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류  기  행  록

 

 

김일손(1464 ~ 1498)

 

   김일손. 본관 김해. 자 계운(季雲), 호 탁영(濯纓), 시호 문민(文愍). 1486년(성종 17)에 생원(生員)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직필하고, 그 뒤 헌납(獻納) 때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화(禍)를 입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戊午史禍)라 한다. 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한 신진 사림(士林)은 집권층인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거세되었다. 중종반정(1506) 후 신원(伸寃)되고,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 수록 문집 : 탁영집

- 일시 : 1489년(성종 20) 4월 14일 ~ 28일

- 일정 : 천령(* 함양) - 제한 - 등구사 - 금대암 - 용유담 - 탄촌 - 엄천사 - 사근역(* 수동) - 산음(* 산청) - 단성 - 광제암문 - 단속사 - 오대사 - 묵계사 - 좌방사 - 상원사 - 세존암(* 세존봉, 혹은 망바위로 추정) - 법계사 - 천왕봉 - 향적사 - 영신사 - 서쪽능선 - 의신사 - 신흥사 - 쌍계사 - 불일암

-주요 내용 : 일두 정여창과 함께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유학이 불교를 압도해가는 시기로서 학자로서의 실천적인 자신감이 엿보인다. 2년 전 남효온이 묵은 영신사 위의 빈발암은 언급되지 않아 의아하다. ‘쌍계석문’을 습작 글씨라 표현하여 서체에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불교에 귀의한 최치원을 애석해 함.

 

두류산 유람을 떠나다

 

선비가 태어나서 한곳에 조롱박처럼 매여 있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서 자신의 자질을 기를 수 없다면, 자기 나라의 산천쯤은 마땅히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것이 기쁘거나 어긋나는 것을 생각해보면, 늘 마음은 있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

내가 처음 진주의 학관(學官, * 지방에서 양반 벼슬아치 자식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이 되기를 구했던 것은,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루(句漏, * 갈홍이 신선술을 수련했던 곳)의 수령이 되었던 갈치천(葛稚川, * 진나라 갈홍)의 마음도 일찍이 단사(丹砂, * 선약의 재료로 쓰인다는 수은과 유황 화합물)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두류산은 진주의 경내에 있는데, 진주에 도착하고 나서 매일같이 두 짝의 나막신을 준비하였으니, 두류산의 운무(雲霧)와 원학(猿鶴)이 모두 나의 단사이기 때문이었다. 학관으로 있던 2년 동안 녹봉만 축낸다는 비방을 거듭 풀고 병을 핑계 삼아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하게 노닐고 싶은 뜻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한 번도 두류산에 들여놓은 적이 없었으니, 어찌 평소의 뜻에 부합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두류산을 마음속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매번 조태허(曺太虛) 선생과 함께 한번 유람하자고 했지만, 조태허가 벼슬살이에 얽매여서 나와는 왕래가 끊어졌다. 더욱이 오래지 않아 조태허는 어머니 상을 당해 천령(天嶺, * 함양의 옛 이름)으로 떠나버렸다.

천령에 사는 상사(上舍, * 조선시대 성균관 유학생) 백욱(伯勗) 정여창(鄭汝昌)은 나의 정신적 벗이었다. 올봄 도주(道州)에서 녹명(鹿鳴, <<시경>> 소아의 녹명을 말함)을 노래할 적에 그가 마침 내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두류산을 유람하자고 약속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국(相國) 김은경(金殷卿)이 영남으로 내려와 정치를 살피면서 여러 번 편지를 보내와 만나자고 했지만 찾아가질 못했다. 그러다가 4월 11일 기해일에 그의 행차를 좇아가 천령에서 뵈었다. 그때 천령 사람에게 물으니, 백욱이 서울에서 이조부(二鳥賦)를 노래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 지 닷새나 되었다고 하였다. 마침내 서로 만나 오랜 소망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매우 기뻐하였다.

상국 김은경이 자기를 따라 가자고 나를 붙잡았으나, 나는 산행할 약속이 있다고 사양하였다. 상국이 간청하다가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게 되자, 도리어 노자를 주며 전송해주었다. 그리고는 공무에 매인데다가 체력이 너무 허약해서 유람을 따라나설 수 없다고 한탄하며 못내 섭섭해 하였다. 새로 부임한 천령 군수 이잠(李箴) 선생은 내가 성균관에 있을 때 경서(經書)를 가르쳐주신 분이었는데, 역시 나에게 후한 노자를 주셨다. 천령 사람 임정숙(林貞叔)도 따라나서서 세 사람의 행장을 준비하였다.

 

士生而匏瓜一方. 命也. 旣不能遍觀天下. 以畜其有. 則域中之山川. 皆所當探討者. 惟其人事之喜違也. 常有志而未副願者. 什居八九. 余初求爲晉學. 其意則便養也. 而句漏作令. 葛稚川之心. 又未嘗不在於丹砂焉. 頭流在晉之境. 旣到晉則日理兩屐. 頭流之煙霞猿鶴. 皆余之丹砂也. 二載皐比. 徒重腹便之譏. 則引疾于鄕. 以遂徜徉之志. 而足迹未嘗一及干頭流. 豈非素志之未副者也. 然頭流不敢忘懷也. 每與曺太虛先生共卜一遊. 而太虛簪纓有累. 余阻於道途之往來. 未幾. 太虛丁內艱而去天嶺矣. 天嶺上舍鄭伯勖. 余之神交也. 今年春. 歌鹿鳴於道州. 適過吾門. 約觀頭流. 無何. 金相國殷卿. 出按嶺南. 屢以手柬. 期而未赴. 四月十一日己亥. 追其行上謁於天嶺. 問天嶺之人. 則伯勖賦二鳥於京師. 而還其廬已五日矣. 遂得相遻. 雅喜其宿願之不悖. 金相國將挽余以自隨. 余辭以山行有約. 相國強之而不能奪也. 則資行以送. 仍恨簿書爲累. 羸瘵已甚. 未得從之遊. 介介不已. 新天嶺李先生箴. 乃余杏壇執經者也. 資我亦厚. 天嶺人林貞叔亦從. 以備三人之行.

 

두류산으로 향하는 여정

 

14일, 임인일.

마침내 천령(* 함양)의 남쪽 성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가량을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는 곳이었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가량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 솟아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들어갈수록 점점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몇 리를 더 가서 한 고개를 오르니, 종자가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도 살피지 않고 말을 채찍질하여 그냥 지나쳐버렸다. 이 날 비는 물을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는 온산에 가득하였다. 종자들은 모두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썼다. 진흙길이 미끄럽고 질퍽하여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뒤처졌다.

나는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도착했다. 불룩하게 솟은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우뚝한데 그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石澗水)가 북쪽에서 그 속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위쪽엔 동, 서로 두 사찰이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모두 동쪽 사찰에 묵기로 하고 종자를 가려서 돌려보냈다.

밤새도록 내린 비가 아침나절이 다하도록 그치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절에 머물며 각자 낮잠을 잤다. 그런데 한 승려가 문득,

“비가 개어 두류산이 보인다.”

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세 사람이 벌떡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세 개의 푸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흰 구름이 가로지르듯 감싸고 있어 짙푸른 봉우리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잠시 뒤에 다시 비가 내렸다. 내가 농담삼아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마음이 있는가 봅니다. 산의 모습을 숨겼다 드러냈다 하니 시기하는 바가 있는 듯합니다.”

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산신령이 시인 묵객을 오랫동안 묶어두려는 계책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 날 밤에 다시 개어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전부 드러났다. 굽이굽이 뻗은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백욱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 밤기운을 받아 깨끗해지니 이때에는 속세의 찌꺼기라곤 전혀 없군요.”

라고 하였다. 나의 어린 종이 피리를 제법 불 줄 알기에 그를 시켜 불게 하였더니, 빈산에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은 서로 마주앉아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15일, 계묘일)

다음날 새벽녘에 나는 백욱과 함께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등구사에서 1리쯤 걸어 내려갔는데 제법 볼 만한 폭포가 있었다. 다시 10리쯤 가서 한 외딴 마을을 지났는데 그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험한 고개를 넘어 산허리를 타고 오른쪽으로 돌아 서북쪽으로 가니 바위 밑에 샘이 있었다. 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 세수도 하였다.

그곳을 벗어나 한걸음에 금대암(金臺菴)에 이르렀다. 한 승려가 나와·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백욱과 함께 경내로 들어섰다. 뜰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반쯤 시들었어도 그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승복를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袈裟)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 도량(精進道場)이라고 했다. 백욱이 그럴 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精一)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갈 뿐 물러섬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하여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경각시켜 잡념과 졸음을 없애게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기도 고되군요. 학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해나간다면 어찌 성취함이 없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錫杖)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정오가 되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좁은 바위 계곡을 굽어보니 갑자기 물이 불어나 호수처럼 보였다. 멀리 상무주암(上無住庵, * 삼정산 아래의 암자)과 군자사를 가리키며 바라보았다. 그곳에 가보고 싶었지만 냇물을 건널 수 없었다. 산길을 내려가려니 매우 가팔라서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팡이를 앞으로 내짚으며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안장을 얹은 말이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는데, 한걸음 옮기자마자 내가 탄 말만 유독 한쪽 다리를 절어 방아를 찧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내가 백욱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절뚝거리는 노새를 타고 가는 멋은, 시인이 참으로 면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라고 하였다.

