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옛 지도, 삼불봉 아래 오성대가 보인다.
동학동 계곡의 미타암 앞 옥빛 담
문득 몇년간 해답을 못찾고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하러 나섰다.
확실한 정보가 많이 부족하니 숙제를 끝내겠다는 생각보다는
위성지도만 계속 들여다 보는게 더는 도움이 안되니, 실제로 현장에 가보는 수밖에...
녹음이 우거지고, 이파리 무성할때는 무언가를 찾는데 있어 시야에 방해를 받고
험한 돌길, 잡목과 덤불이 우거진 길에 은신하고 있을 벌과 뱀들도 성가시고
막 겨울에 들었으니 눈이라도 내리면 비탈길, 너덜길과 암릉이 위험할테고
눈 내리기 전, 지금 이때를 놓치면 새 봄이 될때까지 또 미련을 두며 기다려야겠기에..
주차료와 입장료를 동학사에 시주하고 오랜만에 동학골로 오른다.
안에서 공부하는 학승들은 모르겠다만, 산꾼의 입장에서야 대웅전 하나 딸랑 공개하는 동학사야 별 볼거리도 없어 지나치기 바쁘고, 특히 주말 낮 이라면 그래도 국립공원 이라 찾는 이들도 많아서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에 감동을 받기는 쉽지 않은것 같지만, 국립공원이 되기전, 예전의 동학사는 깊은 계곡의 조용하고 은밀한 사찰 이었던것 같다. 계룡산이 국립공원이 되고서야 비로소 동학사에 신도라는게 생겼다고 하니, 불과 얼마전과 지금의 이 길은 상전벽해가 아닐까 싶다.
조선 후기 문신인 입재 강재항은 그의 저서 입재유고의 계룡산기에서 동학사를 이렇게 말한다.
사찰과 암자로는 마명암, 귀명암, 상원암, 북사자암, 상초암, 군장암, 신원사, 동학사, 승장 영규(僧將 靈圭) 스님의 갑옷과 투구가 있는 갑사가 있으나, 동학사가 그중 가장 그윽하다.
일주문을 지나 평탄한 길을 한참 걸어 오르면 관음암, 미타암 앞으로 예전 동학사가 적막한 곳 이었을때
스님들이 빨래도 하고, 땀도 식혔을 아름다운 옥빛 담을 만난다.
지금도 살짝 깊어 보이지만 예전엔 물이 많아 사람이 빠져 죽을 정도로 더 깊었다고 한다.
화재도 나고, 중창도 하는 곡절을 거치며 현재에 이른 동학사
스님들 공부하는 도량이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곳은 대웅전 건물이 전부다.
동학사를 가볍게 스쳐 지나며 두분께 감사를 드린다.
그간 오성대나, 오송대에 관한 자료를 찾으면서 자료의 부족에 많은 답답함을 느꼈다.
遊山記를 모아 국문으로 출간한 책들도 있지만, 이 고장에서 계룡산을 연구하신 두분이 계셔서, 다행이 계룡산 오송대에 관한 많지 않은 자료나마 공부할 수가 있었다.
선인들의 계룡산 여행기인, 계룡산유기(鷄龍山遊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학위를 받은 이길구 박사님과 역사와 한학에 해박하시고, 계룡산 및 사찰과 암자들의 옛 기록과 선인들의기록을 연구하여 풀어놓으신 무위당 추만호 박사님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래의 번역된 한시와, 遊記는 온전히 이 두분의 수고 덕분이다.
심우정사 가는 능선길 입구를 지나면
그 다음 계곡이 바로 목표로 한 오송대 계곡 이다.
위 이정표에서 능선길을 따라 심우정사로 가는 길은 평탄 하다.
과연 옛날에도 심우정사로 갈때 지금처럼 편한 능선길을 택했을까..
아마 당시에도 이 길은 있었을 테고, 또한 오송대 계곡길도 주 등로로 있었으리라.
오송대계곡
대부분의 지도엔 오송대 라고 나오지만
옛날 지도에는 거의 오성대계곡 이라고 나오는 곳 이다.
예전엔 계곡 입구에 몇년전까지 오성대 라는 국립공원 이정표 까지 있었다.
과연 오성대 인가 오송대 인가?
산꾼들마다 서로 오성대가 맞다, 오송대가 맞다 라고 주장들을 하는데
이것은 나에게도 오랜시간 궁금증 이었고, 이번 산행의 첫번째 화두 이다.
계룡산을 좀 안다는 산꾼들 사이에서 '오성대'는 암암리에 유명한 곳 이다.
오성대 라는 이름 처럼 오성 하면 떠오를만한 이항복이 등장을 하고
이곳이 그의 수련처 였다고 '하더라' 라는 근거 불명한 설로 그럴듯한 배경도 세웠다.
하지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이항복과 계룡산의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산꾼들에게 오성대 하면 떠오르는 산과 인물은 운장산의 송익필 이다.
