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단상 -

 

박(朴)씨에게 하사받은 이(李)씨

- 박(朴)씨는 성(姓)이고 박씨로부터 하사받은 이(李)씨는 씨(氏)이다 -

 

 

필자가 시리즈글 <신화이야기> 글에서 최근 식물신화로서 단풍나무와 자작나무를 다루었다. 거기에서 특히 고로쇠나무와 거제수나무 즉 단풍나무와 자작나무의 곡우물 수액 채취에는 신화적인 배경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나무 신화와 관련하여 한국의 주요 성씨들이 나무(木)와 관련된 성씨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한국 4대성씨인 김(金) 이(李) 박(朴) 최(崔)는 나무신화 또는 그와 연관한 성씨들이다.    

 

김(金)씨는 나무로 지은 일주문 또는 맞배지붕 목조 기와지붕을 옆에서 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金'은 나무로 만든 상자와 같은 모습이다. 보물섬의 보물상자처럼 지붕이 아치형인데 人변으로 덮은 것일 뿐이다.

 

그런 반면에 이(李)씨는 나무 밑에 아이의 모습이다. 이것은 김알지 신화에 나오는 '나무 밑에서 흰 닭이 울었다'는 신화적 모습이기도 하다. 

 

박(朴)씨의 경우 앞선 글들에서 많이 다루었지만, 나무에 기원(卜)을 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卜'자는 '점 복'자라고 하지만, 그 상형은 기도하는 엄지가 나온 두 손을 모은 모습이다. 

 

최(崔)씨는 봉황과 관련된 성씨이다. 山 아래 봉추(鳳隹)의 隹 즉 봉황 새끼이니 단풍 든 산에 봉황이 날아오기를 바라는 기원이 '崔' 씨 글자 속에 들어 있다.

 

현 정국에서 재미있는 것은 李씨와 朴씨의 정국이라는 점이다. 이명박씨가 집권하고 있지만, 국민적 인기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최고를 구가하고 있다. 같은 집권당이면서도 박씨와 이씨가 가지는 그 경선의 앙금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李씨는 본래 박혁거세 박 성(姓) 가문에서 李씨의 그 씨(氏)를 하사한 것이다. 한국에서 李씨는 특히 경주이씨는 신라 6성(六姓)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6姓이라는 것이 본래는 6氏였다. 한국의 李씨들 가운데는 경주李씨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신라 6氏란 李, 崔, 鄭, 孫, 裵, 薛 6촌장의 씨(氏)를 말한다. 이들 6촌장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6성은 모두 朴 성(姓)의 왕실 가문에 의하여 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탄생지로 추정되는 경주 탑동 나정.

 

박혁거세와 남해왕을 이어 기원전 32년 신라 3대 왕위에 오른 유리왕(新羅 儒理王 8)은 6촌장에게 각각 성을 하사하였는데 그것이 李씨를 비롯한 崔, 鄭, 孫, 裵, 薛 신라 건국의 6촌장의 씨(氏)들이다. 알천양산촌 촌장이었던 알평은 아찬의 벼슬에서 박씨 가문인 유리왕으로부터 이씨(李氏) 성을 하사 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이명박씨의 이씨(李氏)이다.

 

<경주이씨대동보>에 의하면 경주이씨의 시조라는 알평(謁平)의 출생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표암]로 내려왔다고 했다. 이씨 시조가 표주박 바위에 내려왔다는 것은 박씨를 바탕하여 성씨가 주어진 것을 전설화한 것이다. 

 

 

*표주박을 닮아 있는 황남대총.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 고분공원 안에 있는 고분. 사적 제40호.

  표주박은 박혁거세의 '박'에 연계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한국 2위로 많은 성씨인 이씨는 중국에서는 최대의 씨(氏)이지만, 朴 성(姓)은 한국 고유의 바가지 성(姓)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라 3대 유리왕 때에 알천양산촌 알평에게 李씨 성을 하사할 때의 그 李씨의 글자 모양이 김알지 신화에서 말하는 '금궤가 걸려 있는 나무 아래 흰 닭이 울었다'는 것과 유사한 '나무 아래 아기'의 모습이 '李'자이다. 박석김(朴昔金) 신라 삼대왕실의 영향을 볼 수 있다.