시냇물 북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용유담(龍游潭)에 이르렀다. 용유담은 남북으로 뻗은 못인데, 깊고 그윽하며 기이하고 빼어나서 속세와 천 리나 떨어진 듯하였다. 임정숙이 먼저 와 용유담 바위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길을 떠났다. 때마침 날이 개었으나, 물이 양쪽 언덕에 넘실거려 용유담의 기이한 형상은 구경할 수 없었다.

임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 * 점필재 김종직)이 고을을 다스릴 때,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재계하던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용유담 바위의 비늘 같은 홈들은 밭을 갈아엎은 것처럼 뚜렷한 흔적이 많았다. 또한 항아리와 가마솥처럼 생긴 바위도 있었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이곳 주민들은 용이 사용하던 그릇이라고들 한다. 이들은 산골짜기의 급류가 개울의 돌을 굴려 오랫동안 서로 닳아서 이런 모양이 된 줄 전혀 모르니, 백성들이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허탄한 말을 좋아하는 것이 이처럼 심하구나.

용유담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나아갔는데 길이 매우 험하였다. 아래는 천자나 되는 절벽이어서, 떨어질 것만 같아 머리털이 쭈뼛거렸다. 사람과 말 모두 숨을 죽이고 지나간 것이 거의 30리였다. 강가 언덕에서 두류산 동쪽기슭을 바라보았다. 푸른 등나무 덩굴과 고목사이로 선열암, 고열암(古涅庵) 등의 암자(* 함양 독바위 일대의 암자)를 가리키며 바라보았는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한 조각배가 약수(弱水) 를 사이에 두고 있는 듯하여, 한 걸음에 오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길이 점점 낮아지고, 산세도 차츰 평평해지고, 물의 흐름도 점점 고요해졌다. 산이 북쪽에서 뻗어내리다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된 곳이 있었다. 그 아래 겨우 10여 호쯤 되는 민가가 있었는데, 탄촌(炭村)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 큰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백욱이 말하기를,

“이 마을은 살 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문필봉(文筆峯) 앞이 더욱 살 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앞으로 5, 6리를 더 가니 대숲 속에 오래된 절이 있었는데, 엄천사(巖川寺)라고 하였다. 땅이 평평하고 넓어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절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1리를 가니, 천 길이나 되는 높다란 절벽이 있었다. 사람들이 절벽 사이로 비스듬한 길을 뚫어놓았는데, 1리쯤 되었다(* 자혜나루에서 화계로 이어지는 하안 절벽지대로 추정).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북쪽으로 가니 임정숙의 농지가 있는 아랫마을이 나왔다. 임정숙이 자꾸 자기 집에 가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날이 저문 데다 비가 내려 물이 더욱 불어날까 염려되어서 사양하기를,

“왕 자유(王子猷, * 왕희지)는 문 앞까지 갔다가 대 안도(戴安道, * 진나라 사람 대규)를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숙과 여러 날 함께 노닐었으니, 굳이 집에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정숙이 발에 병이 나서 끝까지 모시고 다닐 수 없다고 사양하여 그와 작별하였다. 저물녘에 사근역(沙斤驛, * 현 수동)에 도착하였다. 두 다리가 몹시 아파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十四日壬寅. 遂自天嶺南郭門而出. 西行可一十里. 渡一溪水. 抵一逆旅. 名曰蹄閑. 自蹄閑西南行. 上下岡隴可十里. 兩山對峙. 一泉中注. 漸入佳境矣. 行數里陟一岾. 從者曰當下馬拜. 余問所拜. 答曰天王. 余不省天王是何物. 策馬而過. 是日雨下如注. 嵐霧渾山. 從者皆蓑笠. 泥滑路澁. 相失在後. 信馬到登龜寺. 山形穹窿如龜. 以寺登其背而名也. 古砌絶峻. 砌隙有幽竇. 澗水自北而注其中㶁㶁然. 其上有東西二刹. 一行皆寓於東刹. 汰還從者. 雨勢竟夜. 終朝殊未已. 遂留寺宇. 各就午寢. 僧忽報雨霽. 頭流呈露. 吾三人驚起. 刮睡眼視之. 則蒼然三峯. 偃蹇當戶. 白雲橫斜. 翠黛隱映而已. 少選又雨. 余戲曰. 造物其亦有心者歟. 潛形山岳. 似有所猜. 伯勖曰. 安知山靈久關騷客爲計耶. 是夜復晴. 皓月流光. 蒼顏全露. 稜稜壑谷. 若有仙人羽客來舞翩翩也. 伯勖曰. 人心夜氣. 於此都無査滓矣. 余之小蒼頭. 頗調觱篥令吹之. 亦足以傳空山之響. 三人相對. 夜分方寢.

 

遲明. 吾與伯勖. 着芒屩策扶老. 步下登龜一里許. 有瀑布可觀. 行十里許. 穿一孤村. 村多柹樹. 崎嶇經丘. 緣山腰右轉而西北行. 巖下有泉. 掬而飮之. 仍盥手. 出一步到金臺菴. 一僧出汲. 余與伯勖. 率爾而入. 庭中有牧丹數本半謝花甚紅. 百結衲子廿餘. 方荷袈裟. 梵唄相逐. 回旋甚疾. 余問之. 云. 精進道場也. 伯勖頗解之曰. 其法精而無雜. 進而不退. 晝夜不息. 以爲作佛之功. 稍有昏惰. 其徒中捷者一人. 以木長板. 拍而警之. 使不得惱睡. 余曰. 爲佛亦勞矣. 學者於作聖之功. 做得如此. 則豈無所就乎. 菴有六環錫杖. 甚古物也. 日亭午. 由舊路而返. 下瞰石澗. 暴漲如湖. 遙指上無柱君子寺. 欲往而不可渡矣. 山路將下甚側. 足不停地. 遂以杖拄前滑瀡而下. 鞍馬已候於山下. 騎行纔移一步. 吾所乘獨蹇一足. 如下舂然. 顧謂伯勖曰. 蹇驢風味. 詩家固不免矣. 沿澗北崖. 東行至龍游潭. 潭南北. 幽窅奇絶. 塵凡如隔千里. 貞叔先待於潭石上. 具饌以待. 點罷遂行. 時適新晴. 水襄兩崖. 潭之奇狀. 不可得而窺矣. 貞叔云. 此佔畢公爲郡時禱雨齋宿處也. 潭石鱗鱗. 如田之畇畇. 多宛然之迹. 又有石如瓮如金鼎類者. 不可勝紀. 民以爲龍之器皿也. 殊不知山澗湍急. 水石流轉. 相磨之久. 而至於成形. 甚矣. 細民之不料事而好誕說也. 由潭而東. 路極險阨. 下臨千尺. 竦然如墜. 人馬脅息而過者幾三十里. 隔岸望頭流之東麓. 蒼藤古木之間. 指點先涅古涅等方丈. 不知其幾也. 一葦如隔弱水. 雖欲跋一步以登而不可得矣. 路漸低而山漸夷. 水漸安流. 有山自北而斗起爲三峯. 其下居民僅十數屋. 名曰炭村. 前臨大川. 伯勖曰. 此可居也. 余曰. 文筆峯前. 尤可卜也. 前行五六里. 篁竹林中. 有古寺曰巖川. 土壤平廣. 可以廬其居也. 由寺而東一里. 峙壁千尋. 人鑿斜逕於壁間而行一里許. 踰一小峴北行. 出貞叔田園之下. 貞叔邀請不已. 日已暮. 又恐雨益甚水益漲. 辭曰. 王子猷. 到門而返. 不見安道. 況今與貞叔共數日之遊. 不必更入門矣. 貞叔謝以足疾. 未得卒陪杖履云. 與之別. 曛黑投沙斤驛. 兩股疼痛. 更不可步.

 

단속사를 거쳐 오대사에 묵다

 

(16일, 갑진일)

이튿날 천령에서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말을 타고 1리쯤 갔다. 큰 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엄천(巖川)의 하류였다. 서쪽으로 푸른 산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겹겹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모두 두류산의 지봉(支峯)들이었다. 정오에 산음현(山陰縣, * 산청군)에 이르렀다.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았다.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물은 저렇게 밤낮없이 유유히 흘러가는구나하는 감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골라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장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계승할 수 있으랴.

산음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단성(丹城)에 이르렀다. 지나온 산천마다 맑고 빼어나며 밝고 아름다웠으니, 모두 두류산이 간직한 운치이다. 신안역(新安驛) 10리 지점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들어가 투숙했다. 나는 이곳을 단구성(丹丘城) 이라고 바꾸어 부르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단성의 수령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하게 보내왔다. 화단에 오죽(烏竹) 1백 여 그루가 있어, 지팡이 될 만한 것을 골라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어 가졌다.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다. 맑고 시원한 시냇물이 들판의 서쪽으로 흘러들었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 3, 4리를 가니 계곡의 입구가 있었다. 계곡에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의 피어오르는 연기와 뽕나무 밭이 보였다. 시내 하나를 건너 1리를 가니 감나무가 겹겹이 둘러 있고, 산에는 모두 밤나무였다.

