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경로 : 경천대 - 운영담 - 암서재 - 첨성대 - 능운대 - 채운암 - 읍궁암

 

 

 

 

 

 

 

 

하계 야유회 특별산행 이다보니 장소섭외의 문제로 두번이나 장소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번째 장소로 정해진 화양계곡으로 더 유명한 괴산의 도명산. 여름철엔 화양계곡 덕분에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곳 이다. 그런데 때마침 찾아온 태풍 다나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그래도 우산을 쓰고 화양구곡을 돌아보려 했던 기대마저 허물어뜨린 흙탕물

게다가 식당 예약 시간 변경으로 시간도 부족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도명산 산행을 할때도 날씨가 좋지 않았었다.

대부분 도명산 산행을 하시는 분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일행들과 원점회귀  단체산행을 하다보니 9곡 파곶(파천)과 주차장 이전에 있던 1곡 경천벽을 볼 수가 없었다. 산행을 하지 않고 화양구곡만을 돌아본다면 넉넉한 시간이라 이날은 이정도에서 만족을 해야 할듯 한데, 흙탕물엔 맥이 빠진다.

 

 

 

 

 

 

 

 

화양구곡 제1곡 경천벽(擎天壁)

 

경천벽은 화양계곡 주차장 가기 전에 있어서 중간에 잠시 차를 세우고 휴대폰으로 담아 두었다.

기암이 가파르게 솟은 바위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모습이라 경천벽이라 한다.

 

 

 

 

 

 

 

 

운영담

 

화양구곡중 제2곡으로,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雲影潭) 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옥수 청류가 아닌 탁류라 구름의 그림자도 없고, 감흥은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화양구곡 하면 뭐니뭐니해도 노론의 대표 우암 송시열을 빠뜨릴수 없다.

그는 1666년 청주 화양동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곳에 들어와 후학을 가르쳤다.

지금은 괴산 지역 이지만, 조선시대 이곳은 청주목 관할 이었다.

조선후기를 이끌어간 노론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화양서원과, 지금은 사대주의

상징적인 장소 이지만 당시에는 숭명의 성지였던 만동묘는 꼭 들려봐야할 곳 이다. 

 

 

 

 

 

 

 

 

만동묘에 들어서는 양추문

가을햇살 이라는 말 같은데, 아마도 이곳에 모셔진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말하는것 같다.

 

 

 

 

 

 

 

 

양추문 계단부터 이리 좁고 가파르다.

허리를 바짝 낮추고 조심스럽게 올라야 한다.

 

 

 

 

 

 

 

 

성공문(星拱門)

 

정문인 양추문을 넘어서면 만동묘로 들어서는 중문인 성공문이 높다란 단 위에 마련되어 있다.

 

 

 

 

 

 

 

 

성공문에 오르는 계단 뒤로 만동묘정비가 보인다.

 

 

 

 

 

 

 

 

만동묘의 모든 계단은 이처럼 가파르고 좁다.

사실 정면으로 걸어 올라가기가 어려울 정도라 옆으로 게걸음을 해야 한다.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계단이라 몸을 숙이고 조심을 하라는 의미 라고 하며

감히 정면으로 똑바로 황제를 대할수 없으니, 옆으로 몸을 돌려 걸으라는 의미 라고도 한다.

 

 

 

 

 

 

 

 

성공문에서 내려다본 만동묘 전경

 

 

 

 

 

 

 

 

만동묘

 

만동묘는 송시열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중화를 숭모하는 모화주의(慕華主義)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송시열의 유지를 받든 수제자 권상하가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난 1갑자후인 1704년 (숙종30년)에 지었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도운 인물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표현된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준 은인이라는 뜻으로, 임란 이후 왕부터 신하까지 조선을 이끌던 선비들의 명분과 논리 였다. 결국 시대의 흐름과 현실을 외면한채 사대주의적인 사고와 명분만 내세우다 왜란보다 더 참혹했던 호란을 유발시킨 원흉이 되었다.

