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길 전구간 지도 (출처 : 대청호 오백리길 http://www.dc500.org)

 

 

 

 

 

 

 

 

 

 

 

산행코스 :: 이평리 - 정상 - 삼각봉 - 감로봉 - 이백리 (약 4시간 쉬엄쉬엄)

산행일시 :: 2012년 4월 7일 토요일, 여행과 산행

 

 

 

 

 

 

 

 

 

 

 

 

여산에서 옥천 고리산에 가는 토요일 오전, 반보님의 전화를 받고 함께 고리산에 가기로 한다.

오후 산행이라 우리도 식사를 하고 천천히 따라나서기로 한다. 

 

 

 

고리산은 지도에 고리환 자를 써서 환산(環山) 이라고 나오는데, 이곳 주민들은 지도에 표기된 환산(環山)

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으며 고리산 이라 부르고 있다. 고리산의 또 다른 유래는 풍수지리설로 배를 붙들어

맬 고리가 있는 산이라하여 고리산이라 불렀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당시에 없던 대청호가 생기는 바람에

그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리산은 고구려에서 온 지명으로, 고구려산 이라는 말 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공식적으로 고려로 국호를 변경 하였으나, 왕건이 세운 고려와 혼동을 방지

하기 위하여 그간 고구려 라고 해왔다고 한다. 또한 일부 사학자들은 고구려와 고려의 정확한 발음은 고구리와

고리 라고 하고 있는바,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오늘 이 고리산의 지명은 고구려의 고려 에서

따온 고리산 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있어 보인다.

 

 

 

 

고리산 등로 입구주변 대청호반 에서...

 

올해 처음 보는 진달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봄. 그중에서도 4월에 올해는 바쁜일로 꽃 구경 할 틈이 없었다.

등로 입구 근처에 차를 세우고 대청호로 내려서니 호숫물이 참으로 맑게 느껴진다.

 

 

 

 

 

 

등로 입구에서... (13시)

여산 일행들을 기다리다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20여분 오르니 나뭇가지 사이로 대청호가 보이기 시작한다.

 

 

고구려의 국명이 고리라고 주장하는 근거 기록

 

한·중·일 자전과 옥편 기록이 첫번째로,  청나라 시대의 '강희자전', 우리나라 옥편의 시조격인 정조때의

'전운옥편', 최남선의 '신자전' 등에 '고려'를 '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광복 후 한글학회가

편찬한 '큰사전'에는 '고구리'라는 단어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과 타이완에서 출판된 자전에도

'麗'자를 '려'와 '리'로 읽을 수 있으나 '리'로 읽는 사례로 '고구려'와 '고려'를 들고 있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조선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도 '高句麗'를 '고구리'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를 달고 있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신채호, 이병도 등은 '高麗'의 소릿값을 '카우리' 등으로 읽었는데

이때도 '麗'자는 '리'로 읽었다. (출처 : 서경대 서길수 교수님의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 중에서)

 

 

 

 

 

이윽고 여산팀들을 만나 같이 동행을 한다.

오늘 이 산길은 백제 성왕의 사연이 남아 있는 곳 이다.

역사에 해박한 반보님이 그날의 사건을 현장에서 보듯 생생하게 표현을 하신다.

백제 성왕이 이곳 고리산에 있던 태자를 보기 위해 오다가 인근에서 매복중이던 신라군에게 잡혀 현장에서

참수당한 사건을 말함이다.  

 

 

 

 

 

 

이윽고 조망이 가장 아름다웠던 바위를 만난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대청호 물길은 마치 미로 같다.

댐이 만들어져서 현재와 같은 물길이 아니었을때 조그만 강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저 넘어는 신라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이곳 고리산은 백제군 최전방 이었다.

 

 

 

 

 

 

 

 

 

대청호 절경중 하나인 병풍바위가 있는 부소담악(赴召潭岳)

 

옥빛 대청호 물줄기를 길게 가르며 가늘게 뻗어 있는 부소담악.

대청호가 조성되면서 그 자태가 더욱 도드라졌다고 한다.

예전엔 나무가 많아 병풍 같은 암벽이 잘 보이지 않아서 의병장 조헌과 우암 송시열 등이 부소담악을 ‘숨은 병풍’

(隱屛)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물에 잠기고 흙이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가 많이 사라져 암벽이 드러나게

된 것 이라고 한다. 부소담악은 추소팔경의 막내로 제팔경이지만 지금은 추소팔경중 제일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부소’(赴召) 라는 말은  ‘임금의 부름을 좇아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름의 유래는 불분명 하지만, 향토사학자들은 아마 백제 성왕과 관련된 표현이 아닐까하고 추측 한다고 한다.