장경판각(藏經板閣)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빙 둘러져 있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속에 절이 있고,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문 앞에 비석이 서 있는데,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시명(大鑑師銘, * 대감국사 탄연의 비명)이었다. 완안(完顔) 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의 연호) 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佛殿)이 있는데, 주춧돌과 기둥이 매우 질박하였다. 벽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영정(影幀)이 그려져 있었다. 이 절의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柳純)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단속(斷俗)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겨 초상을 살펴보지 않았다.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 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고풍스러웠다. 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그래도 올라가 조망하고 난간에 기댈 만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한다.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의 조부 통정공(通政公, * 여말 선초의 문신 강회백)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곧장 시내 하나를 건넜다. 덤불 속에 비석이 있는데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었다.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세운 것이었다. 돌의 결이 거칠고 나빴으며, 높이는 대감사비에 비해 두어 자나 낮고,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북쪽 담장 안에 있는 정사(精舍)는 주지가 평소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사 주위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다. 그 동편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해온다. 당 아래에 새로 지은 가설물이 있는데, 매우 높아 5장(丈)의 깃발을 세울 만하였다. 이 절의 승려가 수놓은 천불상(千佛像)을 안치하려는 것이었다.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하나하나 둘러보니 그 모양이 각기 달라 그 기이함을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주지가 거처하는 정사로 돌아와 고문서를 뒤적거리며 살펴보았다. 그 중에 한지 세 폭을 연결한 문건이 있었는데, 정결하고 빳빳하게 다듬어져 요즘의 자문지(咨文紙)같았다. 그 첫째 폭에는 국왕 왕해(國王王楷)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인종(仁宗)의 휘(諱)이다. 둘째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高麗國王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이다. 이 둘은 고려 국왕이 대감국사에게 보낸 문안 편지였다. 셋째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씌어 있고, 황통(皇統)이라고도 씌어 있었다. 대덕은 몽고 성종(成宗)의 연호다. 그 시대를 고찰해보면 합치되지 않으니, 상세히 알 수 없다. 황통은 금(金)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다.

이를 보면, 고려 인종, 의종 부자는 이미 오랑캐의 연호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들이 선사(禪師)와 부처에게 이처럼 정성을 기울였건만,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에 유배되는 화를 면치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 됨이 없음이 이와 같도다.

또 좀먹은 푸른 비단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서체는 왕우군(王右軍, * 왕희지)과 유사하고 필세(筆勢)는 놀란 기러기 같았다. 내가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이하도다. 또 노란 명주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는 자획이 푸른 비단에 쓴 글씨보다 못하였고, 모두 떨어져나간 간찰(簡札)이어서 문장도 알아볼 수 없었다. 또 육부(六部)에서 함께 서명한 붉은 칙서(勅書) 한 통이 있는데. 요즘의 고신(告身) 과 같은 것으로 절반은 없었다. 그러나 옛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보고 싶어 할 만한 물건들이었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 산에 오르길 꺼려해서 하루 쉬기로 하였다. 석해(釋解)라는 승려가 말벗이 되었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 경태소(慶太素)가 광대 둘을 보내 각자 지닌 재주로 산행을 즐겁게 하였다. 또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 붓과 벼루를 받들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

여명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서 길을 떠났다. 광대가 생황과 피리를 불면서 앞장을 서고, 석해는 길잡이가 되어 동네를 벗어났다. 돌아서서 동네를 바라보니, 물이 감싸고 산이 에워싸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아늑하였다.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승려들이 사는 곳이 되었을 뿐 덕이 있는 고사(高士)들이 사는 곳이 되지 못하였구나!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큰 시내를 건넜는데, 바로 살천(薩川, * 시천면)의 하류였다. 살천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돌아 서쪽으로 20리 가량 지났는데, 모두 두륜산의 기슭이었다. 들은 넓고 산은 나지막하였으며 맑은 시내와 하얀 돌이 모두 볼 만하였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향했다. 시내를 따라가는데 냇물은 맑고 돌은 자른 듯이 모나 있었다. 또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냇물을 아홉 번이나 건넜고, 다시 동쪽으로 꺾어들어 판교(板橋)를 건넜다.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서 하늘이 보이질 않았다. 길은 점점 높아졌다. 6, 7리를 가니 압각수(鴨脚樹)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크기는 백 아람이나 되고, 높이는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그 머리에 오대산수륙정사기(五臺山水陸精社記)라고 씌어 있었다. 읽으면서 좋은 글임을 새삼 깨달았다. 다 읽어보니 고려 때 학사(學士) 권적(權適)이 송나라 소흥(紹興) 연간에 지은 것이었다. 절의 누각은 아주 장대하고 방이 매우 많았으며, 깃발은 마주보고 있었다. 오래된 불상이 있었는데,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불상은 고려 인종이 주조한 것입니다. 인종이 쓰던 쇠로 만든 여의(如意, 법회나 설법 때 법사가 손에 드는 물건)도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날은 저물고 비도 내려 절에서 묵기로 했다.

 

翌日. 盡還天嶺來隨人. 騎馬行一里許. 竝大川而南. 皆巖川之下流. 西望蒼山. 纍纍然抑抑然. 皆頭流之支峯也. 午投山陰縣. 登換鵝亭覽題記. 北臨淸江. 有逝者悠悠之懷. 少攲枕而覺. 噫. 擇而處仁里. 知也. 棲而避惡水. 明也. 縣號爲山陰而亭扁以換鵝. 其有慕於會稽之山水者乎. 吾輩安得於此永繼東晉之風流乎. 由山陰而南及丹城. 所歷溪山. 淸秀明麗. 皆頭流之緖餘也. 新安驛十里. 舟渡津而步. 投館丹城. 余喚丹丘城而仙之. 丹之守崔慶甫. 資送加厚. 花砌上有烏竹百竿. 擇其可杖者. 根斬二竿. 分與伯勖. 自丹城西行十五里. 歷盡阻折. 得寬原. 一淸泠注其原之西. 緣崖而北三四里. 有谷口. 入谷有削巖面. 刻廣濟喦門四字. 字畫硬古. 世傳崔孤雲手迹也. 行五里許. 見其竹籬茅屋. 煙火桑柘. 渡一溪進一里. 柹樹環匝而山之木. 皆栗也. 有藏經板閣. 巋然繚以周垣. 垣之西上百步樹林間有寺. 扁曰智異山斷俗寺. 有碑立門前. 乃高麗平章李之茂所撰大鑑師銘. 完顏大定年間建也. 入門有古佛殿. 礱斲甚樸. 壁畫二冕旒. 居僧云. 新羅臣柳純者. 辭祿舍身. 創此寺. 因名斷俗. 圖其主之像. 有板記在焉. 余卑之不省. 循廊而轉. 行長屋下. 進五十步. 有樓制甚傑古. 梁柱橈腐. 猶可登眺憑檻. 臨前庭有梅數條. 相傳政堂梅. 乃姜文景公之祖通亭公. 少讀書於此. 手植一梅. 後登第. 官至政堂文學. 遂得名. 其子孫世封植之云. 出北門. 驀過一澗. 榛荒間有碑. 乃新羅兵部令金獻貞所撰僧神行銘. 李唐元和八年建也. 石理麁惡. 其高不及大鑑碑數尺. 文字不可讀. 北垣之內有精舍. 住持所燕居也. 繞舍多山茶樹. 舍之東有弊宇. 世傳致遠堂. 堂之下有新構一架極高. 其下可建五丈旗. 寺僧以此欲安織成千佛之像也. 寺屋之廢. 而僧不居處者. 多數百架. 東廊有石佛五百軀. 逐軀各異其形. 怪不可狀. 還就住持之舍. 披寺之故. 有白楮紙連三幅. 搗鍊精勁. 如今之咨文紙. 其一署國王王楷. 卽仁宗諱也. 其二署高麗國王王晛. 卽毅宗諱也. 乃正至起居於大鑑師狀也. 其三書大德而一書皇統. 大德則蒙古成宗之年也. 考其時不合. 不可詳. 皇統則金太宗年也. 仁毅父子. 旣稟夷狄之正朔. 又致勤於禪佛如是. 而仁宗困於李資謙. 毅宗未免巨濟之厄. 佞佛之無益於人國家. 如此夫. 又有蠹餘靑綾書. 字體類右軍. 勢如驚鴻. 不可得以附翼. 奇矣哉. 有黃綃書者. 紫羅書者. 其字畫下於靑綾書. 而皆斷簡. 其文亦不可詳矣. 又有六部合署. 朱勅一通. 如今之告身. 而亦逸其半. 然亦好古者之所欲觀也. 伯勖足繭. 憚於登陟. 遂留一日. 有釋該上人者可語. 薄暮. 晉牧慶公太素. 遣兩伶. 各執其業. 以娛山行. 又遣貢生金仲敦. 以奉筆硯. 黎明. 細雨絲絲. 蓑笠以行. 伶執笙笛先路. 而釋該爲鄕導出洞. 回望則水抱山圍. 宅幽而勢阻. 眞隱者之所盤旋也. 惜其爲緇流之場. 而不與高士爲地也. 西行十里. 涉一巨川. 乃薩川之下流也. 由川而南. 斜轉而西. 約行二十里. 皆頭流之麓也. 野闊山低. 淸川白石. 皆可樂也. 折而東向. 行澗谷. 澗水淸. 石斷斷然. 又折而北行. 九涉一澗. 又東折而行. 渡一板橋. 樹木蓊鬱. 仰不見天. 路漸高. 行六七里. 有二鴨脚樹對立. 大百圍高參天. 入門有古碣石. 額曰五臺山水陸精社記. 讀之殊覺好文. 卒業則乃高麗權學士適. 趙宋紹興年中撰也. 寺有樓觀甚偉. 間架甚多. 幡幢交羅. 有古佛. 僧言高麗仁宗所鑄. 仁宗所御鐵如意. 亦在云. 日暮雨濕. 遂止宿.

