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산행기

 

 

이정구 [李廷龜, 1564~1635]

 

 

 

한북문(漢北門)에 올라,..< 지금의 홍지문을 말함 >..홍제원(弘濟院)을 지나가니, 사방 들녘에 보리가 익어 누렇고, 창포 노래에 쟁기 뒤척이니, 갑자기 고향 전사(田社) 의 정취가 일어났다. 낮에 진관사(津觀寺)에서 쉬었다. 절이 쇠잔하고 승려도 적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지만 메마른 바위와 드문드문 있는 나무그늘, 폭포의 흰 물결을 보고있노라니 적이 속세에 찌든 뼈가 벌써 허물을 벗고 있음을 느끼겠다.

푸른 들에 나귀를 풀어놓고 시원한 서쪽 누각에서 쉬었다. 졸다 일어나니, 소반 가운데 채소가 향긋하고 차가 담박했다. 여기에서 청담(靑潭)은 다만 3,4후 (堠정도 ##거리라고 한다. 해가 서쪽으로 지니 마음이 바빠져서 곧장 북루(北壘)로 향하니, 모든 맑은 흥취도 사라졌다. 이로부터 지세가 점점 높아지고 돌과 자갈이 서로 버티고 있으나, 필로(蹕路) 가 숫돌같이 평평하여 지팡이와 나막신을 번거롭게 할 필요 없었다. 대략 몇 리를 가서 성 밑에 이르러, 대서문(大西門)에 올랐다. 산이 삼면을 가리고 있어, 시야가 넓지 않았으나, 은빛 바다 일대에 푸른 산봉우리〔螺鬟〕너머로 어슴푸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물에 솟은 섬이었다.

누각을 내려와 말을 치달려 중성(重城)으로 돌아드니, 산은 더욱 빼어나면서 험준하고, 물은 더욱 맑으면서 세찼으며, 바위는 더욱 고우면서 기이했고, 아름다운 나무가 우거져 그윽한 새가 서로 지저귀었다. 절간과 불탑이 구름 사이에 솟아 있고, 소나무 울타리를 한 띳집에서 좁은 길을 끼고 밥을 짓고 있었다.

맑은 여울이 돌아흐르는 곳에 우뚝 선 붉은 누각은 바로 산영루(山暎樓)였다. 아로새긴 난간이 시내에 잠겨, 석양에 붉은 물결 일렁이고, 숲에 이내가 자욱하여 푸른빛이 성긴 창에 떨어지니, 일찍이 이 누각의 경물을 묘사한 시에 화답했었는데, 올라보니 그 기이함을 곱절 더하다. 다시 오언율시를 지었다.

저녁에 중흥사(重興寺) 동쪽 방[東寮]에서 머무는데, 부질없이 흥이 나서 시를 지었다. 어떤 스님이 자신이 치영(緇營) 의 주인이라고 하니, 바로 승려를 통솔하는 벼슬을 맡은 승려로서, 푸른 눈동자에 긴 눈썹을 지녔다. 죽순과 막걸리를 대접하면서 산중의 고사를 잘 갖추어 말해줬다. 북한산은 백제 온조왕의 옛 도읍으로 성을 쌓은 것은 숙종 신미년(1691년, 숙종 17년)이었다. 거주하는 백성은 7백여 호, 사찰은 대략 열한 곳인데, 상운사(祥雲寺), 진국사(鎭國寺), 보광사(普光寺), 태고사(太古寺)가 그 중 가장 뛰어난 곳이다. 오영(五營) 의 곡식 창고가 절 앞에 늘어서 있는데, 군량미〔餉穀〕가 거의 만포(萬包)이다. 동남쪽에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는 대〔將臺〕’를 만들고, 병장기는 관아 창고와 각 사찰에 나누어 보관했다. 경영(京營)에서 병기와 군량을 관리했고, 성을 담당하는 장수가 그 일을 맡았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치영에 걸린 어제시판을 삼가 보고, 행궁(行宮)에 들렀다. 행궁은 나월봉(蘿月峯) 남쪽, 남장대(南將臺) 아래에 있었다. 이어 동장대(東將臺)에 오르니 절과 군영 건물이 손바닥 안에 있는 듯 뚜렷하고, 산의 형세는 삼면으로 절벽이 우뚝한데, 서쪽 한 모퉁이만 약간 평평했다. 물이 그 입구를 돌고, 석회로 바른 성가퀴〔粉堞〕와 층층이 지은 보루가 아득히 산 등성이를 에워싸고 있어, 산이 하늘처럼 둥글게 엎드린 것이 몇 굽이인지 모르겠다.