 

 

 

 

 

 

진행방향 뒤쪽 (산행을 시작한쪽)으로 보이는 파노라마 전경 (클ㅇ릭)

조망 바위에서의 조망은 뒤 산쪽을 제외 하고 진행방향 우측과 뒤로 200도 가량 시원하게 펼쳐진다. 

 

 

 

 

 

 

 

 

 

 

 

 

조망바위에서 보이는 대청호의 모습들

 

 


 

 

 

 

 

동봉에서 바라본 고리산 정상

 

 

 

 

 

 

정상에 가려면 동봉을 내려서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정상 직전에 뒤돌아본 동봉이 마치 정상보다

더 높아 보인다.

 

 

 

 

 

 

 

 

 

고리산 정상 (14시 55분)

 

고리산은 삼국시절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 이다.

백제 성왕시절, 태자 부여창이 백제, 왜, 대가야 연합군의 주력병력을 상주시키고 신라와 대치 하였던 곳이다.

아마 주력병력은 산 뒤에 있는 현재의 대청호반 평야지에 주둔을 하였을 것이고, 이곳은 최전방 GOP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던 그 시절...

백제, 대가야, 왜나라 3국이 힘을 합친 백제의 연합군이 현재의 옥천 일대에서 마주보는 산줄기를 차지하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백제의 주력군은 태자인 부여창이 이끌고 오늘 산행지인 고리산, 환산성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현재 지도에 말동산 이라고 나오는 백제군의 전진기지 이자 기마 사육장 이었던 성치산성으로 직접

원정을 나왔던 백제의 성왕이 주력 연합군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앓아 누워 있는 태자를 위문차 방문

하려고 국가 최고 대신인 6좌평중 4명의 좌평을 포함 일행 50명만을 데리고 움직이다가 첩보를 입수하고

이동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잡혀서 백제의 성왕이 현장에서 신라의 노(奴)에게 목이 잘리고

백제의 주요 대신들이 모두 죽어버리는 참사를 당하게 된다.

 

신라는 백제의 성왕이 성치산성으로 왔을때 부터 첩보를 입수하고 백제군들이 성치산성에서 환산성으로

자주 다니던 길을 끊고 백제의 왕이 태자가 이끄는 주력군과 통합적 전술을 하는것을 전략적으로 방해 하려고,

기병을 이용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신라군의 사정을 모르던 백제의 왕 일행이 해가 저물에

가는 어느날 늦은 오후에 말을 몰고 급하게 늘 다니던 길을 통해 고리산으로 가다가 횡사를 당하게 된것이다.

 

 

이후 분노한 백제군은 기병을 몰아 성급히 관산성을 공격하지만 대패를 당하게 되고 말무덤 이라는 지명까지

생기게 된다.

 

 

 

 

 

 

정상의 헬기장 풍경

 

 

 

 

 

 

정상에서 바라본 진행방향의 능선

고리산 능선 뒤로 희미하게 우뚝선 산이 충남제일봉 서대산 이다.

 

 

 

 

 

 

지나온 정상과 동봉(우측봉우리)

 

 

 

 

 

 

삼각봉에서 동행한 여산님들

 

 

 

 

 

 

전망이 좋은 감로봉에 있는 여흥민씨와 부인 죽산박씨 합장묘

 

 

 

 

 

 

지나온 능선길

 

 

 

 

 

 

감로봉에서 바라본 대청호 조망

뒤로 멀리 속리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감로봉에서 대청호를 조망하는 느림님

옛날 백제의 군사들이 이렇게 건너편 신라 군영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옥천군 읍내

 

백제군 진영에서 바라본 신라군 진영이다.

옥천 바로 앞에 보이는 낮은 산들에 신라는 산성(서산성, 삼양리토성)을 쌓고 전선을 구축했을것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상상을 해본다.

 

 

 

 

 

 

능선을 따라 직진을 하다 마지막 봉우리를 앞두고 이백리 방향으로 왼쪽길을 따라 걸어가니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예쁜 돌탑을 세우고 태극기가 펄럭이는 산불감시초소에 도착을 한다.

가고자 하는 이백리 방향은 이곳에서 사진상의 앞쪽으로 직진하여 내려가는게 아니라

산불감시초소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하산을 해야 한다.

 

 

 

 

 

 

옥천시내와 관산성

 

 

 

 

 

 

백제군 진영에서 바라본 신라군 최전방과 이곳으로 오다가 죽은 백제 성왕의 목이 잘린 곳

성왕이 목이 잘린곳은 구천(궂은벼루)라 불리는 곳으로 벼랑밑으로는 서화천이 흐르고 있고 바로 코 앞에

신라군 최전방 기지인 관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관산성에서 양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신라군의 최전방 이다.