 

묵계사를 둘러보다

 

(17일, 을사일)

이튿날 아침 승려가 짚신을 선물로 주었다. 골짜기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가는데, 오른편은 산이고 왼편은 냇물이어서 길이 몹시 위태로웠다. 숲 속을 10리쯤 가니 골짜기 입구가 약간 트였다. 그곳에는 기름진 들판이 있어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다시 10리를 가니, 주민들이 나무를 휘거나 쇠를 달구어 농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이라 느낀다더니, 그런 삶이 여기에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따라온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는 궁벽한 곳이어서 이정(里正)이 꺼릴 것 없이 횡포를 부립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번잡한 조세와 과중한 부역으로 고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5리를 가서 묵계사에 당도하였다. 이 절은 두류산에서 경관이 가장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나 직접 와서 보니 소문처럼 절경은 아니었다. 다만 절간이 밝고 아름다우며 사이사이 금실을 넣어 특이한 비단으로 울긋불긋하게 만든 부처의 가사와 금대암의 승려들처럼 20여 명의 승려가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볼 만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말을 돌려보내고서 지팡이를 짚고 참대〔苦竹〕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좌방사(坐方寺)에 도착하였다. 거주하는 승려는 서너 명뿐이었다. 절 앞의 밤나무가 모두 도끼에 찍혀 넘어져 있었다. 승려에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한 승려가 말하기를,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인데,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개간하여 경작하려 하니, 나라의 백성이 많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그들을 교화시킬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잠시 앉았다가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하여,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그러자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마침내 그와 함께 일행은 앞 고개로 올랐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 위에 올라앉아 둘러보니 앞뒤에 큰 골짜기가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나절 생황소리가 피리와 어우러졌다. 맑고 밝은 소리가 산과 계곡에 울려 퍼져 마음이 상쾌해졌다.

흥이 다하여 내려오다가 시냇가 너른 바위에 앉아 발을 씻었다. 이 날도 여전히 음산하여, 동상원사(東上元寺)에서 묵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깨었는데, 별과 달빛이 환하고 두견새가 자꾸 울어대니, 정신이 맑아져 잠이 오질 않았다. 나의 서형(庶兄) 김형종(金亨從)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일은 천왕봉에 상쾌한 마음으로 올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네.”

라고 하여, 일찌감치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

 

詰朝. 寺僧以芒鞋爲贈. 出洞而北. 右山左水. 道甚懸危. 行樹林中十里許. 洞口稍開豁. 有膴原可以耕而食. 又十里有居民. 揉木爲業. 鍛鐵爲生. 余曰. 花開爲春. 葉落爲秋. 有是夫. 從僧曰. 地僻而里正無忌憚. 民苦於賦煩役重. 久矣. 出五里抵默契寺. 寺在頭流. 最名勝刹. 而及寓目. 殊不愜前聞. 但寺宇明媚. 以間金奇錦. 靑紅雜製. 以爲佛袈裟. 居僧廿餘. 默然精進. 如金臺而已. 少憩. 舍馬扶筇. 披苦竹林. 迷失道. 間關抵坐方寺. 居僧只三四. 寺前栗樹. 皆爲斧斤斫倒. 問僧胡然. 僧曰. 民有欲田之者. 禁亦不能. 余歎曰. 太山長谷. 耕墾亦及. 國家民旣庶矣. 當思所以富而敎之也. 少坐. 呼笙笛吹破湮鬱. 有鶉衣一衲. 班舞於庭. 蹲蹲然其氣象可掬. 遂與之俱登前峴. 有木橫道. 坐其上. 前後臨大壑. 晩色蒼然. 笙聲和笛. 寥亮淸澈. 山鳴谷應. 神魂覺爽矣. 興盡乃下. 坐溪邊盤石濯足. 是日猶陰. 遂宿東上元寺. 夜半夢覺. 星月皎潔. 杜宇亂啼. 魂淸無寐. 吾庶兄金亨從喜報曰. 明日天王峯. 可快意登覽也.

 

천왕봉에 오르다

 

(18일, 병오일)

날이 밝자 행전을 차고 신발을 묶어서 차림을 단단히 하였다. 숲 속을 뚫고 나아가는데 길이 몹시 험하였다. 쓰러진 나무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몸이 빠지기도 하였다. 그 아래는 온통 참대였는데, 죽순이 삐죽삐죽 나와 있어 발길에 마구 채였다. 길에서 뱀을 만나기도 하였다.

저절로 쓰러진 고목들이 앞에 즐비하였는데 모두 편(楩), 남(楠), 예(豫), 장(章)의 좋은 목재들이었다. 어떤 경우는 몸을 굽혀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낑낑대며 그 위를 넘기도 하였다. 이렇듯 좋은 나무들이 훌륭한 목공을 만나지 못해 동량(棟梁)의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빈산에서 말라죽는 것을 생각하니,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애석히 여길 만한일이다. 그러나 또한 이 나무들은 천수(天壽)를 다 누렸구나.

나는 힘찬 걸음으로 먼저 가 시냇가 바위에 앉아 기다렸다. 백욱은 힘이 부치자 허리에 끈을 묶고 한 승려에게 끌도록 하였다. 내가 그들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스님은 어디서 죄인을 묶어오는 것이오?”

라고 하니, 백욱이 웃으며 말하기를,

“산신령이 도망친 나그네를 붙잡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대개 백욱이 예전에 이 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익살스럽게 대답한 것이다. 이곳에 다다르자 갈증이 심하였다. 따라 온 사람들이 모두 물을 떠서 쌀가루를 타서 마셨다.

여기서는 달리 샛길이 없었다. 다만 천 길 바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한 시내를 이루었을 뿐인데, 산 위에서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은하수가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듯하였다. 시내 가운데에 큰 돌이 첩첩이 포개져 다리가 되었으나, 이끼가 끼어 미끄러워서 밟으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오고가는 초동(樵童)들이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그곳이 길임을 표시해두었다. 나무 그늘이 하늘을 가려 햇빛이 새어들지 않았다. 이런 험한 곳에서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다섯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한 번 쉬기도 하면서 구슬땀을 흘리며 힘을 썼다.

시내가 끝나고 조금 더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참대 속을 헤치며 걸었다. 산은 온통 돌로 덮여 있었다. 바위나 칡넝쿨을 부여잡고 한걸음 한걸음씩 10여 리를 숨가쁘게 기어올랐다. 높고 가파른 산 하나를 오르니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데, 별천지에 온 것처럼 기뻤다. 꽃 한 송이를 꺾어 머리에 꽂고, 따라온 사람들에게도 명하여 모두 꽃을 꽂고 가게 하였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 하나가 보였는데 세존암(世尊巖, * 세존봉으로 추정되나 법계사와의 거리로 미루어 망바위로 볼 수도 있음)이라고 하였다. 세존암은 매우 가파르고 높았으나 사다리가 있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 십 리 정도 되는 거리였다. 기뻐서 따라온 사람들에게 힘내어 다시 올라가자고 말하였다. 여기서부터 길이 조금 완만해졌다. 5리 정도 더 가니 법계사(法界寺)에 다다랐다.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나뭇잎은 파릇파릇 막 자라나고 산꽃은 울긋불긋 한창 피었으니, 때는 늦은 봄이었다.

잠시 쉬다가 바로 올라갔다. 배〔船〕같기도 하고 문(門) 같기도 한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를 거쳐 지나가게 되었는데 길은 꼬불꼬불 돌기도 하고 꺾어지기도 하였으며, 골짜기는 휑뎅그렁하였다. 돌부리를 움켜쥐고 나무뿌리를 부여잡고서 가까스로 봉우리 위를 올랐으나,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사방에 끼어 있었다.

향적사의 승려가 솥을 가지고 와서 널찍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샘을 이루고 있어,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쌀을 일어 밥을 짓게 하였다. 온 산에 다른 목재는 없고 삼나무나 노송나무 같은 나무만 있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비파나무인데 이 나무로 밥을 지으면 밥맛이 없다.”

라고 하였다. 시험해보니 과연 그랬다. 옛 사람들이 밥 짓는 땔나무를 고를 줄 알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두류산에는 감나무, 밤나무, 잣나무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열매가 바람에 떨어져 온 계곡에 가득하다. 이곳의 승려들이 열매를 주워 주린 배를 채운다.”

라고 하는데, 이는 허망한 말이다. 다른 초목들도 오히려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데 하물며 과실이야 어떠하겠는가? 해마다 관아에서 잣을 독촉하므로 주민들이 늘 산지에서 사다가 공물로 충당한다고 한다. 매사에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에 이런 경우이다.