절벽은 묶어 세운 듯 칼과 창처럼 빽빽하게 둘러서 있는데, 가장 우뚝 솟은 것이 세 봉우리이다. 공중에 떠서 하늘로 솟구친 것이 백운대(白雲臺)이고, 그 북쪽에 우뚝 선 것이 만경대(萬景臺)이며, 그 남쪽에 우뚝하게 서서 동쪽까지 뻗어 웅거한 것은 인수봉(印綬峯)이니, 이것을 삼각산이라고 한다. 바라보면 옥 같은 불탑〔玉浮屠〕이 높이 솟아 남쪽까지 뻗어가다 약간 낮아지다가, 갑자기 솟은 것이 바로 노적봉이다. 삼각산 중에 백운대가 가장 높다. 그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산과 바다까지 미친다고 한다. 산허리에 옛날부터 바위에 구멍을 뚫어 발을 댈 수 있는 곳이 있는데, 한 번 미끄러지면 천길 낭떨어지라 결코 목숨을 아끼는 자가 아니라야 감히 다리로 버틸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올려다보는데, 오직 모골이 서늘질뿐이다. 바람이 불어오니 어느덧 하늘 높이 올라 삼청(三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생각이 든다.

대체로 우리나라 산은 기세가 높고 구불구불 내려오는데, 장백산(長白山)에서 가까이 솟은 것은 불암산(佛巖山)이고, 불암산이 뻗어서 수락산(水落山)이 되었고, 또 돌아서 도봉산(道峯山)이 되었으며, 기운이 서려 모였다가 둘러쳐진 장벽으로 배열되었다. 그 중 빼어난 것은 군대 앞에서 만마가 달리는 것 같은 암벽으로 솟았고, 오랜 시간 동안에 불탑이 층층이 서서 삼각산으로 많이 모여들었다.

삼각산 대맥은 동쪽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뻗어 중앙을 둘러 안아 북한산 한 구역을 열었고, 문수봉(文殊峯) 한 갈래가 남쪽까지 뻗어 왕성(王城)의 북악(北嶽)이 되어 우리 억만년 왕실의 큰 복의 기반이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만든 서기(西岐) 이다. 아, 기이하도다. 서울 성시(城市)가 산봉우리에 가려 가까우나 보이지 않고, 눈 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은은한데 아름다운 기운이 떠 있으니, 백악산(白岳山)과 종남산(終南山) 사이라는 것을 알겠다.

동남쪽으로 끝까지 쳐다보니 끝이 없어, 긴 강은 명주를 펼쳐 놓은 듯하고, 먼 산봉우리에서 고운 연기가 나니, 완연히 수놓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산수였다. 내가 이에 사방을 바라보고 탄식해서 말하기를, “이 곳에 오른 자가 무슨 한이 있겠는가? 스스로 높이 올라 본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대단한 경관임을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어서 옛날에 강국이라고 불렀던 동한(東韓)을 생각하니, 큰 당나라의 병력으로도 살수 서쪽에서 머뭇거리다가 칼날을 거두어 돌아간 것은 그 지세가 절벽으로 막히고, 성의 해자가 험준하고 좁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 그 험준함을 깎고 스스로 방비함을 잃어버리고 굳센 도적을 깨우쳐서 성 아래의 수치를 남겨 병자호란 때의 눈물이 천고토록 눈을 찢어지게 하였다. 그러니 구름까지 닿는 북한산성으로 양을 잃고 난 뒤에 우리를 고친 것은 진실로 전란〔陰雨〕에 대한 경계이다. 그러나 수비는 장수를 얻는 데 있고, 보전하는 것은 인화(人和)에 있다. 이러한데 금성탕지(金城湯池)의 근심 없음만을 믿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지금 나와 그대들은 한가로이 군문〔轅門〕의 고각 소리를 들으면서, 한가한 날을 얻어 여유롭게 놀러와 이곳에서 즐기니, 태평성세의 다행이 아니랴.

대동문(大東門)을 나와 말을 놓고 걸어갔다. 돌비탈길이 험하여 마른 다리가 비틀거리니, 가면서 ‘행로난(行路難)’을 길게 읊조렸다. 조계(曹溪)의 뛰어난 경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보는 중에 피곤이 심해졌다. 또 가뭄 끝이라 폭포의 물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시로써 빚을 남기니, 매우 아쉬웠다.

