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1번 국도를 타고 계룡을 지나 연산에서 계룡산 신원사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간다. 우측에는 향적산에서 계룡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늘어서

있고 신원사로 가기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논산 노성산으로 향한다.

 

 

 

 

 

 

 

 

 

 

 

노성산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가기전에 명재 윤증의 고택을 지난다.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궐리사도 인근에 있다. 차를 세우고 고택을 먼저 둘러본다.

 

 

 

 

 

 

 

 

 

 

 

 

 

 

 

 

 

고택 앞 배롱나무가 물 가운데 심어져 있는 연못

 

 

 

 

 

 

 

 

 

초겨울 고택 앞 모과나무엔 노오란 모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명재고택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명재 윤증 (1629-1714)의 고택으로 논산 노성산 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통 한옥 체험', '고택숙박' 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아늑함과 시원함을 느낄수 있는 안채

 

 

명재고택은 명재 윤증이 작고하기 5년전 자식들과 그를 흠모한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거출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재 윤증은 고택에서 4km 떨어진 작은 초가에서 검소하게

살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셔서 명재고택의 '고'자를 옛 '古'가 아닌 연고 '故'자로 쓰고 있다.

 

 

 

 

 

 

 

 

안채는 평면이 'ㄷ'자형으로,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사랑마당과 바깥마당을 주변에

두었고, 안채의 남쪽에는 행랑채가 위치하고 있어, 전체 구조는 'ㅁ'자형을 이룬다.

 

 

 

 

윤증, 송시열, 윤휴... 당대의 이야기들

 

 

① 한때는 친했던 사이

 

 

윤증을 이야기 할때는 그 아버지인 윤선거를 먼저 언급을 해야만 한다.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이고, 서로 혼인으로 얽혀 있는 절친한 사이였다.  송시열과 윤휴 또한 인척관계로 맺어진 사이면서 두 가문은 송시열과 윤휴가 태어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송시열은 윤휴의 학문에 감탄을 하여 비록 당파가 달랐음에도 관직에 추천 하곤 하였다. 이렇듯 친했던 세사람이 서로 원수가 된데에는 성격의 차이도 있었지만 학문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서로 타협하지 않으려는 외골수 에서 비롯된다.

 

 

② 송시열의 주자 맹신과 윤휴의 자유로운 사상

 

 

몇년전 도명산을 다녀오며 근처의 화양구곡과 송시열에 대해 설명한적 있었다. 송시열은 서인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 권력자이자 학자로써 주자를 광적으로 맹신하고, 명나라를 지극존중 하는 사대주의 숭명사상을 가졌다고 언급한적이 있었는데, 그 도가 심했던것 같다.

 

송시열이 맹목적인 주자 추종자라면, 윤휴는 도전적인 천재 였다. 그는 송시열 처럼 무조건 적인 주자 추종 보다는, 주자의 이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의문점을 궁구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자의 제자였더라도 의문점을 해소치 못하고 그냥 놔두지는 않았을것 이라며 의문점이 생긴 부분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뇌동 하는것은 학자로서 옳지 않다 주장을 하였고, 심지어는 20대 초반에 이황과 이이의 이론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취하였다고 한다. 그는 <대학>, <중용>, <효경>등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다는 말인가> 라는 말과 함께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수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학계의 보수성이 지금도 무척 심한데, 조선시대에는 아마도 더욱 더 심했을것이다. 당시의 주류세력들은 주자 - 이이 - 송시열로 이어지는 계보만 정통으로 보고, 윤휴처럼 주자의 이론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들을 '사문난적' 이라고 몰아부쳐 숙청해 버리고 자신들 집단의 권세를 이어나갔다. 주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송시열에게 윤휴는 아마도 종교적 '이단' 이나 정신병자 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결국 송시열은 <주자가 모든 학문의 이치를 이미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의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다> 라며 비판했다.

 

 

 

 

 

 

 

 

 

 

 

 

담장이 없는 윤증고택

 

윤증 고택에는 신기하게도 담장도, 솟을 대문도 없다. 이는 바로 옆에 있는 노성 향교와

관련이 있는데 원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향교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심하던

19세기 초, 노론에서 소론의영수 집안의 동태를 감시하고자 노론의 주도로 권리사를

윤증고택에서 멀지 않은 현 위치로 옮기더니, 20∼30년 후 향교도 윤증고택의 바로

옆으로 옮겨 버렸다. 이러한 노론의 속셈을 알아챈후 그럴 바에는 모든 것을 보여주자는

차원에서 솟을대문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당당하고 가릴게 없다는 시원한 모습이다.

 

 

 

 

 

윤증, 송시열, 윤휴... 당대의 이야기들

 

 

③ 윤선거와 송시열의 사이도 금이 가고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는 이렇게 송시열이 윤휴를 비판하는것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것으로 보인다. 윤휴의 주자 해석에 대해 1653년 황산모임에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이며 비난하는 송시열에게 윤휴를 안타깝게 여긴 윤선거는 <젊은 학자가 자기 생각을 펼 수도 있지,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라며 윤휴를 옹호하였는데, 이날 송시열은 윤선거와  밤새도록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후 송시열은 윤선거와 윤휴와의 관계를 의심하였고, 이는 윤선거가 죽는날까지 그리고 죽은후에도 변치 않았다고 한다.  

