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동생네 돌잔치에 다녀오느라 산행이 없는 주말 오후에 그녀와 가볍게 꽃구경 산책을

하기위해 집을 나섰다. 동학사는 무척 붐빌것 같고... 예전에 다녀온 공주 공산성 왕궁터의

벚꽃나무들이 생각났다. 혹시 지금 꽃들이 많이 지지 않았을까? 하며 잠시 걱정도 하였지만

공산성은 꽃이 아니라도 바람쐬며 가볍게 걷기에는 풍광도 좋고 그만인 곳이라 출발을 한다.

 

 

 

 

 

 

 

 

금서루

 

공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는 정문이 바로 금서루다.

서쪽 문이라는 말이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공산성과 금서루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래 500년을 이끌어 가던 한성백제는 고구려에 속아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이다가 민심도 잃고 국고도 탕진하다 결국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목숨을 잃고 멸망한다. 많은 왕비와 많은 왕족, 귀족들이 피살되고 8천명의 백성들이 잡혀갔다.

당시의 백제나 지금이나 과도한 토목공사는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고 있는듯 하다.

 

 

 

 

 

 

 

 

금서루에서 바라본 공북루 가는길

 

 

결국, 백제는 문주왕이 곰나루로 불리웠던 웅진으로 천도하니 그게 바로 현재의 공주다.
그후 성왕이 사비성(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웅진백제 시대를 연다.

 

 

 

 

 

 

 

 

공산정

 

 

금서루에서 공산정 구간은 성벽 보수공사로 인해 통제를 하고 있어 바로 공북루로 왔다.

개인적으로 공산성에서 가장 풍취가 있는 곳이라 여기는데, 마침 그곳이 통제를 하고 있다.

 

 

 

 

 

 

 

 

공북루

 

 

 공북루 주변도 공사중인지 어지럽기만 하여 그 옆으로 성곽길을 따라 오른다.

공산성 북쪽의 금강을 지나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원래 망북루 였는데, 선조때 터만 남아있던 곳에 새로 누각을 세우고 공북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북루와 공산정

 

 

공산정에 오르면 저 성곽길을 따라 공북루로 내려오게 되어 있다.

 

 

 

 

 

 

 

 

서둘것 없는 일요일 오후, 천천히 성곽길을 따라 오른다.

봄 바람이 솔솔 부는데 집사람이 가벼운 겨울 자켓을 입고와서 다행이라고 한다. 

 

 

 

 

 

 

 

 

공산정이 보이는 뒤돌아본 풍경

 

 

 

 

 

 

 

 

이윽고 연못이 인상깊었던 만하루가 내려다 보인다

 

 

 

 

 

 

 

 

만하루와 연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 까지 사용되었던 연못으로 상당히 깊어 보인다.

 

 

 

 

 

 

 

 

만하루

 

 

조선 영조때 건립되었다가 근래 복원된 만하루

 

 

 

 

 

 

 

 

만하루에서 바라본 금강과 공주의 강북지역 

 

 

 

 

 

 

 

 

금강변이라 물을 쉽게 확보 하였으며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게 돌로 층을 이루며

단을 쌓았는데 연못의 수량에 상관없이 연못 수면에 내려설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만하루를 지나 성곽길을 오르면서 뒤돌아본 모습

 

 

 

 

 

 

 

 

그녀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풍경도 좋고 가볍게 운동도 된다.

 

 

 

 

 

 

 

 

개별꽃

 

 

 

 

 

 

 

 

봄까치

 

 

 

 

 

 

 

 

 

 

 

 

 

 

 

 

공주도 서울처럼 강남과 강북으로 나뉜다

강북은 신시가지 이고 강남은 백제시대부터 내려온 구시가지인 셈이다.

 

 

공주의 옛 지명은 웅진 이다. 곰 나루 라는 말이다.

 

지금 금강의 <금>자가 비단 금(錦)을 사용하지만 원래는 웅진의 곰웅(熊)자를 딴 웅수(熊水)에서

<곰강> 으로 불리다 금강 으로 변했다고 한다. 공산성은 약 2,200m 길이로 110m 높이에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의 장방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강건너 야경도 근사할것 같다.

 

 

 

 

 

 

 

 

 

 

 

 

 

 

 

 

현재 충남의 도청소재지는 오랫동안 대전에 있다가 홍성의 내포신도시로 옮겨 갔는데

일제가 대전에 철도를 놓기전에 이곳 공주로 철도를 개설하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 대전이란 고작 회덕과 진잠에 현을 두고 있는 자그마한 곳 이라 전통의 공주만 못했고...

그래서 공주에 철도를 개설하고, 충남도청을 세우려고 했었는데...

양반님네들이 그만 엄청 반대를 하였다고 한다. 철길을 내자면 기맥이 끊기기도 하고...

 

 

그래서 대전에 역을 세우고 철도를 개설하게 되었고, 공주보다 작은 촌동네 이던 대전은

이후 산업시설이 집중되고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 하면서 금새 공주인구를 추월하게 되고

결국 1932년 도청소재지 마저 대전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도청소재지를 대전으로 뺏기면서 공주가 보상으로 받게 된것이 위 사진에 보이는
금강철교와 사범학교 및 농업학교 설립 이었다고 한다.

 

 

 

 

 

 

 

 

금강변 풍경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때 세운 15m 높이의 고층 누각 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누각은 복원된 것으로 별도 다른곳에 임류각지가 있다. 

 

 

 

 

 

 

 

 

임류각 주변의 벚꽃

 

 

 

 

 

 

 

 

광복루

 

 

광복루는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인듯, 바닥에 평상이 하나 설치되어 있어 앉아서 쉴 수 있게 해놨고

조그만 건물을 돌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어르신들을 볼수가 있었다.