고개를 내려와 기 노인(奇老人) 은 바로 돌아가고, 나는 도원(道院)으로 향하여, 장난삼아 ‘오말루원(午抹樓院)’이라는 시를 짓고, 서계(西溪)로 향하여 세이정(洗耳亭)에서 쉬었다. 청절사(淸節祠)를 방문하니, 바로 매월당 김시습의 영혼을 모신 곳이다. 진상(眞像)에 절을 올리고, 느낀 바를 절구 두 수에 붙였다. 해질녘에 도봉산으로 들어가니 골짜기 안은 구름이 걸친 숲으로 이미 속세의 기운이 아니었다. 푸른 벽에 붉은빛으로 ‘도봉동문(道峯洞門)’ 네 개의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도봉 서원에 이르러 다만 사당 앞에서 배알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강당이 널찍하고 사롱(紗籠) 속에 어필로 ‘도봉서원’이라고 쓴 큰 액판(額板)이 걸려 있었다. 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개(開)’ 자 칠언절구가 있고, 서쪽 문미에는 ‘계개(繼開)’라고 썼으며, 동쪽 익실(翼室) 에는 ‘의인(依仁)’이라 편액했고, 서쪽 익실에는 편액이 없다. 동쪽에 ‘광풍당(光風堂)’이 있는데, 관을 쓴 자와 동자 4, 5인이 마루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서쪽 모퉁이의 작은 문에 ‘영귀(咏歸)’라고 써 있다. 남쪽으로 물이 쏟아져 내리고 푸른 병풍을 친 듯한 숲 위에 누각 하나가 날아갈 듯 서 있는데, 오른쪽은 ‘침류(枕流)’라고 편액했고, 왼쪽은 ‘제월(霽月)’이라고 편액했다. 뜰 가운데 늙은 괴나무와 우거진 오동나무가 늘어서 있는데, ‘침류당’에서 잠시 쉬노라니, 번거로움과 시끄러움이 저절로 사라져 가슴속이 후련했다.

시냇가로 걸어나와 돌아보니 천길 되는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았는데, 큰 맥 하나가 일어나 삼각산으로 달려나가 왼쪽 한 자락으로 서려 포부를 편 듯 의젓하여, 마치 도를 깨우친 자가 단정히 손을 모으고 있는 기상과 같으니 ‘도봉(道峯)’이란 이름에 알맞다. 백 줄기 맑은 시냇물이 발원하여 진수를 하나의 골짜기로 쏟아내니, 바위에 부딪쳐 물살이 거세지고, 소용돌이치다 폭포로 흐른다. 침류헌 밖으로 폭포가 웅장하여, 뿜어낸 것은 푸른 무지개와 같고, 소리는 우레가 들끓는 것 같으며, 물방울은 구슬을 흩뿌린 것 같았다.

물이 콸콸 흘러 아홉 구비에 옥 부딪는 소리 울리고, 물을 끼고 어지러운 바위가 이가 어긋난 것처럼 여기저기 있는데, 어떤 것은 넓고 커서 앉을 만하고, 어떤 것은 구불구불하여 하나로 잇기 어렵다. 마치 용이 웅크리고 범이 걸터앉고 거북이가 엎드리고, 새가 나는 것 같은데 물이 스며든 곳에 바위가 쌓여 물이 넘실거리고 부대끼어 색이 밝고 미끄러워 하나하나가 유리를 땅에 깔아놓은 것 같다. 바위 위에 힘찬 필치로 몇 구를 붉게 새겼는데, 바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두 분 선생과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아, 우암 선생이 먹으로 쓴 시의 흔적을 어루만지니 그 당시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사모하는 보잘것없는 이 마음을 사당 앞에 ‘다만 후인이 와서〔唯有後人來〕’라는 싯구에 붙이니, 혹자는 뒤에 온 사람이 추배될 시참으로, 도봉산 아래 이렇게 맑고 훌륭한 신선 마을〔洞府〕을 연 것은 은연중 우리 도가 맑고 깨끗한 기운을 모아 길러 영령이 함께 흠향받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산악의 바른 기운이 도학의 진원이라면 천년토록 오랫동안 보존될 것이니, 또한 기이하지 않은가?

저녁이 다되어 근원을 찾을 방도가 없었다. 골짜기 북쪽에 옥천사(玉泉寺)가 있는데, 역시 올라 보지 못했으니 아쉽다. 밤에 ‘의인재’에서 묵으면서 등불을 돋워 시를 지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산에 구름이 일어나고 비가 장난했다. 해질녁 하늘이 열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하늘이 내가 돌아가려는 것을 안다는 것에 문득 기뻤다. 흥이 나서 서둘러 안장을 준비하고 골을 나오니, 구름이 엷고 바람이 가벼웠다. 한번 동소문으로 들어오니 옛날처럼 가벼운 먼지 속의 객인데 옷깃에 가득한 노을과 이내가 아직 옷자락을 스치는 것을 알겠다. 마침내 기록해서 훗날 볼 것에 대비한다.

 

출처 : http://politizen.or.kr/zeroboard/zboard.php?id=pds_1&no=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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