 

'朴'자가 단군신화의 신단수처럼 나무(木) + 기원(卜)으로 보다 근원적이라면, '李'자는 김알지 신화처럼 나무 아래 아기가 이미 태어나 있는 모습이다. 신라의 삼대 왕성인 박석김(朴昔金) 세 성씨에서 김알지 신화의 '나무'와 관련된 내용은 이러한 '李'씨의 글자 모양과 연관되어 있다. 나무에 대한 신화적 배경을 신라 초기의 신화들과 성씨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본래부터 성씨란 성(姓)과 씨(氏)로 구분되어 있었다. 성(姓)이란 글자 모양처럼 모계사회의 태생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성이란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반면에 씨(氏)는 "출생한 곳으로서 아버지와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는 “황제(黃帝)"의 성(姓)은 “희(姬)”였고 그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이러한 성과 씨가 나중에는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이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황제(黃帝) 자신이 성(姓)이 있듯이 결국 받들어 모셔진 존재는 성(姓)이었고 하사받은 것은 씨(氏)가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 신라 건국에서 성(姓)은 오직 박혁거세의 박(朴) 만이 성이었고, 그 뒤에 6총장이 유리왕에게 하사받은 6촌장들의 6씨는 씨(氏)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다.

 

성(姓)은 여성적 모계사회를 배경으로 보다 근원적이고 씨(氏)는 성을 가진 제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남성적 배경을 가진다.

 

신라시조 신화와 관련하여 그리고 신라정치 구조의 여성적 배경을 터로 모계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면이 박(朴)가의 성(姓)이다. 신라의 여성적 왕계 계보가 남성 왕계를 압도하는 것은 <화랑세기>에 잘 남아 있다.

 

박혁거세가 남성시조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후대의 표현일 뿐이다. 사실은 朴이라는 성(姓)은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의 성(姓)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낳은 그 '박'은 선도성모 자신이며 그것은 바가지 신화에 연계되어 있다.

 

박을 의미하는 신라의 호공(瓠公) 문화에 광범위하게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박 특히 표주박(瓠 또는 瓢)이며 그러한 '박'은 나중에 <흥부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흥부전>의 흥부는 박흥부이며 바가지에 대한 신라신화가 신라가 망하자 판소리 문학화되어 흥부는 '朴興夫'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처럼 박혁거세를 낳은 선도성모를 모시는 전통이 신라시대에 있었으며 그것이 조선시대에 보완되기도 하였고 지금도 남아 있다.

 

중동 문화와 신라 문화의 연계성에 대하여 특히 예수와 산중의 사가랴 가문의 풍습과 신라 화랑의 풍류선도(風流仙道)문화 대하여 비교하는 주장은 일찍이 필자가 <화랑세기>와 달라이라마 탄생 등의 비전을 내용으로 처음으로 제기한 바 있다. 성모(聖母) 마리아에 대한 내용은 신라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 성(姓)은 박혁거세를 낳은 선도성모에게서 나온 성(姓)인 것이다. 선도성모를 모시는 사당은 '성모사(聖母祠)'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경주 선도산에 남아 있다.  

 

*경주 선도산성 성모사(聖母祠)

朴이라는 성(姓)은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의 성(姓)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명박씨에 대하여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넓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은 그녀가 가지는 선도성모의 '모계적' 신화를 바탕한 면이 朴씨 성(姓)의 근원적 힘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李씨는 선도성모로부터 나온 유리왕(신라 3대)이 하사한 씨(氏)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왕실의 고(高) 성이나 백제 왕실의 '부여(夫餘)' 성처럼 신라 왕가의 삼대 성인 박(朴), 석(昔), 김(金)의 경우는 제왕의 성으로서 성(姓)이다. 거기에서 하사받거나 파생된 가문들은 씨(氏)에 속한다는 것이 엄격한 구분이 된다. 이들 성과 씨를 합쳐 '성씨'라고 하는 것이다. 고려시조 왕건의 경우 왕씨들의 시조로 보지만 본래 왕건과 발해시조 대조영은 그 성이 고(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즈음은 '성(姓)이 무언가'라고 물으면 '김씨(氏)'라고 하면 사실은 비논리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씨가 성을 대신하고 있다. '김씨' '이씨'라고 하지 '김성' '이성'이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姓)은 그 표기상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원뜻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성씨(姓氏)'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면 박근혜와 이명박은 성(姓)과 씨(氏)만큼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성씨는 지난 2000년에 조사한 바로 전체 286개이다. 그 10대 성씨의 순위는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이지만, 이 중 성(姓)은 김(金), 박(朴) 둘 뿐이고 나머지는(한국 씨족보에만 따르면) 씨(氏)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약 900년 전인 서기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씌어진 『백가성(百家姓)』이란 책에서 중국의 성씨에 대하여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순서가 가문의 중요도를 따져“趙錢孫李 周吳鄭王...”으로 기록했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다. 중국에서도 이(李)씨는 황제 아래 제후적인 성씨로 되어 있다.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씨를 하사한 것처럼 이(李)씨는 한국에서도 하사받은 경주 이씨(李氏)가 가장 오래된 李씨이다. 이러한 한국의 李씨가 중국 당나라 이씨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바로 신라 왕실 가문에서 이(李)씨를 신하에게 하사한 것에서 증명된다. 

