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주차장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주리 85-2



 

 

 


 

 

 

 

 

 


삼년산성 서문지 아래 주차장 앞은 단풍나무들이 예쁜 꽃을 피우고 있다.

딱히 주차장 이라고 할 것도 없이, 길 양쪽으로 구획을 만들어 주차장을 대신하고 있다.


사연없는 옛 성이 어디 없겠냐만은, 삼년산성은 그만저만한 성이 아니다.

신라가 장기적인 플랜을 가지고 국력을 총 동원하여 탄생시킨 최고의 산성이자 회심의 역작이다.

성곽길이 좋은 것은 걷기 편안하다는것 외에도 이런 역사의 현장이 전해주는 생생함일 것이다.  










삼년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서문 이다.

하늘도 흐리고, 미세먼지도 많은 날인데 때마침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

몇일만 늦게 왔어도 공사가 깔끔하게 마무리 되었을 것이다.










반대쪽 성벽과 치성

치성이 서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하나씩 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 위해 먼저 북문을 향해 걸어 오른다.

두툼한 성벽, 성벽의 폭이 7-8m에 이르고, 성벽의 높이는 13m-22m, 평균 15m로 한국의 많은 성벽중 가장 높고, 두터운 성벽을 가진 성벽 이라고 한다. 산성이다 보니 산의 능선 둘레를 따라 축조하였기에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국운을 건 전략적 야심작, 삼년산성


동서쪽 성벽은 내탁외축(內托外築) 방식이며, 남북쪽은 내외협축(內外夾築)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내탁외축 이란 바깥쪽에 돌을 쌓고 안쪽에 흙으로 다진 것이고

내외협축 이란 안과 바깥 양쪽에 돌을 쌓고 그 안에 또 흙이나 돌을 채우는 방식이다.

삼년산성은 내외협축에 그 안쪽에 돌을 대충도 아니고, 차곡차곡 쌓아서 하나의 거대한 석벽과 다름 없을 정도로 튼튼한 산성이다. 가히 당대 축성술의 최고 기술이 집약된 명작 이고 신라의 국운을 걸었던 전략적 야심작 이다. 그래서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북문으로 오르는 길 위쪽은 이미 공사가 다 끝이 난듯 보인다.










삼년산성 안쪽의 잡목과 덤불로 우거진 숲도 깔끔하게 정돈이 되었다.

비로소 성의 옛 모습과 골격이 옛 모습 그대로 보여진다.

성은 분화구나 바구니 같은 정상지형에 만들어졌으며, 안쪽 평지가 작아

대부분의 건물들이 능선 위쪽 성벽 근처 평지에 세워졌다고 한다.










서문 양쪽위 성벽에는 이렇게 치성을 만들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보다 쉽게 공격할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서문 앞에는 반원 형태로 성문을 감싸고 도는 옹성을 만들어, 다수의 적군이 성문을 직접 공격할수 없게 만들었으며, 접근한 소수의 적군을 독안에 든 쥐처럼 공격할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문에 대한 더욱 놀라운 비밀은 잠시 후 한바퀴를 돌아 내려오면서 언급할 계획이다.

잠시 치성이 뭐고, 옹성이 뭔지 그림자료를 통해 살펴 보자.

옹성은 다수의 적이 성문을 공략하는것을 막고, 접근한 적을 포위 공격하기 위함 이고

치성은 앞으로 튀어나와 성벽이나 성문에 적군이 붙어있는 적을 쉽게 보고 공격하기 위함 이다. 







참고사진 : 옹성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참고사진 : 치성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서문의 반원형 치성은 이렇게 복원이 되어 있다.










치성을 통해 성문의 방어력을 한층 더 강화 시킬수가 있다.










오늘 뭔가 큰 의미를 두고 이 성을 찾은건 아니다. 당일 아침에 갑자기 정해진 것으로, 

산악회 박대장이 좋은 일을 하다 사고로 중상을 당해서 회복하다가 첫 산행 인데

아직 뼈가 다 굳은건 아니라서 그나마 평탄하고 쉬운 곳을 가자고 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뒤돌아보니 보은평야 너머로 금적산이 보인다.










이윽고 북문지로 내려서는길, 삼년산성에서 제일 높은곳에 우뚝 선 북동쪽 치성이 보인다.

장군이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고 호령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을것 같다.










북문 방어를 위한 북동쪽 치성


삼년산성은 보은의 평야지대 한복판에 있는 325m 높이의 오정산(烏頂山) 정상의 세봉우리와 서쪽 골짜기를 연결하는 포곡식 산성이다. 이 근방에 명산들이 많아서 위성지도를 들여다 봐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 인데, 어떻게 이런곳을 찾아내서 산성을 세웠는지 참으로 대단하기만 하다.


