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일이 있어 산행을 못하고 일요산행을 위해 금요일 모임에서 산행지를 꼽아보다가

멀지도 않으면서 조망도 좋고, 코스도 무난한 진안의 천반산을 선택하게 된다. 역시 이번

산행도 먹거리 푸짐하게 해서 가볍게 떠나는 소풍같은 산행 인지라 산은 작지만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가득한 천반산 으로 길을 떠난다. 425년전 선비들의 한이 맺힌 곳 으로..

 

 

 

 

 

 

천반산 휴양림

 

 

지난번과 같이 이번에도 천반산 휴양림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9시58분)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산행 들머리가 있다.

 

 

 

 

 

 

 

 

오늘 산행은 이렇게 여덟 그리고 나, 아홉명이 동행을 한다.

 

 

 

 

 

 

 

 

조망이 보이는 곳 까지는 이렇게 잠시동안 오름이 계속된다. 

 

 

오늘의 산행을 하면서 역시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수는 없다.

이날 산행은 정여립과 함께 시작하여 끝을 맺는다.

 

 

 

 

 

 

 

 

 능선 너머로 멀리 진안의 마스코트인 마이산이 보인다.

 

 

당대의 천재 정여립, 모사꾼 송익필, 간흉 정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하드라마

임진왜란 발생의 일축을 담당하고, 지독한 골육당쟁의 원인이 되버리며

두번의 호란을 야기시키고 결국 조선의 쇠퇴와 몰락의 단서를 제공하고

종내는 친일파에서 뉴라이트로 까지 이어지는 사건, 기축사화

 

 

 

 

 

 

 

 

 실제로는 보다 가깝게 보이는데 카메라 줌이 고작 이정도에 불과하다.

 

 

조선조 4대사화를 합친것 보다도 더 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

역모, 요샛말로 종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정여립의 기축사화의 현장이 바로 이곳 천반산

이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 사건을 두고 <조선 500년 제일사건> 이라 불렀으며

전 민족의 항성을 묻고 변성만 키우는 짓이다 라고 까지 했었다.

 

 

 

 

 

 

 

 

 능선에 올라 깃대봉이 있는 우측으로 가지말고 왼쪽으로 조금만 내려서면 멋진 조망터가 있다.

이곳에서 덕유산 주능선이 조망되고 굽어 흘러가는 구량천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예쁜 소나무가 있다.

 

 

 

 

 

 

 

 

능선에서 바라본 덕유산 줄기

 

 

천반산 그 이름은 한을 품고

 

천반산(天盤山), 그 이름에는 3가지 유래가 있는데...

먼저 주능선 일원이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고

두번째로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세번째로는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천반락도 天盤落桃)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천반산 정상인 깃대봉 (11시9분)

 

 

하지만, 정여립 사건과 연관된 이산은 마치 天反山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가 발생한 사건의 주인공 정여립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은 이곳

하늘(임금)에 반대 했던 역신들의 산, 천반산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은 정여립은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깃대봉 한켠 바람이 없는 곳에서 느긋한 식사를 한다.

간식을 하고나서 성터에서 식사를 하려고 하였는데 앉은 자리가 길어지며 식사로 이어진다.

자리가 좀 더 넓었더라면 모두다 편안히 앉았을텐데 자리가 협소한것이 조금 아쉽다.

 

 

 

 

 

 

 

 

두시간 가량 긴 식사를 하고 나서 성터로 향한다.

 

 

 

 

 

 

 

 

성터로 가는 능선길

 

 

 

 

 

 

 

 

천반산 능선 뒤로 보이는 운장산 줄기

 

 

모사꾼 송익필

  

사진에 보이는 운장산은 송익필의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고, 구봉산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 이라고 한다.

송익필은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세우고 천여명을 죽게한 조선 최대의 사화인 기축옥사의 주범이라고도 할수가

있는데, 그의 아비 송사련 또한 송익필을 능가하는 간악한 자였다.

 

송익필의 아비 송사련은 서얼 출신으로 그의 어미 또한 서녀로 당시 중종때 좌의정이던 안당의 서매가 되니

촌수로는 외삼촌 이지만 거의 노비신세 였다고 한다. 안당의 신세를 지던 그는 벼슬 욕심에 안당의 정적인

심정에게 붙어 미관 말직을 얻으면서 외삼촌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을 모함하여 신사무옥을 일으키는

만행을 자행한다. 결국 은혜를 입은 안당을 멸문지화로 만들고 자신은 그 공로로 당상관이 되었다.

