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죽주산성과 비봉산을 한바퀴 돌고나서, 조선시대 커다란 죽산부를 관할했던 읍치였던, 죽산면 번화가로 가기 전 중간에 있는 매산리에 들렸다. 매산리에 있는 커다란 석불입상을 보고자 함이다.

 

열려있는 문으로 사진으로 보이는것 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부처님이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키에 어딘지 부조화 스럽지만, 쉽게 만날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석불입상 앞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오층석탑이 같이 자리하고 있다.

탑지석에 의하면 오층석탑의 건립연대는 993년 이라고 하니 거란의 1차 침입이 있던 고려 성종때다.

 

 

 

 

 

 

 

 

 

 

 

 

 

 

 

 

 

 

 

 

 

 

 

 

 

 

 

 

 

 

 

 

 

 

 

 

 

높은 머리위에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쓰고 있는데, 이는 고려초기 보살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식 이라고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저 보개는 사실 황제가 쓰던 면류관을 표현한 것 이라고 한다. 고려초 광종이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주의식으로 개경을 황도로 삼고, 황제의 면류관을 썼다고 하니, 이를 본딴 모습일것이라고 하며, 얼굴에 보이는 평면적 조각 기법과 부조화 그리고 불상의 크기에 비례하여 좁은 어깨 등도 역시 논산 개태사의 불상과 비슷한 고려초기 석불양식 이라고 한다.

 

 

 

 

 

 

 

 

 

 

 

 

 

 

 

 

 

 

 

미륵당 이라고 불리우는 높다란 누각에 모셔진 화강암으로 조성된 5.6m 높이의 미륵부처님

이목구비가 비례가 맞지 않아서 어딘가 부조화 스럽지만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얼굴은 몸에 비해 무척 길며, 목에는 번뇌,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고, 두 귀는 길게 늘어져 볼에 밀착되어 어깨에 닿아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으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U자형의 주름을 하고 있다.

 

 

 

 

 

 

 

 

 

 

이 석불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다른 시대의 설화가 전해져 온다.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에 이곳 죽주산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와 처인성에서 살리타이를 죽인 김윤후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무렵에 세웠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영조 임금 때 이 지역에 살던 최태평(崔太平)이란 부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빈민 구제와 호국의 염원을 담아 건립했다는 설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부처님은 태평미륵 이라고 부른단다. 그러나 대체적인 의견은 양식적인 특징으로 고려시대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높이에 관해서는 자료가 제각각 이다. 문화재청은 3.9m, 한국민속문화대백과는 5.7m, 그리고 현장의 안내판에는 5.6m 로 되어 있다.

 

 

 

 

 

 

 

 

 

 

누각 지붕엔 새집으로 추정되는게 보인다.

즐거운 상상이 그려진다.

 

 


 

 

매산리 석불입상 :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7호

미륵당 오층석탑 : 향토유적 제20호

 

석불입상 위치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6 

 

 

 

클릭 : 죽주산성 구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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