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코스 : 주차장 - 남문 - 서장대 - 서문 - 정상 - 동문 - 성내 - 남문 - 주차장 (6.06km, 2시간28분)









상당산성 정문 역할을 하는 공남문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연초록 융단이 펼쳐진듯한 잔디밭엔 시민들이 돗자리를 깔고 쉬는 모습이 보인다.

성문을 마주보고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잔디밭 공원은 처음 보는것 같다.









그 앞에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가 있다.

詩碑에 적힌 멋들어진 번역과 달리 내 생각대로 해석해 보았다.

終夕을 밤새도록이 아닌 종일로 옮겼다. 밤에 뭐가 보일리 없을테니...


遊山城(산성을 노닐며) / 金時習


芳草襲芒屨 (방초습망구) - 향기로운 풀들은 짚신을 파고들고
新晴風景涼 (신청풍경량) - 비 개인 풍경은 맑기만 하구나
野花蜂唼蘂 (야화봉삽예) - 들꽃엔 벌이 들어 꽃술을 쪼아물고
肥蕨雨添香 (비결우첨향) - 비는 살찐 고사리에 향기를 더하누나
望遠山河壯 (망원산하장) -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登高意氣昻 (등고의기앙) - 높이 오르니 의기가 드높아라
莫辭終夕眺 (막사종석조) - 온종일 사양치 않고 바라보려네
明日是南方 (명일시남방) - 내일이면 남방으로 떠나갈테니









상당산성 유일의 홍예문인 공남문

남방의 상징인 주작이 천정에 그려져 있다.









공남문 천정의 주작








공남문을 들어서면 마치 옹성처럼 성문 안쪽에 성벽이 가로 막고 있다.

유사시 적이 툭 터져서 나가지 못하고 삼면의 성벽 위에서 적을 협공 할 수 있게 되있다.

외옹성이 아니라 일종의 내옹성 이라고 보면 될듯 싶다.









한바퀴 돌아보기 위해 습관적으로 시계방향을 택해 서문을 향한다.

그런데 늦은 오후라 결과적으로 반대로 돌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멋진 일몰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면이 완만하고 널찍하여 적의 접근이 용이한 남쪽 성벽에는 사진처럼 여장을 세워놨다.

여장은 성가퀴 하고도 하는데, 성벽위에 놓인 방어용 담을 말한다.









원총안(遠銃眼)


여장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번갈아가며 뚫려 있다.

위 사진의 원총안은 먼곳의 적을 보고 겨냥하는 구멍이며

근총안은 접근하는 가까운 곳의 적을 겨냥하는 구멍이다.









근총안(近銃眼)은 이렇게 아래쪽으로 경사가 나 있어, 근접한 적을 쏠 수가 있다.

아마도 임란을 거친 조선 숙종때 개축된 것이라, 조총이 군에 보급돼 있을 상황이다.









상당산성 공남문 쪽에서 바라본 속리산

우측으로는 선도산이 보인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밖으로 성벽에서 툭 튀어 나온 성곽이 보인다. 치성 이다.

치성은 성곽에서 돌출하여 성벽에 접근한 적을 측면에서 쉽게 공격하기 위함이다.









공남문 서쪽 치성에서는 공남문 뒤로 반대편 치성이 보인다.

공남문엔 문을 중심으로 양쪽 모서리(동남쪽, 서남쪽)에 2개의 치성이 마련되어 있고

직선으로 되어 있는 남쪽 성벽 중간인 이곳에 치성이 하나 더 있다. 총 3개의 치성.

지난번 난공불락의 요새인 삼년산성을 보고 와서 그런지 그렇게 견고해 보이진 않는다.

무열왕이 왜 그렇게 삼년산성을 자랑스러워 했는지 새삼 다시 느낄수 있었다.









다시 조금 더 올라가서 뒤돌아본 툭 튀어나온 치성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이라 한낮을 피해서 햇볕이 기세를 잃을 시간에 산성에 왔다.

그런데 오후들어 시간이 갈수록 구름이 많아 지니 폭염 땡볕에 해를 피해서 좋지만

하늘빛이 회색빛으로 흐려지니 촬영하는 입장에선 마뜩치 않은 하늘색 이다. 









서남 암문 옆 남서쪽 모서리 높은 곳 에는 마치 장대나 포대같은 치성이 있다.

지금은 나무로 인하여 시야가 좁지만, 나무를 베어내면 양쪽을 시야에 둘수 있는 곳 이다.

동, 서, 북쪽은 위 지도처럼 성벽이 굴곡이 되어 있어 굳이 치성을 둘 필요가 없었다.









상당산성 서남 암문









암문이란 문루가 없어 멀리서 보면 문 인지 알 수가 없어 적에 노출되지 않고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을 말하며 유사시 안쪽에 쌓아둔 돌과 흙을 허물어 폐쇄 할 수 있다.

