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경로 : 진틀 - 병암폭포 - 신선대 - 백운산 - 상백운암 - 백운사 - 선동 (10.7km, 5시간)









안내산악회인 금강산악회 버스를 타고 진틀에서 하차, 홀로 산행을 시작한다.

화창하게 맑은 날, 기온 까지 온화한데 내려서 원거리 조망을 보니 살짝 뿌옇다.

서리꽃이 있을까 기대도 해보았는데, 그러기에는 날씨가 너무 푹하다.









개념도에 병암폭포를 지나 가도록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산행을 시작하고 약 460m, 5분정도 걸어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개념도상 병암폭포를 가려면 다리를 건너면 안될것 같아 산길샘과 개념도를 다시 보니, 다리 직전에서 계곡을 따라 직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안내산악회 동행들은 모두 넓은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 버리고, 결국 혼자서 계곡으로 들어선다.








지난주 걸었던 계룡산의 오송대를 찾아가는 조선시대 옛길은 희미한 흔적 이라도 있었는데, 여기는 아예 길 흔적도 없다. 그냥 GPS 방향만 보고 걸어갈뿐. 지금 이 시기가 가시나 덤불이 없어서 그나마 걸을만 했다.







 

계곡으로 들어선지 18분경, 병암폭포를 만났다.

백운산에서는 그래도 꽤 유명한 폭포인데 수량 부족으로 그렇게 큰 감흥은 없다.

여름날 비온뒤에 오면 훨씬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을것 같다.








병암폭포 상단에서








병암폭포를 지나면서 길은 더욱 오지로 변해간다. 지리산 반달곰 한마리가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작년에 올무에 걸려 죽었다고 하니, 지리산에서 처럼 곰 만날일은 없을것 같고, GPS만 가끔씩 꺼내 보면서 방향을 잡고 오른다.








사실 산길샘 어플을 쓰면서 네이버 위성지도를 쓰고 있는데, 네이버 지도에는 병암폭포를 경유해서 오르는길과 백운사에서 선동으로 내려서는 등산로가 잘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두 길은 없어진지 오래고, 잡목과 낙옆으로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니 유의해야 하겠다.








계곡의 작은 폭포와 예쁜 물 웅덩이








숲은 온통 고로쇠나무 천지다.

백운산이 고로쇠 수액으로 유명하다더니 정말 온통 고로쇠 나무들만 보인다.


고로쇠의 유래는 도선국사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 도선 국사가 오랜 좌선 후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를 펼 수 없어 옆에 있는 나무를 잡고 일어서다 나무가 꺾였는데, 꺾인 나무에서 수액이 뚝뚝 떨어져 나와, 그 물을 마셨더니 원기가 회복되고 다리 통증도 사라졌다고 한다. 도선 국사는 이 나무의 이름을 뼈에 이롭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라 불렀다고 한다.








얼마전까지 무덤이 있던 자리로 올라섰다.








다른산에 있으면 이쁨좀 받을 커다란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이윽고 신선대 직전에서 등산로와 만난다.
아마 등로를 따라 오른 일행들은 이미 진즉 신선대를 지나갔을 것이다.
거의 쌩길 인데다 방향과 길을 찾느라 빨리 걸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려다본 신선대








신선대 아래로 돌아가니 위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저 계단을 지나면 다시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하나 더 있다.








신선대에 오르니 먼저 시선을 잡아 끄는건 장쾌한 지리산 주능선









광양 백운산 신선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반야봉








백운산 신선대에서 바라본 노고단과 종석대

종석대가 고리봉 정도 되는줄 알았는데, 고리봉이나 만복대는 노고단에 가려있다.








신선대에서 바라본 백운산 정상








따리봉,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신선대에서 바라본 따리봉과 도솔봉


도솔봉은 도솔산 이라는 별개의 산명으로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지도에 나온다.
상세한 지방지도 부터 커다란 대동여지도 까지 나오고 있으며


따리봉은 이름이 이상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배의 키에서 물속에 잠기는 넓적한 나무판 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조선시대 지도들을 찾아보니 1750녀의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에서 읍봉(揖峯) 이라고 쓰여 있는것을 볼 수 있었다. 상봉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 읍을 하는 봉우리라는 말이다.