그는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고청 서기, 중봉 조헌, 기허당 영규 등과 함께 계룡구선(鷄龍九仙) 으로 생전에도 계룡산에서 자주 모였으며, 죽어서도 칠월칠석 전후 수정봉에 모여 선계의 기생까지 불러다 놓고 질퍽하게 논다는 전설까지 있는데, 그 모임의 좌장이 바로 송익필 이라고 한다.
발음도 비슷한 오송대와 오성대
그리고 오성 이항복과 구봉 송익필의 오성대
여기에서 구전으로 인한 착각으로 혼동이 유발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지 않을수 없다.
하여튼간에 오송대 계곡을 비로소 처음 올라본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계룡산 산행을 하는데 있어 주된 등로 였다고하니 감회가 새롭다.
계곡 따라 양쪽 사면, 인적이 끊겨 두툼하게 깔린 낙엽 따라 희미한 흔적이 있다.
간혹 널찍하고 확실한 길도 보인다.
심우정사로 이어지는 첫번째 계곡 갈림길을 지나자 마자 두번째 갈림길이 나온다.
그 갈림길 우측에 석축과 함께 뚜렷한 암자터가 보인다.
그곳에서 왼쪽 계곡으로 들어가야 산꾼들이 흔히 오성대 라고 부르는 곳이 나온다.
먼저 '오성대' 라고 소문난 곳을 찾아 보기로 한다.
갈림길에서 왼쪽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자 오른쪽으로 멀리 석축이 보인다.
이파리가 없는 계절 이라 멀리서 보이는데, 다른 계절엔 사진처럼 가까이 가야 보일것 같다.
석축이 두개의 단으로 된걸 보니 꽤 큰 암자터 같이 보인다.
가파른 사면을 밟으며 조심스레 왼쪽으로 올라선다. (내려올때엔 오른쪽으로)
꽤 큰 돌들이 석축을 이루고 있으며 지금도 견고해 보인다.
아랫단을 지나며 바라본 상단의 석축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서 만난 옛 기와와 접시 조각
상단 석축 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마주한 소위 '진짜 오성대'
오랫동안 위 사진을 많이 봤었지만 실제로 보는건 처음 이다.
계룡산에 오성대는 없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실제로 현장에 서보니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간다. 즉, 개인적인 견해로는 계룡산에는 '오성대'가 없다는 것이다. 오성대는 오송대에서 비롯된 이름이 구전되며 잘못 전해진데다, 계룡구선으로 활동했던 송익필의 운장산 오성대의 지명이 섞여지고, 거기에 최종적으로 오성 이항복에 까지 와전되어, 마치 가족오락관 고요속의 외침 같은 결과가 생긴거라고 본다.
또한, 그동안 오성대와 오송대의 자료를 찾아보면서 위 사진속 장소는 오성대도, 오송대도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위 사진 한장만 보고 그렇게 추측하는게 무리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결국 오송대가 맞건, 오성대가 맞건, 둘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 라고 간주되며, 선인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이곳은 조선시대에 그 유명한 오송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송대는 조선시대 계룡산 최고의 명소중 하나
오송대는 계룡산에 무수히 많았던 암자나 기도터중의 한곳 같은 그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계룡산을 오른다면 거의 필수적으로 가봐야 하는 유명한 곳 이었고
그곳에서 술 한잔 마시며 시 한수 정도는 읊어줘야 '나 계룡산 다녀왔다네' 라며 폼잡을수 있던 곳
지금 같으면 파리 여행와서 필수적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에펠탑 정도쯤은 되었던것 같다.
이렇게 유명한 곳 이다보니 입소문도 나고, 그 명소에 대한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오성대로 잘못 전달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밝혀진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사대부들이 그곳을 찾아 경치가 어떤지, 이동경로는 어찌 되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겼기에, 그 기록들이 보여주는 단서를 통해 이곳이 그 소문난 오송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더불어 쉽게 짐작할수 있다.
이항복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서울생으로 서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스무살에 성균관에 들어가고, 이후 권율의 사위가 되고, 변란을 거치며 43세에 정승의 반열에 오르는데, 그가 계룡산에서 수학을 했다는 기록 뿐만 아니라 계룡산을 다녀갔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오송대를 방문했다면 적어도 다른 사대부들 처럼 시 라도 한수 남겼을텐데 그런것도 없이 최근 약 15년전 부터 구전을 근거로 오송대가 오성대로 잘못 불리워지며 이항복이 수도했다는 곳이라고 '하더라' 라는 설이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상단 암자터에서 바라본 하단의 암자터
이곳이 오송대가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 하나, 위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계룡산을 찾을때마다 오송대를 찾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이동경로를 남기고 오송대에 관한 시를 남겨두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남긴 기록만으로 오송대의 정확한 위치를 지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분명한건 있다. 오송대는 심우정사 아래쪽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진짜 오성대라고 잘못 부르는 위 사진속 장소는 심우정사 한참 밑에 있다.
조선시대의 계룡산 여행기를 보면 이동경로가 동학사 - 귀명암(심우정사) - 고적대 - 오송대 - 설봉(삼불봉) 이며, 설봉에서의 하산경로 또한 설봉 - 오송대 - 고적대를 거쳐 귀명암에 이른다고 되어있다.