상당산성에는 서남쪽과 동북쪽 두곳에 암문이 마련되어 있다.









중앙의 우암산과 산성 아래 청주 동물원

우암산 이라고 한것을 보니 우암 송시열과 관련이 있는 지명 이다.


그럼 청주는 송시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요즘 같은 첨단 정보의 시대에도 인터넷 정보는 만능이 아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많은 글에서 송시열의 종가가 청주시 문화로 13번지라고 나온다.

그런데 청주에는 문화로가 없을뿐더러...

은진송씨 종가는 예전에 회덕 지역 이었던 지금 대전에 있다.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 71-5)


그리고 송시열과 관련하여 빠뜨릴수 없는 지명이 화양동인데

수많은 자료에 청주 화양동 이라고 나온다. 얼핏 잘못된 정보가 아닌가 싶은데

이는 화양동이 화양계곡과 만동묘가 있는 괴산군 청천면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도에는 이 지역이 청주에 속한 것으로 나오니 틀린말이 아니다.

그래도 최신 글에는 분명한 주석을 달아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지금의 현대인들은 청주 화양동이 아니라, 괴산 화양동 이라야 이해되기 때문이다.























성벽위에 미석이 촘촘히 박혀 있다.

미석은 성벽과 여장사이에 (위 사진에는 여장이 없음) 툭 튀어나온 돌로 눈썹돌 이라고도 부른다.

사람의 눈썹처럼, 빗물이 성벽으로 바로 흐르지 않도록 작은 처마를 만들어 놓은 것 이다.

겨울에 물이 스며들어 얼었다 녹았다 하며 성벽이 터지는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성벽에 핀 기린초









같이 걷는 식구는 해도 안뜨고, 바람 시원하게 불어서 좋다고 한다.









개망초
















상당산성의 둘레는 4.2km로 지난번 다녀온 삼년산성 보다 2배 반 이나 길고

면적은 3배 이상 넓은 제법 큰 성 이다. 안에 터가 넓고 논, 밭 까지 있어서

식량을 자급자족 할 수 있으니 유사시 장기간 농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청주시


청주는 애초 처음엔 중국 지명을 답습한 靑州 였다가 얼마후 淸州가 되었다.

우리말로 하면 '맑은고을' 이란 뜻인데, 유래를 추측해보면 그렇게 좋은 뜻은 아니다.


관심법으로 유명한 궁예는 청주호족을 우대하였으며,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에 나오는 청주호족 아지태는 왕건이 정권을 잡기 전에도 정적 이었다. 이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난 이후에도 궁예에게 충성스러웠던 임춘길, 강길아차, 배총규, 경종 등 청주호족들이 일으킨 반란에 지친 고려에서 더 이상의 반란이나 불충한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지역 호족들을 달래는 의미에서 맑은 고을(淸州)로 개칭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


왕건에게는 반란의 땅 이었던 청주, 홍성, 공주


청주는 백제시대에 상당현, 또는 낭비성, 낭자곡성이라고 하였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9주5소경으로 개편하는데 이때 청주는 서원소경이 되었다가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 요즘의 직할시 급이다. 이후 고려 태조 23년에 (940년) 청주(靑州)로 바뀌었다가,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으로 목(牧)이 설치되면서 청주(淸州)라는 오늘날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기면서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이라 고 했다.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라는 말에 대한 근대의 최초 해석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이던 이마니시 류 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놈)이 해석을 엉뚱하게 하면서 이 지역이 호남을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차현(車峴)은 차령산맥이 아닌 수레티를 의미한다. (차령산맥 이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산맥은 일제시대 고토분지 라는 일본 지질학자가 만든 것이다) 내가 이전 죽주산성에 관한 글을 쓰면서 간단히 언급했던 수레티는 중부고속도로와 329번 지방도가 만나는, 경기 안성 일죽면과 충북 음성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궁예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칠장사 부근 이다.


'차현이남 공주강외'란 결국 차현과 공주강 사이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왕건에게 있서 최대의 아킬레스건인 궁예를 지지하고, 반란을 했던 청주지역과 홍성, 공주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거꾸로 호남인들은 왕건의 친위세력중 하나로, 고려 전체에 걸쳐 공직에서 배제된 경우가 없었다. 왕건은 호남인들을 크게 중용하였고, 왕건의 둘째부인이자 혜종의 모후인 장화황후 역시 방송에서 보신대로 나주 사람이며, 팔공신중 왕건 대신 옷과 투구를 입고 죽어 고려시대 충절의 본보기가 되었던 신숭겸 역시 곡성 사람으로, 호남 이나 후백제 출신들이 고려에서 관직 임용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왕건은 '차현이남  공주강외'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차별도 금방 풀어서 그 지역사람들을 중용하였고 홍성 사람을 왕비로 맞았으며, 왕건의 손자인 현종은 공주 사람을 왕후로 맞아들였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지리'에서 훈요십조를 빗대어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몰았다.