 

그러니까 신라 3대 유리왕이 "李"씨를 하사한 것은 당나라 왕가의 씨(李)도 하사하는 대상이었다는 것만큼 박(朴) 성(姓)은 황제급의 위치에서 씨(氏)들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나라 때 하사받은 李씨들 외에도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들이 "李”씨로 바꾼 경우도 많았다. 

 

이것은 조선후기 갑오경장 이후 성씨가 없었던 많은 평민들이 김씨를 가장 많이 선호하여 바꾼 것과도 같은 배경이다.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 의하면 중국의 성씨는 무려 23,000개로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李씨가 가장 많다. 그러나 그 "李"씨는 성(姓)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은 아예 성(姓)이 없고 씨(氏)만 존재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서류형식에서도 그 어떤 것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모두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그 씨(氏)마저도 일본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없었다가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 발표로 인하여 씨들이 생겼다. 이때 마을을 이루는 장소의 지명 등의 지형을 씨로 삼아 일본인들은 각자의 씨(氏)에 대한 자부심이 한국인들보다 약하다. 

 

일본의 역사에서 족장의 칭호로 성(姓)을 사용한 적이 있고 씨(氏)는 그 친족을 나타냈던 적은 있다. 일본에서도 씨가 성보다 하위 개념이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성(姓)이 한반도의 왕족들의 배경에서만 존재하던 일본은 중세 이후에 성과 씨가 합쳐져 버린 결과가 오늘날 씨(氏)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은 여러 다른 나라와 왕조들이 합해진 나라라는 면에서 성(姓)의 힘이 남아 있어서 오늘날도 '성명(姓名)'이라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한반도에서 건너간 왕족 성(姓) 및 천황가의 오랜 단일 계보로로 인하여 성(姓)의 개념은 씨(氏)가 대부분이었기에 지금은 '씨명(氏名)'으로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사실상 일본에서 성(姓)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천황가의 성(姓)만 남아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10대 성씨 가운데 최대 성씨인 김(金)과 3위인 박(朴)은 성(姓)이다. 2위인 이(李)는 성이 아닌 씨(氏)이다. 이(李)씨는 중국에서는 최대의 성씨이지만 거기서도 성(姓)은 아니며 씨(氏)이다. 현재 일본의 모든 라스트 네임은 성(姓)은 아니고 모두 씨(氏)이다.

 

흥비롭게도 여성인 박근혜의 박(朴)은 선도성모의 여성 조상의 태생을 말하는 성(姓)이고, 씨(氏)만 존재하는 일본에서 태어난 이명박의 이(李)씨는 신라때 朴 성(姓)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이(李)씨라는 사실이다.

 

지난 경선 때에 한나라당 당원들의 다수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여 사실상 당내에서 이긴 사람은 박근혜 후보였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원외 여론조사 숫자로 우여곡절 이긴 결과에 대하여 개의치 않고 박근혜 후보가 대범하게 승복선언을 해주었다. 그 원외 인기 여론조사가 문제가 있었음은 현재의 인기도를 보면 확실히 증명이 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씨에 대하여 승복선언을 해주고 그것을 번복하지 않은 것은 사실상 신라 시조 朴 성(姓)의 가문인 3대 유리왕이 알평에게 李씨를 하사한 것의 재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李씨는 아직도 朴근혜의 '하사'에 대한 제대로 된 보답을 못하고 오히려 편협한 알천양산촌 족장 정치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같은 집권당 내에서 승복연설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나라 통합의 그 어떤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은 물론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 이명박씨 가문 지역구인 포항 한 곳을 위하여 전국 예산의 최대치분을 퍼붓듯이 한국의 모든 李씨들에게도 대범하지 못한 아직도 좁은 촌장 그릇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가 최근 경주를 힘써 찾아간 것은 여러가지 역사적 신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2/13/08 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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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두막 위에 서린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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