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기(天冠山記) - 정명국사 천인 (동문선에 수록된 천관산기의 해석본)

 

 

천하에 통한 것이 한 기운이 새면 내와 개천이 되고, 쌓이면 산과 뫼 뿌리를 이룬다.

오령(烏嶺) 남쪽 바닷가 옛적 오아현(烏兒縣) 지경에 천관산이 있다.

꼬리는 궁벽한 곳에 서리고 머리는 바다에 잠기어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며 높고 우뚝하게 솟아 여러 고을 땅에 걸쳐 있으니, 그것은 큰 기운이 쌓인 것이리라.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이 산을 지제산(支提山)이라고도 한다” 하는데 화엄경에도 있듯이, “보살이 머물렀던

곳을 지제산이라 이름하고, 현재 보살이 있는 곳을 천관이라 이름한다.”는 설도 이와 같다.

 

산의 남쪽 언덕에 포개진 돌이 우뚝서서 두어 길이나 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이

성사(聖師)의 신통력을 빌어서 8만 4천의 탑을 세운 것인데, 이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탑 앞 끊어진 언덕 위에

층대가 한 길 남짓하게 우뚝솟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부처님과 가섭(迦葉)이 편안하게 앉았던 곳이다.

상고 하건데, 불원기(佛願記)에 이르기를 “내가 가섭과 더불어 조용히 앉았던 곳에 아육왕이 내가 입적한 뒤에

탑을 세워서 공양하겠다.” 하였는데 아마 이곳이리라. 신라 효소왕이 유밀에 있을 때 부석존자(浮石尊者)라는

사람이 그 아래서 살았는데, 지금의 의상암(義湘庵)이다. 면세(面勢)가 요소(要所)를 차지하고 맑고 수려하기가

천하의 제일이어서 창문을 열어 놓고 내려다 보면, 호수와 산의 만가지 떨기가 한꺼번에 궤안(几案)으로 들어온다.

한가롭게 앉아 있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풀리어 심오한 진리의 경지로 들어가게 한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 부처님과 가섭이 여기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뒤에 통령화상(通靈和尙)이 탑의 동쪽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지금의 탑산사이다. d니 대사가 일찍이 꿈을 꾸니,

북쪽 산허리가 땅 속에서 솟아 나오는데 가지고 있는 석장(錫杖)이 날아서 산봉우리를 지나 북쪽 산허리에

이르러 꽂히었다. 석장이 꽂혔던 곳이라고 어렴풋이 생각되는 곳에 덤불을 베어내고 절을 지었으니, 지금의

천관사(天冠寺)가 그것이다.

 

신라 신호왕(神虎王)이 태자가 되었을 때에, 마침 임금의 견책(譴責)을 당하여 산 남쪽 완도(莞島)로 귀양갔는데,

화엄홍진(華嚴洪震)대사가 본래 태자와는 좋아하는 사이라, 동궁(東宮)의 일이 급함을 듣고 달려가 이 절을

의지하여 밤낮으로 정성껏 예를 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불렀다. 곧 여러 신중(神衆)을 감동시켜 부름에

응하여 절의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으니, 지금의 신중암(神衆巖)이 그것이다. 절 남쪽으로부터 바라보면

바위들이 더욱 기이하여 뾰죽하게 우뚝 솟은 것은 당암(幢巖)이요, 불쑷 튀어나서 외롭게 매달려 있는 것은

고암(鼓巖)이요, 구부정하여 몸을 굽혀 명령을 듣는 것 같은 것은 측립암(側立巖)이요, 엉거주춤하여 사자가

뽐내는 것 같은 것은 사자암(獅子巖)이요, 겹겹이 쌓아 올려서 굄질하여 놓은 것 같은 것은 상적암(上積巖)․

하적암(下積巖)이요, 외연(巍然)히 가운데 서서 홀로 높은체 하는 것은 사나암(舍那巖)이요, 뾰쪽뾰쪽하게

양쪽을 옹위하여 공결(空缺)된 곳을 보충하게 하는 것은 문수암(文殊巖)․보현암(普賢巖)이다. 참으로 화엄대덕

(華嚴大德)이 도를 닦는 곳에 바른 것에 의하여 서로 나타나고, 물건과 내(我)가 온전히 참되었으니, 그 같은

곳을 형상하여 지목한 것이 공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천관사로 부터 남쪽으로 5백 보를 올라가면 작은 암자가 낭떠러지 언덕 바윗집 아래에 끼어 있어서 아홉 바위의

 정기를 머금었으니, 그리하여 구정암(九精庵)이라 이름을 붙였다. 만일 암자에 있는 사람 중에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신령이 반드시 무섭게 하여 머물러 살 수 없게 한다. 만일 마음이 참되고 깨끗하면 반드시 별과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혹 금종(金鐘) 소리가 바위 골짜기에 울리는 것도 들을 수 있어서, 무릇

