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ㅡ 퇴계 이황 ㅡ

 


나는 어릴 적부터 영주(榮州)와 풍기(豊基) 사이를 자주 왕래하였으니, 저 소백산(小白山)이야 머리만 들면 보이고 발만 옮겨 놓으면 올라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그리기만 하고 직접 가보지 못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요행히도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오게 되니, 나는 저절로 백운동(白雲洞)의 주인이 되어 마음속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동안의 소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에 걸쳐 공무(公務로 말미암아 세 번씩이나 백운동을 들렀지만 한 번도 산문(山門)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었다.

 

4월 22일(신유)

이윽고 여러 날 이어지던 비가 개고 먼 산의 풍경이 목욕을 한 듯이 청명하였다.

나는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에 가서 유생(儒生)들과 함께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산을 향하여 올라갔다. 민서경(閔筮卿)과 그 아들 응기(應祺)가 길을 따라 나섰다.

 

우리 일행은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갔다.

골짜기는 깊숙하고 숲속은 고요한데, 여기저기, 개울물이 돌에 부딪쳐 흐르는 소리가 절벽 사이에서 요란하였다.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렀다. 초암은 원적봉(圓寂峯)의 동쪽과 월명봉(月明峯)의 서쪽에 있었다.

여러 갈래의 작은 봉우리들이 위의 두 봉우리에서 갈라져 내려오다가 이 초암을 끌어안듯이 안아돌아 암자 앞에 와서 산문을 이루고 멈추어 섰다.

암자의 서쪽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내려오다가 고여서 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는 제법 평평한 자리로 이루어져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만하였다.

그곳에 앉아서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며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비할 데 없는 운치가 느껴졌다.

옛날 주경유(周景遊, 경유는 주세붕의 字)는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근처에는 기왕에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으니 백운대라고 하면 이름이

서로 혼동될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백(白)자를 고치어 '청운대(靑雲臺)' 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종수(宗粹)스님이 내가 이곳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묘봉암(妙峯庵)에서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청운대 위에서 술을 두어 잔씩 마셨다.

그 때 민서경은 학질이 걸려 돌아가겠다고 하였고, 당시 나는 잔병 치레를 하여 비록 쇠약한 몸이지만 이 산을 꼭 한 번 올라가 보고싶다고 하니 스님들이 서로

의논한 뒤에 간편하게 만든 가마인 견여(肩輿)를 만들어 왔다.

옛날 주태수(周太守,주세붕)께서 이미 사용하였던 방법이라고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허락하고 민서경과 작별한 뒤에 우선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민응기와 종수 그리고 여러 스님들이 혹은 앞서고 혹은 뒤서면서 태봉(胎峯)의 서쪽에 이르렀다.

개울 물을 하나 건너서 비로소 말에 내려 걸어 올라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견여를 타고앉아 아픈 다리를 쉬었다.

 

이날은 철암(哲庵). 명경암(明鏡庵)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다.

내가 보기에는 철암이 가장 깨끗하였으며 맑은 샘물이 암자의 아래와 뒤에서 흘러나와 암자의 동서로 갈라져 내려갔는데 맛이 매우 달고 차가웠다.

그리고 주위의 경치가 끝없이 탁 트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석륜사의 북쪽에 있는 바위는 생김새가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까닭으로 이곳을 예로부터 봉두암(鳳頭巖)이라고 불려왔단다.

그 서쪽에 바위가 또하나 우뚝 서 있는데 사다리를 놓고서야 그곳을 올라갈 수가 있었다.

주경유가 광풍대(光風臺))라고 이름지은 곳이다.

절 안에는 바위에 부처상을 조각하였는데, 스님들은 그것의 영험이 대단하다고 하였으나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24일(계해)

걸어서 백운암(白雲庵)에 도착하였다.

이 암자를 지은 스님은 이곳에서 좌선(坐禪)을 하다가 선(禪)의 이치를 깨달은 뒤에 홀연히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 암자에 중이 없었다.

다만 암자의 창 앞에는 우물이 있고, 뜰 아래에는 잡초들이 을씨년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그 암자를 지나니 길이 더욱 험준하였다. 산길을 곧바로 올라가자니 마치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당기고 밀면서 산마루에 올랐갔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견여를 탔다.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 쯤 가니 석름봉(石凜峯)이 있었다. 봉우리 꼭대기에 풀로 엮은 초막(草幕)이 있다.