난공불락의 요새, 불멸의 철옹성


높이는 낮지만 정상부 아래쪽은 매우 가파르다. 거의 절벽에 이르도록 가파른 산세는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고, 그 위에 13-22m 의 매우 높은 성벽이 둘러싸고 있으니 한눈에 봐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닐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삼년산성은 성을 쌓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때까지 한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은 철옹성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삼국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에 절대 뺏기지 않을 불멸의 요새를 작심하고 세운 것이다.










예전에 태종 무열왕이 이곳에 머물렀다더니

북문아래 예전 행궁이 있던 곳에 작은 건물이 있다.

1902년에 창건한 한국불교 해동종 직할종찰인 보은사 이다.


















보은사 한쪽에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 안에는 석조 여래입상 부처님이 계신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미륵전 앞에서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으니 스님이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고 하신다.










부처님 오신날, 삼년산성 보은사 에서 고맙고 맛난 비빔밥으로 점심 공양을 했다.

준비해간 김밥은 배낭에 그대로 묻어 두었다.










점심을 먹고 일행들과 다시 보은사 뒤쪽 북문지로 올라갔다.










삼년산성 북문지










북문지에서 내려다보니 산 아래로 경사가 가파르고 성벽 또한 매우 높다.

잠시 내려와서 보니 북문지의 복원해논 성벽과 뒤쪽의 높은 치성이 보인다.

북문 앞에는 자연지형을 이용한 두겹의 차단벽을 쌓고 통로를 만들어 다수의 일시 진격을 막았다. 


성문 자료사진을 구하기 위해 19년전에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을 찾아 봤다.

오래된 방송이라 그런지, HD 방송도 아니어서 그런지 화질은 좋지 않았다.










삼년산성 북문의 구조 (자료화면 : KBS역사스페셜)


















지난해 봄, 부슬부슬 이슬비 내리고 안개 자욱하던 날 이곳에 왔었다.

성 전체에 문루나 흔한 정자도 하나 없어 비 피할곳 없어 약간 당황스러웠던 날

결국 다 돌지 못하고, 보은사 갈림길에서 내려오면서 맑은 날 다시 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많은 돌들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삼년산성은 470년 신라 자비왕때 3년에 걸쳐서 쌓은 성 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해서 쌓았다고 하는데, 일선계는 지금의 선산군 지역 이라고 한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변방으로 행정적 통치가 불가능해 선산군 지역의 인원을 동원했을 것이라고 한다.


8톤트럭 2만5천대분, 돌 천만개가 들어간 성


3천명의 인원이 8톤트럭 2만5천대분의 돌 천만개를 그것도 자연석을 일일히 다듬어서 쌓았다고 하니 얼마만한 대규모 공사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 성을 쌓을때 보은지역의 돌이란 돌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이런 규모의 엄청난 성을 쌓았다는것은 국운을 건 전략적인 투자 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삼년산성의 축조연대와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우리나라 현존하는 산성중 축조연대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산성 이라고 한다. 이는 그만큼 이 성이 큰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삼국의 역사가 이 산성으로 인해 큰 변화의 계기를 가져왔다는것을 의미 한다. 신라가 그 기록을 꼭 남겨야 했을만큼 중요했던 산성 이고, 기록을 남기고 싶어했을 만큼 자랑스러운 유산 이었다.










삼년산성 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것 처럼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려서 그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이 502년 삼년산군 이라는 지명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내 생각은 470년에 삼년산성을 쌓고 나서, 이 산성이 가지는 엄청난 의의와, 산성에 대한 신라 왕실의 큰 기대와 관심 때문에 이 일대의 지명까지 삼년산군이 된듯 하다. 즉, 반대인 것이다. 지명때문에 산성의 이름이 생긴게 아니라, 산성의 이름 때문에 지역 이름까지 바뀐게 아닌가 싶다. 연대도 그런 순서로 흐르고 있고..









북동쪽 치성으로 올라선다.










장군의 장대처럼 쓰였을 북동쪽 치성에 오르면 사방이 다 보인다.










북동쪽 치성에서 바라본 북서쪽 봉우리와 지나온 북문지

예전엔 성벽도 지금보다 더 높고, 나무들도 다 베어졌을 것이다.










북동쪽 치성에서 바라본 삼년산성 내부










가야할 산성 동쪽길

구병산이 살짝 보이고 우측 뒤로 영동 백화산이 보인다.










속리산으로 넘어가는 말티재

속리산은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동문지로 향한다.