아래 두분의 옛 기록을 보자.
조익의 택반록
이성유와 박자수(문준)가 서로 어울려 시 짓느라 돌아올 줄 몰라
느지막이 귀명암으로 올라가는데 비를 흠뻑 맞는다.
비가 그쳐 폐암(고적대) 하나를 지나 오송대에 이른다.
오송대 편액의 큰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다.
해 저물어 노승 선운의 안내로 오송대에서 식심암으로 내려온다.
식심암에도 누대(玩鶴亭)가 있어 그 곳에 올라 시를 읊는다.
附子修聖兪兩君韻
日晩 與兩君 聯袂上山 將欲遍觀 上下巖洞之勝 遇雨 入憩歸命菴
尨眉老僧 號曰仙雲 爲余先導
暮投息心菴 次子修
1693년 오재정은 7박8일간 계룡산 곳곳을 돌아보며 장문의 유계룡산록을 남겼는데, 준봉(隼峯,매봉,관음봉)에서 마배령(馬背嶺,마등령,자연성릉)을 지나, 설봉(雪峯,삼불봉)에서 출발하여 오송대(五松臺)-고적대(高寂臺)-귀명암(歸命菴,심우정사)-동학사로 내려온다.
다시 (설봉에서) 동으로 내려와 오송대(五松臺)에 이르러 대 위에서 몸을 식힌다. 대 위의 오랜 소나무는 다섯이 아닌 여섯 그루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 소리를 내고 서리 맞은 잎은 푸르름을 띄며 멀거나 가까운 산의 빛깔이 찬란한 색채를 비추고 있으니 참으로 하나의 별세계라 하겠다. 이에 나는 감정이 차 오른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유독 너를 사랑하노라
홀로 서리와 눈에 아랑곳 않고
가지와 잎 바꾸지 않음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태산 아래 태어나지 않아
천자에게 봉작받는 일을 면했으니
더욱이 얼마나 다행스러우랴
깊은 산에 뿌리 박아
구름을 벗하고 학의 둥지가 되어
등반한 시인을 만났으니
영화로움과 욕됨이란 과연 무어련가
식물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선비에게 있어서랴. 이 때문에 한 차례 탄식하고 앉았는데, 조금 지나 승 유신(裕信)이 이끌어 방에 들어간다. 곧 행장을 옮겨와 비로소 점심을 들고 대들보에 이름을 쓴다. 승 법상(法詳)과 더불어 방들을 두루 돌아보고 고적대(高寂臺) 아래를 지나 귀명암(歸命菴)에 이르니, 또한 그윽하고 고요하여 사랑할 만하다.
날이 이미 저물어 곧바로 동학사(洞壑寺)로 내려가니, 동학사는 큰 절이다. 골짜기 어귀의 폭포 옆에다 옛날에 학이 둥지를 틀었으므로 그리 이름했다고 한다. 몸이 지쳐 나아갈 수 없어서 부도전(浮屠殿)에 머물러 자다. (해설 & 출처 : 무위당 추만호 선생님)
옛날의 흔적들
이곳이 오송대가 될 수 없는 이유 둘, 조망
잡목들을 다 치우면 앞쪽으로 황적봉 능선이 보이긴 하지만 산을 등지고 우측으로 호랑이능선 바로 밑인데다, 좌측으로는 삼불봉에서 심우정사를 지나 내려서는 능선 아래 계곡속이라 그렇게 시야가 넓지는 않다.
조선시대 오송대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가 조망 이다.
강재항은 입재유고의 계룡산기에서 오송대의 풍광을 설명하며 조망이 뛰어난 자연성릉과, 유명한 연천봉 보다도 더 빼어나다고 하였으니 오송대를 찾을때 그곳에서 바라본 경치나 조망은 필수적인 조건 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황화봉 서쪽은 금선대다. 금선대 북쪽은 뭇 봉우리가 화살촉같이 서 있고 바위가 모두 희어서 설봉(雪峯)이라 부른다. 설봉 동쪽은 오송대(五松臺)다. (그 소나무들은) 고려시대 나옹(懶翁) 스님이 심었다고 한다. 설봉 서쪽에 사련봉과 연천봉이 있으나 오송대가 그중 가장 빼어나다.
설봉은 지금의 삼불봉 이다.
설봉 서쪽에 사련봉(네개의 연봉들, 자연성릉), 연천봉이 있다고 한것을 보니 방위를 헷갈리지 않은게 확실해 보이는데, 삼불봉 동쪽이 오송대 라고 하니, 이 말이 오랫동안 나를 어지럽히고 있다. 황화, 금선대 라는 지명도 새롭다. 위성지도를 보며 등산화도 자일도 없는 조선시대의 사람이, 그리고 가능하면 견여를 타고 갈 수 있는 길로, 선비들의 이동경로를 추정하는데, 자꾸 설봉 동쪽 오성대 라는 말이 신경 쓰인다.