초막 앞에는 나무토막들을 이리저리 걸쳐 놓은 것이 있는데 매를 잡는 사람들이 만든 매잡는 틀이란다.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알 만하였다.

 

그 봉우리 동쪽 몇 리쯤에 자개봉(紫蓋峯)이 있고 거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수 리를 더 가면 또 한 개의 봉우리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다.

이것이 국망봉(國望峯)이었다.

맑게 갠날 햇볕이 밝게 비치면 여기서 용문산(龍門山)과 나라의 수도인 서울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산에 운무(雲霧)가 끼어서 먼 곳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흐릿한 중에서도 서남쪽으로는 월악산이 은은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태백산(太白山)과 청량산(淸凉山) , 문수산(文수山), 봉황산(鳳凰山)이 보일듯 말듯

늘어서 있다. 그리고 저 남쪽으로는 팔공산(八公山)과 학가산(鶴駕山) 등 여러 산이 있을 것이고 그 북쪽으로는 오대산과 치악(雉嶽) 등 여러 산이 구름 사이에서

출몰하였다.

또 여기서 볼 수 있는 물로는 죽계(竹溪)의 하류인 구대천(龜臺川)이 있고, 한강의 상류인 도담(島潭)이 보인다.

곁에 있던 종수가 말하기를,

"이런 높은 곳에서 먼곳을 바라보려면 서리가 내린 뒤인 가을 낮이나 비가 막 갠 뒤의 화창한 날씨라야 합니다.

옛날 주태수께서도 비때문에 5일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올라갔기 때문에 비로소 먼 경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그렇겠다고 여기면서도, 산에 오르는 맛이란 꼭 눈으로 먼 곳을 보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산 위에는 기온이 낮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자라는 나무들은 모두들 동쪽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고 나뭇가지들도 몹씨 외틀어지고 왜소하였다.

그리하여 계절로 보아 4월 하고도 그믐께인데도 이제서야 나뭇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니 1년 내내 자라는 기간이 얼마되지 않을 듯하였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주위환경의 온갖 고난을 버텨나가느라고 마치 전쟁을 대비하는 듯한 태세를 하고 있으니 깊은 숲속에서 쑥쑥 자라는 나무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형태가 달랐다.

곧 환경에 따라서 체질이나 성품이 바뀌는 것은 식물이나 사람이나 똑 같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8,9 리쯤 서로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 철쭉이 숲을 이루었으며 지금 마침 그 꽃들은 한창 피어나서 울긋불긋한 것이 꼭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다.

어쩌면 호사스러운 잔치 자리에 왕림한 듯한 기분이다.

산봉우리 위에 앉아서 술을 서너 잔씩 나눈 뒤에 시 7 수씩을 지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철쭉꽃 숲속을 지나 중백운암으로 내려왔다.

 

나는 종수에게 말하였다.

"내가 처음 제월대(霽月臺)를 바라보았을 때에 두려움으로 다리 힘이 다 빠져버리더니 지금 이렇게 올라 왔는데도 다리에 힘이 아직 남아 있음을 느끼겠으니

거기를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종수를 앞세우고 벼랑을 따라 발을 모로 디디며 올라갔다.

상백운암이라고 불리던 곳은 이미 불탄 지 오래되어 빈터에 풀만 우거지고 파란 이끼만 가득 돋아났다.

제월대는 바로 그 앞에 있었다.

그 제월대 앞은 낭떠러지를 이루어 내려다 보기만 하여도 정신이 아찔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내려 와 그날 밤은 다시 석륜사에서 묵었다.

 

25일(갑자)

나는 상가타(上伽陀)에 가기로 작정하고, 지팡이를 짚고 산길을 나섰다.

환희봉(歡喜峯)에 오르니, 서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더욱 아름다웠다.

모두 어제는 보이지 않던 산봉우리들이었다.