 

 

2년후 동학사 모임에서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를 가까이 하지 마라고 종용 하면서 흑백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송자대전 122권에 의하면

 

송시열 : 이와 같이 오래도록 다툴 필요 없이 일단 한마디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네. 공이 한번 말해 보게.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또 주자가 그른가 윤휴가 그른가를 말일세.

 

윤선거 : 흑백으로 논하면 희중(希仲 윤휴)은 흑이고 음양으로 논하면 희중은 음이네.

 

송시열 :  공이 이제야 비로소 크게 깨달았구먼, 이는 사문의 다행이자 친구간의 다행이네.

 

그러나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휴와 인척 관계로 친했던 사이인데다, 윤휴의 학문적 천재성을 아까워 하며 송시열의 강요에 따르는척 했지만 실제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며, 송시열은 이런 윤선거에게 매우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④ 윤선거 사망후에 본격적으로 문제가 커진다.

 

 

송시열의 제자였고, 송시열의 뒤를 이을 차기 송시열로 생각할 만큼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의 갈등을 보며 안타까워 했지만, 부친의 사망후에 그의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윤선거에 대해 윤휴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비난하던 송시열은 윤선거의 상에 그래도 제문을 보내왔는데, 그와 원수지간이 되버린 윤휴 또한 제문을 보내오자 더욱 의심병이 도지고 비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것은 윤휴를 두둔하다가 윤선거가 송시열로부터 미운털이 박혔는데, 윤휴는 윤선거의 제문에 그를 우유부단 하다고 조롱한다.

 

내가 보기에 공은 어떤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소. - 윤휴의 제문 中 -

 

이후 윤증은 윤휴와 절교를 했다.

그런데 윤증은 송시열과 윤선거가 윤휴 때문에 갈라선 내막을 잘 몰랐는지, 아니면 그래도 송시열을 믿었는지, 윤증은 스승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윤선거가 생전에 써놓았지만, 보내지 않았던 송시열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한다. 이 편지에서 그는 남인 윤휴와 허적을 참람한 무리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폭넓게 생각하라며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면 그들 역시 감동하여 송시열을 따를 것이라며 화해를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윤증의 생각과 달리 송시열은 이 편지를 보고 매우 격분하며 윤선거를 비난했다고 한다.

 

물론 묘갈명을 제대로 써줄리도 없었다. 친구였고, 제자의 부친이었지만 묘갈명 써주기를 거절하는 송시열에게 윤증은 몇번의 간곡한 부탁을 하였고 심지어 울면서 까지 애원을 하였는데, 결국 몇번의 문구 수정부탁끝에 최대한 좋게 써준 성의없는 최종적인 윤선거의 묘갈명 역시 그의 삶을 조롱하는 내용이 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하며 마음을 돌리려 전달했던 그의 편지로 인해 거꾸로 역효과를 내며 광분했던 송시열은 윤선거가 평생을 두고 아파하던 그의 유일한 약점을 다시 꺼내면서 윤휴를 두둔한 윤선거를 그와 같은 사문난적 급으로 비난했다.

 

윤휴도 그렇고, 송시열도 그렇고, 대단한 학식을 가졌다는 분들이 한때 절친했던 친우의 제문에 조롱의 글을 보낸것을 보면 학식과 인품은 비례하지 않는것을 보여주는듯 하다.

 

 

 

 

 

 

 

 

 

 

 

 

 

 

 

 

 

 

 

 

 

 

 

離隱時舍(이은시사)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천시(天時)를 연구하는 집

 

 

 

 

 

윤증, 송시열, 윤휴... 당대의 이야기들

 

 

⑤ 윤선거의 치명적인 과거

 

 

윤선거는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권순장, 김익겸 등과 함께 성문을 지켰다.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권순장·, 익겸과 윤선거의 처는 자살했으나, 그는 평민의 복장으로 모친과 함께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를 만나 함께 죽으려고 했다고 하는데 남한산성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충남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학문에 정진하였다.

 

송시열은 이를 두고 당시 아버지가 살아계셨음으로 마음대로 죽을수가 없었다 라며 두둔하였는데, 이후 윤휴 건으로 중립을 지키는 윤선거에게 서운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절친이자, 인척 그리고 동문이자 같은 서인으로 더할나위 없이 가까웠던 그를 비난한다.

 

수치를 모르고서 말꼴을 먹고는(甘心莝荳不知羞)
뻔뻔스레 다시 와서 호탕하게 노니누나(靦面重來躡儁遊).
청류를 향해 옷소매 빨지 마소(莫向淸流涴衣袂).
때 묻은 옷소매에 청류 더럽혀질까 두렵소(却恐衣袂涴淸流).

