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코스 : 우금치 - 견준봉 - 두리봉 - 경일아파트 - 택시타고 차량회수

시간거리 : 3.72km(도상거리) / 1시간20분 (우금치 탐방 포함)







공주시 우금치에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






















박정희, 5.16, 10월유신 등의 글자가 훼손되었다.

전문을 옮겨본다.



인내천과 사민평등의 종지아래 후천개벽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고 동학교주 전봉준이 호남의 만석보 기슭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편성하여 첫 봉화를 든 것은 갑오(서기 1894년) 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대거하여 백산을 점거하고 습격해오는 관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4월말에는 전주성까지 함락하게 되니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의 무력간섭 아래 이 나라의 국권마저 위협받게 되자 정부 측이 먼저 화해하기를 청하니 우국애민의 일념에서 동학군은 마침내 양보하여 전주성을 내어주고 그 여력을 지방 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국주의 일제의 엄청난 야욕은 돌연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 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녕 국가의 명맥이 통틀어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후퇴했던 동학군은 드디어 항일 구국의 독립군으로 재무장하고 총궐기하였다,


남북접이 호응 합세하여 20만의 대병력을 논산평야로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통령의 작전지휘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월 하순부터 전개된 공주성의 대공방전은 이 우금치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처참하고 가열하게 됐다. 한 고지의 주인을 4.50차례나 바꾸어 가면서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을 되풀이하였다.
그리하다가 새로 투입된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근대의 무서운 살인무기 기관총으로 연속 맹사격을 퍼 붓게 되니 악전고투하기 3일 만에 동학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인 채 전우들의 시산혈하를 넘어서 11월 11일 논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망의 혁명 사업이 여기서 좌절당하고 계속되는 추격과 살육 속에 위국단침조차 알아줄 이 없었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서기 1973.11.11
제자 대통령 박정희
글 문학박사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 위령탑 건립위원회 세움


박성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친으로 22살에 경북 성주지방 동학의 접주로 활동 하였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박성빈의 5남2녀중 막내다.


박 전 대통령은 부친 때문인지 동학혁명에 대해 관심이 컸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정읍을 방문해 부친의 동학농민전쟁에 농민군으로 참여를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한다. '동학은 혁명'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정읍 황토현과 이곳 충남 공주 우금치에 동학기념탑을 세웠다.







봉화를 상징한것 인지...













우금치 고개를 넘어 공주방향에 조성된 위령탑

우금치 고개를 넘어가면 당시 동학군이 점령 하려고 사투를 벌였던 공주감영은 지척이다.







우금치 고개위로 올라선다.







이 좁은 계곡을 따라 동학혁명군의 주력이 우금치 고개를 향해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 고개마루에 개틀링 기관포 여러대가 배치되었을 것이고, 관군도 신식 스나이퍼 소총을 들고 이중 삼중으로 늘어서 농민군을 겨눴을 것이다.







우금티 터널 (우금치 터널)


우금티를 가로지르던 기존 2차선 40번 국도를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우금티 고개는 양쪽 사면이 파헤쳐지며 우금치 유적의 원형이 손상될 상황이었는데, 공주지역 시민단체들이 도로 확장 반대를 주장하며 대안으로 터널형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관철시켜서 2006년에 개통되었다. 그런데 이후 40번 국도는 우금티 터널 북쪽 새재를 통해 공주로 들어가는 길로 옮겨졌다.












우금치를 지나는 도로 옆 밭


우금치혈전의 그날 수천의 동학군 시체가 쌓였을 우금치 앞 산 사면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이 좁은 계곡으로 몰려들어와 우금치 고개와 견준봉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진에 보이는 견준봉 사면엔 흰옷을 입은 수천 동학혁명군의 시체가 널브러져 쌓여 있었다.

백의의 시체가 산을 뒤덮고, 붉은 피는 스며들고 넘쳐서 몇일간 흘렀다고 한다.







우금치 고개


현재 터널 이름은 우금티 터널 이다.