현재의 따리봉은 잘못된 이름


그런데 이후 19세기 들어 제작된 흥선대원군 시절의 1872지방도에 처음으로 즙봉(楫峯) 이라고 나온다. 1872 지방지도는 이전 지도에 비해 상세도가 떨어진다고 하는데, 일견해도 지도쟁이가 揖을 楫으로 잘못 적은것으로 보인다. 재밌는것은 揖에는 여러뜻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모으다' 이며, '모을 즙' 으로 쓰일때 揖과 楫자는 同字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즉, 揖峯의 뜻과 이전 지도의 기록을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고 '모으다' 란 의미의 (同字)인 楫峯으로 적었은 것이다.


그런데 楫에는 '모으다' 말고 주된 의미로서 쓰이는 ('배를 젓는) 노'라는 뜻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모으다'에서 유발된 잘못된 유래는 잊어버리고 사람들이 '노' 라는 말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1899년 광양군 읍지와 일제시대의 1925년 광양읍지에 楫峯 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따리봉 이라는 완전 엉뚱한 이름이 되버린것으로 추정된다. 이것 역시 고요속의 외침 이다. 더 재밌는건 이 잘못된 이름에 의미를 더해 산세가 노를 닮아서 따리봉 이라 한다 라는 억지 유래까지 생겼다.








도솔봉 왼쪽 뒤로 멀리 머리만 보이는 무등산








신선대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

나도 한쪽 조망이 좋은곳에 앉아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다.








도솔봉과 따리봉
지금이라도 따리봉 대신에 읍봉 이나 절봉 으로 바꿔 불러야 하나..














신선대에서 바라본 매봉과 뒤로 악양면








신선대를 내려서 정상으로 간다.














능선의 기암들














당겨본 정상








백운산 정상에서..


신동국여지승랑 40권 광양현편을 보면 광양현의 진산으로 현의 북쪽20리에 있는 백계산(白鷄山)이 진산(鎭山) 이며 업굴산(業窟山) 백계산(白鷄山)의 동쪽 지맥(支脈)이다 라고 나온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글에서 백계산이 지금의 백운산 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여기에 의문이 생긴다.


1700년도 이후 광양현이 단독으로 자세하게 나오는 지도에는 분명하게 백운산과 백계산이 구분되서 나오지만, 그 이전의 전라도가 한,두장으로 나오는 지도에는 광양의 산으로 백계산 하나만 나오는데, 이는 백계산이 현청과 향교에서 가까운 진산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백계산과 백운산은 다른 산 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진잠현을 봐도 계룡산이 20리(동국여지승람에서는 15리) 거리에 있는데, 진산이 산장산 이다. 백계산이 광양의 진산으로서, 광양에 백계산 하나만 나오는 옛 지도에도 동네 뒷산인 산장산이 진잠현의 진산으로서 단독으로 나온다. 산장산은 옛날 진잠현청 뒤에 있는 높이 200m 가량의 낮은 산 이다. 대전 근교와 충남의 주요한 산들도 안나오는 지도에도 현청이 자리했다는 이유로 뒷산이 나오는 것이다.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진잠현의 진산으로 나온다. 전주시의 진산은 건지산 으로 나오는데, 이 역시 100m 안되는 낮은 산 이다. 또한 공주목의 진산은 명산 계룡산이 아닌 작은 공산으로 나온다. 진잠현도, 공주목도 명산 계룡을 외면하고 있는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다 <계룡산 주 동쪽 40리에 있다>. 광양현과 백운산도 40리 거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는 옥룡사(玉龍寺)가 백계산(白鷄山)에 있다고 언급하며, 송천사(松川寺), 운암사(雲巖寺) 모두 백계산(白鷄山)에 있다는 설명한다. 모두다 현재 백계산에 있는 절과 절터다. 그리고 백계산이 현에서의 거리가 20리 라고 하는거 봐서는 여기서 언급된 백계산이 지금의 백계산이 맞는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운산이 백계산 이라면 40리 라고 해야했을 것이다. 같은 책에 증산(甑山)이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는거 봐서는 거리 개념이 없는게 아니다. 또한 동여비고에 나오는 백운산(일명 백계산) 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옥룡사, 송천사, 운암사의 위치를 봐서는 지금 백운산과 무관한 현재 백계산을 백운산 이라고 지도 제작자가 혼동하거나 일시적으로 같이 쓴것으로 보인다. 백운산은 전국적으로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여하튼 업굴산이 현 백계산의 지맥은 아니지만 동쪽에 있는것도 맞다. 이런점들을 조합해 봤을때 현재의 백계산이 옛날 광양의 진산으로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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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억불봉