 

그러나 30년후 안당이 복권되고 나서 그의 자손들이 송사련을 무고죄로 고발을 하게 되자 음모가 드러나고

이미 죽은 송사련은 관직이 박탈되고 송익필등 가족은 다시 노비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망터에서 이날 함께한 동갑나기 공주님들

 

 

정철과 친하게 지내며 뛰어난 문장가로 어떻게 신분상승을 꾀하던 그를 제지하는  동인세력은 그에게

눈의 가시였고 결국 전국의 서인세력을 규합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는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며

 언변에 거침이 없던 정여립 으로 타겟을 잡고 치밀한 계획하에 전라도의 정씨가 왕이된다는 유언비어를

전국적으로 유포시키고 백성의 관심과 의심병 많은 선조의 관심이 이쪽에 쏠리게 만든다.

 

 드디어 기축년에 황해도에서 왕에게 장계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시나리오에 천여명의

생목숨이 끊어지니 이게 바로 기축사화다. 그의 아비는 신사무옥을 일으키고 그는 기축사화를 일으키니

 신분상승을 꾀하던 '쌍놈' 父子가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을 몰살시키고 국란을 맞아

국가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동인백정 이라는 송강 정철 보다도 더 악질 간흉임에 틀림이 없다.

 

 

 

 

 

 

 

 

독재봉(왼쪽)과 성터(오른쪽) 사이 뒷편으로 보이는 마이산

 

 

 

 

 

 

 

 

말바위

 

 

말바위 보다는 말 안장 바위가 어울리는 것 같다.

 

 

 

 

 

 

 

 

말바위에서 바라본 구량천

 

 

동인백정 송강 정철

 

- 사독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다.<선조실록 145권>

- 정철이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역적의 변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오늘이야

               말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날이라 여겨 자신이 신문하는 관원이되어 일망타진 할 계책을 세웠다. <선조실록 84권>

- 정철의 일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 듯하니 방치하는 것이 옳다. <선조실록 54권>

 

 

 

 

 

 

 

 

 성터

 

 

 

 

 

 

 

 

 천반산 성터 (14시9분)

 

 

역모의 시작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장계 한 장이 조정에 당도한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정여립이

세상을 전복시킬 엄청난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첩보는 구체적이다. 정여립이 자신을

따르는 일당과 호남, 황해도에서 동시에 봉기해 한강의 얼음을 딛고 한양으로 진입, 훈련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때까지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선조조차도 정여립이 모반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했다.

정여립과 한 길을 걸었던 동인 계열은 그가 스스로 한양에 올라와 무고를 주장하면 사건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판단은 어긋났다. 10월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당도했다. 변고는 거듭됐다. 10월18일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월20일 선조가

직접 나선 정옥남에 대한 친국을 시작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됐다. 옥남은 정여립의 아들이다.

 

 

 

 

 

 

 

 

저 멀리 계곡사이로 구봉산이 보인다.

 

 

사실은 역모가 아니라 치밀한 음모

 

힘을 잃고 정권을 찾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은 완벽한 시나리오를 구성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모 사건이라 하면 조선시대에는 더욱 엄청난 사건이었다. 서인들은 천출 노비로

아비 송사련 때문에 비롯된 신분몰락의 분풀이와 함께 신분상승을 호시탐탐 모색하고 있던 당대의

천재 모사꾼이자 지독한 간흉 송익필과 동인백정으로 불리웠던 송강 정철 등이 음모를 꾸며 율곡의

추천으로 서인에 들어왔다가, 율곡이 죽자 서인들의 행태에 실망하고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을

역모의 주역이자 도화선으로 삼아 동인정권을 끌어내리고 신분상승과 집권을 할 계획을 세운다.

 

 

 

 

 

 

 

 

당겨보니 옛 천황산, 천황봉의 산세가 오밀조밀한 구봉산의 뭇 봉우리들과 비교가 된다.

 

 

<동사만록>에도 음모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정철 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한 서인은 계획된 대로 사전에 내통한 황해도 관찰사를 시켜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다는 비밀장계를 선조에게 보내면서 준비된 음모가 시작되는데

그때 이미 정여립은 서인들이 보낸 자객에게 천반산 앞 죽도에서 암살을

당한 이후 였다고 한다.