혹자들은 우금치가 잘못된 이름이고, 우금티가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티' 와 '치'는 같은 말로, 峙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다.

키와 치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말로 둘다 높다, 오르다 라는 의미로 같은 표현에 '시'와 '키'도 있다.

하<시>다, <치>켜세우다, <키>가 크다 와 같은 표현에서 '티', '시', '치' 와 '키' 는 같은 의미에서 출발하는 어원이다.


우금치는 잘못된 것이고, 우금티가 맞다 !!

라고 마치 '치'와 '티' 가 무관한 어휘 인것 처럼 주장 하는것 보다는, '티' 에 대한 한자가 따로 없고, 峙(치) 를 동일 의미로 사용하였음으로 '티'는 '치' 라는 한자를 음차한 우리말 표현 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것 같다. (eg. 한티, 한치, 한재, 한고개, 큰고개, 대티) 반대로 한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걸 한자를 모르는 대다수의 백성들끼리 서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치가 티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금치를 우금티, 또는 우금재 라고 불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자를 다루던 양반의 비율은 2% 미만 정도 였고, 그 외는 한자와 친숙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인데, 한자와 친숙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티'는 '치' 라는 한자의 단순 음차이며, 둘은 같은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이제와서 '티'가 올바른 고유의 표현이고 '치'는 틀렸다 라고 하는건 그래서 무의미한 주장일 뿐이다. 우금치의 '우금' 자체가 한자이다. 고로 애초 한자 지명인 우금치(牛禁峙)가 입과 입을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우금티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자들은 일제가 우금티를 우금치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그건 지나친 억측이다. 참고로 牛禁峙로 적혀있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23년전인 1872년 지방지도를 첨부한다.







1872년 지방지도 공주목지도에 나오는 우금치(牛禁峙)








우금치 전투에 참전했던 관군이 작성한 동산초비기에 실려있는 우금치


그런데 위 두 지도의 한자가 다르다.

하나는 牛禁峙 이고 다른 하나는 牛金峙 라고 적혀있다.

牛禁峙는 옛날에 이곳에 도둑이 많이 있어서, 해가 저물었을 때 소를 끌고 이 고개를 넘다 보면 도둑들에게 소를 빼앗긴다 해서, '해가 저물면 소를 끌고 이 고개를 못 넘게 했다'는 유래로 우금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이 고개에서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하여 牛金峙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우금고개 중간쯤 원효사 아래의 지명이 도장굴 인데, 도둑이 많이 살던 동네 라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금송아지 유래설 보다는 牛禁峙 라는 이름에 더 무게가 실린다.







우금치 고개 한쪽에는 기념 조형물이 쓰러져 있다.

마치 당시의 동학농민군들이 쓰러져 있는 느낌이 든다.

텅빈 고개마루에, 당시의 전쟁을 전달할수 있는 상징적인 조형물이 세워졌으면 한다.







1차 동학혁명으로 청군이 개입되고, 덩달아 일군이 개입을 했다.

이후 일본군은 상상할수 없는 경복궁 습격사건을 일으켜 고종의 목에 칼을 대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캐틀링 기관포 8문과 수천정의 신식 소총등을 뺏어갔다. 즉 이미 일본은 조선을 향해 손톱, 발톱, 이빨까지 시커먼 야욕을 다 드러낸 상황인데, 조정과 관군은 일본군을 겨눠야할 총뿌리를 농민들을 향해 돌린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뿐만 아니라, 조선 관군 그리고 민보군과도 싸워야만했다.

조정과 유생들은 더 큰 외세의 적을 외면한채, 신분제도를 부정하는 동학과 싸우느라 왜적과 한팀이 되었다. 훗날 이날 동학군과 싸웠던 관군은 의병이 되어 동학군과 한팀이 되거나, 친일파로 전락을 했다.


안중근은 젊을때 동학 농민군을 진압했었으며, 김구는 동학의 접주 였다고 한다. 한일 합병 이전에 이렇게 한팀이 되었더라면,, 우금치에서 동학군을 향하던 관군의 소총이 경복궁을 넘어 고종의 목에 칼을 대던 일본군을 향해 불을 뿜는 사이다 같은 반전이 있었더라면..