저물녘에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한 칸의 판잣집(* 성모사당)이 겨우 들어앉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판잣집 안에는 돌로 된 부인상(婦人像)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었다. 그 판잣집 들보에는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걸려 있었다. 또,

“숭선(嵩善) 김종직(金宗直) 계온(季昷),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하산(夏山) 조위(曺偉) 태허(太虛)가 성화(成化, * 명 헌종의 연호) 임진년(1472) 중추일에 함께 오르다.”

라고 쓴 몇 글자가 있었다. 일찍이 유람한 사람들의 성명을 차례로 훑어보니, 당대 걸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당에서 묵기로 하였다. 겹으로 된 솜옷을 껴입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 몸을 따뜻하게 하였다. 따라온 사람들은 사당 앞에 불을 지펴놓고 추위를 막았다. 한밤중이 되자 천지가 맑게 개어 온 산하가 드러났다. 흰 구름이 골짜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마치 넓은 바다에서 조수가 밀려와 온 포구에 흰 물결이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드러난 산봉우리들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 같았다. 돌무더기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외람되게도 마음과 정신이 모두 늠름하고 몸은 아득한 태초에 있는 듯 하여 회포가 천지와 함께 흘러가는 듯하였다.

 

早戒行李. 遲明. 偪屨着綦. 致其鞏固. 行林薄中. 路甚梗. 椔翳沒身. 其下皆苦竹. 笋芽出地而茁. 亂蹴而行. 蛇虺當道. 木之自仆者. 相着於前. 皆楩楠豫章之材也. 或傴僂出其下. 或蹩躠行其上. 仍思其不遇於匠石. 不見備於棟梁之用. 而枯死空山. 爲造物可惜. 然亦終其天年者歟. 余健步先待於一澗石. 伯勖力熯. 腰繫一索. 使一僧挽而前. 余迎謂曰. 僧從何處拘罪人來. 伯勖笑曰. 不過山靈拿逋客耳. 蓋伯勖曾遊此山. 故戲答云耳. 到此渴甚. 從者皆掬水和糜飮之. 更無蹊逕. 只千丈巖溜. 聚成一澗. 從山上而注. 如銀潢自天倒瀉澗中. 巨谷纍纍. 相疊爲梁. 苔痕滑潤. 履之易踣. 童行往來者. 累小石其上. 以識其路. 樹陰參天. 光景不漏. 如此泝澗. 五步一息. 十步一息. 矻矻用力. 澗盡稍北. 復披苦竹中. 山皆石也. 攀緣磴葛. 轉轉以上. 喘喘十餘里. 陟一崔嵬. 䕽䕽花爛開. 喜其別造化. 折簪一花. 分命從者皆揷而行. 遇一巘崿. 號世尊巖. 巖極峻拔. 有梯可上. 上而望天王峯. 可數十里. 喜謂從者努力更進一步. 自此路稍低. 行五里許到法界寺. 只留一僧. 木葉田田纔長. 山花艶艶方開. 卽候暮春也. 少憩卽上. 有石如船. 或如門. 由之以行. 盤回曲折. 嵌谾谽谺. 捫石角攬木根. 纔及峯頭. 而大霧四塞. 咫尺不辨. 香積僧將錡子來. 得一寬地面. 巖溜淙淙. 滴成泉水. 不敢更上. 卽命淅米而炊. 滿山更無他材. 有木如杉檜. 僧云枇木也. 薪而爨. 失飯味. 試之果然. 古人知勞薪之所炊者. 因可推也. 人傳頭流多柿栗海松. 秋風實落. 塡滿蹊谷. 居僧取而充飢者. 妄也. 他草木尙不遂其生. 況於果實乎. 每歲官督海松. 民常轉貿於產鄕以充貢云. 凡事耳聞. 不如眼見者類此. 薄暮. 上峯頂. 頂上有石壘. 僅容一間板屋. 屋下有石婦人像. 所謂天王也. 紙錢亂掛屋樑. 有嵩善金宗直季昷,高陽兪好仁克己,夏山曺偉太虛. 成化壬辰中秋日同登. 若干字. 歷觀曾遊人姓名. 多當世之傑也. 遂宿祠宇. 襲重綿加煖衾以自溫. 從者燎火祠前以禦寒. 夜半. 天地開霽. 大野洪厖. 白雲宿於山谷. 如滄海潮上. 多少浦口. 白浪驅雪. 而山之露者. 如島嶼點點然也. 倚壘俯仰. 愯然神心俱凜. 身在鴻濛太初之上. 而襟懷與天地同流矣.

 

산신에게 제를 올리려다 포기하다

 

23일, 신해일.

여명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돋는 것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잘 닦은 구리거울 같은 해가 솟아올랐다. 사방으로 저 멀리 눈길 닿는 데까지 바라보니, 뭇 산은 모두 개미집처럼 보였다. 묘사하자면 창려(昌黎, * 당나라 문인 퇴지)의 남산시(南山詩)와 합치될 것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선니(宣尼, *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오르셨을 때의 심정과 꼭 들어맞는다. 무한한 회포를 품고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감개가 그지없었다.

산의 동남쪽은 옛 신라의 구역이고 산의 서북쪽은 옛 백제의 땅이다.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들이 독 안에서 생겼다 사라지는 것같이, 처음부터 꼽아보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이곳에 뼈를 묻었던가? 우리들이 이번에 아무 탈 없이 여기 올라 구경하는 것도 어찌 하늘이 내린 혜택이 아니겠는가? 망망하고 아득한 태평세월 속에서도, 생각하면 슬프고 즐거우며 기쁘고 근심스러워 갖가지 불평한 일을 토로할 것이 있다. 그래서 백욱에게 말하기를,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악전(偓佺)의 무리를 맞이하여 기러기나 고니보다 높이 날며, 몸은 세상의 밖에서 노닐고 눈은 우주의 근원까지 다가가 기(氣)가 생성되기 이전의 시점을 관찰할 수 있을까?”

라고 하니, 백욱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종들을 시켜 제물 두 그릇과 술을 차리게 하였다. 사당 아래서 고유(告由)하려고 제문을 지었는데, 아래와 같이 그 제문에는,

“옛날 선왕(先王)이 상하의 구분을 정하여, 오악(五嶽)과 사독(四瀆)은 천자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고, 제후들은 봉지(封地) 내의 산천에만 제사를 지내며, 공경(公卿), 대부(大夫)는 각기 해당되는 제사만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명산대천에서 사당에 이르기까지 그 아래를 지나는 모든 문인이나 나그네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올리니, 신에게 고하는 것이나 신에게 기원하는 것이 모두 그런 것들입니다.

두류산은 먼 바닷가에 있는 산으로 수백 리나 펼쳐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진산(鎭山)이 되었으며, 그 아래로 수십 개의 고을이 둘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산에는 반드시 크고 높은 신령이 있어서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정기를 쌓아 백성에게 복을 내리는 것이 무궁무진합니다. 저는 진사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도(邪道)를 미워하여, 평생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사(淫祠)를 지날 때면 비난하거나 무너뜨리고야 말았습니다.

금년 여름 유람할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나 이 산 기슭에 이르렀는데, 안개와 비가 온 산을 가려 이 산의 경치를 마음껏 구경하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맑게 개니, 마치 한유가 정성스런 마음으로 묵묵히 기도하자 형산(衡山)의 구름이 맑게 갠 것과 같습니다. 이를 보면 형산의 신령이 반드시 한유에게 박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 고을 주민에게 물으니 이 신을 마야부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속이는 말입니다. 점필재 김공은 우리나라의 박학다식한 큰 선비입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고증하여 이 신을 고려 태조의 비(妃)인 위숙 왕후라고 하였으니, 믿을 만합니다. 위숙 왕후는 열조(烈祖)를 이끌어 세워 삼한을 통일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러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모셔놓고서 백성들이 영원히 제사를 올리는 것은 순리입니다.

내 나이 약관(弱冠)에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만 집에 계신데, 서산의 해가 점점 기울 듯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옮기는 순간에도 애일(愛日)의 간절한 마음을 늦춘 적이 없습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90세를 누린 것과 곽종(郭琮)이 어머니를 위해 장수를 빈 것이 서적에서 증험되니, 감히 산행을 위하여 고하고 노모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백반 한 그릇과 맑은 물 한 잔을 올리니 정결하고 공경한 마음을 귀히 여기시어 부디 흠향하소서.”

라고 하였다.

제문을 다 짓고서 술을 따르려 하는데, 백욱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야부인이라 하는데 그대는 위숙왕후라고 확신하니, 세상 사람들이 의심할 듯 합니다.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위숙왕후든 마야부인이든 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산신령에게 술을 올릴 수는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태산(泰山)의 신이 임방(林放)만 못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국가에서 분향을 할 적에 산신령에게 하지 않고 매번 성모(聖母)나 가섭에게 하였으니, 그대는 어찌 하시렵니까?”

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두류산의 신령이 흠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산을 진압하는 신령을 버려두고 음사(淫祀)를 번거롭게 행하는·것은 질종(秩宗, * 제사 관계 담당관직을 가리킴)의 허물입니다.”