 

숭정제 의종은 명의 마지막 황제로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처첩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금성의 작은 언덕인 징산(景山)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만동묘 내부

 

송시열은 명나라 신종의 휘호인 비례부동(非禮不同)을 입수해 자신이 죽은 뒤 만동묘를 짓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만동묘는 '모든 강물은 꺾어져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의미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에서 나왔다.  이는 중국에서 흐르는 강물을 빗댄 말로, 중국에 대한 숭명주의와 사대주의를 바로 나타내는 곳 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불굴의 충정 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만동묘는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영조 이래 노론정권이 장기 집권하고 송시열의 화이론이 그 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세가 날로 커져서 폐단 또한 매우 컸다. 만동묘는 그 당시 전국의 서원이나 사당 중에서 가장 위세를 부려 폐해의 상징처럼 되었다가 흥선 대원군때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대보단에서 지낸다고 하고 만동묘를 철폐 하였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숭정제 라고 부르는데, 崇禎은 의종이 명나라가 망할때까지 사용했던 연호 이다. 하여 실제로 숭정의 연호는 숭정17년에서 끝이 나고, 이후 청나라가 들어섰는데도 청태종의 연호인 숭덕을 사용치 않고, 조선의 재조지은의 의리에 입각한 사대부들은 죽은 망령을 부여잡고 숭정을 고집한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260년간 조선을 지배 했다.

 

하여 숭정17년으로 끝나버린 연호가, 조선에선 '숭정260년' (1887년)과 같이 명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조선에서는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이 260년간 황위를 누리며 조선왕 위에 군림하게 되는, 시대착오적 숭명에 물들어 있었다. 

 

명나라가 망해서 없어진후 수백년동안 중국 본토에서조차 지내지 않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이땅에서 지내고 그 연호를 사용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던 것 이었다. 이는 변화하는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명분록적 사고를 바탕으로 기존의 규범과 가치를 지키려고 했던 보수성이 강한 주리론에 바탕을 둔 조선 성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동묘정비

 

일제는 1917년 만동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는데, 1937년에 유림들이 몰래 제향을 드린 것을 빌미삼아 일제가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훼손하였고, 1942년에는 다시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파묻었는데, 1983년 홍수로 묘정비가 발견되어 괴산군에서 옛 자리에 다시 세웠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서 알아볼수 없는 만동묘정비

 

 

 

 

 

 

 

 

다시 만동묘를 나와서 바라본 존사청과 풍천재 (정면)

 

 

 

 

 

 

 

 

증반청 마루에는 두분이 앉아 계신다.

 

 

 

 

 

 

 

 

화양서원 사당

 

 

 

 

 

 

 

 

화양서원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화양서원은 창건직후 바로 사액이 되었으며, 숙종때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만동묘를 원내에 두고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서원이자 노론의 본거지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조선 사림 폐단의 온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학문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세워진 서원은 사학으로 초기에는 순기능이 많았다. 그러나 서원의 수가 늘어나, 명종대에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개소에 이르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을 지지 않았으니,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곳 화양서원의 경우, 영조 때 노론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또 우암 송시열이 문묘(文廟)에 배향되자, 위세가 날로 더하여 국가로부터의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의 기부에 의하여 서원 소속의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三南) 일대에 산재하였다고 한다.


서원의 권세가 강해지면서, 제수에 쓴다는 명목으로 각 지역에 당시 공포의 상징으로 통하던,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보내어 강제로 관리와 백성의 돈을 뺏는 등 폐해가 심했다. 이후 대원군 집권시기에 서원철폐를 하면서 제1 타겟이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화양서원 이다.