(출처 : 송자대전)

 

 

⑥ 결국 송시열과 갈라서는 윤증

 

 

묘갈명 건으로도 서운했지만 스승의 예를 다하려고 했던 윤증은 송시열이 자신이 두둔했었던 옛일을 다시 끄집어 내며 윤선거를 이리 비난하자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결국 윤증은 사제 간의 의리를 끊고 <송시열은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 그는 나의 집안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헐뜯으려 한다> 라며 <아버지는 군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죽어야할 의리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결국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의 늪으로 빠져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회니시비(懷尼是非) 이다. 회(懷)는 송시열이 살던 회덕을, 니(尼)는 윤증이 살던 이성(尼城, 논산시 노성면)을 말한다.

 

송시열이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지않고 살아나온곳을 비난하는것을 반박하는 이들은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살아남았을 때 송시열은 남한산성에 있었는데, 그때 윤선거가 일개 유자(儒者)에 불고했지만, 송시열은 대군사부의 벼슬아치였다.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벼슬아치가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유자를 욕할 수는 없는 노릇> 이라고 하는데, 나 역시 이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택 앞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정말로 아름다울 것 이다.

 

 

 

 

 

윤증, 송시열, 윤휴... 당대의 이야기들

 

 

⑦ 소론의 영수 백의정승 윤증

 

 

윤증은 36세에 내시교관, 38세에 공조좌랑, 39세에 세자익위, 40세에 전라도사, 44세에 사헌부 장령, 45세에 집의 55세에 호조참의, 57세에 이조참판을 거쳐 68세에 공조판서, 70세에 이조판서, 73세에 좌참판이 제수됐었고 81세에는 우의정, 83세에 판중추부사 등 18번 관직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감당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사임상소를 18번이나 올리면서 한사코 벼슬을 사양했다.

 

이런 명재에게 사람들은 백의정승 이라 불렀으며, 윤증의 학식과 인품을 알고 있는 관리들은 자리를 감당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그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윤선거로 인해 송시열과 윤증이 갈라선 일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송시열과 윤증은 각각 노론과 소론의 영수로 조선 후기 정치계는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담이 없는 명재고택

 

 

 

 

 

 

 

 

 

명재고택에는 장독대가 참 많다.

 

 

 

 

 

 

 

 

 

 

 

 

 

 

 

 

 

장독대 위엔 400년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명재고택에는 고택의 역사가 담긴 300년 역사의 씨간장과 씨된장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고택에서는 한옥체험과 더불어 장을 판매하기도 하는데, 간장과 된장을 각각

전독간장, 교동된장 이라 부른다. 교동(校東) 이라는 이름은 향교가 윤증 집안을

감시하기 위해 옆으로 이동을 해오면서 향교의 동쪽에 있는 집이라 해서 붙혀진 이름

이며, 전독간장은 항아리(독)째 전해져 내려오면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간장을

달이는 날에는 온 동네에 장 냄새가 진동을 해 몸져 앓아 누워있는 환자도 교동댁의

간장을 좀 먹었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고택의 사당

 

 

 

 

 

 

 

 

 

뒤켠

 

 

 

 

 

 

 

 

 

 

 

 

 

 

 

 

 

 

 

 

 

 

 

 

 

명재고택 옆의 향교

 

노성향교는 처음 노성초등학교 터에 창건하였다가 이후

노론에서 소론영수 집안의 동태를 감시하고자 옮기면서

향교 터의 높이를 고택보다 높게 하였다고 한다.

 

 

 

 

 

 

 

 

 

 

 

 

 

 

 

명재 고택 인근에 있는 궐리사로 걸음을 옮겨본다.

 

 

 

 

 

 

 

 

 

궐리사는 공자가 자란 마을인 궐리촌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공자의

영정이 봉안된 영당을 뜻하는 것이고 우리나라에는 강릉,제천,

화성(수원)등에 있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노성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공자상과 궐리탑

 

궐리사는 숙종 13년 (1687년) 송시열이 건립을 추진하였고 권상하 등

송시열의 제자들이 숙종 42년 1716년에 노성 이구산에 세웠다. 후에

중국에 가는 사신편에 공자의 영정을 부탁하여 숙종 44년에 봉안하였다.

정조 15년 엔송조 오현(주돈이.정호.정이.장재.주희)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후 1805년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석주에 음각으로 쓰여진

궐리(闕里)라는 글씨는 송시열의 제자인 문순공 권상하의 작품이다.

 

 

 

 

 

 

 

 

 

 

공자상

 

 

 

 

 

 

 

 

 

궐리사 위치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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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산 산행을 하면서 명재고택과 궐리사를 덤으로 구경하고 왔다.

궐리사가 이곳에 자리한 이유도 이 지역의 지명때문이 아닌가 싶다.

완만한 노성산을 천천히 걸어올라 그곳에서 계룡산을 멋지게 조망하고

내려와 명재고택 및 궐리사를 한번 둘러보는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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