이중환의 주장에 대해서 전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한번도 밟아보지도 않았다며, 병조정랑에 있으면서 목호룡 사건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에 의한 것이어서 이중환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이중환은 호남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고 택리지를 썼다.


그의 외가가 나주였기 때문에 한번쯤은 호남에 갔을만한데도 그는 끝내 호남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그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그후 광산김씨의 고변에 의한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한 다음 '택리지'를 썼기에, 택리지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은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제승당 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장대


보통 장대가 시야가 좋은 높은곳에 만들어 지는데 상당산성의 서장대는 성 내부도

그리고 외부도 볼 수 없는 곳에 세워져 있다. 









서문인 미호문이 보인다.









딱지꽃
















상당산성 서문 (미호문 弭虎門)


미호문의 弭자는 '활고리' 의미하며 이곳의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굴곡진 성벽의 모양이 활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보통 동서남북에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도가 그려지는데, 공남문 천장에 그려진 주작이나 서문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간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짚신나물


선학초 라고도 불리며, 독성이 없고, 강력한 항암효과가 있어서 중국의 박순식 이라는 조선족 여의사가 짚신나물과 삼백초를 이용하여 각종 말기 암환자 80명을 90% 완치시켰다고 하기에, 나도 전에 짚신나물과 삼백초를 준비해서 시골 아버지께 끓여드리고 설명해 드렸다. 맛은 녹차 맛이며, 고혈압 환자는 과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벽의 곡선미가 너무도 아름답다.









성벽에 핀 기린초
















청주시와 저 멀리 천안/아산 광덕산

왼쪽으로는 무성산이 보인다.


백제의 상당현을 거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였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이 청주라는 지명으로 고친 후에도 그리고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면서도 '서원' 이라는 지명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청주한씨 한명회는 임금의 장인이 되어 '서원부원군'이 되었고, 조선시대의 관청문서에도 청주부를 서원부로 기록한 예가 많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청주 지역에서 불충 하거나 모반등 큰일이 발생하면 청주목을 서원현 으로 강등을 시켰는데, 그 횟수가 무려 8번이나 된다고 한다. 지금도 청주에는 서원구, 서원대학교, 서원초등학교등 신라시대에 시작된 서원(西原)의 이름이 남아 있다.









상당산성에서 바라본 태화산, 광덕산, 망경산, 운주산, 동림산























진천 두타산을 당겨본다.









벌판 뒤로 병풍처럼 우뚝 선 진천 두타산









빙글빙글 휘어 돌아가는 산성길 우측의 제일 높은 곳이 상당산 정상 이다.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









상당산성에는 3개의 수구가 남아 있다.









수구 물 배출구는 판석이 바깥으로 돌출되도록 만들어 물이 벽을 타고 흐르지 않도록 했다.









성벽에 핀 상당산성의 야생화, 수국









흑성산 뒤로 해가 넘어 간다.









당겨본 중앙의 흑성산









상당산 정상에 들렀다 간다.

정상부는 발굴작업 중인지 파란색 방수포로 덮어 놨다.


상당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백제시대의 상당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토성 이었는데, 이후 산성의 주인이 신라에서 고려를 거치면서 여러차례 바뀌었다가, 조선시대 들어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중요도가 부각되어 숙종때 지금의 석성으로 개축 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상당산성을 보면, 이보다 천년전에 신라가 쌓은 삼년산성이 얼마나 튼튼하게 잘 쌓은 산성 인지를 알 수가 있다.


어떤 학자는 상당(上黨) 이라는 지명이 '금강 상류' 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이야기 한다. '당'은 우리말에서 한자훈을 빌려쓴 것으로. '무리 黨'의 '무리' 에서 '물' 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백제 도읍지에서 보면 청주는 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학자는 한강 상류 라고도 한다. 위성지도를 살펴보니, 사실 상당산성의 물은 감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물론 상당산의 북쪽 계곡은 미호천으로 흘러들어가 금강으로 흐르지만, 그건 산성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산성의 물이 흘러들어가는건 한강 상류 겠지만, 정서적으로 볼때 이곳은 금강에 가깝다.









산성 안에는 예전에 '남악사', '장대사', '구룡사' 라는 3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4.2km의 긴 성곽을 지키기 위해서는 5880명의 군사가 필요했는데, 당시 성에 주둔한 관군은 1000명 정도로 나머지를 승병으로 채웠기 때문 이라고 한다. 어쨌든 승병이 4천명 이상 있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절 또한 규모가 있었을것 같다.


조선시대 승려에게는 승역이 지워져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 징발 당했는데, 임진왜란후 승군에 대한 조명이 되어 승병들이 산성등을 지키는데 동원 되었다고 한다.