 

최근 유네스코에 소수서원, 도산서원등 우리나라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과연 서원이 우리가 내세울만한 자랑스러운 유산이냐 하는 점은 논란과 의심의 여지가 많겠지만, 주자학을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했던 역사의 중요한 현장 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 선정과는 별개로, 서원은 시대착오적인 명분과 이념에 빠져서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던 주자학의 온상지 이자, 백성을 위한 합리적 정책이 아닌, 자신들의 명분에만 집착해 전쟁을 초래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이끌었던 당쟁의 근원이 아니던가. 특히 조선후기 4대 서원 이었던 화양서원이 이번 유네스코 명단에 빠져있는데, 유형, 무형의 문화재적 가치를 떠나서 폐해를 생각하면 이는 너무도 당연 하다고 생각한다.

 

 

 

 

 

 

 

 

화양서원 묘정비

 

 

 

 

 

 

 

 

송시열은 화양(華陽) 이라는 말에 걸맞게 화양동을 명나라 촌 으로 만들려 했던것 같다.

화양 이라는 말은, 중국문화의 햇빛 이라고들 하는데 어찌보면 명나라의 은총(햇빛) 이라는 말과도 상응한다고 본다. 송시열이 명나라를 얼마나 지극하게 떠받들었는지는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사상에 어울리는 이름이 바로 화양 이다.

 

 

 

 

 

 

 

 

암서재(巖棲齋)

 

송시열이 1666년에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세운 것으로, 화양구곡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모방했듯이 암서재도 주자가 기거했던 운곡정사를 염두에 둔 것이어서 주자를 대하는 송시열의 모습을 보여준다.

 

 

 

 

 

 

 

 

금사담과 암서재

 

화양구곡중 제4곡인 금사담은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가 금싸라기 같아서 금사담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금색? 격류가 흐르고 있다. 옛날 우암은 작은 배를 이용하여 저곳을 다녔다고 한다.

 

 

 

 

 

 

 

 

이날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송시열이 저곳에 앉아...글을 읽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제자들과 모여 동동주에 파전을 먹고 계셨을지도..

 

 

 

 

 

 

 

 

암서재를 지나 첨성대를 향해간다.

지난번엔 도명산을 오르며 그냥 지나쳤던 곳 이다.

첨성대에 가기전에 먼저 물가를 따라 음각된 글씨를 찾아 보았다.

 

 

 

 

 

 

 

 

화양3교를 건너기전 도명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첨성대를 가려면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야 하는데

그곳에서 물가로 내려가서 계곡을 따라 조금만 가면 위와 같은 바위가 있다.

그곳에 송시열과 명나라 의종의 글씨가 있다.

 

 

 

 

 

 

 

 

대명천지

정일월

비례부동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송시열의 글씨 이다.

왼쪽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는것은 다음과 같다.

 

此八字陪臣宋時烈嘗書與人者也  正宣於此山中謹模以勒

차팔자배신송시열상서여인자야  정선어차산중근모이륵

<이 8자는 배신 송시열이 일찌기 여러 사람들과 익혔던 글자다.
바르게 알리기 위해 이 산중에서 삼가 모사하여 새기다.>
※ 陪臣은 제후의 신하가 천자(天子)를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 이다

 

대명천지, 조선의 땅은 위대한 명나라 것이고

숭정일월, 조선의 해와 달 역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것이로다.

송시열의 사대적인 숭명(崇明), 존숭(尊崇) 사상이 고스란히 새겨진 글씨다.

 

송시열은 조선후기 노론이 집권을 하는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등장 했을만큼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노론의 영수인 정치가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에 이어 송자(宋子) 라고 까지 불려, 그의 시와 산문집이 '송자대전'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런 그의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숭명주의와 사대주의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노론이 집권하던 조선후기 정치와 사상을 휘어잡으며 같은 노론의 후학들로부터는 칭송의 기록만을 남겼지만, 지금은 평가하는 사람들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가고 있다.

 

주희와 생각이 다르면 절친도 원수가 된다.

