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성과 함께 백제의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비성 ...

신비의 제국 백제의 마지막 흔적을 남아 있는 곳

다만, 이번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늘이 아름다운날 연꽃만 들여다 볼 수 없어서 부소산성으로 향한다.

하지만 부소산성으로 가면서도 마음은 복잡하다. 고작 천오백년전 백제에 관한

기록이란게 5천년 또는 만년 이전의 단군신화나, 마고할미 신화와 거의 동일할

정도로 전무한 가운데, 학교에서 배운것에 대한 믿음도 이미 약해졌기 때문이다.

 

 

 

 

 

 

 

 

 

부소산성입구에 차를 세우고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선다.

 

부소산성 대신에 옛 이름인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 이라 부르고 싶지만 아직

부소산성이 사비성 이라는 확신 역시 갖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은 여전히 부소산성이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세상에 조금 이라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조선을 망친 노론의 마지막 당수 친일파 이완용이 나라를 일제에 팔아먹고, 그 질손인 친일파 

이병도가 신석호 등과 함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일제가 만들어낸 식민사관을 적극 옹호

홍보하고, 이후 국사편찬위원회 및 서울대교수, 문교부장관, 학술원원장을 거쳐 나중에 국정

자문위원까지 하면서 우리나라 사학계를 좌지우지 하며 일제의 식민사관을 교과서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사실을... 이 모두가 광복후에 제대로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친일파 매국노들이 쓴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한 나로서는 내가 배웠던 과거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가 정말 맞는 기록인지, 아니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고대사가 몽땅 허구인지 의심만 들 뿐이다. 심지어 그 이전의 기록까지도.

 

 

 

 

 

 

 

 

 

먼저 낙화암으로 향한다.

 

낙화암으로 가는 숲길은 가파르지 않고 공원처럼 편안한 길 이다.

 

 

 

 

 

 

 

 

 

낙화암 백화정

 

풍납토성 - 공산성 - 부소산성으로 이어지는 기존 역사가 그럴싸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기록이 너무도 많고, 또한 그것을

뒷받침 하고 있는 사료나 증거나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요즘같은 인터넷 시대에

친일파가 만든 반도사관을 그대로 믿을만큼 어리숙하거나 순진 하지도 않고...

 

 

 

 

 

 

 

 

 

백화정 아래의 낙화암 전망데크

 

삼천궁녀는 사실 완전한 허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한줄도 등장하지 않는

삼천궁녀의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는곳은 조선시대 어느 선비의 詩에서 라고 한다.

삼천 이라는 말은 단순히 많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어에 불과 한 것이다.

삼천갑자 동방삭, 삼천리 금수강산, 백발 삼천장, 삼천년에 열매 맺는 천도복숭아..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백마강은 옛 이름으로 백강 이라고 한다.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와서 전쟁을

치뤘던 곳이며, 당서에 보면 소정방은 백제 패망 전에도 가끔 와서 낚시를 하던 곳이라

했는데, 과연 당나라 소정방이 낚시하러 황해를 건너 먼 이곳까지 낚시하러 왔을까...

 

 

 

성충이 의자왕에게 탄원하기를.....

<....무릇 용병하는 법은 반드시 그 지형을 살펴 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중략> 라고 했다는데, 강의 상류란 부여와 공주가 있는 백제의

수도 이고...성충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강의 하류에서 적을 맞아야지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 한다고 

했을리가 없을터 당시 백강의 위치와 사비성의 위치가 우리가 배운것과 다르지 않냐는 것이다.

 

 

 

 

 

 

 

 

 

 

황포돛대를 단 유람선이 고란사 선착장에서 출발하여 백마강을 내려간다.

사진에 보이는 탁한 물색은 <고인물은 썪는다> 라는 너무도 간단한 자연의

진리를 이해할수 없는 개똥철학으로 무시했던 유명한 분의 작품일테고...

 

 

 

 

 

 

 

 

 

아.....