수백 걸음을 지나가니 석성(石城)이었던 옛터가 있고 성안에는 주춧돌과 허물어진 우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 서쪽에 조금 높이 솟은 바위봉우리가 있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앉을 만한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는 소나무. 삼(杉)나무. 철쭉 들이 제멋대로 자라서 그늘을 지우고 있었는데 등산하는 사람들도 일찍이 이르지 못한 곳이란다. 이곳 사람들은 그 봉우리의

생김새를 본떠서 산대암(山臺巖)이라고 불렀다.

나는 사람을 시켜 가려진 곳을 헤치고 먼곳을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곳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이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

주경유가 이곳에 오지 않아서 이 이름이 이처럼 고루한 것인가? 나는 불가불 그 이름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서 나는 이곳을 자하대(紫霞臺)라고 명명하고, 석성의 이름을 적성(赤城)이라고 하였다.

이는 옛날 천태산(天台山)이 붉은 노을이 낀 것처럼 붉어 보인다고 하여 '적성산'이라고 한 뜻을 따온 것이다.

자하대의 북쪽에는 이름없는 두 봉우리가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그 빛이 희게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 동쪽 것을 백학봉(白鶴峯), 서쪽 것을 백련봉(白蓮峯)이라고 감히 명명하여 기왕에 있는 백설봉과 함께 일컫게 하였는데, 이는 소백산의

이름과도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숲을 뚫고 험준한 산을 넘어가서 산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바위골짜기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상가타이고 또 그 동쪽에 있는 것은 동가타였다.

종수가 이르기를,

"옛날 희선 장로(希善長老)가 처음 이 동가타에서 머물었고, 뒤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에서 좌선 수도(坐禪修道)를 9년

동안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호를 목우자(牧牛子)라고 하였으며 그의 시집(詩集)도 남겼는데 소승이 일찍이 그것을 가져

있다가 남에게 빌려주었습니다." 하고, 시 두어 구절을 읊었다.

모두 마음을 깨우칠 만한 것들이었다.

 

그 서북쪽으로는 금강대와 화엄대가 있다.

나는 그 이름을 그대로 남겨 두기로 하였는데, 그곳에는 고승의 자취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동쪽에 있는 석봉(石峯)이 가장 기이하게 빼어났다. 그곳이 연좌(宴坐)라는 명칭을 가진 것은 역시 고승의 고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가타로부터 시내물을 따라 내려오는데 고목과 푸른 등나무 덩굴들이 서로 얽혀서 하늘이나 해도 볼 수가 없었다.

중가타의 어귀에 이르렀으나 절안에 스님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 곁에 폭포가 바위에 부딪쳐떨어지는데 폭포 곁의 바위 절벽에는 잔대[箭竹]들이 무더기로 자라다가 지금은 잎이 모두 말라죽었다.

그러나 그 뿌리들은 줄기를 드러낸 채로 얽히어 있었다.

그리고 이 폭포의 이름을 죽암폭포라고 하였다.

산승(山僧)이 이르기를,

"이 절벽뿐만 아니라 이 골짜기 전체에 이 잔대들이 무리지어 살았는데 지난 신축년(1541년,중종36?)에 그것들이 모두

열매를 맺고는 저렇게 말라 죽었습니다."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이치를 터득할 수가 없다.

 

우리는 조그마한 시내를 건너서 금당(金堂)과 하가타암(下伽陀庵)에 이르렀다.

그동안 중가타의 동쪽에 보제암(普濟庵)이 있고 하가타의 곁에 진공암(眞空庵)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스님들이 전염병을 앓고

있어서 들어가 보지 않고 지나쳤다.

우리는 하가타에서 시내를 하나 건너 관음굴에 들러 거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26일(을축)

하산하는데 산밑으로 반석이 널찍하게 펼쳐지고 그 위로 맑은 시내물이 흘러가니, 졸졸 흐르는 그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시원스러웠다.

그 시내 의 양쪽에는 목련(木蓮)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물가에다가 지팡이를 세워놓고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 이를 씻으니 기분이 상쾌하였다.

 

그 때 종수가 시 한 구를 읊었다.

 
시냇물은 옥을 찬 벼슬아치 비웃는데, [溪流應笑玉腰客]

세속 먼지 씻을래도 씻을 수 없네. [欲洗未洗紅塵踪]

 
종수가 읊고나서, "이것이 누구를 가리킨 것이겠습니까?"