 

한동안 이 나라에서 권력자들의 잘못된 정치적 행동이나, 부정부패를 비판하게 되면 '좌빨' 이나 '빨갱이'로 몰아부치곤 하였는데, 송시열이 영향을 끼치던 조선후기도 마찬가지 였다. 공맹의 가르침을 송나라 주희와 다르게 해석을 하거나, 주희의 학문(주자학)을 조금 이라도 비판하게 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처단을 당했는데, 대표적인게 윤휴 이다. 윤휴가 주자의 중용장구가 틀렸다고 다시 쓰게 되자, 윤휴와 절친 이었던 송시열은 자신이 맹신하는 주자를 흠집낸 윤휴를 찾아가 <주자의 서술에서 일자 일획을 더하고 빼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라며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관계가 틀어지면서 결국 죽게 만들었다.

 

송시열은 주자를 절대적 가치로 신봉했던 반면 윤휴는 천하의 이치를 왜 주자만 알아야 하냐고 주장했다.

윤휴가 송시열에게 했던 말은 지금 생각해도 충분히 당연한 주장이다.

'공은 어째서 주자만 공자의 뜻을 알고 나는 공자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즘도 학계는 그만큼 보수적이다. 평생의 삶과 업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례부동(非禮不動)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로,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 이다.

비례부동의 오른쪽에 숭정황제어필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왼쪽에 작은 글씨로 비례부동을 새긴 과정과 시기가 적혀있다.

 

陪臣閔鼎重奉至 與宋時烈等謹拜手 稽首摸勒時四十七年甲寅四月日也

배신민정중봉지 여송시열등근배수 괴수모륵시사십칠년갑인사월일야.

<배신 민정중이 받들고 와서 송시열 등과 함께 삼가 공손히 절을 하고

본떠 새기니 때는 47년 갑인 4월 일이다.>

 

47년은 숭정47년을 말하는 것으로 1627년 숭정1년을 기준하면 1674년, 갑인년 이다.

비례부동은 송시열이 1674년 4월에 직접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에서 바라본 비 내리는 화양계곡의 거친 탁류

 

 

 

 

 

 

 

 

다시 등산로로 되돌아와 도명산을 향해 조금 오르면 첨성대에 이른다.

 

 

 

 

 

 

 

 

첨성대(瞻星臺)

 

화양구곡중 제5곡으로 등로에서 살짝 비켜 있어 고개만 숙이고 걷다보면 그냥 지나치는 곳 이다.

이곳에 그 유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첨성대에 새겨진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

 

조선 선조의 친필로, 만동묘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절, 강물이 만 번을 꺾여 돌아도

필동,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

 

만절필동 우측에 작은 글씨로

昭敬大王 御筆(선조 어필), 華陽書院은 元孝大王 御筆(숙종 어필)

즉, 만절필동은 선조의 글씨요, 화양서원은 숙종의 친필 이라는 말이다.

 

만절필동은, 황하(黃河)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마침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명나라 황제를 향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인데

요즘도 정치가들이 가끔씩 사필귀정이라는 의미로 써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만절필동, 재조지은, 반청숭명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대주의를 의미하는 사자성어 이기 때문이다.

 

옛날엔 숭명주의, 요즘은 숭미주의, 숭일주의

 

요즘도 당시의 사대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것 같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재조지은이고, 숭명이 아니라 숭미(崇美)를 하는지

왜 국가에 이익이 안되는 시위만 골라 하면서 부끄럽게 미국 국기를 흔들어 대는지 난감한 일 이다.

덩달아 그분들 때문에 국민들에게 있어 태극기 마저 인식이 나빠지고 있다는 점도 안타까운 일 이다.

더우기 요즘같은 시국에 친일을 넘어 숭일을 외치는 사람들 까지 있으니 이 나라가 민주국가는 맞는것 같다.

 

 

 

 

 

 

 

 

첨성대라 하였으니 꼭대기에 오를수 있다는 의미라서 우산을 든채 뒤로 돌아 올라선다.