가휴 조익이 1602년 9월 계룡산 오송대에 오른후 쓴 登五松臺 라는 글을 보자.
몇몇 노승의 안내로 비탈길에 오르자, 자루처럼 일어나 구름 밖으로 솟구친 높은 언덕이 있다.
산 안의 멀고 가까운 빼어난 곳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오송대' 라고 한다.
세 자의 큰 글씨로 된 편액은 한호(韓濩, 韓石峯 한석봉)의 글씨다.
암자는 텅 비어 쓸쓸하고 섬돌 가득 낙엽만이 구른다.
스님들이 들려주는 지난날의 유래가 허무맹랑하여 믿을 수가 없다.
마침내 소나무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져 앉아 술잔을 들어 마시면서 시 몇 수를 이어 짓다.
산 꼭대기 바로 아래 있는 암자 蓮房住在翠微中
놀라워라 높은 누대 반 허공에 기대었다 驚卻高臺倚半空
지난 일이라 아득하여 누구사 알랴마는 往事微茫誰記得
감실서 노승의 하이얀 눈썹과 마주하였소 一龕相對雪眉翁
산중의 해는 일찍 지는 법이라. 서늘하여 더 머물 수가 없다.
각자 옷깃을 떨치고 북쪽 산기슭으로 나아가니
저물녘 산에 어리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안개처럼 깔려 앞 봉우리를 끊어 덮는다.
뒤돌아보니 오송대로부터 겨우 수십 걸음을 왔을 뿐이거늘 길이 아예 분간되지 않는다.
찬바람 겨드랑이 간지럽히며 높은 산 내려와 風駕腋下崔嵬
긴 숲 다 지나 이끼 낀 바위에 앉으니 度盡脩林坐石苔
단풍나무와 흰 구름이 서로를 비추는데 紅樹白雲相掩映
뒤돌아보니 오송대는 이미 사라졌어라. 回頭已失五松臺
오송대에 관한 몇개의 힌트가 나온다.
<설봉 동쪽>
<자루처럼 일어나 구름 밖으로 솟구친 높은 언덕>
<산 안의 멀고 가까운 빼어난 곳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꼭대기 바로 아래 있는 (또는 산허리) 암자>
<높은 누대 반 허공에 기대었다>
<(하산을 시작하는데) 북쪽 산 기슭으로 나아갔다>
이런 풍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설봉 동쪽이고, 암자터니 만큼 근처에 물이 있어야 하며
다섯그루의 소나무와 암자는 없더라도 석축이나 臺의 흔적이 희미하게라고 있어야겠고
사대부들이 절로 시 한수 읊을 마음이 일만한 곳
이곳에 서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게 낙석 이다.
상단 터에서 바위 위쪽을 보면 돌 굴러떨어지기 딱 좋은 곳 이다.
위 사진속 큰 바위들도 그렇게 굴러 떨어진것 같으니 자다가 벼락맞기 십상이지 싶다.
그렇게 진짜 오성대 라고 잘못 알려진 암자터를 내려가 다시 갈림길에 이르러
아까 조금전 암자터로 가면서 지나친 다른 암자터로 올라간다.
이곳도 석축이 뚜렷히 남아 있다.
터도 꽤 넓어 보이고 뒤 언덕이 조금전 '가칭 오성대' 암자에 비해 완만하다.
두번째 암자터를 돌아보고 내려와서 잠시 고민을 한다.
조금 내려가서 첫번째 갈림길에서 심우정사로 가는 능선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따라 갈까...
그러다 그냥 계곡을 따라 직진하여 심우정사 부도탑 왼쪽으로 오르기로 한다. 갈만 하다.
조금 걸어 오르다 뒤돌아본 오송대 계곡
사람 옆 얼굴의 모습을 갖춘 커다란 바위를 만난다.
마지막 갈림길에서 우측의 부도탑쪽 지계곡을 따라 살짝 가파르게 올라서면 심우정사 왼편 이다.
사실 삼불봉에 어느길로 해서 오를지 결정을 못내리고 있었다.
심우정사 동측 능선을 따라 암릉을 거쳐 바로 오를건지, 서쪽 계곡으로 오를건지...
찾아보고 싶은 곳은 서쪽 계곡이 많지만, 우측 능선길로 올라 계곡길로 내려올 수도 있었다.
우측능선으로 올라갈게 아니라면 심우정사에 들릴게 아니라 그냥 왼쪽 계곡으로 직진 했어야 했다.
그곳에 의심스러운 곳이 두어군데 있었는데, 심우정사에 들려가다 보니 지나치게 되었다.
심우정사 목초스님 부도
터가 정말 명당 이다.
오송대가 있다면 이정도 명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석축으로 네모 반듯하게 대를 쌓아 올렸다.
정면으로는 황적봉 능선의 마안봉, 시왕봉, 천황봉 정상과 쌀개봉까지 웅장하게 들어오고
왼쪽으로는 삼불봉으로 올라가는 암릉, 오른쪽으로는 호랑이 능선을 따라
점점 고개를 돌리면 자연성릉의 암릉이 조망된다.