하늘이 꽃처럼 아름다운 날 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지 않은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의 지명이 전부 중국에

그대로 존재 한다. 식민사관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반도사관 이다. 지명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배운 한반도의 삼국관 으로는 과학적으로 납득 할수 없는 여러분야의

수치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인구수, 방향, 이동거리, 이동경로,  위치 등...

 

 

 

 

 

 

 

 

 

고란사로 가기 위해 잠시 산을 내려선다.

 

 

 

 

 

 

 

 

 

고란사

 

앞쪽이 공사중이라 뒤에서 한컷을 담는다.

 

 

 

 

 

 

 

 

 

고란사에서 바라본 백마강과 선착장

 

 

 

 

 

 

 

 

 

고란사의 속편한 황구

 

어이쿠 녀석아, 어서 일어나...

오늘이 바로 복날인데, 정신 차려야지 ^^

 

 

 

 

 

 

 

 

 

연리지

 

다시 낙화암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부소산성을 돌아본다.

 

 

 

 

 

 

 

 

 

 

중국의 보수 사학자들은 동북공정을 외쳐가며 자국의 역사를 확장 왜곡하고

일본의 보수 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 같은 망언을 하며 역사를 확장 왜곡한다.

그런데 유독 이땅의 보수 사학자 들은, 친일, 식민 반도사관으로 축소 왜곡한다.

 

 

 

 

 

 

 

 

 

사자루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고, 사대강을 옹호하는 등

양심을 판 학자들의 진실 왜곡은 결국 지탄을 받게 되어 있다. 

 

 

 

 

 

 

 

 

 

옛 이름은 송월대 라고 한다.

 

1919년 부소산성의 제일 높은곳인 이곳 송월대에 임천면의 관아 정문인

개산루를 옮겨 짓고 이름을 사자루로 바꿨다고 한다.

 

 

 

 

 

 

 

 

 

사자루에서의 조망은 이정도

 

당시 백제의 병사가 부족해서 전쟁에서 패한건 아니라고 한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전략은 예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을때

써먹었던 별동대 작전을 그대로 재 사용하였다. 즉, 수많은 산성들을

모두 제쳐놓고 대군을 몰아 바로 사비성으로 진격해버린 것이다.

 

 

 

 

 

 

 

 

 

사자루 2층

 

원래의 전쟁이란 앞에서부터 차례로 산성깨기를 하면서 진군을 해야 하는데

이런 예측못한 빠른 도성공략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백제군이 집결을

하지 못하고 도성을 내주고 만것이다. 그래도, 웅진성에서 예식의 배신만

없었다면 오히려 집결한 백제군에게 후방을 공격당하고 보급로가 차단된

나당 연합군이 위험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저 강 건너편에 옛 백제의 사비성을 복원해 놓았다.

사진으로 보니 엄청난 규모 이다.

 

 

 

 

 

 

 

 

 

부소산성이 있는 부소산은 금남정맥의 종점

 

 

 

 

 

 

 

 

 

현재의 등산로는 옛날 토성 이다.

 

 

 

 

 

 

 

 

 

반월루

 

부소산성 누각중에 조망이 제일 좋은 곳 이다.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

 

반월루에서의 야경도 아름다울것 같다.

400만이 넘는 백제의 수도라면 당시의 그림을 상상해 보자.

공산성도, 부소산성도 마치 영화 세트장 처럼 너무도 좁다.

 

 

 

 

 

 

 

 

 

역광의 실버라이닝이 눈부시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의 인구는 76만호

요즘같은 4인 핵가족은 아니었을테니 6인가족 이면456만

 

1910년 일제가 실시한 조선의 인구는 13,128,780 명

그럼 당시 삼국의 인구가 일제시대 조선의 인구와 비슷?

 

 

 

 

 

 

 

 

 

다시 토성의 성곽길을 걸어간다.

 

부소산성은 순수 흙을 재료로 판축기법으로 축조한 토성 인데, 판축기법이란

성벽이 될 부분의 양쪽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판목을 고정시켜 틀을 만든뒤에

그안에 서로다른 종류의 흙을 교대로 넣고 다져주는 기법 이라고 한다.