마지막엔 사진 우측과 중앙에 보이는 바위 틈을 잡고 올라서면 된다.

 

 

 

 

 

 

 

 

올라서면 화양계곡 쪽으로 이렇게 넓은 바위가 있고

 

 

 

 

 

 

 

 

뒤쪽에도 조망터가 있다.

 

 

 

 

 

 

 

 

꼭대기에는 이렇게 생긴 커다란 바위가 놓여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볼때는 저 바위 위까지 올라갈수 있어 보였는데, 아니다.

 

 

 

 

 

 

 

 

첨성대에서 바라본 학소대 방향

 

 

 

 

 

 

 

 

첨성대에서 바라본 화양3교와 채운암

 

 

 

 

 

 

 

 

화양3교를 당겨본다.

 

 

 

 

 

 

 

 

채운암

 

누군가 도명산(道明山) 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언급하며 산 아래 채운암이라는 암자에서 도통한 이가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어떤 지도에도 채운암은 찾을수 없었다.

 

사실 도명산 이라는 이름도 나오질 않고, 이 일대에서 나오는 지명은 화양동, 공림사, 도명사, 파곶산 이다.

파곶(葩串)은 화양구곡의 제9곡 이기도 하고, 화양구곡의 백미이자 제일 아름다운 곳 이라고 하는데, 보통 등산로 밖에 멀리 있어서 일부러 구곡 트레킹을 하지 않으면 쉽게 볼 수 없는 곳 이다. 오늘 그곳에 갈 수 있을것으로 생각했는데, 흙탕물이 사람들 마음을 앗아간것 같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문서에 파곶산은 다른 이름으로 낙양산 이라고 불리는데 또 다른 이름은 낙영산으로 지금 지도에는 낙영산 으로 되어 있다. 공림사 사적비에 있는 낙영산과 도명산의 이름 유래를 알수 있는 미륵봉 황금밀탑의 전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림사 사적비 (空林寺事蹟碑 ) 의 내용중

 

...사찰의 북쪽에 미륵봉(彌勒峯)이 있는데 부용(芙蓉)이 만장(萬丈)이나 되게 치솟아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 꼭대기에 큰 돌이 있고 돌 가운데에 황금빛의 밀탑(密塔)이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중국의 도읍 낙양성(洛陽城) 중에 드리워졌다. 무덕(武德) 연간에 당(唐) 나라 고조(高祖)가 조짐을 보고 점을 보는 사람에게 점을 치게 하고, 곧 사람을 보내 남은 자취를 추적하게 하였다. 그 사람이 징봉(澄峰)에 이르러 보니, 단지 돌만 보이고 탑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돌의 윗부분을 뚫어보니 과연 탑이 있었으므로, 이에 그 탑을 꺼내었다.

 

드디어 몸이 육장(六丈)이 되는 미륵불상(彌勒佛像) 3좌(座)를 돌 표면에 안정시키고는 그 산의 이름을 낙영(落影) 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세 번째가 된다. 미륵봉은 깊은 계곡과 험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고 빼어난 물과 돌이 있어 아름다운 경치가 위아래로 10리(里)에 펼쳐있어 모두다 선경(仙境)이다. 세상에서는 파곶(葩串) 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네 번째가 된다. (후략)

 

 

도명산 정상에서 학소대로 내려서는 길에 있는 커다란 마애삼존불 역시 낙양사 옛터 라고 한다. 이 마애삼존불이 있던 미륵봉이 바로 도명산 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의 도명산이 바로 낙영산이요, 낙양산이며, 파곶산으로 보인다.

 

낙양산, 낙영산, 도명산, 파곶산은 같은 산 (異落影山今稱落陽山一云葩串山)

 

만동묘와 화양서원의 위치를 설명할때 늘 '낙양산을 배후로 북향을 하고 있다'는것을 보면 낙양산은 지금의 도명산을 가르킨다. 아마도 현재의 조봉산, 낙영산, 무영봉, 가령산, 도명산이 파곶산이나 낙양산, 낙영산의 이름 아래 하나의 산으로 취급받고 다른 이름의 봉우리로 되어 있었을것 같다.