뒤로는 암벽이 가로 막고 있어서 낙석의 위험도 없다.
심우정사로 내려섰다. 오랜만이다.
마지막 다녀간지가 벌써 9년전 인데 그때 우연히 취수원 암자터 서남쪽의 오송대 후보터에 들렀다.
그전엔 어느 한 겨울 계룡산이 밤새 내린 흰눈으로 덮힌날, 상원암 해우소 옆길로 해서 왔었다.
1700년 충청관찰사 송상기는 유계룡산기를 남겼는데 그곳에 귀명암 (심우정사)에 대한 말이 나온다.
벼랑을 따라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뒤엉켜 우거져 있었다. 험한 고개를 하나 넘으니 계룡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뒤쪽에 귀명암이 있는데 비교할 곳이 없을 만큼 높고 가팔랐다. 앞마루에 앉자 기이한 봉우리와 높은 절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으니 계룡산의 참 모습을 단번에 다 살필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숲과 골짜기에 단풍잎이 무성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였다. 암자에는 짤막한 기문이 있었다. 숭정(崇禎) 갑진년(1664, 현종5)에 벽암(碧巖)이 지었다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이어서 오송대에 관한 언급도 하였는데,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송대五松臺는 서봉의 정상 부분에 있으니 예전에 송담 할아버지께서 노닐던 곳을 볼 수 있었다. 옛날에는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송담 할아버지는 밑에서 설명할 송담 송남수님을 말하는 건데
오송대가 서봉의 정상 부근 이라니... 어디를 말하는 걸까
다른분 글에는 오송대는 설봉 동쪽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서봉은 심우정사를 기준으로 서봉인가?
많은 분들이 추측하는 오송대 후보지들이 심우정사 기준 서쪽에 있는것은 맞다.
삼불봉 정상에서 남동쪽 암릉 아래 자리한 곳 이라 겨울 칼바람에 대비해
아늑한 비닐하우스 처럼 해놓았다.
삼불봉 아래에 있는 심우정사는 계룡산 일대에서 기가 센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목초스님때도 번개가 방바닥까지 내려치고 심우정사 뒷편의 거대한 암벽에선 굉음이 울리는등 기가 센곳이라 웬만한 분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법수스님도 웬만한 분은 아닌듯 싶다.
마침 스님이 출타중이신지 암자가 조용하다.
건너편으로 천황봉에서 이어진 황적봉 능선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다시 고민을 한다.
우측 바위 능선을 타고 삼불봉에 바로 오르느냐
아니면 계곡 탐방을 하느냐.. 결국 암릉길은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부도탑으로 돌아간다.
부도탑에서 계곡으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
사진 중앙의 뒤쪽 바위절벽 아래로 내려서 돌아가는 길과
벼랑을 올라서 넘어가는 길이 있다.
벼랑을 내려서서 점찍어논 두군데를 찾아봤어야 했는데
벼랑위 조망터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이날 하루에 다 둘러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가볼 생각이다.
벼랑 바위에 올라서니 사진 중앙의 평평한 목초스님 부도가 자리한 터가 보이고
우측뒤로 황적봉, 마안봉과 시왕봉, 천황봉, 쌀개봉이 보인다.
그 우측 뒤로는 호랑이능선과 자연성릉의 암봉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조망터 뒤쪽은 이렇게 생겨, 암자가 있을만한 자리는 아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황적봉 능선의 황적봉, 치개봉, 마안봉, 천왕봉, 시왕봉
제일 높은 곳이 하얀 암벽 바위가 마치 볏가마 쌓아 놓은것 같다고 해서 황적봉 이요
울퉁불퉁 갈퀴처럼 뻗어내린 암릉이 벼 알곡을 훑던 치개 처럼 보인다고 해서 치개봉 이다.
결국 치개봉이나 황적봉이나 비슷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 같은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장군봉 정상의 안내도에는 치개봉을 설명하면서 '치개'란 말의 유래가 '무엇을 팍 쳤다' 에서
비롯되었다고 써놨는데, 이는 웃음만 나오는 엉터리 라고 본다.
그리고 천왕봉은 (계룡산 정상은 천황봉, 상봉) 산 아래 동학사와 암자에서 올려다보면
정상으로 이어진 암릉이 우뚝선 사천왕 처럼 보인다고해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실제로는
능선을 지나가다 보면 전혀 '천왕'스럽지 않은 곳 이다.
잘록한 안부를 내려가 다시 우측으로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는 시왕봉 이라고 부르는데
불교에서 죽은자를 심판한다는 명부의 열명의 왕을 말하는 것으로, 명부시왕 또는 그냥
시왕 이라고 부른다. 이 또한 산아래 절에서 스님들이 붙혀논 이름 일게다.