 

 

 

 

 

 

 

 

 

발굴 안내도

 

사실 당시 성곽길을 걷던 내게 필요한것은 전체 지도와 현위치 안내...

어디로 가야하는지, 지금 내가 어디쯤 있는지에 대한 안내가 부족하다.

 

 

 

 

 

 

 

 

 

사비성인지 내지성인지...

 

부여를 사비성이라고 하는데 성에서 출토된 유물중에 사비성이란 비는 없고
내지성(柰祗城)이란 비(碑)가 출토되어 부여박물관에 보관중 이라고 한다.

 

 

 

 

 

 

 

 

 

군창지

 

꽤 넓은 곳인데, 옛날 군대의 식량 창고 였다고 한다.

 

 

 

 

 

 

 

 

 

영일루


 

다시 태자골 숲길을 걸어 영일루로 간다.

부소산성은 평시에는 태자들이 놀던 정원같은 산책로 였다고 한다.

 

 

 

 

 

 

 

 

 

백제시대 영일대가 있는곳으로 이곳에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던 해를

맞이했던 곳 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

역시 조선시대 관아의 문을 옮겨와서 세우고, 이름을 영일루라 한것이다.

 

 

 

 

 

 

 

 

 

서복사지

 

 

 

 

 

 

 

 

 

충령사

 

산성을 한바퀴 돌아 내려와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신 충령사를 지나 삼충사로 향한다.

 

 

 

 

 

 

 

 

 

삼충사 의열문을 들어서면 안에 문이 하나 더 있다.

 

 

 

 

 

 

 

 

 

삼충사

 

 

 

 

 

 

 

 

 

삼충사는 백제말의 충신인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어느 역사 보다도 미스테리한 백제의 마지막 성터를 돌아본다.

백제에 대한 현 기록이 식민사관에 의해 자행된 잘못된 기록인지 아니면 사실

인지에 관한 선택은 차후에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로 남겨두어야 할 것같다.

 

 

 

 

 

 

 

 

 

추정 왕궁터

 

 

 

 

 

 

 

 

 

부소산성을 다녀온것인지, 사비성을 다녀온것인지...

 

 

 

 

 

 

 

 

 

주차장으로 되돌아 가는 길 왼편의 넓은 공터 역시 왕궁터다.

 

부여의 백제유적이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분명 축하할 일이고 기뻐할 일임에 틀림없지만, 이 또한 현재의 역사가

왜곡된 것이라면, 그 왜곡을 돌이킬수 없도록 방점을 찍는건 아닌지...

 

 

 

 

 

 

 

 

 

의자왕이 공산성에서 부하의 배신에 의해 포로가 된후 백제는 주류성을

임시 왕성으로 삼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다시 200여개 성을 회복하고 최후에

당/신라/왜/백제 22만7천의 병력이 백강에서 대규모 접전을 벌이기도 한다.

이후 백제유민 20만명이 왜로 이주하고, 왜는 국호를 일본으로 고치고 ...

 

 

 

 

 

 

 

 

 

왕궁터와 연지

 

 백제의 5도독부

 

당은 백제를 멸하고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 (德安)의  5도독부를 설치

하였는데, 지금의 공주에 있었던 웅진도독부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 없는 몇개 지명들은 현재도 옛 백제의 고토로 추정되는 중국에 그대로 존재 한다는....

 

 

 

 

 

 

 

 

 

 

야채를 저장했었다는 목곽 창고

 

 

우이도행군총관 김춘추

 

백제를 공격할때 김춘추가 당으로 부터 받은 직함은 우이도행군총관 이다. 우이도는 현재의 산동성

으로 왜 김춘추의 직함이 한반도의 지명이 아닌 산동성의 군 책임자 직함을 받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 이다. 

 

 

 

 

 

 

 

 

 

 

사비성 백제 왕궁터

 

역사 사실이 무엇인지, 백제에 관해서는 혼미하기만 하다.

다만, 여러가지 정황상 드러나고 있는 자료들에 따르면, 백제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렇게 힘없고 작은 소국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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