 

공림사와 화양계곡 사이에는 도명골 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도명사의 위치가 그곳 안쪽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 도명산 이라는 지명은 채운암이 아닌 그 도명사에서 비롯된것으로 보인다.

 

 

 

 

 

 

 

 

첨성대에서 바라본 채운암과 우측 하단쪽의 능운대

채운암은 능운대 까지 가서 산길로 빙 돌아가야 한다.

 

 

 

 

 

 

 

 

바위 뒤쪽 조망터에서 바라본 암서재

 

 

 

 

 

 

 

 

당겨본 암서재

 

화양구곡을 여름에만 왔었다.

가볍게 땀흘리고 계곡물에 시원하게 씻기 좋아서 여름산행지로 많이들 꼽는데

이렇게 연달아 날씨로 인해 제대로 감상을 못하다 보니 아무래도 가을에 와야 할것 같다.

 

화양구곡에 단풍이 붉게 물들때, 찾는 인파도 적으니 물색도 곱게 한몫 할테고

가을 어느 맑은날 도명산행을 하며 화양구곡을 처음부터 제대로 돌아보고 싶다.

 

 

 

 

 

 

 

 

 

 

 

 

 

 

 

첨성대를 내려와 돌아내려가면서 만절필동을 다시한번 살펴보니

작은 글씨로 새겨진 글이 보인다.

 

崇禎 再周壬申, 臣 李秀得, 李命益, 宋必重, 李奎燮, 再拜摸勒
숭정 즉위 후 두 번째 임신년, 신하 이수득(당시 청주목사), 이명익, 송필중, 이규섭이 두 번 절하고 새기다

 

 

 

 

 

 

 

 

 

 

 

 

 

 

 

채운암을 가기위해 화양3교를 건너며 방금 다녀온 첨성대를 바라본다.

 

 

 

 

 

 

 

 

화양구곡 제5곡 첨성대 (瞻星臺)

 

 

 

 

 

 

 

 

제6곡 능운대 (凌雲臺)

 

구름을 찌를듯한 바위 라고 한다.

비도 오고 시간도 다 되어서 각자를 찾아볼 겨를도 없이 바로 채운암으로 향한다.

 

 

 

 

 

 

 

 

채운암 가는 길

 

 

 

 

 

 

 

 

채운암 대웅전

 

앞쪽 안내판에 보니, 효종때 혜일선사나 숙종때 송시열이 암자를 짓고 욱장사 라고 불렀다고 적혔다.

채운 이라는 말은 자개구름, 무지개를 닮은 상서로운 오색구름을 의미한다.

 

 

 

 

 

 

 

 

 

 

 

 

 

 

 

 

 

 

 

 

 

 

채운암에서 바라본 첨성대

첨성대 뒤쪽 작은 봉우리를 오르면서 도명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비가오는 관계로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채운암을 보고 서둘러 식당으로 향한다.

여름 야유회 특별산행으로 준비한 백숙 한그릇 하고 날씨로 인해 행사가 일찍 마무리 되는 바람에 오후에 가벼운 트레킹을 하기로 한다. 마음 같아서는 화양구곡에도 왔으니 파천까지 다녀오면 좋을것 같아 이야기를 했는데, 흙탕물을 생각해보니 그럴 마음이 없어진다.

 

 

 

 

 

 

 

 

화양구곡 제3곡 읍궁암(泣弓巖)

 

주차장으로 가는길, 읍궁암에 들려 간다.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불명 이지만 다들 독살로 추정한다.

그의 사후 독으로 몸이 퉁퉁 불어서 관이 맞지 않자 새로 관을 제작할 시간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급하게 왕의 시신을 감춰야 했는지 송시열과 대신들이 널판지로 관을 넓혀서 만든

누더기 관에 효종을 넣었다고 한다.