옛 지도에는 천왕봉이니 시왕봉이니 하는 이름은 보이지 않고, 마안봉 대신 안봉(鞍峯)이라고
되어 있고 치개봉이나 황적봉 자리엔 시루봉을 의미하는 증봉(甑峯)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치개나 황적 그리고 시루는 농경문화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학봉리에서 보면 힘찬 암릉이
치개나 노적가리 처럼 보이고, 반대쪽 신도안에서 보면 둥그런 시루처럼 보이는것 같다.
예전에 밧줄을 잡고 내려섰던 마안봉의 암릉
심우정사 취수파이프가 연결된 계곡의 암자터
예전엔 이 사진을 두고 '가짜 오성대' 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보기엔 이거나 그거나 둘다 '가짜 오성대' 다.
오성대 라는 이름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오송대가 올바른 지명이니 말이다.
심우정사 취수원 계곡 옆으로 암자터가 몇개 보인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50m 지능선 꼭대기에 암자터가 하나 있는데 10년전 우연히 가본곳이 있다.
조망도 무척 빼어난 곳이고 기왓장등 암자터의 흔적이 있어 오송대나 고적대 후보지중 하나로 보인다.
네이버 지도에 암자터 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곳 이기도 하다.
이날은 취수원 암자터에서 서북쪽으로 묘한 느낌이 들어 그곳으로 올라 보았다.
아래쪽은 취수원 암자터 석축들중 하나가 보이고
중앙의 커다란 바위와 우측의 바위 사이로 올랐다.
정상부는 이렇게 생긴 바위 조망터가 있고 우측으로 아늑한 곳에 암자터가 있다.
뒤로는 널찍한 암자터가 있는데, 잡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조망 또한 훌륭한 곳이다.
정면으로는 천황봉에서 이어지는 황적봉 능선이 펼쳐지고
왼쪽은 한폭의 그림처럼 삼불봉에서 내려온 암봉들이 소나무를 머리에 이고 연봉을 이루며 늘어서있다.
뒤로는 삼불봉과 양쪽의 암봉들이 기운차게 병풍을 두르고 있다.
암자가 있고 스님이 땔감으로 잡목들좀 베어 낸다면 가히 훌륭한 곳이라 할 수가 있을것 같다.
다만, 이곳은 선인들이 설명한 '자루처럼 일어나 구름 밖으로 솟구친 높은 언덕이' 은 아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50m쯤, 건너편 계곡 능선이 전에 다녀온 취수원 서남쪽 오송대 후보지다.
위에서 말한 자루처럼 일어나 솟은 언덕 이라면 오히려 그곳이 더 적합한 곳일 것이다.
이곳엔 다섯그루가 모여 있으면 오송대로 불리울수 있을만큼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다.
오송대의 멋진 소나무들은 산 아래 주민들이 관을 만들기 위해 베어낸것 같다.
즉, 구불구불 멋들어진 소나무가 아니라, 굵고 쭉쭉 뻗어 올라가서 관재목으로 쓸만했다는 소리다.
1686년에 간행된 은진 송씨, 송담 송남수님의 송담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惆悵難逢石室翁 : 석실의 늙은이도 만날수 없으니 섭섭함을 한탄하네.
與一見丈老 焚香石室 達夜談玄 : 일현 장로와 석실에서 향을 사르고 밤 새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仍訪五臺 飫賞而還 : 거듭하여 오(송)대를 찾아 물리도록 완상하고 돌아 왔다.
中年見師貽書于京曰 : 중년에 대사가 서울로 편지를 전해 왔는데 이르길
臺前五株松 乃一山中奇古物也 : 대 앞 5그루 소나무가 산에서 오래된 기이한 것입니다.
而州人欲浮取棺材 不能禁 : 고을 사람이 높은걸 취하여 관재[널 관]로 하려니 금할수 없습니다.
願得五松臺三大字 揭于楣間 : 원함은 [오송대] 세 큰 글자를 얻어 처마 사이에 게양하면
以絶其偸犯之萌 : 훔치려 범하는 촌사람을 끊을수 있을 것입니다.
公其勉之云云 : 공께서 그것을 힘써주시지요 운운.....
余邀石峯 : 내가 석봉(韓濩, 한석봉, 당시 33세)을 불러
繕寫而送 仍而得全 : 잘못을 바로 잡아 다시 고쳐 보내니 인하여 온전할 수 있었다.
今到于此 悠悠歲月 : 이제 이에 이르러 오랜 세월에
奄至四十年之久 : 문득 40년이라 오래 되었구나.
而臺廢無松。室空無人 : 대는 폐하고 소나무는 없어져, 사람도 없이 집은 비었구나....
愴然而作 : 슬픈 마음이 들어 짓는다
四十年前此峽中(사십년전차협중) : 사십년 전 이 골짜기 속에
五松蒼翠聳晴空(오송창취용청공) : 푸르고 푸른 다섯 소나무가 맑은 하늘로 솟아 있었네.
當時健筆今何處(당시건필금하처) : 당시의 굳센 글씨가 지금은 어느 곳에
惆悵難逢石室翁(추창난봉석실옹) : 석실의 늙은이도 만날수 없으니 섭섭함을 한탄하네.