정(定)을 닦고 혜(慧)를 익히는 자는 반드시 그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남악(南嶽) 법량사(法亮師)가

일찍이 와서 암자에 머물러 있는데, 처음에는 종소리를 듣고 다음에는 별빛을 보고, 삼칠일(三七日)이 되어서는

다라니(陀羅尼)를 얻었는데, 그 때에 혜해( 慧解)가 제일이라고 일컬었다. 암자의 구멍으로부터 비탈을 기어올라

백여 보를 기어올라가면 넓적한 석대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한다. 산에 오르는 자가 위험한 길에 곤란

하다가 여기서 쉬면 기쁘다는 뜻이다. 석대 앞 숲 사이에 옛길이 있어서 지름길을 이루고 있는데, 이 길을 찾아

올라서 산꼭대기에 이르면, 사방의 전망이 확 트인다. 구름과 놀이 맑고 선명하며 초목이 빛나고 맑으며 쇠잔한

산과 나머지물(殘山剩水)이 푸른 소라를 쭉 늘어놓고 힌비단을 손바닥에 놓고 보는 것 같다.

 

산꼭대기에서 남으로 3십 리쯤 달리면 선암사(仙巖寺)가 있고, 절 북쪽에는 바위가 총총히 있는데 지선(地仙)이

살던 곳이니, 아마 단애옹(丹崖翁) 황석공(黃石公)의 다음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절의 남쪽 다른 봉우리 위에

있는 미타암(彌陀庵)의 북쪽에 신령한 돌이 있는데, 높이와 크기가 겨우 8척쯤 되는 것으로 손으로 떠밀면

끄덕하여 움직이는 것 같으니, 아. 참 놀랄 만하다. 또 포암(蒲巖)이 서쪽에 있는데, 위에 있는 모난 우물이

깊이는 한 자 쯤 되고 영롱한 샘이, 깊고 맑아 사철 마르지 않고 푸른 부들 두어 포기가 돌 틈에 나서 마치

이 샘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그 외에도 너무 이상하고 심이 괴이하여 오똑한 것, 납작한 것, 빠끔한 것,

우뚝 일어난 것, 폭 엎드린 것들이 올망졸망하고, 높직하고, 펑퍼짐하고, 두루뭉실하고, 뾰쭉뾰쭉하며

천태만상이니 기이한 것을 다 기록할 수 없다.

 

어찌 조물주가 정수한 기운을 여기에만 뭉쳐 놓고 큰 바다를 한계로 하여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는가.?

슬프다! 사람의 성품이 산수를 사랑하여 나막신에 납(蠟)을 칠하고 올라간 이도 있고, 나귀를 거꾸로 타고

돌아간 이도 있고, 혹 며칠씩 묵다가 돌아오기를 잊는 이도 있고, 오래오래 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으니, 오직

우뚝 솟은 산을 구경하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그 정서를 기쁘게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개 뜻을

산수 사이에 붙이고 인지(仁智)의 즐거움을 좇아서 장차 본성을 회복하고 그 도를 이루자는 것이다. 더구나

여러 대사(大士)의 그 넓은 눈으로 경계하니 화장(華藏)의 장엄(莊嚴)한 경치가 있는 곳에서 바로 앞에 나타

나고, 백성의 여러 벗을 반 걸음이라도 찾을 수 있으니, 비록 조화(造化)를 폈다 오무렸다 하여 산과 바다를

삼켰다 토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나머지 일이니 그다지 괴이할 것도 없는 것이다.

 

지난 경자년(1240년) 가을 7월에 내가 일찍이 이 산에서 놀면서 성적(聖跡)을 탐방하였는데, 탑산(塔山)의

주공(主公)인 담조(曇照)가 나에게 고적(古跡)을 보여 주며 말하기를 “ 이 초본(草本)이 산 뒤 민가에 유락

(遺落)되어 있는데, 우연히 가서 얻게 되었다. 세월이 오래되고 찢어지고 썩어서 글자가 없어진 것이 많으니,

그 뜻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새롭게 하여서 후세에 보여주면 이것도 또한 유통(流通)의 한 단계가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때 마침 내가 다른 곳에서 청하여 가므로 생각을 모아 볼 겨를이 없었는데, 뒤에 담일(湛一)이라는

자가 또 이 초본을 나에게 주었다. 상자 속에 넣어 둔지가 오래되었는데, 요즈음 한가한 날에 우연히 검열하게

되어 대강 그 줄거리를 기록하여 그 뜻에 응하고, 초본과 함께 바르게 돌려보내노라.

 

※ 동문선(東文選)은 신라시대에서 조선 숙조대까지의 시문(詩文)을 정선하여 모아엮은 책이다.

조선성종때(1478년) 서거정등이 편찬한 정편 130편과 숙종때(1713년) 송상기 등이 편찬한속편 21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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