라고 하고서, 마침내 제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반평생 동안 운기(雲氣)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을 뿐, 그것이 허공에 있는 물건인 줄 몰랐다. 여기 올라와보니 구름이 눈 아래 평평히 깔려 있을 따름이었다. 구름이 평평히 깔린 곳은 그 아래가 대낮인데도 반드시 그늘이 드리웠을 것이다. 해질녘에 남기(嵐氣)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석문(石門, * 통천문)을 통해 내려가 향적사에서 묵었다.

이 절의 승려가 나에게 치하하기를, “이 늙은이가 이 절에 머문 지 오래되었습니다. 올해에 상봉을 보고자 하는 승려와 속인들이 많았으나, 비바람과 구름에 가려 두류산 전체를 본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날씨가 흐려 비가 올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비님들이 상봉에 오르자 날씨가 맑게 개었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앞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금강대(金剛臺, * 향적대 앞의 바위)라고 하였다. 바위에 올라보니, 흰 구름이 항상 감싸고 있는 기이한 봉우리가 무수히 보였다.

법계사에서 상봉에 이르고 또 향적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층층의 비탈길을 돌고 돌았다. 비탈진 바위에는 모두 석심(石蕈)이 나 있었다. 산은 모두 첩첩의 돌뿐이었다. 낙엽이 돌 틈에 끼여 썩었고, 초목이 거기에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짤막한데 모두 동남쪽으로 쏠려 있고, 구부러지고 더부룩하여 가지와 잎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는데 상봉 쪽이 더욱 심하였다.

두견화(杜鵑花) 한두 송이가 이제 막 피기 시작하였다.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니 여기는 바로 2월 초순의 기후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산 위에는 꽃과 잎이 5월이 되어야 비로소 한창이고, 6월이 되면 벌써 시들기 시작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백욱에게 묻기를,

“봉우리가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먼저 양기를 얻을 듯 한데 도리어 뒤늦게 피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땅과 하늘의 거리는 8만 리이고 우리가 며칠 동안 걸어서 상봉에 올랐지만 상봉의 높이는 지상에서 1백 리도 채 되지 않습니다. 상봉에서 하늘까지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양기를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홀로 우뚝 솟아 바람만 먼저 맞을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생물의 생리는 높은 곳을 꺼릴 듯합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있으면 거센 비바람을 면치 못하고 낮은 곳에 있어도 도끼에 찍히는 액운을 만나게 되니,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요?”

라고 하였다.

향적사 곁에 큰 목재 수백 개가 쌓여 있었다. 승려에게 무엇에 쓸 것인지를 묻자 승려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호남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구걸하여 섬진강까지 배로 실어온 뒤 하나하나 옮겨다놓은 것입니다. 이 절을 새로 지으려 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유자(儒者)들의 학궁(學宮)에 대한 정성은 아직 멀었구나. 석가의 가르침이 서역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를 떠받들어 문선왕(文宣王, * 공자)을 능가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사교(邪敎)에 탐닉하는 것이 우리들이 정도(正道)를 독실히 믿는 것과 다르구나.”

라고 하였다.

이 절에서는 멀리 바다가 보였다. 내가 승려에게 말하기를,

“천지간에 바다는 넓고 육지는 적습니다. 그런데 우리 청구(靑邱, * 조선)는 산이 평지보다 많고 국가의 인구는 날로 불어나 수용할 곳이 없습니다. 그대는 자비심이 많으니 어찌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두류산이 뻗어내린 산맥을 거슬러 올라 장백산(長白山)에서부터 평평하게 깎아내려 남해를 메워서 만리의 평원을 만들어 백성들이 살 곳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복전(福田)을 삼으시구려. 그러면 정위(精衛)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소승이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도록 오랫동안 깊은 산 속 바위굴에서 금단(金丹, * 장생불사의 신선이 된다는 영약)을 수련하시오. 그리하여 당신네 열반(涅槃)의 도를 버리고 저 장생(長生)의 도술을 배워서 두류산이 골짜기가 되고 남해가 뽕나무 밭이 되기를 기다리시오. 그런 뒤에 함께 장수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소?”

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辛亥黎明. 觀日出暘谷. 晴空磨銅. 徘徊四望. 萬里極目. 大地群山. 皆爲蟻封蚯垤. 描寫則可會昌黎南山之作. 而心眼則直符宣尼東山之登矣. 多少興懷. 下瞰塵寰. 感慨繫之矣. 山之東南. 古新羅之區也. 山之西北. 古百濟之地也. 紛紛蚊蚋. 起滅於瓮盎. 從頭屈指. 幾多豪傑. 埋骨於此哉. 吾輩今日登覽無恙者. 亦豈非 上之賜也. 茫茫藹藹. 太平煙火中. 又念有悲歡憂喜. 吹萬不齊者. 遂語伯勖曰. 安得與君邀偓佺之輩. 凌鴻鵠之飛. 身游八紘之外. 眼窮一元之數. 以觀夫氣盡之時耶. 伯勖笑曰. 不可得矣. 仍命僕夫. 具貳簋泂酌. 將報事於祠下. 其文曰. 昔先王制上下之分. 五岳四瀆. 唯天子得以祭之. 諸侯只祭封內之山川. 公卿大夫各有所當祀也. 降及後世. 名山大川. 至於祠廟. 凡文人行子之出其下者. 必以行具而奠. 有告焉有祈焉者. 皆是也. 維頭流. 邈在海邦. 磅礴數百里. 作鎭湖嶺二南之界. 環其下數十州. 必有巨靈高神. 興雲雨儲精英. 以福于民無窮已也. 某與進士鄭汝昌. 守道疾邪. 平生不讀非聖之書. 行過淫祠. 必衊之毀之而後止也. 今年夏. 作意遊山. 行及茲山之麓. 霧雨冥濛. 懼不克縱觀茲山之異也. 昨者. 雲陰解駁. 日月光霽. 精心默禱. 衡山之靈. 未必不厚於韓愈氏也. 問諸居民. 以神爲摩耶夫人者誣. 而佔畢金公. 吾東方之博通宏儒. 徵諸李承休之帝王韻記. 以神爲麗祖之妃威肅王后者信也. 提甲烈祖. 以一三韓. 免東人於紛爭之苦. 立祠巨岳而永享于民. 順也. 吾年弱冠. 失所怙. 老母在堂. 西山之暉漸迫. 愛日之懇. 未嘗弛於跬步之頃也. 周文九齡. 郭琮祈年. 書籍有驗. 敢爲山行告焉. 而敢爲老母祈焉. 白飯一盂. 明水一爵. 貴其潔且敬也. 尙饗. 文旣成且酹. 伯勖曰. 世方以爲摩耶夫人. 而子明其威肅王后. 恐未免世人之疑. 不如已之. 余曰. 且除威肅摩耶. 而山靈可酹. 伯勖曰. 曾謂泰山不如林放乎. 且國家行香. 不於山靈. 而每於聖母或迦葉. 子將奈何. 余曰. 然則頭流之靈. 不享矣. 棄山鎭而瀆淫祀. 是則秩宗者之過也. 遂止. 半日. 但仰見雲氣之麗于天. 不知其爲半空物也. 到此則眼底平鋪而已. 平鋪處. 必晝陰也. 日晡時. 嵐氣四合. 遂下由石門. 投香積寺. 寺僧相賀云. 老物住此久. 今年多少僧俗. 欲觀上峯者. 輒爲風雨雲陰所蔽. 無一得見頭流之全體. 昨晩陰雨有徵. 措大一登. 便光霽. 是亦異也. 余頷之. 寺前有巖斗絶. 名金剛臺. 登眺則眼前奇峯無數. 白雲常繞之. 自法界至上峯至香積. 皆轉繞層崖而行. 崖面皆石蕈. 山皆疊石. 落葉眯於石眼. 而草木之根. 因着而生. 枝條短折. 皆東南靡拳曲蒙茸. 不能舒展枝葉. 上峯尤甚. 杜鵑花始開一花兩花. 而未拆之蕊滿枝. 正是二月初也. 僧云. 山上花葉. 五月始盛. 六月始彫. 余問伯勖. 峯高近天. 宜先得陽氣而反後. 何也. 伯勖曰. 大地距天八萬里. 而吾行數日而到上峯. 峯之高距地不滿百里. 則其距天不知其幾也. 不可言先陽. 特孤高先受風耳. 余曰. 凡物之生. 其忌高哉. 然高不免風雨之萃. 卑且遭斧斤之厄. 將何擇而可乎. 香積傍. 有大木數百章積焉. 問僧何爲. 僧曰. 老子行乞於湖南諸州. 漕致蟾津. 寸寸而輸. 欲新此寺. 已六年矣. 余曰. 吾儒之於學宮. 其未矣. 釋氏之敎. 覃自西域. 愚夫愚婦. 奉之軼於文宣王. 民之耽邪. 不如信正之篤矣. 寺可以望海. 余謂僧曰. 天壤之間. 水多而土小. 吾靑邱. 山多於地. 而國家生齒日繁. 無所容. 汝善慈悲. 盍爲衆生. 根尋頭流之所從來. 自長白山. 平鋤以塡南海. 作原隰萬里. 以奠民居爲福田. 不猶愈於精衛乎. 僧曰. 不敢當. 余又曰. 高岸爲谷. 滄海爲桑田. 雲山石室. 修鍊金丹. 舍爾涅槃之道. 學彼長生之術. 待頭流爲谷. 南海爲桑田. 然後共保耆壽. 何如. 僧曰. 願結因緣. 遂拍手大噱.