40년전 암자에 현판을 달기 전에는 그냥 오대 라고 불렀던것 같다.
그곳에 다섯그루 소나무가 관재목으로 쓸만큼 크고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멋진 고목들을 관 재료로 베어내려고 하니 높으신 양반님이 '오송대' 라는
글자를 내려서 걸어두면 감히 일반 백성들이 그 소나무들을 함부로 베어내지 못할 것이다.
라는 취지에서 한석봉에서 부탁해 오송대 라는 글을 암자 현판으로 걸어 두었다는 말 이다.
그런데 40년이 흘러 가보니, 밤새 이야기 하던 일현장로 라는 분은 늙어 돌아가셨고
그새 암자도 폐하였고, 한석봉 글씨는 누가 들고 갔으며, 아름드리 다섯 소나무는 모두 베어져
고을 어느 양반 관짝으로 사용되었다는 말 이다.
아마 위 사진속 소나무는 그때 베어진 오송대의 명품송의 후손이 아닐까도 싶다.
목표했던 삼불봉과 동쪽 봉우리 사이 계곡으로 오르려면 내려가야 하건만
취수원 서북쪽 암자터에서 계속 북쪽으로 살피며 올라간다.
위와 같은 멋들어진 소나무는 오송대의 소나무가 될 수가 없겠다.
관짝으로는 쓸모 없을테니 말이다.
너무 많이 올라와서 목표했던 계곡으로 가기 힘들어 그냥 자연성릉으로 바로 치고 올라간다.
그 가파른 너덜길 계곡에도 석축을 쌓아 평평하게 만든게 보인다.
그릇을 보니 옛날 암자터가 아니라 무속인들의 기도터 같다.
능선에 올라 삼불봉 직전 비경 조망터에서 삼불봉과 마지막 후보지를 조망해 본다.
삼불봉은 예전에 설봉 으로 불리웠다.
우뚝선 바위색이 눈처럼 하얗다고 해서 그런 이름 이라고 한다.
인근 금산의 백암산도 비슷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비경 조망터 안쪽에 누가 제단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 앞의 조망터
삼불봉 부터 우측 삼불봉 전망대 봉우리 까지
가히 계룡산 최고의 조망터 중의 하나 이다.
조망터에서 바라본 황적봉 능선
황적봉 뒤로 서대산이 보인다.
신년 일출이 서대산 뒤로 떠오르는데 조용히 일출을 보기에도 좋은곳 같다.
건너편 쌀개봉에서 이어지는 황적봉 능선 뒤로 대둔산이 보이고
왼쪽 뒤로 덕유산 주능선이 보인다.
시왕봉 뒤쪽으로 보이는 덕유산에서 남덕유로 뻗은 덕유능선
역광을 받고 있는 천황봉과 바로 앞의 호랑이능선
삼불봉과 우측의 동봉
사실 이날 그곳에 가지는 않았지만, 내가 오송대로 추정하는 가장 유력한 장소는 바로 저 사진속에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른 곳에서 헤매지 않고 바로 저곳으로 가서 기왓장 하나라도 천천히 찾아볼 생각이다.
삼불봉 동쪽 이라면 저 봉우리 밖에 없다.
삼불봉에 올라 하산길로 동쪽으로 내려서 오송대로 갔다는 글도 보이고
오송대는 삼불봉 동쪽에 있다는 글도 있다.
여하튼 삼불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 귀명암에 이르려면 저 동봉 우측 능선 암릉을 이용하던지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길을 따라 오송대 계곡으로 내려서야 한다.
저 계곡길로 오르며 얼마나 가파른지, 선비들이 다닐만한 곳인지 알아보려 했는데
바로 이렇게 올라오고 말았다. 나중에 저곳에 가서 대충 살펴보니 눈으로 보는만큼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충분히 오르내릴만 해보였다. 암자도 있을만 해보이고...
오송대의 위치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시가 한수 더 있다.
설봉 동쪽 이라는 힌트와 더불어 위 사진과도 잘 어울리는 詩 이다.
오송대(五松臺) - 李命求, 1884년
어지러이 바위 층층 비탈길
흰 구름 깊은 곳에서 스님께 묻소이다
오송대 위 형상 잊고 서 있으면
천신께서 깨달음의 꽃비를 내리시는지
亂石層層一逕斜 白雲深處問禪家
五松臺上忘形立 靜滅諸天欲雨花
삼불봉에 오르며 뒤돌아 보니 공주시가 보인다.
예전 사대부들도 관음봉에서 삼불봉에 올랐다고 하니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관찰사 송상기의 기록을 보면 견여를 이용했다고 나온다.
견여란 둘이서 드는 가마를 말하는데, 두명이 성인남자를 가마에 태우고
이 가파른 산을 오르려면 무척 고생했을것 같다.
더우기 당시 계단도 없었을 이런 가파른곳은 견여에서 내려야 했을테니 상상이 된다.
매봉이 관음봉이 되고 설봉이 삼불봉으로 바뀐것은 불교의 영향일 것이다.