 

 

 

 

 

 

 

 

광복루 주변의 벚꽃

 

 

 

 

 

 

 

 

영동루와 구시가지

 

 

영동루로 연결된 성은 토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백제시대 당시엔 무척 가파르게 만들어져 있었겠지만 지금은 성으로써의 흔적만 있을뿐 이다.

 

 

 

 

 

 

 

 

영동루로 가는 토성길

 

 

 

 

 

 

 

 

만아루지의 벚꽃

 

 

동문에서 성문 밖으로 나와 만아루지로 내려섰다.

만아루는 공주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내성 동문의 바로 앞에 위치 했다고 한다.

 

 

 

 

 

 

 

 

만아루지에서

 

 

 

 

 

 

 

 

자동셀카로 한컷

 

 

 

 

 

 

 

 

진남루로 내려서는 길

 

 

 

 

 

 

 

 

진남루

 

 

 

 

 

 

 

 

진남루를 지나 백제시대 왕궁터로 간다.

 

 

 

 

 

 

 

 

공산성의 벚꽃들도 이미 많이 진 상태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왕궁터 주변엔

벚꽃이 아직 예쁘게 남아 있어서 꽃구경 나온 체면을 살리게 되었다. 

 

 

 

 

 

 

 

 

백제왕궁터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 만들어진 왕궁터 이다.

 

 

 

 

 

 

 

 

왕궁터의 오래된 왕벚꽃 나무

 

 

 

 

 

 

 

 

 왕궁터의 연못

 

 

웅진시대 초기의 연못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보다시피 꽤 깊다.

연못 안에서 많은 백제시대의 유물들이 같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왕궁터의 화사한 왕벚꽃 아래에 대학생들이 봄나들이를 온것 같다.

에고... 저때가 참 좋았었는데...

 

 

벚꽃과 중간고사가 늘 겹쳐 매번 아쉬웠던 4월초의 대학시절

늦은밤 도서관을 나오면 반겨주던 노란빛 나트륨등 아래 눈부시게 아름답던 벚꽃들.. 

 

 

 

 

 

 

 

 

공산성 왕궁터의 화사한 벚꽃

 

 

 

 

 

 

 

 

 

 

 

 

 

 

 

 

왕궁터를 지나 다시 출발지점인 금서루로 가는 길

소풍나온 인근 체육관 꼬마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다. 

 

 

 

 

 

 

 

 

공산성과 구 웅진 시내

 

 

660년 7월13일 백제 웅진의 공산성은 백제 최후의 운명을 건 대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수도 사비성을

빠져나온 의자왕의 백제군은 공산성에 진을 치고,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전멸시킨 신라·당 연합군과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엿새간 나당 연합군의 공격도 없는 가운데 의자왕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당시 공주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지역 유지인 예식의 배반으로 당나라에 강제 항복을 당하게

된다. 그는 붙잡혀 당나라로 끌려갔고, 백제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공산정

 

 

당나라군 13만과 신라군 5만의 연합군은 이전의 전투양상인 영토확장이 아닌 백제의 멸망을 목표로 

지역의 다른 성들을 모두 그대로 놔둔채 부여로 급속 진군하여 개전 5일만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

시키는 수나라의 별동대와 같은 군사작전을 보여주지만 의자왕을 놓치는 가장 중대한 우를 범하고 만다.

 

 

천만다행 으로 포위망을 빠져나온 의자왕 일행은 금강과 험준한 벼랑으로 천혜의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는 웅진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대비한다. 사비성에서 백제의 식량이 불에 타버리고, 신라의 보급로는

험준한 산간지방을 통과해서 와야 하는 상황에서 시간은 나당 연합군이 아닌 의자왕의 편 이었다.

 

 

그와중에 인근에 난공불락의 백제의 임존성이 버티고 있고, 백제멸망을 위해 사비와 웅진으로 직진해

오면서 백제의 지역 산성들을 그대로 지나치는 바람에 백제의 지방군은 주력을 그대로 보전해 있으니

식량보급이 어려운 18만의 연합군은 사방에서 밀려들 백제군을 염려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공산정과 금서루

 

 

평지인 사비성과 달리 웅진성(현 공산성)은 강을 끼고 있는 산성이라 수비가 용이하고, 지방의 백제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모여들때까지 농성을 하기에 충분한 성 이었는데, 농성 10일만에 의자왕은 전투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항복을 하고 만다. 많은 사학자들이 당시 어이없는 항복이 아니었더라면 백제멸망이후

수년간 저항을 했던 지방의 백제군이 모여들어 백제가 승리할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의견을 내놓는다.

 

 

하지만 사실 이는 의자왕의 항복이 아니라 당시 웅진성을 관할하고 있던 예식 이라는 장수의 배반으로

의자왕은 부하에게 구금당해 강제 항복을 당하게 되고, 백제는 멸망을 하게 된다. 이후 예식은 일가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예식진 이라는 이름으로 정3품 대당좌위위 대장군을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에도 나와 있었지만 예식진의 묘비명이 2008년 중국에서 발견되면서 더욱

뚜렷해 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학자들은 예식의 배반으로 인해 신라가 통일을 하게 됨에 따라 당과 삼국이 평행을 유지하던 힘의 균형에서

이후 한반도가 힘을 잃고 동북아의 힘의 균형추가 중국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금서루

 

 

출발지점인 금서루로 돌아오면서 공산성 봄 나들이를 마친다.

금서루 근처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찾았고 이후 유명인사들이 많이 다녀갔다는

유명한 공주국밥집인 새이학가든이 가까이에 있어 공주국밥 한그릇씩 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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