우금치 탐방을 마치고, 견준봉을 향해 출발한다.

한동안 사진에 보이는것 보다는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현 우금치 고개마루에서 견준봉으로 오르는 사면은 가파른 턱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예전에 도로를 내면서 사면이 깎인듯 하다.







우금치에서 견준봉으로 가는 능선 사면의 풍경

당시 그날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들은 우금치 건너편 지막곡산쪽 능선에서 우금치 고개마루와 견준봉 정상까지 약 1km에 해당하는 이 능선을 따라 2개 대대 병력이 집중방어를 하며 길게 늘어서 왼쪽 전방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학군들을 향해 발포했을 것이다.







우리가 우금치를 이야기 하면 모든 자료에 나오는게 견준봉 이다.

그런데 우금치는 견준봉 사면에 있는 고개마루 라는 것이고, 우금치 전투의 핵심이자, 우금치에서 가장 높은 고지가 바로 견준봉 이라는 똑같은 설명한 하는 '글' 만 있지, 현재의 다음, 네이버지도 뿐만 아니라 국토지리원 지도 뿐만 아니라, 그외 각종 지도 및 신문기사나 블로그, 어느 한곳에서도 정작 '견준봉'이 현재 지도에서 어디인지 표시해논 자료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직접 올라가면서 지형을 보면 현재 오르고 있는 사진상의 고개 마루가 견준봉 일것 처럼 보였다.

저 날망에 기관총을 세워놓고, 산 아래에서 물밀듯이 몰려드는 백의의 동학군을 향해 사격을 했을것 같다.

아니 사실 저곳을 놓치면 능선 아래의 우금치 고개는 방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정황상 지형도는 위 사진의 날망이 아닌 다음 사진의 봉우리를 견준봉이라 말한다.








바로 위 사진의 날망 오른쪽에 있는 저 가파른 봉우리 인데

이 봉우리가 각종 지도를 보면 위와 같은 현실적인 중간 턱이 없이 단순한 하나의 봉우리로 나온다.


나무가 없어도 중간 턱이 봉우리 정상에서의 사격으로 부터 엄폐가 되는데, 만일 지금과 같이 나무가 많았다면 나무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우측 봉우리 정상에서의 기관총 사격이 큰 역할을 못했을 것이고 중간턱까지 밀려든 동학군에 의해 그 아래쪽 우금치 고개마루는 바로 점령될 수 있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마도, 우금치, 중간고개날망, 봉우리로 이어지는 모든 능선에 방어군들이 늘어섰을 가능성이 높다.












견준봉은 나름 꽤 가파르다.

우리 산꾼들에게야 일도 아니지만, 당시 위에서 기관총을 고정시키고 사격을 하면 조총과 죽창을 들고 접근하기는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위쪽에 개틀링 기관포 한대 정도는 고정해 놨을것인데, 이 가파른곳을 밀고 끌며 올라가느라 고생을 했을것 같다. 







견준봉을 오르며 내려다본 모습








정상 바로 밑의 튀어나온 바위 지형


아마 저런곳에 기관총을 고정했을 것이다.

기관총 이라기 보다 기관포가 더 어울릴 것이다.

바퀴가 달린 모양새도 포의 형태라서 돌아가며 불을 뿜어대서 개틀링 기관포를 '회선포' 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하튼간에 사거리 2000m 의 기관포와 800m의 신식소총은, 사거리 100m와 서서 총구로 탄약과 화약을 장전해야만 하는 전장식 구조와, 초보자들은 2분당 고작 1발을 발사할수 있은 열악한 상황의 화승총과는 애초에 병력의 차이를 떠나서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 이었다. 2000m의 사거리 라면 견준봉 정상에서 저 멀리 고개 아래 동학군이 모여있는 금학동 마을 까지도 닿는 거리다. 불사의 주문을 외우며 뻥뚫린 들판과 고개를 달려와 조총의 유효사거리가 되는 100m 이내로 접근하면서 대부분의 동학군은 쓰러져갔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집단 학살과 같은 상황 이었다.