연천봉 낙조 라더니 정면은 역광으로 연천봉 위로 해가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삼불봉에서 바라본 장군봉 능선과 우산봉~갑하산
삼불봉에서 바라본 앞쪽 상신리 마을과 뒤쪽 세종시
삼불봉의 동쪽 부처님 봉우리는 이번엔 패스한다.
바로 삼불봉을 동쪽으로 내려가 목표했던 동봉 안부로 돌아간다.
삼불봉의 숨은 뒤편에는 삼불봉 정상 바로 아래의 기도터가 있다.
암자터로 쓸수 있을 정도로 터가 넓은 편 이다.
다 좋은데, 조망이 좋지 않으니 오송대는 될 수가 없고
이런 바위터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있었을리가 없다.
암자터에 있는 거북이 한마리
아까 삼불봉 전 조망터에서 바라본 삼불봉과 동봉 사이의 가파르게 보였던 비탈길 이다.
생각보다 완만하고 선비들이 어렵지 않게 다닐만 해보였다.
더우기 삼불봉 동쪽의 오송대라면, 암자터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시간상 탐사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 동봉으로 바로 올라선다.
삼불봉 동쪽(정확히는 동남쪽)의 봉우리는 가서보니 동,서 쌍봉이다.
쌍봉으로 나뉘다 보니 터가 크지 못하다.
먼저 우측 봉우리는 터가 이만 하다.
물론 잡목이 없다면 황적봉 능선, 자연성릉, 장군봉 능선까지 계룡산 전역이 조망되는 곳 이다.
서쪽 봉우리로 가면서 바라본 삼불봉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장군봉 능선과 남매탑
남매탑의 위치가 언제적 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탑 왼쪽으로 너른 공터가 있는것이 그곳에도 암자 건물이 있었던것 같다.
1700년 관찰사 송상기의 유계룡산기에 정각암과 상원암의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도 두개의 탑이 있다고 했으며, 옛날 건물 앞에 두개의 탑이 있다고 했다.
정각암은 상원암 아래쪽에 있던 암자인데, 남매탑으로 오르는 계곡을 그래서 정각골 이라 부른다.
정각암은 절 뒤에 있는데 매우 높고 험했다. 암자에는 두어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정실이 깨끗했다. 상원암은 또 그 위에 있었는데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암자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바위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깎아지른 듯 솟아 계룡산의 여러 산등성이들이 모두 발 아래로 보였다. (중략) 암자는 옛날 건물과 새 건물이 함께 있고, 옛날 건물 앞에는 두 개의 탑이 서 있었다. 탑 앞에 누대가 있는데, 그 주위는 비로 쓴 듯이 깨끗했다.
여기서 다시 고민을 한다.
능선을 따라 심우정사로 바로 내려가서 하산을 할것인가
아니면 남매탑으로 내려가서 정각골로 하산을 할것인가...
해가 이미 기울어 가고 있어 심우정사로 바로 내려서는 초행길 대신에
남매탑 하산길을 택한다. 그리곤 또 후회를 한다.
상원암
다시 해우소 뒤로해서 심우정사로 갈까를 고민했다.
왜냐하면 남매탑 하산길이 계룡산 하산길 중에 나에겐 제일 불편한 길 이기 때문이다.
삼불봉 아래 갈림길 부터 남매탑 지나 거의 동학사 까지...
삐툴빼툴하고 맨질맨질한 돌이 경사면에 마치 매끄러운 타일처럼 깔려 있는데 이게 젬병 이다.
돌이 죄다 미끄러워 평소에도 거의 준 빙판길 이라 발끝에 정말 신경을 쓰면서 걸어야 한다.
비가 오거나 눈이라도 살짝 내리면 무척 피곤한 길 이다.
오를때는 크게 상관 없는데, 내려갈때는 피하고 싶은 길 이다.
그런 길을 또 사람은 망각의 동물 이라고 혹시나 하며 선택을 하고 후회를 반복한다.
천장골로 돌아갔어야 했어, 또는 동봉에서 바로 심우정사로 내려갔어야 했어라며 ..
헤드랜턴을 키고 컴컴한 길을 걸어 조심스레 하산을 완료한다.
결국 이날 몇군데를 찾아보긴 했지만 딱 여기다 라고 확신을 가질만한 곳은 찾지 못했다.
이번에 못가보고 다음으로 미뤄둔 세곳은, 다음 언젠가 또 탐사를 위한 즐거운 숙제로 남겨두었다.
오송대의 정확한 위치를 연구하고 찾는 분들이 있는 만큼 조만간 밝혀지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계룡산 오성대는 잘못된 장소라고 말하고 싶다.
계룡산에는 오성대라는 장소가 없을뿐 아니라, 그곳은 오송대 역시 아니니, 현재의 그 잘못된 오성대에 의미를 두고 일부러 찾으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이제껏 암암리에 소문난 그 오성대와 이항복에 대한 역사적 자료나 문헌을 제시하며,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오송대 외에 별도로 아래쪽에 그 오성대가 있었노라고 주장해주기를 기쁜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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