 

 

 

 

 

 

 

 

 송판서굴은 등로를 벗어나 300m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당대의 인기인 정여립

 

 

당대의 식자들은 그의 얼굴 한번 보기를 소망했고, 그와 서신한번 주고 받는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그런 그였기에 그와 연관되었던 사람들, 편지 한번 주고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처형을 당하게 된다

 

결국 음모는 성공하기에 이르고 조선시대 최악의 왕 선조는 동인의 반대파인 서인의 수장 정철을 시켜

기축옥사를 진두지휘 하게 하고 동인 사냥을 시작케 한다. 이때의 모사꾼이 송익필 이다 (정감록과 정여립을

결부시켜 거짓 소문을 퍼트린 이가 송익필 이다). 그렇게 동인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狂人 정철의 손에서 

원래 계획된 동인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대로, 당시 집권하고 있던 동인들은 수장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관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삭탈관직을 당하고 동과 서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극한의 원수가 되어 버린다.

 

 

 

 

 

 

 

 

모두 배낭을 가파른 길을 벗어놓고 가파른 길을 내려선다.

 

 

선조의 열등감

 

왕재가 부족했던 선조는 어릴적에 왕이 되어 당대 최고로 뛰어났던 천재 정여립에게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열등감은 이후 몇십년이 지나도 씻겨 지지가 않았는데, 당시 국내 정세가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좋지 않게 흐르자 변덕스럽고 의심병 많은 선조는 민심을 회복하고

정치적인 돌파구를 찾으려 고민하던 차에, 집권당인 동인을 누르고 정권을 잡으려는 서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뻔히 보이는 음모로 인해 시작된 역모를 눈감아 주면서 왕권을 회복 하고자

정철을 앞세워 기축옥사를 단행 하였다.

 

또한 낙향한 정여립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 수백명의 대동계를 조직하여 전라도 지역에 상륙하여

전혀 대비가 없던 관군들을 물리치며 승승장구 하던 천여명의 왜적을 물리친 일이 발생하자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민심이 정여립에게 쏠리게 되자 불신감 가득한 새가슴인 선조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서인들을 부추켜 정여립과 동인들을 몰살하게 한다. 서인들의 뻔히 보이는 음모의

배경에는 이렇게 선조의 문제가 오버랩 되어 있는 것이다.

 

 

 

 

 

 

 

 

 바위아래 자리한 송판서굴

 

 

정여립의 역모가 거짖인 이유들

 

 

1. 당시 집권층은 정여립의 동인이다. 불만은 서인들이 가지고 있는데, 집권파인 정여립이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

2. 역모의 진원지는 전라도 천반산인데,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고변은 천리길도 넘는 황해도에서 했고, 전라도지역에서

    역도로 붙잡힌 사람들은 역모 자체를 부인하다 장살된 반면 해서지역 역도들은 역모를 사실이라 자백했다고 한다.

3. 정여립이 암살을 당할시 그는 천반산 앞에 있는 죽도에 아들과 수하 한명을 동행하고서 단풍구경을 하고 있었다.

4. 수백명의 무술을 하는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지만 그는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

5. 역모사건후 그의 집에는 그가 평소에 쓰던 그대로 방치되어 그와 교류했던 선비들과의 안부 편지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후 그 편지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었는데, 역모를 준비한 사람이 집안에 중요한 문서

               등을 집에 방치해 두며 단풍놀이를 간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단풍구경 갔다가 암살을 당한 것이다.

6. 그가 역모후 도주한곳이 죽도 라고 하는데, 잠시후 아래에서 죽도 사진을 올릴것 이지만, 죽도는 말만 섬이지

               밤톨만큼 작은, 그러면서도 사방이 강물에 에워 쌓여진 조그만 야산에 불과 하다. 정말 역모라면 지리산 같은 큰산

   으로 도망을 가던지 해야지 마을 뒷산보다 작은 죽도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 이다.

 

 

 

 

 

 

 

 

 연안송씨 송보산 선생이 세종때 예조판서에 올랐는데,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에 은거하여 수도 하였다고 하며, 이후에 정여립이 대동계원을

데리고 훈련을 할때 이용되었다고 한다.

 

 

 

 

 

 

 

 

굴 내부에서 바라본 모습

 

 

 거짖 역모로 동인을 몰살하고 국난을 초래한 서인들이 나중에는 진짜 역모를 일으키는데

그게 바로 인조반정 이다. 조선의 또 다른 못난이왕 인조의 등장인 것이다.

 

 

 

 

 

 

 

 

 우측위로 작은굴이 하나 더 있는데 접근이 위험해 보인다.

 

 

 

 

 

 

 

 

 뜀바위 에서 바라본 건너편 바위

 

 

정여립과 용마(龍馬)

 

정여립이 타고 다녔던 말이 용마 라고 하는데, 정여립의 이야기에는 그 용마의 전설도 함께 전해온다.