왜 성왕은 성치산에서 이곳 고리산으로 오는데 위험하게 신라의 최전방 관산성 앞을 지나서 와야만 했을까..?

그것도 달랑 최고 귀족들을 포함하여 수행원 50명만 데리고... 무모하게 말이다.

 

백제군에 대해 훤하게 정보를 가지고 있던 신라와...

그런 신라군의 동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백제

그 와중에 백제의 뛰어난 군왕인 성왕은 너무도 안이하게 백제군의 동태가 뻔히 내려다 보이는 적의 최전방

관산성 앞을 경유해 고리산으로 급히 가려다 신주 김무력 (김유신의 할아버지) 장군 부대 소속인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 에게 사로잡혀 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한 나라의 왕과 백제 최고 벼슬인 여섯명의 좌평중 4명이나 잡히게 되는 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신라측은

졸병을 시켜 성왕의 목을 베고, 그 목을 경주 관청인 북청의 계단밑에 묻어 두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밟도록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성왕이 관산성에 쳐들어 왔는데 신주의 김무력장군이 성왕은 물론이고 4명의 좌평 및

2만9천6백명의 적군을 참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나오는데, 사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의 죽음은, 50여명만

데리고 아들을 위해 위문을 가려는 아비를 김무력 장군 부대 소속 부하장졸이 길목에서 성왕일행을 사로잡고

횡재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당시 김무력 장군은 고리산성에 머무르던 백제의 주력군에 막혀 관산성으로

올수도 없었다고 한다. 

 

아래는 일본 서기가 전하는 복병에 사로잡혀 참수 당하는 백제 성왕의 모습이다.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성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얼마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옵니다” 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 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을 깬것은 신라 진흥왕 이다. 백제의 성왕은 그것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데, 성왕의 목을 치는 신라의 하급 장졸이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 라고 한것을 두고 아직도 억측들이 분분하다.

 

신라에서 말을 관리하는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가 뭔가 잘못알고 한 말은 아닌지...

 

 

 

 

 

 

성왕이 죽고나서 백제군은 구심점을 잃은데다 성급하게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큰 타격을 받고 헤매게 된다.

고리산성은 몇개의 봉우리가 연결된 산성으로 절대 많은 군대가 주둔할수 없는 곳인데, 지도를 보면 고리산 뒤에

백골산 이라는 섬뜩한 이름을 가진 산이 나온다. 바로 백제군이 대패를 한 곳이다.

 

백골산 아래 현재 대청호반 평지에 백제군의 주력이 주둔을 했던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으며, 백골산과 고리산은

최전방의 방어 진지 라고 전해지고 있다. 노고성과 고리산성으로 이어지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던 백제는

꿈에도 생각못한 배후 공격을 받게 되는데 바로 신주에서 내려온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장군에 의해서다.

김무력 장군은 금관가야의 마지막왕인 구형왕의 세째아들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이후에 왕자의 신분에서

신라 장군이 되어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신하고 차지한 신주의 군주가 된다. 

 

강변 평야지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는 후방을 기습받고 허둥지둥 대는 사이에 전면에서 합공을 당하니 결국 포위가

되어 삼국사기에 신라 김무력 장군에 의해 백제군 2만9천7백명이 죽었다는 기록과 함께, 백골산 이라는 무시무시한

지명을 남기고 또 다시 대패를 당하게 된다. (참고 : 고성혁의 역사추적)

 

 

 

 

 

 

산불감시초소에서 환산성 제1보루 쪽으로 가다가 봉우리 못미쳐 우측으로 내려선다.

산행종료 (17시03분)

 

 

나중에 백제의 왕이된 부여창은 (위덕왕) 신라 왕도 북청계단에 묻혀 매일같이 짓밟히는 성왕의 목을 찾아

오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실패를 하고 만다. 훗날 의자왕이 윤충장군을 시켜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의 처자들의 목을 베어와 백제 성왕(聖王)를 참수하여 머리를 돌려주지 않았던

신라의 백년 전 만행에 대한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옥중에 묻어 버렸다고 한다.


 

 

 

 

 

 

 

 

 

 

 

뒤풀이를 하러간 식당 화단에 심어져 있는 만개한 노루귀들...

산에서도 보지 못한놈을 식당 화단에서 만났다.

봄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식당에서 토종닭 백숙과 도리탕으로 뒤풀이를 하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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