통함을 잊고 편안히 영면 하시라는 마음을 전하며..

급히 오느라 술 한병 준비 못한게 마음에 걸린다.

 

 

 

 

 

 

 

어디로 내려갈까 고민하며 두리번 거리다가

좀 전에 산죽밭을 올라 후면 능선으로 힘겹게 넘어가기전에 만났던 바위 틈새로 내려왔다.

이 방향이 오르기도 제일 쉬워 보인다. 괜히 뒤로 가서 고생만 했다.

아마 최초 발굴했던 그 사학과 교수님도 이쪽으로 올랐던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최후의 그날 뛰어내려 탈출했던 분들도 이쪽으로 뛰어내렸을 것이고..

 

 

 

 

 

 

 

내려와서 배낭을 메고 능선으로 향하며 바라본 대둔산 형제봉 (형제바위)

 

 

 

 

 

 

 

인적 드문 너덜 계곡을 올라선후 산죽밭을 지나 능선 등로에 오른다.

 

 

 

 

 

 

 

마천대 방향으로 가다 등로를 살짝비켜 아래에서 본 솔봉이길 정상 봉우리에 올라선다.

정상은 꽤 넓고 조망이 좋다.

 

 

 

 

 

 

 

솔봉이길 정상 봉우리에서 바라본 형제봉과 동학군 최후의 항쟁지

 

지금 에딘버러 골프장 위쪽의 행정2리의 옛 지명이 염정골 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엔 그 옆에 있는 벌곡면 수락리 도산동 까지 크게 염정골 (염정동) 이라 불렀다고 한다. 대둔산 최후의 항전지는 유격 본부로, 400호 정도가 살았던, 이곳 염정골과 연계하여 지원을 받았다고 하니, 음식등 기초적인 것들을 가지고 돛대봉을 지나는 대둔산 북릉의 험한 능선길을 따라 오고 갔을 것이다. 또한 식수는 능선 너머 절터의 샘물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아침에 지나왔던 동심정과 원효사가 있는 곳에서 조달했던것 같다.

 

 

 

 

 

 

대둔산 형제봉 (형제바위)

 

능선 등로 방향에서는 이 모양이라 형제봉이라고 쉽게 알아보기 어렵다.

솔봉이길에서도 보이지만, 양파길이나 일봉길에서 봐야 제대로 보이니

아마도 형제봉 이란 이름은 릿지하는 분들이나 알지 않을까?

 

 

 

 

 

 

 

봉우리 정상 우측 조금 아래는 솔봉이길 11피치 종료지점이다.

대둔산 조망은 저곳이 시야가 더 좋다.

 

 

 

 

 

 

 

솔봉이길 11피치 종료지점에서 바라본 대둔산 남릉과 천등산

최후 항쟁터에서 올라오는 잠시 몇십분 사이에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졌다.

 

 

 

 

 

 

 

그곳에서 바라본 대둔산의 가을색

 

 

 

 

 

 

 

당겨본 대둔산 동학혁명 최후 항전 유적지

정말 새 둥지 같은 곳이다.

위에서도 바위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저런곳을 어찌 알았을까..

 

 

 

 

 

 

 

조금전에 내려선 솔봉이길 봉우리 정상

이때 갑자기 빗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서둘러 정상에 다시 올라선다.

내려서려면 등로쪽 바위 사면을 내려가야 하는데 비에 젖으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돌아내려와 정상으로 가다 건너편 봉우리에서 바라본 조금전 솔봉이길 정상

 

 

 

 

 

 

 

양파A길 마지막 봉우리에도 가을꽃이 곱게 피었다.

 

 

 

 

 

 

 

마천대로 가는 사이에 비는 모기 날개나 적실만큼 내리는듯 마는듯 하더니

어느새 그치고 구름사이로 해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슬그머니 내민다.

 

 

 

 

 

 

 

구름다리와 삼선계단

 

 

 

 

 

 

 

지나온 통신탑 봉우리

양파길 마지막 봉우리가 아닌가 싶다.

 

 

 

 

 

 

 

마천대에서 바라본 대둔산 남릉과 천등산

 

 

 

 

 

 

 

 마천대에서 바라본 솔봉이길의 동학군 최후의 항전지

 

 

 

 

 

 

 

북릉쪽

 

 

 

 

 

 

 

마천대에서 내려다본 구름다리쪽 단풍

 

 

 

 

 

 

 

 

 

 

 

 

 

구름다리 앞까지만 잠시 들려간다.

가까이서도 예쁜 단풍은 이미 지고 멀리서만 근사한 가을 빛만 남았다.

 

 

 

 

 

 

 

 

 

 

 

 

 

동심바위

 

 

 

 

 

 

 

사진없이 글만 보고 위성지도를 통해 대략 솔봉이길 근처라고 추정만 하다가, 어느날 솔봉이길 등반사진에서 최후 항전 유적지를 발견하고 현장을 확신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긴 했는데, 아직 무언가 개운치 않은 기분도 든다. 현장의 위치를 찾느라 자료를 준비하면서 몰랐던 내용도  많이 알게 되었고, 아예 전쟁상대도 되지 못한채 일방적 사냥과 살육만 당했던 동학혁명군들의 비통함과, 갖은 악독한 방법으로 30만명 이라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땅의 백성들을 살육했던 일제의 잔악함에 치를 떨었다.

 

 

 

 

 

 

 

주차장에 내려서니 산위에서 볼 수 없었던 단풍이 곱게 들어 있다.

 

동학농민 혁명군의 최후의 항전터가 기념 문화재가 되었다면, 현장주변과 등로를 정비하여 동학농민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참혹했던 최후의 항전터를 공개하는게 어떨까 싶다. 동학혁명군의 최후의 둥지는 등로에서 떨어진 위험한 험지에 있다. 무분별한 방문 보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근대사의 중요한 현장을 찾으려는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처럼 물한병 달랑들고 허둥대지 말고, 차분히 술한병은 챙겨 가시기를. 배티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분들의 함성소린가, 예고없던 천둥과 번개가 시공을 넘어 울어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