그 말은 워낙 빨라서 정여립이 상두산에서 6km쯤 떨어진 김제 황산으로 활을 쏘면, 용마가 더 빠르게

달려가 그 화살을 물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살을 쏘았는데 용마가 화살을 물어오지 못하자,

정여립이 화가 나서 곧바로 그 용마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이 용마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크게 자책하며 그의 칼과 함께 용마를 묻었다고 하는데, 그 무덤이 김제시

금산면 쌍룡마을앞 논 가운데 있는 무덤 이라고 한다.

 

 

 

 

 

 

 

 

뜀바위 건너편에 진대장님이 건너가서 사진을 찍고 계신다.

 

 

 

 

 

 

 

 

 뜀바위는 조망이 시원한 곳 으로

천반산은 이처럼 곳곳에 멋진 조망터를 가지고 있다.

 

 

 

 

 

 

 

 

뜀바위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길과 구량천

 

 

 

 

 

 

 

 

 다시 건너편 뜀바위로 넘어와 잠시전 서 있던 뜀바위를 바라보며

 

 

 

 

 

 

 

 

 뜀바위를 건너와 조망터에 선 우리들산악회 회장님

 

 

 

 

 

 

 

 

 

 

 

 

 

 

 

 

 

이제 죽도 절개지 쪽으로 하산을 한다.

 

 

 

 

 

 

 

 

 송편 모양의 작은 섬 죽도

 

 

이 송편모양의 작은 섬이 죽도 인데,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면

이 작은 산에 숨는 다는게 말이 안되는 소리다.

그는 이곳에 단풍놀이 왔다가 암살을 당하고

조선시대 최대 음모사건의 희생양이 되었다.

 

 

 

 

 

 

 

 

 우측으로 치유할수 없는 상처로 남은 죽도의 슬픔인 죽도폭포가 보인다.

 

 

 

 

 

 

 

 

당겨본 죽도폭포

 

 

죽도의 눈물

 

원래 죽도는 오메가 Ω 형태의 섬같은 곳 이었다.

수려한 바위산 절벽을 맑은 물이 휘돌아 흘러 마치 섬과 같았던 곳 이다.

 
그런데 물줄기 일부를 돌려 논을 만들려고 병풍바위 중간을 폭파하여 지금의 폭포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구량천물 일부가 폭포 아래로 흘러가게 되면서 물길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논만들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인간의 욕심이 남긴 결과만이 죽도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훼손한채 영원히 복구할수 없는 흉물스런 절단면이 되어 죽도의 슬픈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한번 파괴된 자연은 결국 이렇게 회복 되지 못하고 영원한 상처로 남는데 

오늘날에도 위정자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이 어리석은 짓을 반복 하고 있다.

 

 

 

 

 

 

 

 

 죽도에서 연결된 칼능선 뒤로 운장산, 구봉산 라인이 보인다.

 

 

정여립이 계원들과 함께 뛰어다니던 산, 천반산

그리고 끝내는 암살을 당한 죽도

 

그 둘을 내려다 보고 있는 이 모든 사건의 원흉

간흉 송익필의 호를 딴, 운장산

 

세월은 흘러 두 사람은 오래전 흙이 되었건만

마주하고 있는 두 산을 걷는 이 땅의 후손들은

그 둘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이 빚어낸 죽도의 슬픔

 

 

 

 

 

 

 

 

오늘 어슬렁 어슬렁 소풍길을 함께 하신 분들

 

 

3년전 여름엔 이곳에서 산행후 시원한 물놀이를 즐겼다.

자일을 구량천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묶어두고 퐁당퐁당 헤엄치며...

건너편 벼랑 아래쪽은 수심이 꽤 깊은 곳 이다.

 

 

 

 

 

 

 

 

 이제 구량천 따라 지나온 능선을 우측에 끼고 돌아오는 길

 

 

 

 

 

 

 

 

비온뒤에는 신발을 벗고 이 곳을 지나야 한다.

구량천을 지나면서 능선 사이의 아름다운 천변 길이 끝난다.

 

 

 

 

 

 

 

지난번엔 이곳에서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휴양림앞에 주차를 했다.

원점회귀를 하려면 장전마을 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잠시 더 걸어야 한다.

 

 

 

 

 

 

 

 

 

 

 

 

 

 

 

 

이윽고 휴양림 입구, 아침에 차를 세워둔 곳에 도착을 하며 산행을 마친다. (16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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