당시 개틀링 기관포의 엄청난 위력








견준봉 정상







일부 지도에는 견준봉 대신 견준산 이라고도 나온다. 

한자로는 犬蹲峰 이라고 하는데 현지 주민들은 산이 가파르다고 하여 '개좆백이'라 하였다고 한다.

견준봉 정상은 평범하다. 험하다고 하지만, 우리가 다니는 산들중에 이보다 험하지 않은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 정도다. 양반네들에게야 험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 사거리와 성능이 월등한 개틀링 기관포와 신식 소총을 들고 방어를 하면 원시 무기를 들고는 접근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장위영 참모관 구완희가 작성한 <공산초비기>에 따라 만들어본 우금치 전투도


사거리 2,000m의 개틀링 기관포와, 사거리 800m의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한 관군, 민보군, 일본군에 맞선, 유효사거리 100m의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동학군은 등에 부적을 붙이고 입으로 절대불사의 주문 이라고 믿던 주문을 외친다.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 이라는 총알도 두렵지 않은 마법의 주문을 큰 소리로 외치며 빗발치듯 날아드는 총알 앞으로 뛰어 나갔다.


인해전술도 어느정도 무기를 갖추어야 가능한데, 50여차례 막무가내식 정면 돌격은 전투가 아닌 일방적 학살이 되버렸다. 동학군 수천명이 죽는동안 관군과 민보군측은 고작 각각 한명씩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왜 전봉준의 주력은 다수의 잇점을 살릴수 있는 넓은 개활지가 아닌, 엄청난 화력이 집중된 좁은 계곡으로 돌진하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나서야 뒤늦게 두리봉으로 일부 우회하는 작전을 진행했을까?


1. 주공 루트가 우금치 였더라도, 처음부터 기관포와 병력이 집중된 우금치로 몰릴게 아니라, 일부 병력을 나눠 먼저 새재쪽 우회나 두리봉 쪽으로 강력한 공격을 함으로써 (그곳이 주공격 방향이라고 보임으로써) 우금치에만 집중된 적의 전략과 판단에 혼란을 주고, 주요 병력과 화력을 분산시킨후에 나중에 주력을 일시에 우금치로 몰아갔더라면..


2. 1만이나 되는 손병희 부대가 능치 일대에서 소수의 관군을 맞아 고착되어 있는 바람에 일본군과 관군의 주력은 편하게 우금치에 화력을 집중할수 있었다. 만일 손병희 부대가 소수의 병력만 능치로 배치하여 관군을 붙잡아두고,  나머지 주력은 완전 우회하여 공주시내로 들어가 공주감영 점령을 시도했으면, 우금치의 전봉준 주력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하던 관군과 일본군은 앞뒤로 적을 맞게되는 상황을 피하기위해  화력의 상당부분을 공주 방어를 위해 황급히 후퇴를 해야 했고, 우금치의 방어 전열은 크게 약해졌을 것이다. 


이처럼, 우금치 공격전에, 전선을 새재, 두리봉, 공주시내로 확대시킴으로써, 방어군으로 하여금 동학군의 목표가 우금치가 아닌것처럼 혼란을 주어, 적의 화력과 병력을 최대한 분산을 시켜놓고 난후 분산된 지역으로 이동할것 처럼 보이던 주력을 일시에 우금치로 집중하여 돌파 해야했는데, 병력수의 월등한 차이만 믿고 너무도 순진한 자신감으로 처음부터 전병력을 좁은 계곡으로만 몰아넣어 다수의 잇점을 못살리고, 상대로 하여금 방어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3. 애초부터 전봉준과 손병희의 주력이 산악지형과 금강이 감싸고 있어 방어가 유리한 공주를 무리하게 점령하려고 할게 아니라 우회 북상하여 김개남과 대승적인 목적을 위해 전술적으로 공조하는게 가장 최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김개남의 병력은 총포를 가진 병력만도 8천 이라 할정도로 강군 이었다는데, 탐관오리만 징치 하려는 전봉준과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김개남은 동학의 이름은 같았지만, 거병의 뜻이 달라 힘을 합치지 못하고, 각각 공주와 청주에서 대패를 하고 말았다.