청주제일봉 선도산이 보인다.

산성의 북쪽 사면은 매우 가팔라서 성벽아래 높은 토성이 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백제시대에는 토성 이었는데, 북쪽 성벽은 토성만으로도 충분 했을듯 싶다.









왼쪽 끄트머리에 구병산이 살짝 머리를 내밀고 있다.









당겨본 구병산
















성곽길에서 발견한 유일한 원추리

북쪽을 돌아가는데 하늘이 더욱 어두워지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결국 비는 한두방울 떨어지다 말았지만 혹시나 몰라서 걸음을 서두른다.









동문인 진동문

그러고 보니 보통 네방향에 문을 두는데, 북쪽은 가팔라서 그런지 문이 없다.









까치수염


성벽을 따라 걷는데도 야생화들이 많이 보인다.

사진에 담지 않은 꽃들도 많고, 척박한 성벽에 기대에 피어난 꽃들이 아름답기만 하다.









鎭東門, 동쪽을 진압한다는 말이다.

상당산성은 임진왜란후 남쪽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한 성 이라 진남문이라 했어야

할것 같은데, 진동문 이라 했다. 왜적의 침입루트가 상주를 거쳐오는 동쪽 방향 이라는 뜻 인가?

허나, 남문인 控南門의 控 또한 통제하고, 제어한다는 의미가 있으니, 어차피 비슷하다고 봐야겠다.









이제 저곳만 올라서면 출발지인 공남문 이다.









보화정 (동장대)를 지난다.









저곳만 올라서면 공남문 인데,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성 마을을 돌아본다.









식당들이 늘어선 상가지구









떨어진 덜 익은 살구 하나를 생수에 씻어 입에 넣는다.

짜릿한 신맛,, 어릴적 추억 때문인지 아직도 신맛이 좋다.

덜여문 초록색의 단단하고 시디신 어린 자두,,는 과수원에나 가야 맛을 볼테고

장터에서도 빨갛게 익은 자두 보다는 연초록과 노란색이 섞여 있는 탱탱한 자두를 산다.

옛날엔 노란 탱자를 따서 짜먹기도 많이 했는데, 요즘은 탱자나무 보기도 힘들다.








상당산성의 저수지는 일제 강점기때 수구가 있던 자리가 수해를 입으면서 생긴 것으로

옛 지도에는 '蓮堂'(연당) 이라는 연못과 '逍遙亭'(소요정) 이라는 정자가 나와있다.









식량의 자급이 가능했던 산성 안의 논
















끝이 보이는 곳까지 가보고 되돌아 오는데 서쪽 하늘에 구름아래 작은 일몰이 시작된다.

역으로 돌았으면 일몰을 보고 내려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운조루에 소장된 상당산성도를 2017년에 박효영님이 모사한 것으로 산성안 기념관에 있다.

상당산성 복원도와 비슷하다. 이렇게 복원이 되면 부여백제문화단지 처럼 정말 멋질것 같다.

지도처럼 연못과 정자를 복원해 놓고 관청과 마을까지 민속촌을 꾸며 놓으면 좋을텐데..

지금의 호수도 아름다워서 잘 활용하면 예전의 작은 연못보다 더 아름다울수도 있겠다.

다만, 내부에 사유지로 보이는 많은 상가들이 있어서 쉽지는 않아 보인다.









공남문으로 되돌아가며 바라본 제방과 주차장

저수지 제방이 성벽 이었고, 제방 아래 유실된 수문터를 발견했다고 한다.









다시 만난 공남문









청주는 백제의 영토 이었다가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펴자 얼마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6세기 중반에 신라의 품에 떨어지며 백골산 전투를 시작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신라가 삼년산성에 국력을 총 동원해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했던 것처럼

백제가 상당산성을 철옹성으로 만들어 고구려의 남하를 그 선에서 저지했다면 어땠을까..

당시의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허나, 장수왕이 남하를 시작해서 한성에서 개로왕을 죽이고 진천 대모산성과 청원 남성골산성을 거쳐

대전의 월평산성까지 내려갔으니 웅진 턱 밑에 까지 몰려든 적을 맞은 백제의 입장에선 신라처럼

3년씩 공을 들이고 국력을 총동원하여 요새를 구축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청주 일대를 지켜내기에 백제의 허술한 토성은 힘이 없었다.

조선 숙종때 비로소 지금과 같은 석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상당산성은 까칠해 보이지 않는다.

삼년산성이 난공불락, 불패의 성 이었다면, 이곳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순하고 여린 모습이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를 몰고 상가지구로 간다.

이동네 맛집 이라는 상당집을 찾아 들어가니 아뿔사.

이집은 8시에 문 닫는다고... 할수없이 옆집에 가서 같은 메뉴를 시켰는데

그곳은 확실히 맛집은 아니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상당산성내 식당중 다른 맛집은 또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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