억불봉을 포기하는 대신 시간이 남아 느긋한 걸음으로 병암폭포를 볼 수 있었다.
억불봉은 조선후기 지도에 업굴산(業窟山) 으로 나오는데, 억불봉 동쪽 직벽 높은곳에 굴이 있다고 하여 업굴산 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1899년 광양군읍지 까지 業窟山 으로 나오는데, 지금의 억불봉(憶佛峰)은 어디서 나온것일까?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지지자료에 처음 등장하는것으로 보아 아마도 일제시대에 업굴이 구전으로 잘못 전달되며 억불로 지명이 바뀐것으로 추정된다.








당겨본 억불봉








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신선대와 뒤쪽의 따리봉, 도솔봉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산








백운산에서 바라본 억불봉과 금오산








백운산 정상 아래의 데크 전망대








시간에 여유가 있어 한가한 정상에서 한참을 조망하며 쉬다가 내려선다.








백운사 갈림길 헬기장에서 뒤돌아본 신선대와 상봉

이곳에서 백운사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상백운암


상백운암이 들어선 자리는 봉황 둥지 형상의 천하의 길지로, 하백운암에 머물며 3년 기도를 마친 도선국사는 상백운암 터를 발견하고는 기쁨에 겨워 가사 장삼을 갖춰 입고 7일 동안 춤을 췄다고 한다. 바위들이 뒤로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데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자리로 느껴진다.














절집 마당을 내려가면서 시원한 상백운암 약수를 한잔 마신다.















중백운암 자리의 돌탑들

하산을 하면서 상백운암, 중백운암, 하백운암을 지나게 되는데, 백운산 중턱쯤에 있는 하백운암은 백운사 승격을 했고, 중백운암 자리는 돌탑이 대신하고 있다. 1948년 여순사건때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세 암자를 경찰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중백운암터를 지나 조금가니 지도에 안나오는 포장 도로가 나온다.

최근에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한듯 하다.








이윽고 백운사(하백운암)에 다다른다.















백운사 (하백운암)








선동마을로 가는 등산로는 백운사를 지나자마자 포장도로가 해우소 앞쪽에서 우측으로 꺽어지기 전에 왼쪽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GPS를 주의깊게 보지 않고 무심코 편한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내려가면 갈림길을 지나친다.


산악회에서 받은 개념도에는 이곳에서 등산로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는데, 갈림길에 이정표도 없고 낡아서 글도 안보이는 리본 하나만 안쪽에 희미하게 걸려있다. 조용히 등로로 들어선다.








등로를 따라가며 능선을 넘기전에 바라본 백운사

그런데 백운사에서 선동으로 간다던 타 산악회팀들이 모두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아무래도 갈림길에서 그냥 지나친듯 보인다. 사실 포장도로가 편하긴 하다.








백운사에서 선동으로 가는 등산로 역시 거의 이용하지 않는듯 보였다.

앞서간 일행들이 적어도 10명은 넘을텐데 낙엽만 두툼하게 깔려있고 발자국 하나 없다

다들 그냥 도로를 따라 내려간듯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근래 사람이 거의 안다닌듯, 길인듯 아닌듯한 모습이다.

가끔씩 쌓인 낙엽으로 무릎 가까이 푹푹 빠진다.








결국 올라갈때처럼 내려오는 길도 혼자 걷는 길이 되었다.

산악회에서 제공한 개념도에는 병암폭포를 경유해서 올라가고

하산길엔 백운사에서 선동으로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도록 해놨는데

안내도를 만든 산대장님이 백운산을 다녀간지 무척 오래되는지

오름길, 내림길 둘다 길이 없어져, 결국 안내도 대로 다녀온 사람은 나 혼자뿐인것 같다.









백운산은 큰 산 이다. 광양시에서는 국립공원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만해 보이고,

지리산 곰돌이가 내려와서 편히 터를 잡을만한 웅장한 산세다.

이런 명산을 멀리서 보기만 하고 눈꽃 절정기에 간다며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다녀간다.

다음번에 오게되면 고대하던 눈꽃도 보고 싶고 억불봉 코스도 다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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