 

여러 사찰을 거치다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 * 세석대피소 옆의 절터)에서 묵었다.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우뚝 솟아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다.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가섭의 석상이 있었다. 법당 안에는 찬(贊)이 적힌 가섭의 초상화가 있는데, 비해당(* 안평대군)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 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명산에 보관해두고 안목이 높은 사람에게 감상토록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라고 하여 그만두었다. 백성들이 시주하여 가섭상에 복을 비는 것이 천왕봉의 성모상에게 비는 것과 같았다.

밤에 법당에서 잤다.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이 휘몰아쳐 문짝을 후려쳤다. 사람을 엄습하는 찬 기운이 매우 사나워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25일, 계축일.

산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갔다(* 덕평봉을 향한 것으로 추정). 능선의 북쪽은 함양 땅이고 남쪽은 진양(晉陽)땅이다. 나무꾼이 다니는 한 가닥 길이 함양과 진양을 가운데로 나눠놓았다. 한참 동안 서성이며 조망하다가 다시 그늘진 숲 속으로 걸어갔다. 숲 속이었지만 온통 흙으로 덮여 있어서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매를 잡는 사람들이 자주 다녀 오솔길이 나 있어서, 상원사(上元寺)와 법계사로 오르던 길만큼 험하지는 않았다.

산 정상에서 서둘러 하산하여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닿았다. 의신사는 평지에 있었다. 절의 벽면에는 김언신(金彦辛), 김미(金楣)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승려 30여 명이 정진하고 있었다. 대나무 숲과 감나무 밭 사이사이에 채소밭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인간 세상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머리를 돌려 청산을 바라보니 안개와 노을이 드리우고 원숭이와 학이 노니는 선경(仙境)을 떠나온 회포가 벌써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주지 법해(法海)는 참다운 승려였다.

잠시 쉬었다가 길을 떠났다. 비탈길을 오르기 싫어 시냇물을 따라 흰 돌을 밟으며 내려갔다. 골짜기가 맑고 그윽하여 즐길 만하였다. 때로는 지팡이를 짚고 서서 노니는 물고기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신흥사(神興寺)에 당도하였다. 절 앞에 맑은 못과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저녁 내내 놀 만하였다. 이 절은 시냇가에 세워져 있어 여러 사찰 중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났다. 그래서 유람 온 사람이 돌아가기를 잊게 한다. 어스름 녘에 절 안으로 들어가니, 이 절은 불법을 닦는 도량이라 하였다. 종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고 사람들이 떠들썩하여 멍하니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이 날 약 40여 리를 걸었는데 산길이 험준하였다. 이 절의 승려들이 말하기를, “잘 걸으십니다. 잘 걸으십니다.”

라고 칭찬하였다. 나는 평소 역졸이나 심부름꾼이 달리는 말을 뒤좇아가는 것을 보고서,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번 산행을 하면서 처음에는 발걸음이 무거운 듯하더니 날이 거듭될수록 두 다리가 점점 가뿐해짐을 느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일이 습관들이기 나름임을 알게 되었다.

 

(二)十四日壬子. 宿靈神. 前有唱佛臺. 後有坐高臺. 突起千仞. 登而目可及遠. 東有靈溪. 注於剖竹之中. 西有玉淸水. 僧云鷹所飮也. 北有石迦葉像. 堂中有畫迦葉圖贊. 匪懈堂三絶也. 煙煤雨淋. 惜其奇寶之見棄於空山. 欲取之. 伯勖曰. 私於一家. 曷若公於名山. 以備具眼者之遊賞也. 遂不取. 百姓施財. 邀福於迦葉與天王等. 夜宿法堂. 昏霧顚風. 敲戶排窓. 氣襲人甚惡. 不可得以久留也.

 

五日癸丑. 竝山脊而西. 脊以北. 咸陽之地也. 而以南. 晉陽之地也. 一帶樵徑. 中分咸晉. 彷徨眺望久之. 復行樹陰中. 然皆土山. 有路可尋. 捕鷹者多成蹊徑. 不如上元法界路之甚也. 自山頂猝下. 午投義神寺. 寺在平地. 寺壁有金彥辛金楣題名. 居僧三十餘. 亦精進. 竹林柹園. 種菜爲食. 始覺人間世矣. 然回首靑山. 已抱辭煙霞. 謝猿鶴之懷矣. 寮主法海. 可僧也. 少憩遂行. 厭於登高. 乃沿澗水. 踏白石而下洞府. 淸邃可樂. 或拄杖觀游魚. 及到神興寺. 寺前澄潭盤石. 可以永夕. 寺臨澗而構. 最勝於諸刹. 遊人足以忘歸矣. 昏投寺中. 云. 此作法道場. 鍾鼓喧聒. 人物鬧擾. 茫然若有所失. 是日約行四十餘里. 山路險阨. 寺僧皆以爲健步健步云. 余平日. 見郵童走卒. 行及奔馬. 自以爲事之甚難. 比山行初若重步. 爲日多而兩脚漸覺軒擧. 始知凡事在乎習成耳. 余每拄雙筇而行.

 

최치원에 얽힌 설화를 듣다

 

26일, 갑인일.

나는 항상 쌍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이 날에야 비로소 지팡이를 버리고 말을 탔다. 운중흥(雲中興), 요장로(了長老) 두 승려가 동구 밖까지 나와 배웅하였다. 한 외나무다리에 이르러 요장로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세에 퇴은(退隱) 스님이 신흥사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문도에게 말하기를, ‘손님이 오실 것이니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거라.’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등나무 덩쿨을 엮어 가슴걸이와 고삐를 한 흰 말을 타고 재빨리 건너오는데, 외나무다리를 마치 평지인 듯 밟으니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절에 도착하자 스님이 방으로 맞아들여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작별하고 떠나려하니,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강씨(姜氏) 성을 가진 젊은이가 그 기이한 손님을 신비롭게 여겨 말의 재갈을 잡고 그를 따라가려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채찍을 휘두르며 떠나는 바람에 소매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는데 젊은이가 황급히 그 책을 주웠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 잘못으로 속세의 하찮은 사람에게 넘겨주고 말았구나. 소중히 여겨 잘 감춰두고 세상에 보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 급히 떠나 다시 외나무다리를 지나가버렸습니다. 강씨 젊은이는 지금 백발노인이지만 아직도 진양(* 진주)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 책을 보여달라고 해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손님은 고운 최치원인데, 죽지 않고 청학동에 살아 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승려의 말은 비록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기록해둘 만하다. 나는 백욱과 함께 시험삼아 그 다리를 건너보려 하였으나, 몇 걸음 내딛자마자 정신이 아찔하여 떨어질 뻔하였다. 되돌아와 아래로 내려가 옷을 걷어올리고 건넜다. 걸어서 골짜기 입구를 벗어났다. 산에는 왕대가 많았고, 물은 동네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점점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쪽 산기슭에 오래된 성루가 있는데, 옛 화개현(花開縣)이라 하였다.

5리를 가서 시냇물을 건너는데 수석(水石)이 즐비하였다. 동쪽으로 1리를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였다. 그 옆에 두 바위가 마주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광제암문’이란 글자와 비교해보니, 크기는 훨씬 더 커서 말〔斗〕만 하지만, 글씨체는 그보다 못하여 아동이 습자(習字)한 것과 같았다.

석문을 지나 1리를 가니 귀부(龜趺)와 이수〔龍頭〕가 달린 오래된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의 전액(篆額)에는 ‘쌍계사 고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 끝부분에 ‘전(前) 서국도순관(西國都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짓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 비석은 광계(光啓) 3년(887)에 세운 것이다. 광계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이다. 지금까지 600여 년이나 지났으니, 오래되기도 하였다. 인물은 태어났다 가고 운수는 흥했다 폐했다 하며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비석은 유독 썩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니, 한번 탄식할 만한 일이다.

이번 유람에 비석을 구경한 것이 많았다. 단속사 신행(信行)의 비석은 원화(元和, * 당 헌종의 연호)연간에 세웠으니 광계보다 앞선다. 오대산 수륙정사의 기문은 권적이 지었으니 그도 한 세상의 문사(文士)였다. 그런데 유독 이 비석에 대해서는 끝없이 감회가 일어나니, 이 어찌 고운의 손길이 여전히 남아 있고 고운이 산수 사이에 노닐던 그 마음이 백세 뒤의 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 아니랴.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서 모시고 다니며 고운이 외로이 떠돌며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들과 어울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운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반드시 중요한 자리에 앉아 나라를 빛내는 문필을 잡고서 태평성대를 찬란하게 표현했을 것이며, 나도 그의 문하에서 붓과 벼루를 받들고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이끼 낀 비석을 어루만지며 감개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다만 비문(碑文)을 읽어보니 문장이 변려문(騈儷文)으로 되어 있고 또 선사나 부처를 위해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어째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가 만당(晩唐, * 당나라 말기)때의 문풍을 배웠기 때문에 그 누습을 고치지 못한 것이 아닐까? 또한 숨어사는 사람들 속에 묻혀서 세상이 쇠퇴하는 것을 기롱(譏弄)하며, 시속(時俗)을 따라가면서 선사나 부처에 몸을 의탁하여 자신을 숨기려 한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비석의 북쪽 수십 보 거리에 백 아람은 됨직한 늙은 회화나무〔槐〕가 있는데, 뿌리가 시냇물에 걸쳐 있었다. 이 나무도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이 절의 승려가 후원에 불을 놓다가 잘못하여 회화나무 밑둥치까지 불이 번져 이 거목이 쓰러지고 말았다. 썩다 남은 밑동이 10여 자는 되겠는데, 이 절의 승려들은 아직도 그 뿌리 위를 오가며 금교(金橋)라고 부른다. 아! 식물은 또한 생기가 있어 돌처럼 장수(長壽)하지 못하는구나.