삼년산성 동문지



























동문지 아래에는 수구가 있다는데 미처 모르고 보지 못했다.

나중에 사진으로 보니 사람이 들어갈만한 커다란 수구가 있었다.










삼년산성 동문에 서면 매우 가파른 사면이 내려보인다.

사면 자체가 성벽역할을 한데다 높은 성벽이 가로막아서 실제는 훨씬 높게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대규모 병력이 성문으로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지그재그로 벽을 쌓았으니

동문을 통한 공략 역시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삼년산성 동문 구조도 (자료화면 : KBS 역사스페셜)










동문을 지나 남쪽으로 향한다.










이곳은 아직 복원이 되지 않은 1500년전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다

서문쪽의 웅장한 성벽은 근래 복원을 해논것인데, 당시의 고증을 따르지 않고,

돌과 축성 방식도 달라서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실패했다고 한다.


















남동쪽 치성에 올랐다.










동남치성, 남문이 가까워지면서 구병산이 조금 더 드러나 보인다.










남서쪽으로는 금적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보은 읍내가 보인다.










성 안쪽으로 점심공양을 했던 보은사가 보인다.










돌아서 내려가야할 정문인 서문지










뒤로 지나온 동남쪽 치성을 돌아본다.










잡목 제거를 하여 성 내부가 잘 드러나 보인다.

이 좁은 곳 안에 여섯곳의 우물과, 논과 밭이 있어 식량을 자급 할 수 있었다고 하며, 당시 대규모 병력이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성벽을 따라서 걷다보면 위 사진의 아래쪽 처럼 성벽 바로 옆에 밭으로 쓰면 좋을 듯한 평지가 보이는데, 그런곳에 당시 병사들 막사등 주요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아래 평지는 군사 훈련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내부 지형은 Y자 형태로 보은사 우측으로 작은 능선이 내려와 그 우측에 작은 골을 만들고 있다.










성벽을 따라 옛날 건물터였던 평지가 있다.










남문으로 내려선다.



















두분이 저렇게 내려다만 보는 이유는 남문의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남문은 길이 없다. 성문을 나가면 바로 성벽 낭떠러지다.

남문은 5m가 넘는 사다리가 아니면 다닐수 없도록 성벽 위쪽에 문이 있다.










삼년산성 남문 구조도 (자료화면 : KBS 역사스페셜)










성 바깥에서만 돌벽이 아니라, 성 안쪽에서 봐도 돌벽이 보이는 내외협축 방식의 성곽










들어왔던 서문지로 내려선다.

성곽에 올라 내려다보면 벼랑끝에 선 것처럼, 높이가 아찔하다.

산 사면도 가파른데, 이렇게 높고 단단한 성벽까지 버티고 있으니

삼국시대 당시 이곳은 신라군에겐 축복이요, 적군들에겐 목에 걸린 가시 였을 것이다.

사실 신라가 이곳 삼년산성을 완성한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근방에서 기회를 상실한다.

물론 신라가 엄중한 방어를 했겠지만 백제와 고구려는 이 성이 완성되기 전에 공략 했어야만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서문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성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서문은 삼년산성의 대문 역할을 했으며

그만큼 더 이중, 삼중으로 엄중한 방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차를 세우고서 서문을 오르는데 아주 편안하다.

새로 만든 평탄한 차길을 통해서 오를수 있는데, 이 길이 30년 전만 해도 없었다고 한다.

서문 앞은 가파른 계곡으로 서문으로 접근할수 있는 길은 그 옆의 작은 오솔길 이었다고 한다.


사면의 작은 오솔길로 올라서 끝에서는 아래 사진처럼 성벽을 따라 정문에 이르도록 되어

대규모 병력의 접근이 불가능한데다, 소수의 병력도 성벽을 따라 이동하며 화살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성문에 접근했다고 해도 성문 앞에는 또 옹벽이 설치되어 포위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서문을 가려면 화살비를 맞으며 성벽길을 걸어야 한다 (자료화면 : KBS 역사스페셜)










서문의 옹벽과 양쪽에 튀어나온 치성들 그리고 좁은 진입로 (자료화면 : KBS 역사스페셜)











그리고 이렇게 철저한 방비 가운데에도 혹시나 성문이 파괴되어 적들이 밀려든다면

적들은 더욱 황당한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서문지 바로 앞에 있는 대규모 연못 이다.

적들은 연못에 빠지거나 연목을 피해 양쪽 성벽 옆으로 갈라지며 다시 공격을 받게 된다.