하여, 서로 바라보면서 한바탕 웃은 뒤에 각각 시를 또 한 수씩 지어 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시내를 끼고 수리(數里)를 내려 가는 동안 주변은 숲이 구름처럼 덮여있는 절벽들로써 볼수록 장관이었다.

갈림길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민응기와 종수 그리고 여러 스님들은 초암동(草庵洞)쪽으로 떠나고 나는 박달현(博達峴) 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소박달현에 이르러 나는 견여에서 내려 걸었다.

조금 가니 나를 마중나온 사람과 말이 고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서 대박달현을 넘었는데 거기는 바로 상원봉(上元峯) 한 줄기가 남쪽으로 달려가다가, 허리가 조금 아래로 처져서 낮아진

곳이었다. 여기서 상원사가 수리 밖에 안 되지만 힘이 딸려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비로전(毗盧殿)의 옛터 밑으로 흐르는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조금 있자니 허간(許簡)과 내 아들 준(준)이 군(郡)에서부터 찾아왔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여기서 오랫동안 이야기하며 쉬었는데, 우리가 앉아 쉬었던 돌을 비류암(飛流巖)이라고 명명하였다.

우리는 드디어 욱금동(郁錦洞)을 지나서 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소백산은 천암만학(千巖萬壑)의 경치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은 주로 사찰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왕래하게 된다.

대개 사람들이 통행하는 곳은 세 군데의 골인데, 저 초암이나 석륜사는 중간 골[中洞]에 있고,

성혈(聖穴)이나 두타(頭陀) 등의 절은 동쪽 골에[東洞]에 있으며, 상중하의 3 가타암은 서쪽 골[西洞]에 있다.

산행하는 사람들은 초암과 석륜사를 경유하여 국망봉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고 흥이 식으면 돌아오는데, 저 주경유같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기껏 올라가본 곳은 겨우 중간 골 일대뿐이었다.

그의 '유산록(遊山錄)'에 기술한 것이 매우 자세하기는 하였으나 그것들은 모두 이산의 스님들에게 물어서 쓴 것이고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산봉우리 이름들 중에 광풍(光風), 제월(霽月)이나 백설. 백운 등은 모두 중간 골에 있는 것들이고, 그밖에 동서쪽 골에 있는 것들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력이 쇠약하고 병든 몸이었기 때문에 단 한번에 이산의 전체 경치를 다보려고 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동쪽은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고 서동으로 향하여 갔던 것이다.

내가 서쪽 골에서 얻은 명승지로는 백학. 백련. 자하. 연좌. 죽암 등의 경치로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마치 주경유가 중간 골에서

만나본 바의 경우와 같은 의도에서였다.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遊山錄)'을 백운동 서원의 유사(有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어 보았는데 이번에 석륜사에 가보니, 이 '유산록'이 판자에 쓰여져서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의 시문(詩文)이 웅혼, 기발함을 감상하고 도처에서 그의 시를 읊었다.

그렇게 하니 마치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시로써 수작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으로써 얻은 감흥 또한 매우 컸다.

등산하는 자는 참으로 이러한 기록을 남겨야만 되겠다는 뜻을 느꼈다.

그런데 주경유가 이 산에 오기 전에도 호음(湖陰) 정(鄭)선생이나 태수 임제광(林霽光)이 있기는 하였으나, 임 태수가 남겨놓은 글은 한 자도 찾아 볼 수가 없고

호암의 시만이 초암(草庵)에서 겨우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스님들의 말을 빌리면 석륜사에는 황금계(黃錦溪)의 꺼리기 때문에, 후세에까지 이름을 드날린 저 안씨들[안유,안축 등]도 끝내 이 훌륭한 산에 대하여서

말 한 마디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다른 것을 논하여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나같이 벼슬에 매여있는 몸으로 잠시 여가를 내어 유람한 것쯤이야 이 산에 대하여 무슨 보탬이 될까마는, 그동안 지나면서 본 것들을 이렇게 기록할 뿐이다.

훗날 이글을 보는 사람도 내가 주경유의 기록을 보며 감동하였던 것만큼 감동할지 모르겠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년,명종4년]에 풍기[基山郡]관사에서 서간병수(栖澗病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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