절의 북쪽에 고운이 올랐던 팔영루(八詠樓)의 옛터가 있었다. 이 절의 승려 의공(義空)이 자재를 모아 누각을 다시 세우려 한다고 하였다. 의공과 잠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까닭을 물어보니, 그 승려가 말하기를,

“관청에서 은어를 잡는데 물이 불어 그물을 칠 수 없습니다. 조피나무〔川椒〕껍질과 잎을 가져다 물에 풀어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데 승려들에게 그것을 채취해오라고 독촉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승려들보고 살생하는 데 쓰이는 물건을 준비하라고 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여, 나도 한동안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대사의 주민들이 이정의 포학함에 시달린다고 들었는데, 쌍계사의 승려들도 물고기 잡는 물건을 관아에 바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산속에 사는 것도 편치 못하구나.

 

二十六日甲寅. 始舍筇騎馬. 有雲中興,了長老二僧. 相送出洞. 至一略彴. 了長老云. 近世有退隱師者住神興. 一日語其徒曰. 有客至. 當淨掃除以候. 俄而有一人騎白駒. 結藤蘿爲鞅轡. 疾行而來. 履獨木如平地. 衆皆駭之. 至寺迎入一室. 淸夜共話. 不可聽記. 明朝辭去. 有姜家蒼頭者. 學書於寺. 疑其異客. 執鞚以奉之. 其人以鞭揮去. 袖落一卷文字. 蒼頭急取之. 其人曰. 誤被塵隷攬取. 珍重愼藏. 勿以示世. 言訖急行. 復由略彴而逝. 姜蒼頭者. 今白頭猶居晉陽之境. 人有知者. 求觀不與. 蓋其人. 崔孤雲不死在靑鶴洞云. 其說雖無稽而亦可記也. 余與伯勖. 試渡其橋. 纔進數步. 而惝怳欲墮. 返而厲揭於澗之下流以渡. 行出谷口. 山多篔簹. 水橫洞下流. 漸見村落. 西山之麓有古壘. 云古花開也. 行五里. 亂澗水. 水石齒齒. 東行一里. 雙溪合流. 兩石對立. 刻雙谿石門四字. 視廣濟嵒門字. 加大如斗. 而字體不相類. 如兒童習字者之爲. 由石門一里. 有龜龍古碑. 篆其額曰. 雙磎寺故眞鑑禪師碑九字. 傍書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 乃光啓三年建. 光啓. 唐僖宗年也. 甲子至今六百餘年. 亦古矣. 人物存亡. 大運興廢. 相尋於無窮. 而此頑然者. 獨立不朽. 可發一歎. 所見碑碣多矣. 斷俗神行之碑. 在於元和. 則先於光啓矣. 五臺水精之記. 撰於權適. 則亦一世之文士也. 而獨於此興懷不已者. 豈孤雲手澤尙存. 而孤雲所以徜徉山水間者. 其襟懷有契於百世之後歟. 使某生於孤雲之時. 當執杖屨而從. 不使孤雲踽踽與學佛者爲徒. 使孤雲生於今日. 亦必居可爲之地. 摛華國之文. 賁飾太平. 某亦得以奉筆硯於門下矣. 摩挲苔蘚. 多少感慨. 第讀其詞偶儷. 而好爲禪佛作文. 何也. 豈學於晩唐而未變其習耶. 將仙逸隱淪. 玩世之衰. 而與時偃仰. 托於禪佛. 以自韜晦耶. 不可知也. 碑北數十步. 有百圍老槐. 根跨溪水. 亦孤雲手植. 寺僧燒園. 誤延槐腹. 虎倒龍顚之餘. 榦之腐而存者丈餘. 居僧猶履根上往來. 呼爲金橋. 噫. 植物亦有生氣. 則不能如石之壽也. 寺北有孤雲所登八詠樓遺址. 居僧義空. 欲鳩財而起樓云. 方與義空少坐. 忽有剝啄聲. 問之. 云. 官捕銀鯽. 水漲不可施罟. 當取川椒皮葉毒魚. 趣寺僧取給. 僧曰. 資殺生之物. 奈何. 余亦顰蹙久之. 五臺之民. 旣不免里正之暴. 雙磎僧. 又將供毒魚之物. 山林亦不安矣.

 

하산하며 악양성에 이르는 물길을 보기로 하다

 

27일, 을묘일.

비 때문에 길을 떠나지 못하였다.

 

 28일, 병진일.

쌍계사의 동쪽 골짜기를 따라 다시 지팡이를 짚고 길을 떠났다(* 내원골을 따라 선방으로 오른 듯).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태로운 잔도(棧道, * 험하여 사다리를 설치하여 이동할 수 있는 길)를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몇 리를 가자,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 만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우리들은 이곳에 올 수 있었는데,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어쩌면 미수가 여기까지 왔었는데 느슨한 마음으로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청학동이란 정말 없는데 세상에서 그 소문만 계속 전해오는 것인가?

앞으로 수십 보를 가자 가파른 골짜기가 나타났다.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이라 하였다. 암자가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고, 사방의 산은 기이하고 빼어나 이를 데 없이 상쾌하였다. 동쪽과 서쪽으로 향로봉이 있는데, 좌우로 마주보고 있었다. 아래에는 용추(龍湫)와 학연(鶴淵)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글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

“매년 늦여름이 되면 푸른 몸에 붉은 정수리와 긴 다리를 가진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이는데, 용추로 날아 내려 물을 마시고 곧 떠나갑니다. 이 암자에 사는 승려들은 여러 번 보았는데, 이 새를 청학(靑鶴)이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어찌 하면 청학을 내 곁으로 오게 하여, 거문고를 뜯으며 그와 벗할 수 있을까? 암자의 동쪽에는 눈이 내리듯 하얗게 떨어지는 샘이 있는데, 천 길 벼랑으로 떨어져 학연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지극히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등구사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16일이 지났다. 지나는 곳마다 온갖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고 많은 골짜기 물이 다투어 흘러 기뻐하고 골랄만한 경치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한 곳뿐이었다. 또 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미수가 찾던 곳이 여기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계곡이 높고 가팔라서 원숭이가 아니면 다닐 수 없고, 처자식을 데리고 소를 끌고 들어오더라도 너무 좁아 용납할 곳이 없었다. 엄천사(巖川寺)와 단속사 같은 곳은 모두 승려들의 도량이 되었고,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할거나!

백욱이 말하기를,

“솔과 대 둘 다 좋지만 솔이 대만 못하고, 바람과 달 둘 다 청량하지만 바람은 중천(中天)에 그림자를 드린 달의 기이함만 못하며, 산과 물 모두 인자(仁者), 지자(智者)가 좋아하는 바이지만, 산은 공자(孔子)께서 ‘물이여, 물이여!’라고 탄식한 것만 못합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대와 함께 길을 떠나 악양성(岳陽城)으로 나가서 큰 호수에 이는 물결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기에, 나도,

“그렇게 합시다.”

라고 하였다.

 

翌日乙卯. 因雨輟行.

 

二十八日丙辰. 緣雙磎之東. 復扶筇攀石磴. 側危棧行數里. 得一洞府. 稍寬平可耕. 世以此爲靑鶴洞云者也. 仍思吾輩得以至此. 則李眉叟何以不能到歟. 豈眉叟到此而謾不省記歟. 抑果無靑鶴洞者. 而世傳相仍歟. 前行數十步. 臨絶壑閣過棧道. 得一菴曰佛日. 構在絶壁上. 前臨無地. 四山奇峭. 爽塏無比. 東西有香爐峯. 左右相對. 下有龍湫鶴淵. 深不可測. 菴僧云. 每歲季夏. 有靑身赤頂長脛之禽. 集香爐峯松樹. 飛而下. 飮於湫卽去. 居僧屢度見之. 是靑鶴云也. 安得羅而致之. 置一琴爲伴耶. 菴之東. 有飛泉濺雪. 下落千丈入鶴湫. 此儘佳境. 自登龜至此. 前後十六日. 所歷千巖競秀. 萬壑爭流. 可喜可愕者. 不可一二數. 而可人意者. 佛日一菴耳. 又聞鶴語. 疑眉叟所覓者在此. 然壑谷峻絶. 非猿狖則不可行. 妻孥牛犢. 無所容矣. 巖川斷俗. 皆爲緇場. 而靑鶴洞. 終不可得. 奈何. 伯勖曰. 松與竹兩美也. 而不若此君. 風與月雙淸也. 而不若天心對影之爲奇. 山與水俱仁智所樂也. 而不若水哉水哉. 遲明. 將與子行. 出岳陽城而觀瀾於大湖也. 余曰. 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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