 

송시열이 효종 생각에 매일 새벽같이 통곡을 했다고?

 

읍궁암은 송시열이 죽은 효종을 생각하면서 매일 새벽같이 통곡 했다는 곳 이다.

 

효종의 북벌에 사림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효종은 사림의 영수 송시열의 도움과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두 송씨에게 병권과 인사권을 넘겨 주면서까지 힘을 실어주며 북벌에 집착했건만 송시열의 생각은 효종과 달랐다. 아마도 두번의 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에게 호되게 당한 트라우마가 있었던것도 같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사사건건 효종의 발목을 잡았던 정적 이었는데, 어느순간 효종의 충신으로 둔갑이 되버렸다. 바로 조선이 망할때까지 집권했던 노론의 힘 이었다. 오히려 효종의 독살설에서 송시열은 의심에서 벗어날수 없는 인물 이다. 그런 송시열이 매일 새벽에 이곳에서 효종을 위해 통곡을 했다니..

 

제자들이 한 두번은 봤을수도 있으니, 그럼 그랬다고 치고, 왜 그랬을까..

 

두번의 호란은 임란과 또 다른, 상상할수도 없는 무능하고 멍청하기 그지 없던 전쟁 이었다.

임란이후 조선은 모든 면에서 피폐해졌으며 싸울 군비도, 마음도 전혀 준비가 되있지 않은 상태였다.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명나라를 위한 재조지은의 의리와 사대주의적 충성심으로, 대책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광해군이 실리와 명분을 찾으려 했던 반면에, 당시 집권 사대부들은 오로지 명분 하나만을 좇아서 입으로만, 글로만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결과는 무대책

 

제대로된 전투 한번 없이 왜란보다 더 참혹한 피해를 당하고 수십만의 조선 여인들이 끌려 갔으며, 입으로만 충신, 충신 외치는 것들이 정작 군주를 맨땅에 엎드려 오랑캐라며 욕하던 청 황제에게 절을 하는 수모를 안기고 말았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유발한 집권 세력들을 모두 처단을 해야 마땅하겠지만, 너무도 작태가 한심하고, 무능해 보인데다가 왕까지 봉변을 당하는 호된 경험을 통해 바짝 겁을 먹어, 그대로 두는게 청나라의 국익에 유리할것 같아 보여서 놔뒀다고 한다.

 

효종은 몸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노론은 입으로만 북벌을 외치고

 

효종이 군사를 모으고 실제로 북벌을 준비했다면, 송시열과 노론 일당은 입으로만 북벌을 주장했던 것이다. 청나라에 호되게 당한 아픈 상처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감히 싸우겠다고 덤비지는 못하고, 그런다고 자칭 명분과 의리에 죽고 산다고 하던 사대부의 체면에 입으로라도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 선대왕의 원수를 갚는 북벌을 주장해야 했던 것이다.

읍궁암의 아이러니는 그렇게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정작 북벌을 하려는 효종의 발목을 잡았지만, 자신이 목숨처럼 주장하는 대명천하, 숭정일월,  만절필동 이라는 체면은 세워야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북벌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했던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호란을 초래한 책임이 있는 가운데,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권력을 보다 확고히 다지는 일 이었을 것이다. 읍궁은 그저 겉으로 보여지는 명분 뿐 이었다.

 

 

 

 

 

 

 

 

읍궁암 비석

여러개가 있는데 적힌 내용들이 비슷해 보인다.

 

此日知何日(차일지하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孤衷上帝臨(고충상제림)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侵晨痛哭後(침신통곡후) 새벽이 되도록 통곡만 하다가
抱膝更長吟(포슬경장음) 또 다시 엎드려 무릎 끌어안고 탄식하노라

 

 

 

 

 

 

 

 

 

하마소(下馬所)

 

읍궁암을 보고 하마소를 확인한후 하마비를 찾는데 아무리 봐도 없다.