신라의 빅 픽처 (Big Picture)


이런 단단한 방비로, 삼년산성은 한번도 공략당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군사와 경제력 전반에 걸쳐 100년 정도 뒤져있던 서기 470년 당시 어려운 환경에서 변방에 이런 대규모 공사를 한것은 장기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그린 신라의 큰 그림, Big Picture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일차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침을 저지하고, 후일 결국 적으로 만날 백제를 대비 하기 위한

동서남북 어느곳이든 연결되고, 갈수 있는 교통의 요지인 보은의 평야지대에 우뚝선 삼년산성


동쪽으로는 상주를 지나면 경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추풍령을 지나 김천으로 향하고 

서쪽으로는 백제땅 옥천, 대전, 금산으로, 북쪽으로는 청주, 진천을 통해 한강유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경주지역을 벗어나 한강을 확보하기 위한 확실한 교두보를 삼기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함락되지 않을 난공불락의 거점으로 당시 삼국이 마주하고 있던 보은에 이런 멋진 산성을 쌓은것은 신의 한수 였다.


삼년산성, 신라 국력의 결집체


아마도 당시 엄청난 재정과 최고의 기술을 총 동원하여 이 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삼국이 마주하고 있는 접경 지역에 백제도, 고구려도 모르게 이런 엄청난 공사를 해놓고 나서 신라는 환희의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훗날 신라가 백제를 이기고 사비성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을때 신라왕은 왕궁이 아닌 이곳으로 왔다.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온 웅진도독 왕문도를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신라가 이 성에 대해 얼마만큼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한마디로 웅진도독이 와서 보고, 당나라 황제에게 고하되, 신라가 이정도 산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리고 이런 산성이 다른 곳에도 많으니)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딴생각 하거나, 까불지 마라는 소리다. 이 산성은 한마디로 신라 국력의 상징이자 힘의 결정체며 자랑 이었다.










결국 신라는 삼년산성의 단단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강유역을 확보하며 통일의 발판을 세웠고, 훗날 백제와의 관산성 전투때 이곳에 있던 신주 사령관 김무력장군 휘하 비장 도도의 기병이 관산성 전투때 성왕이 이끄는 기병에 대적하기 위해 파견되어 성왕을 기습 매복으로 사로잡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성치산성에서 기병을 거느리고 있다가, 환산에 있던 백제, 왜, 대가야의 연합군 사령관인 아들 부여창을 위로 응원차 가기위해, 4명의 좌평등 50여명의 소수의 기병으로 관산성 앞 서화천변 구진베루를 지나다가 첩보를 접하고 매복하고 있던 삼년산성 기병들에게 성왕이 잡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삼년산성의 기병에 의해 백제 성왕은 죽음을 맞고... 힘의 저울추는 신라로


삼국사기에는 고간 도도가 성왕을 죽였다고 나오는데, 일본 서기에 따르면 성왕을 죽인 이는 말관리를 하는 노비인 사마노(飼馬奴) 고도 라고 한다. 아마 도도는 당시 기병을 이끌던 비장 이었고, 고도는 실제로 성왕의 목을 친 노비일 가능성이 있다. 노비로 하여금 왕의 목을 쳐서 충격과 모욕을 더 주고자 함 이었을 것이다. 신라군은 성왕의 목을 베어 경주로 가지고가 관청인 북청 계단밑에 묻어 밟고다니게 하는 모욕을 주고, 몸만 돌려보낸다. 이 어이없는 사고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힘의 균형추가 신라쪽으로 크게 기울게 되었다.


부왕의 죽음과 모욕에 눈이 뒤집힌 태자 부여창이 이후 기병을 몰아 돌진하여 대패를 당하고, 이후 고구려와 밀약을 하고 최전방 병력을 빼서, 몰래 남하한 김무력의 기병에 의해, 백골산 뒤쪽 백제군 후방이 기습을 당하고, 동시에 전방에서 호응한 신라군에 의해 앞 뒤로 협공을 당하며 백제군이 전멸하는 백골산 전투가 끝나고, 우리가 관산성 전투라고 잘 알고 있는, 양국이 국운을 걸었던 긴 전투가 끝나기 때문이다.











삼년산성 서문 앞에 있는 커다란 연못 아미지(蛾眉池)와 논밭

지금도 비가오면 아미지 연못에 물이 고일것 같다.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 바위의 음각 글씨 아미지(蛾眉池)











짧은 산행을 마치고 삼년산성에 대한 보충 설명을 듣기위해 문화해설사님을 찾아가니

산성의 규모, 시설과 유래, 당시의 시대적 상황등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주신다.


삼국통일의 토대가 되었던 당대 최고의 산성, 삼년산성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며, 견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부처님 오신날,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 불멸의 요새, 철옹성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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