견준봉에서 바라본 두리봉


두리봉은 당시에도 주봉 이라고 하여, 우금치에서 견준봉쪽 일대의 봉우리들 중에서 제일 높다.

다음지도에는 나오지 않을뿐더러, 네이버 지도에는 심지어 두리봉을 일락산 이라고 오기를 해놨다.

일락산은 견준봉에서 두리봉으로 가다가 우측 갈림길을 따라 가면 만나는 낮은 봉우리다.







견준봉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일락산 갈림길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 이니만큼 다음지도와 네이버지도에 정확한 지명이 표기 되었으면 싶다.







두리봉 오름길







두리봉 오름길에 뒤돌아본 견준봉

중앙에 뾰족한 봉우리가 견준봉 이다.







그새 해가 넘어간다.







두리봉 일몰

미세먼지가 많은 날들이라 일몰경이 그다지 곱지는 않다.








두리봉에서 바라본 견준봉과 석양







두리봉에서 바라본 견준봉과 주미산

주미산은 공주의 지형이 배와 같고 주미산은 배의 꼬리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서 유래가 되었고

지막곡산은 지막골 뒷산 이라는 의미로, 지막골은 질그릇 굽는 마을 이라는 뜻 이다.

 







두리봉 정상







두리봉과 건너편 주미산, 봉화대를 잇는 코스를 공주대간 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부른다.







두리봉 정상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장위영 참모관 구완희가 작성한 <공산초비기>에 따르면 영장 이기동이 이곳 주봉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네이버지도엔 일락산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두리봉 이라는 이름은 둥근 봉우리가 높게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 이라고 한다.

산아래 한씨묘가 있어서 한산 이라고도 한다는데, 현재 한산은 두리봉옆 40번 국도 건너에 따로 있다.

한산묘의 뒷산이라 해서 한산 이라고 했다는데, 한산묘의 뒷산은 바로 현재의 두리봉 이다.

현재의 한산이 동그랗게 생긴건 맞지만, 야트막한 낮은 산이고 한산묘의 위치도 그렇고

아무래도 국토지리원의 '한산' 위치가 잘못되었거나, 한산과 두리봉은 별개의 산이 아닐까..







두리봉에서 바라본 계룡산







두리봉에서 바라본 칠갑산












두리봉







두리봉 지나면 공주시 조망터가 나온다.







앞에 있는 산이 일락산 이다.

네이버 지도에는 현 위치 두리봉을 일락산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공주의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산이 바로 일락산 이다.

일락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해지게 마을인데, 해떨어지는 마을 이라는 뜻 이다.








왼쪽 중앙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공주의 진산인 봉황산 이다.

공주감영은 봉황산 너머에 있다. 지금은 공주 사대부고가 그 자리에 있다.







두리봉에서 바라본 계룡산과

봉화대(월성봉), 능암산, 주미산, 두리봉으로 이어지는 공주대간 능선






날이 어둑해지면서 하산을 서두른다.







경찰서로 내려서려 했는데, 등로가 임시 폐쇄되어 경일 아파트로 내려선다.

택시를 타고 어둠이 내려앉은 컴컴한 우금치로 돌아가 차를 회수한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역사의 현장, 짧은 시간 이지만 깊은 감회를 가지고 돌아보았다.


무섭게 군사력을 키워가는 일본이 요즘 총 한방 쏘지 않은일에 조준을 했다며 집요하게 시비를 건다.

마치 자신들 군사력 증강의 명분과 변명거리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

일본은 변함이 없고, 결코 변하지 않을것이다. 조선말 그때처럼 방심하면 안된다.



황치열 - 어찌잊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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