누군가 인터넷에 하마비 라고 한자로 적혀진 비석을 올렸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이곳의 하마비가 아닌 다른곳의 하마비를 올린듯 보인다. 화양구곡은 하마비가 아닌 하마소 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下馬所 이름 그대로 말을 내리는 곳 이다.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가야 하는 곳 이다.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던 만동묘와, 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은 그 힘과 권세가 과도하게 커져서, 묵패를 받았는데 돈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 당시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 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임금위에 만동묘지기

 

이곳 하마소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려다 만동묘지기에게 발길로 걷어차이며 호되게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일로 인해 훗날 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는 계기가 되며, 화양서원은 첫번째 대상이 되었고, 만동묘의 제사 또한 창덕궁 대보단으로 옮기며 철폐 시켰다가 후에 그가 실각을 하며 재개 되었다.

 

 

 

 

 

 

 

 

 

 

 

 

 

 

하마소는 이렇게 양쪽에 나무를 끼울수 있는 구멍을 뚫은 비석을 세워 차단기 역할을 했던것 같다.

마치 제주도의 정주석과 모양이 흡사하다.

 

이렇게 여름 특별산행은 태풍으로 인해 화양계곡을 잠시 둘러보는 것으로 마치고 식사를 마치고 상당산성으로 향한다.

화양구곡은 맑은 가을날 다시 돌아봐야 하겠다.

 

 

 

지금까지 송시열과 숭명사상, 사대주의를 이야기 했는데, 그런데 사실...

송시열과 당시의 화두가 되었던 재조지은을 이해할수 있는게 있다.

그건  임란때 조선을 전폭적으로 도와주었던 명나라 신종, 만력제 때문 이다.

 

고려천자, 조선황제, 만력제

 

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신하를 보내 명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 명 황제, 만력제 라는 분이 명나라를 망친 4대 암군이자 대단한 기인으로 유명한 황제로

왜란이 터져서 구원요청을 받기 전까지 무려 30년간 황제 업무를 일체 보지 않고 태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명나라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중국 사서에는 명나라가 실제로 망한것은 바로 만력제 때라고 할 정도 였다.

 

그런데 그렇게 놀던 사람이, 조선이 위급에 처했다는 소리를 듣자

모든 신하를 대전에 모이게 하더니 아주 신속하게 일을 처리 했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도 만력제가 30년간 태업을 하며 국운이 기울고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 이었는데도

바로 군사 5천을 보내고, 선조에게 도망 다니는데 비상금 쓰라고 은화 2만냥을 보내준다.

이후 20만의 대병력을 보내고 은화 500만냥을 보내 왜군을 막도록 했다고 한다.

 

게다가 군량미를 모아 9만톤에 해당하는 쌀 100만석이나 보내주었는데, 조선에서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이유로 도로 개설이 안되어 있어서 그 쌀이 실제 전달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의 전후복구를 하라고 은화 200만냥을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명나라는 왜란 당시 군대 22만 1천5백을 보냈고, 은화 2000만냥을 소비하였다 한다.

아마 한두 차례가 아니고 식량사정이 안좋을때마다 수차례 손을 벌리고, 도움을 받았던것 같다.

 

이렇게 30년간 명나라를 위해서는 일을 안하던 황제의 전폭적인 조선 도움에 중국에서 '조선황제', '고려천자' 라는 조롱섞인 별명이 붙을 지경 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는데, 어느날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자신은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 선조는 장비의 환생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 장비를 돕는데 두 팔을 걷고 나섰다고 한다.

 

이러니...

 

훗날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세력은 물론이고, 조선 왕실에서도 만력제를 아주 극진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명 황제 신종의 도움이 없었다면 조선 왕가는 왜란 당시 끝이 나고 말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며, 수많은 백성과 군졸들이 굶어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명천지 숭정일월 이라고 새겨넣고, 만동묘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것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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